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의 제목은 <모범생들> 인데, 막상 공연을 보고 나니 어째 기분이 찜찜합니다. 대입이 결국 엘리트가 되기 위한 통로, 성공한 상위 계층이 되기 위한 관문이라는 걸, 그런 세상을, 아직은 풋풋하다고 말하고 싶은 고교시절에 저렇게 극명하게 알고 있다는 것이 약간 절망스럽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합니다. 출연 배우들이 고등학생과 사회인으로 번갈아가며 치고 박고 울고 때로는 굴욕적인 모습을 보이며 그들 나름의 ‘모범’을 보이고 있을 때, 구타를 당하면서도 홀로 고고한 인물이 있으니 바로 반장 민영인데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가졌기에 항상 앞서 있는, 고교시절 정도는 그냥 사뿐히 거쳐 가 주는, 어떤 면에서는 앞으로도 줄곧 모두의 위에 있을, 진정 모범적인 인물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인물을 이 배우가 맡았다는 게 조금 의아한데요. 바로 <여신님이 보고 계셔>의 조동현, <오! 당신이 잠든 사이>의 최병호, <공동경비구역 JSA>의 최수혁, 그리고 <빨래>의 솔롱고로 무대를 채웠던 강정우 씨입니다. 어쩔 수 없이 조금은 밉상이었던 민영으로 두 시간을 보낸 강정우 씨를 공연이 끝난 뒤 객석에서 만나봤습니다.
“연습할 때 다른 배우들 보면 참 씁쓸하고 눈물나고, 입 안이 텁텁하고 그러더라고요”
공연을 보고 나니 기분이 찜찜하다는 기자의 말에 강정우 씨도 공감을 표했습니다. 하지만 배우로서는 무척이나 매력적인 작품이라고 하네요.
“정말 매력적이에요. 인간 본성이 어디까지 나약해져서 치사할 수 있는지, 인간이 선하려고 해도 얼마나 악한지를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요. 본능 안에 있는 여러 면들이 촘촘하게 얽혀 있어서 공연을 행하는 배우입장에서는 재밌더라고요.”
반장 민영은 치사할 필요가 없는 캐릭터잖아요. 상위 3%도 아니고 0.3% 안에 드는, 모든 걸 다 가진 친구인데, 그래서 이 무대에서는 외로운 역할인 것 같습니다.
“맞아요. 다른 친구들보다 우월하지만, 그걸 누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인물이죠. 우월함을 넘어서서 다른 것을 바라보고, 항상 다음 단계를 바라보고 있죠. 캐릭터의 스펙트럼을 크게 두고 싶었어요. 나쁜 본성이 마지막에 나오지만, 그것마저 타당하게 만들어서 복수를 좀 즐기는 인물로요.”
덜 가진 친구들에게 많이 맞는데, 과격한 장면이 많아서 객석이 술렁이기도 합니다. 다치지는 않았나요?
“저뿐만 아니라 저를 때리는 여러 인물들도 같이 부딪히니까 미세하게 다치기도 해요. 작품의 인물은 모두 네 명이고, 더블, 트리플 캐스팅이라서 배우는 총 남자 10명인데, 특이한 친구들이 많이 모여 있어요. 연습할 때 족구를 했는데, 운동을 하면서 땀 흘리고 놀다 보니까 생각보다 많이 친해졌더라고요. 무대 위에서는 다른 상황이지만, 순간순간 그런 애정과 에너지가 나와서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학창시절 생각도 많이 날 것 같은데요, 모범생이었나요(웃음)?
“전혀 아니었어요. 정확히 말하면 ‘날’자로 시작하는 단어에 가까웠죠(웃음). 나쁜 짓은 하지 않되 즐겁게 놀았던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배우를 생각해서 많은 경험을 해보고,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도 좋아했는데, 이번에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제가 그렇게 놀았으니 지금 민영이와는 거리가 멀지만, 그래서 그 당시 저를 아래로 보면서 작품에 참여하고 있어요.”
올해 서른세 살인데, 이번 역할도 그렇지만 작품마다 어린 캐릭터를 맡네요(웃음).
“제가 어중간하게 동안이라서 그래요. 중학교 때부터 이 얼굴이어서 어렸을 때는 노안이라는 말을 항상 들었어요. 학창시절에 즐겁게 노는 데는 도움이 되는 얼굴이었죠(웃음). 그런데 군대를 다녀온 뒤로 처음으로 동안이라는 말을 듣게 되더라고요. 저도 놀랐죠. 그래서 계속 20대 초반 역할들을 맡았던 것 같아요. 사실 남자배우한테는 동안이라는 게 정말 꽃처럼 생기지 않고서야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아요. 정확한 캐릭터를 맞추기가 힘들거든요. 하지만 단점을 장점으로 살려야죠.”
그러고 보니 민영의 캐릭터도 그렇지만, 강정우 씨 얼굴에도 선악이 공존하는, 표정을 잘 못 읽겠는 부분이 있습니다.
“좋게 얘기하면 여러 인물을 다 묻힐 수 있는 얼굴인 것 같아요. 특히 제 눈매에서 착할 때와 나쁠 때를 쉽게 혼동하더라고요. 한없이 착하게만 보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학창시절에 학원 끝나면 다른 부류의 친구들이 오해해서 저를 기다릴 때도 있었어요. 지금은 조금씩 도움이 되는 얼굴이지만, 그 전까지는 시련이 많았죠. 오디션에서 마지막에 고배를 마신 적이 너무 많았거든요.”
이제 정말 단점이 장점이 됐는지, 2013년부터 쉬지 않고 다작을 하시는 것 같아요.
“짧은 기간이었지만 어쩌다 일주일에 공연 3개를 한 적도 있어요. <오! 당신..>을 할 때 대부분 닥터리나 베드로를 하고 싶어 하는데, 저는 40대 중후반의 반신불수 최병호를 하겠다고 했어요. 외모나 목소리가 저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지만 밀고 나갔죠. 뭔가 물꼬를 터야할 것 같았거든요. 이후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 여세를 몰아서 생각하고 있는, 맡아보고 싶은 캐릭터가 있나요?
“민영이의 확장 버전인데, 제가 좀 예민하고 공감능력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 같은 두 얼굴을 가진, 제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하는 캐릭터를 만나보고 싶어요.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웃음).”
이 작품에서 모범생들의 지향점이 성공한 상위 계층이라면 대중의 인기를 먹고 사는 배우에게도 욕심이라는 게 있을 텐데요.
“물론 있죠. 저희 대사 중에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다고 얘기하는 사람은 돈을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어요. 소위 ‘뜬다’고 하죠. 저는 아직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거든요. 저도 연기 잘하는, 좋은 배우가 되고 싶어요. 지향점이라는 건 꿈이니까, 일단 제 연기가 위선으로 보이지 않게 연기를 굉장히 잘했으면 좋겠고, 돈도 많았으면 좋겠고, 좋은 사람으로 좋은 일을 하면서 살고 싶어요.”
연극 <모범생들>의 인물들도 고등학생에서 어른으로 자라는데, 조금 더 시간이 지났을 때 강정우 씨는 어떤 배우로 자리 잡기를 바라나요?
“저 사람 참 연기 즐겁게 한다, 즐겁게 하는데 치열하고 열정이 있다! 그런 말을 듣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저는 무대든 연습이든 즐겁지 않으면 바로 그만두거든요. 제 얼굴의 단점을 이제는 장점으로 살려서 앞으로도 스펙트럼을 넓힐 수 있는 인물을 연기하고 싶어요.”
공연을 보고 난 뒤에 확인해보니, 연극 <모범생들>의 부제가 ‘나쁜 엘리트들의 백색 느와르’군요. 아주 정확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찜찜했던 것이겠죠? 하지만 모든 추악한 것들이 빠져나간 뒤 판도라의 상자에 조용히 남아있던 ‘희망’처럼 무대 위 배우들도, 객석의 관객들도 ‘모범생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저마다의 희망과 바른 기준을 생각해보지 않나 싶습니다. 그것이 학창시절에는 모범생이 아니었지만, 배우로서는 모범적인 길을 걸어가고 있는 강정우 씨가 오랜 시련과 막막함을 딛고 무대에 서 있을 수 있는 힘이기도 하겠죠? 연극 <모범생들>은 8월 2일까지 PMC 대학로 자유극장에서 공연됩니다. 강정우 씨를 비롯해 거친 남자 배우들이 그려내는 적나라한 모범생들의 세상을 확인해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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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하정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