길이 끝난 곳에서 시작된 여행 〈트립 투 이탈리아〉
내가 내 인생의 편집장이라면, 과감하게 가장 지지부진한 코너인 ‘직장’을 폐지하고 ‘여행’이라는 코너를 신설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글ㆍ사진 최재훈
2015.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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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내 인생의 편집장이라면, 과감하게 가장 지지부진한 코너인 ‘직장’을 폐지하고 ‘여행’이라는 코너를 신설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지금 이 곳, 나의 일상이 어제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오늘과 내일로 반복될 때, 그래서 밥벌이가 지루하게 느껴질 때 우리는 꿈꾼다. 훌쩍 떠나 맞이한 낯선 곳에서의 새로운 시작을. 봄과 여름의 중간쯤, 햇살이 따사로운지 따가운지 애매해서 들뜨기 쉬운 날들 사이 만난 <트립 투 이탈리아>는 그렇게 여행의 설렘을 전하는 영화다. 게다가 여행의 끝, 다시 유연하게 되돌아와 안착해야 할 각자의 현실이 있다는 사실도 놓치지 않는다.

 

이탈리아 음식 기행을 제안 받은 두 친구 롭 브라이든과 스티브 쿠건은 단순한 음식 기행으로는 차별성이 없다고 생각, 영국의 낭만파 시인들이 사랑했던 이탈리아 여행지의 흔적을 쫓기로 한다. 그들이 쫓고 싶어 하는 시인 셸리와 바이런에게 이탈리아는 따뜻한 지중해의 햇살과 맛깔스러운 음식의 고장이었다. 하지만 수다스런 두 남자의 여행은 기대처럼 낭만으로 가득한 것은 아니다. 매일 달라진 숙소에 따라 기분이 달라지고, 들르는 식당의 음식들만큼이나 만나는 사람들과 길 위의 이야기들이 달라진다. 얼핏 음식 기행으로 보이는 <트립 투 이탈리아>를 조금 여유 있게 들여다보고,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많이 보았다면 그 영화들이 가진 낭만적 감성에 취해 영화를 더욱 흥미롭게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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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을 먹기 위해 달리는 길 위에서도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나누는 대화에서도 롭과 스티브는 끊임없이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을 인용하고, 성대모사를 한다. 물론 이들이 나누는 성대모사가 제대로인지 알 길은 없지만, 이들이 인용하는 영화와 아련한 기억으로 남은 배우들은 앞선 영화들이 우리의 마음에 새겨둔 추억과 낭만을 환기시키면서 아련한 질감을 만들어 낸다. <대부>, <로마의 휴일>,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이탈리안 잡> 등 두 남자의 여정은 시인과 영화, 그 속을 채운 배우들과 중복되면서 이탈리아를 더욱 낭만적이고 여행하고 싶은 장소로 만든다. 동시에 일로 떠났지만, 각자의 시간 속에서 서로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두 남자의 행보는 여행지에서 꿈꿔보는 일탈로 이어지기도 한다. 따로 또 같이 만들어가는 여행 중에서 두 남자는 왠지 센티멘털한 감상에 빠져들기도 하고, 낯선 여인과 하룻밤 풋사랑에 빠져보기도 한다.

 

주요 장면을 이루는 것은 아니지만, 음식 기행을 하러 찾아간 레스토랑에서 이탈리아 음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담은 스케치는 물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가곡이 흐르는 제노바 해안과 낭만적인 요트 유람, 오드리 헵번의 살랑거리는 발자국이 남아있을 것만 같은 로마의 거리를 걸어보고, 미슐랭 가이드에 소개된 레스토랑에서의 멋진 식사를 하는 등의 장면들은 이탈리아 여행을 꿈꾸는 관객들에게 훌륭한 여행 가이드의 역할을 해낸다. 마이클 윈터보텀 감독의 TV 시트콤 <더 트립> 영화판의 후속편으로 기획된 <트립 투 이탈리아>는 과도한 수다와 쉽게 공감이 되진 않는 성대모사 덕분에 지루할 뻔한 장면들을 이탈리아의 풍광으로 채우면서 마음을 넉넉하게 풀어놓는다. 특별한 스토리나 갈등, 감동은 없지만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에서 시작, 남부 나폴리까지 이어지는 유유자적 식도락 여행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낭만적이고 즐길만하다. 특별할 것 없어 보이지만, 두 남자는 각자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을 여행의 마지막에 만나는데, 여행의 끝에 만나 나누는 그들의 대화는 이제까지 시끄럽게 떠들던 수다와 거리가 멀지만 그저 누군가와 함께 바라보는 석양과 바다의 풍광만으로도 그 진심이 전해진다. 그리고 여행의 끝에 시작된 새로운 길 위에 낭만이 아닌, 사람 냄새를 남긴다. 세 살 딸아이와 아내가 있지만 인생을 더 맘껏 즐기고 싶은 남자와 사춘기 아들을 둔 남자에게 삶은 여전히 스스로 풀어나가야 하는 숙제로 남는다. 그렇게 일탈 같은 여행의 종착지에서도 큰 변화가 없는 두 남자의 인생, 그 자체가 마이클 감독이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품어낸다.

 

훌쩍 떠난 길 위에서 내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는 기적을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고작 얻을 수 있는 건 여행의 끝자락에 내 마음의 키가 훌쩍 한 뼘 정도 자라나는 것 정도이지 않을까? 다시 돌아와야 할 일상과 내 삶, 내 주위 인물들도 그대로일 것이다. 하지만 여행의 끝, 길이 끝난 후 다시 내 인생이라는 여정은 다시 시작된다. 그리고 그 길을 딛는 내 마음이 조금 움직였다면, 사실 그걸로 충분하다.

 

 

함께 보면 좋을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트립 투 이탈리아>에서도 인용한 영화 중 하나인 줄리아 로버츠의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는 제목이 영화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해 주는 영화다. 주인공 리즈는 인생에 회의를 느끼고, 모든 생활을 접고 여행을 떠난다. 저널리스트로 인정받는 직장도, 부족함 없었던 8년간의 결혼생활을 모두 버리고 이탈리아의 로마로 떠난다. 로마에서 리즈는 이탈리아인들의 게으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배우고 스파게티를 음미하는 법을 알게 된다. 이어 인도의 아쉬람 사원에서 기도하고, 발리에서 사랑에 빠진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는 보는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고 싶게 만드는 영화였다. 물론 여행을 통해 새로운 삶을 꿈꾸고, 변화하는 과정에 까지 다다르는 건 어려운 일이다.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동명 에세이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Eat, Pray, Love』를 원작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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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트립투이탈리아 #최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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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훈

늘 여행이 끝난 후 길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된 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느라, 아주 멀리 돌아왔고 그 여행의 끝에선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음악, 공연, 문화예술계를 얼쩡거리는 자칭 culture bohemian.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씨네서울 기자,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