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기억으로는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대학은 상아탑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을 신문 지면이나 TV에서 종종 들었던 듯하다. 상아탑이라는 세 글자는 세속적 이익과는 무관한 학문을 연구하는 태도를 가리켰다. 때에 따라 약간의 비판적인 뉘앙스도 섞인 말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대학을 논할 때 이 말은 자주 사용되지 않는 것 같다. 모든 대학이 취업, 이윤, 실용을 지향하는 지금 사회분위기에서 상아탑은 파괴된 지 오래다.
『진격의 대학교』의 부제는 ‘기업의 노예가 된 한국 대학의 자화상’이다. 전작인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에서 20대 청춘의 불안을 파고든 오찬호 저자는 이번 책에서는 대학의 문제에 집중했다. 이 책은 현재 대학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진풍경을 증언한다. 저자가 기록한 대로 현재 대학은 민주주의 시민으로서 살아갈 지혜가 아니라 취업하는 기술을 배우는 곳이 되었고, 대학은 스스로를 기업이라 생각하고 행동하며 이윤 추구를 노골적으로 추구하고 있다.
대학의 기업화가 진행될수록 피해는 고스란히 대학생으로 향한다. 취업 3종 세트는 옛말, 9종 세트를 갖춰야 하고 경영 경제 복수 전공은 필수. 그럼에도 대학은 청년 실업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했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민주 시민으로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대학에서 전혀 키워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대학이 경쟁을 당연시하고, 경쟁에서의 성패를 전적으로 개인 몫으로 돌리면서 뒤쳐진 자를 향한 차별과 멸시가 정당화되는 분위기가 굳어지기 때문이다.
대학 시험 문제가 엘리베이터 상사 마중법
2022년 서울대를 마지막으로 이땅에서 사회학과가 사라지고, 2045년 청와대에서는 ‘자살의 사회적 책임’을 이해하는 관료가 한 명도 없다는 픽션으로 시작하는 책입니다. 이렇게 허구로 책을 시작한 이유는?
『진격의 대학교』와 유사한 책은 있었죠. 한국 대학의 문제는 심각한 주제이고 많은 사람이 알아야 하는데, 이전에 나온 책이 안 읽혔어요. 어떻게든 빨리 읽히도록 해야겠다고 해서 신경 써서 쓴 픽션이죠.
저술 동기를 말씀해주신다면.
이 책은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2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 요즘 대학생들이 서로 차별을 당연시하는 원인 중 하나가 대학이 자기계발만 강요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조금 다뤘습니다. 이번 책은 그 부분만을 확대해서 쓴 거예요. 이 주제에 집중해서 학생과 토론했습니다. 얼핏 아는 이야기지만, 저도 어느 정도인지는 몰랐는데, 상상 이상의 사례가 나왔습니다. 조금 더 늦어지면 체념만 커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서둘러 책을 써나갔어요.
다양한 사례를 쓰셨는데요.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책을 쓰기로 마음 먹게 했던 사례였습니다. 충격이었죠. 충격 받은 뒤에는 검증하는 사례였고요. 강의 중간에 화장실 가는 시간이 있잖아요. 화장실에 가면서 한 강의실에 띄워둔 PPT를 보는데 너무 놀랐습니다. 기차를 탈 때 상사의 위치, 나비 넥타이 메는 법, 엘리베이터에서 상사 마중법, 상사에게는 반론하지 말라, 이런 내용이었거든요. 마침 제 수업 듣는 학생 중에서도 그 강의를 듣는 사람이 있어서 교재를 볼 수 있었어요. 그 내용으로 시험도 친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또 하나를 이야기하자면, 홈쇼핑 모델이 와서 하는 강의가 있었는데 강사 휴게실에서 그 분이 제 옆에 앉아 있었어요. 홈쇼핑 모델이니까 딱 봐도 저 같은 강사와는 옷차림이나 외모가 많이 다르죠. 참 대학이 정말 많이 변했구나, 하는 느낌이 왔어요. 책에 있는 내용은 제가 느낀 대학의 풍경이기도 합니다. 이런 대학에서 제 강의를 하면 어느 순간부터 죄짓는 듯한 기분도 들고요. 제 강의는 취업에 도움되는 것이 아니니까요. 같은 강의료를 받는데, 그 강의와 제 강의의 간격이 엄청 넓었죠. 어이 어이 없음을 느끼기도 했고요. 그렇다고 학생들에게 그 강의 듣지 말라고 할 수가 없는 시대이고요.
초반부에는 대학이 취업 사관학교가 된 풍경을, 중반부에는 영어 강의를 묘사하셨는데요.
진격대 지방대 캠퍼스만 보면 이 책이 구조조정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이 책은 구조조정을 옹호하는 게 아니라 비판하고 있습니다. 유명 대학의 영어 강의 풍경을 넣은 이유죠. 기업화되었다는 점에서는 지방대든 서울의 유명 대학이든 똑같죠. 대학이 취업에 목메는 추세는 인서울이 지방대보다 늦게 왔을 뿐이지, 이미 서울로 올라왔고요.
기업화라는 게 단순히 대학이 삼성, LG를 좋아한다 의미가 아니죠. 대학 구성원이 기업 이사실처럼 생각한다는 게 더 큰 문제입니다. 기업 이사실에서는 안건을 판단할 때 가장 먼저 이익을 생각하죠. 이익, 관리, 등 지금 대학이 이런 가치에 익숙해요. 사람들이 50보 100보는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하지만, 엄연히 두 배 차이입니다. 최근 대학의 기업화는 더욱 노골화되었어요.
경영학과 는다고 청년 취업 해결되나
인문학, 자연과학 등 취업률이 저조하다는 이유로 기초 학문이 폐과되고 학생들은 경영학과로 몰리고 있는데요. 청년 실업을 해소하는 데 별 도움이 안 됐습니다.
자유롭게 복수전공을 선택할 수 있는, 한 대학에서는 인문사회 계열의 60퍼센트 이상이 경영학과를 택합니다. 그 학교에 25개 전공이 있는데 말이죠. 책에서는 ‘경영학과의 눈물’이라는 기사를 인용했는데요. 취업이 바늘구멍처럼 좁아졌는데 경영학과 학생이 많아졌다고 해서 청년 실업이 해결되지 않아요. 취업 안 되는 이유가 인문사회대 학생이 많아서가 아니잖아요. 경영학과 많아지면 취업문 넓혀준다는 그런 것이 아니잖아요. 경영학과를 전공한 학생은 늘었지만, 취업 3종 세트는 9종 세트로 늘었을 뿐이에요. 대학은 청년실업에 관해서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했어요.
그러다 보니 경영학 이외의 학문을 전공하는 사람은 소외되고요.
인문학, 기초과학 하기 어렵다고 해도 찾아보면 길은 있어요. 오히려 문제는 공부하고 싶은 학생이 스스로 낯설어하는 기분이 든다는 거죠. 충격적인 사례인데, 철학과로 간 학생에게는 “거기 왜 갔어? 점수 맞춰서 갔지?”라는 질문부터 시작해요. 대학 철학 수업을 문화센터 시민 강좌 정도로 이해하기도 하고요. 학문이 권력을 잃으니까 학문을 조롱하는 분위기가 된 거예요. 학과 선택만이 아니라, 수업을 들을 때도 비슷해요. ‘시민 혁명사’ 이런 수업을 들으면 친구가 물어보죠. 점수 잘 주는 과목이냐고. 아니라고 답하면 왜 듣냐고 또 물어봐요. 이런 분위기니까 공부하고 싶은 학생도 ‘아, 지금 내가 가는 길이 맞나?’ 이런 느낌이 들죠.
가끔 초등학생인 제 딸의 친구 학부모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가 있는데요. 제가 사회학을 전공했으니 사회비판하고 그럴 때 있잖아요. 그러면 이분들이 “국회로 가시겠네요.” 이렇게 약간 조롱 섞인 말을 해요. 어른들조차 사회를 비판하거나 그러면 오글거린다, 진지 빤다, 이렇게 생각해요. 자식이 철학과 대학원 간다고 하면 이분들은 졸도할 거 아닙니까. 이런 사회성에 노출될수록 공부하는 친구들이 스스로 나는 희소한 존재라는 기쁨을 가졌으면 합니다. 주눅 들지 말고요. 압박 들어올 때 명쾌해져야 해요. 무장하는 게 중요하죠.
인문사회 쪽에서는 후기 구조주의 이후로는 눈에 띌 만한 사상이나 사상가가 안 나타나는 현상도 대학의 기업화와 관련 있을까요?
인지도 문제겠죠. 학자도 자주 노출되는 게 중요합니다. 우리사회에서 요즘 영향력 있는 사상가가 없다는 인식이 있다면, 예전보다 지금 학자가 못해서가 아니라 학문이 권력을 잃은 거라고 봐야겠습니다. 학문이 존재한다고 의미있는 건 아니에요. 권력을 가져야죠. 지금도 경영학, 경제학 쪽으로는 유명한 학자 많잖아요. 문제는 경영경제가 70이라면 20~30은 다른 학문이 권력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20~30도 취업 안 된다면서 점점 줄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문학적 사유가 있으면 비즈니스에 유리하다, 이런 거짓 인문학도 유행이잖아요.
그게 거짓 인문학이라고는 할 수 없고요. 인문학의 쓰임새 중에 하나일 수 있어요. 그렇게 사용될 필요도 있다고 보고요. 실제로 학문적으로 애플 기기에 있는 인문학적 가치를 분석하기도 하거든요. 그렇다고 그게 인문학의 전부는 아니에요. 상품성이 있어서 인문학이 살아 남았다고 하기보다는 상품화된 세계에서 상처받는 이유, 개선 방향을 제시하는 게 인문학의 본질이니까요.
한국사회 지잡대라는 단어의 등장은 무엇을 의미할까
1902년에도 미국에서 존 듀이가 돈을 좇는 대학을 비판했는데요. 이런 분위기가 어제 오늘 일도 아니고, 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합니다. 한국적 특수성이 있을까요.
미국, 유럽 다 그런 분위기가 있죠. 정도와 속도의 차이라고 할까요. 한국에서 끊임없이 구분하려는 차이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습니다. 예전부터 SKY라는 말은 있었지만 지잡대라는 말은 최근에 생겼어요. 기업 면접에서 지방대 출신에게는 왜 편입 준비 안 했느냐고 묻는다고 해요. 조롱과 멸시를 하는 거죠. 여러 가지 이유로 대학에 경영학과 많아지고 자본의 논리에 빠지는 풍토는 세계적인 추세지만 우리 사회는 주류가 아닌 것에 철퇴를 가하고 낙인을 찍어서 안 좋은 존재로 만들어 세상으로부터 고립시키는 정도가 심하다고 봐요.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정규직 비정규직 문제도 마찬가지에요. 비정규직이 정규직 전환 요구하면, 일확천금을 달라는 게 아닌데도 절대로 받아들이지 못하잖아요. 너가 노력 안 해서 그렇게 됐는데 사회가 왜 도와야 하느냐는 반박이 바로 나오잖아요. 우리사회에는 상처받는 사람이 너무 많죠. 계속 이렇게 해도 되느냐는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차별이 노골화된 시기를 1997년으로 많이 말하잖아요.
숫자 1만큼 차이가 있으면 1만큼 멸시가 있고, 10만큼 차이가 있으면 10만큼 멸시가 있을 텐데요.불평등 정도가 1997년 기점으로 로켓처럼 올라가죠. 잘사는 사람, 못 사는 사람 차이가 벌어집니다. 못 살수록 범죄가 증가할 수는 있어요. 그런데 여기서 원인과 결과를 혼동해서 결과론적으로 해석해버립니다. 불평등이 심해져서 범죄가 늘어난 게 아니라,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원래 추하고, 못 됐고, 게으르니까 못 사는 거야, 하는 식으로 아래를 바라보는 시선이 합리화됩니다. 대학도 그래요. 지방과 인서울이라는 결과를 보고 그 결과로 차별해도 정당하다고 생각해버리죠.
이 책은 대안을 이야기하는 책은 아니라고 하셨어요.
예전 대학생에게도 진로, 취업 문제가 있었지만 지금 정도는 아니었어요. 취업률을 적절하게 유지한다든지 해서 대학이 청춘에게 주는 게 있었죠. 고등학생과 30대와는 다른 낭만, 사회에 대한 객기가 대학생에게는 허용됐습니다. 지금은 고등학교 때까지 문제집만 풀다가 대학에 와서까지도 비싼 등록금을 내고 학원 다니는 꼴인데요. 이전 대학생은 누렸던 것을 지금 대학생은 못 즐기니까 굉장히 억울해해야 해요. 지금 대학생이 얼마나 억울한 존재인가를 알아줬으면 하는 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이고요.
사회구조적으로 취업문을 넓히지 않는 이상, 아무리 경영학 전공자가 많아지고 스펙을 쌓는다고 한들 전체 고통받는 수는 동일할, 아니 더 늘어날 겁니다. 이 책으로 청년실업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이야기할 수는 없겠죠. 다만 학생들이 실업으로 자학하지 말고 스스로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행복할 권리가 있다면 사회적으로 요구해야겠죠. 그 요구를 바탕으로 조금씩 사회가 바뀔 겁니다. 사회가 한꺼번에 좋아지지는 않아요. 대학이 중세 시대처럼 학문의 전당으로 귀환한다고 해서 해결되지도 않을 테고요. 그렇기에 스스로라도 권리를 챙겨야 해요. 상처를 덜 받으려면 경영학이라는 하나의 학문만 배울 게 아니라 다양한 인문학적 스펙트럼을 갖춰야 합니다. 세상은 그런 사람을 무시하지 못할 거고, 무시하지 못할 때 세상이 조금씩 바뀝니다.
그럼에도 대안을 찾아 봐야 할 텐데요. 대학은 어떻게 가야 할까요.
대학이라면 최소한 실패한 사람들, 진입장벽에서 넘어진 사람들의 상처와 슬픔을 어쩔 수 없는 결과처럼 합리화하는 정서를 가르쳐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사람이’ 아프다고 이야기하는데 “경제 성장했다, 스마트폰 보급률 높아졌다, 자동차수 많아졌다”며 지표가 좋아졌다는 반론을 들을 때가 있어요. 그런 지표도 의미는 있겠죠. 하지만 사람들이 아프다고 할 때 경제적인 논의를 가져오면 안 되잖아요.
세월호가 충격적이었는데요. 대학에서는 사람의 생명 앞에서 그 무엇도 함부로 하면 안 된다고 배워야 하는데요. 대학은 오히려 다른 걸 가르쳐요. 인양할 돈이 얼마다, 내수 침체로 발목 잡는다, 이런 논리죠. 물론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대학에서는 다른 생각을 가지는 비율이 높아져야 하지 않을까요. 대학은 자본주의 사회의 완충제, 옴부즈맨 역할을 했습니다. 비판, 감시 역할을 하는 집단이 있으면 전체적으로도 좋잖아요. 대학이 그런 자부심을 갖고 살면 좋겠는데, 이런 덕목은 대학 평가에서 아무도 봐 주지 않죠. 오히려 철퇴 사유죠.
대학평가가 격차를 부추기고 있다고도 지적하셨습니다.
지잡대라는 말에서도 보듯, 밑을 향한 멸시가 많아요. 한국사회는 평가를 하면 잘하는 사람을 칭찬하려고 하지 않고 못하는 사람을 걸러내려고 해요. 평등이란 최소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노력입니다. 평가를 하면 할수록 평등이 없어지죠. 무시 당하는 사람이 많아져요.
민주주의 시민으로 살기 위한 근육 키워야
에필로그에서는 민주주의에 관해서도 쓰셨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으로 살기 위해서는 그것을 느낄 수 있는 근육들을 키워야 합니다. 책 한 권 읽는다고 되는 게 아니거든요. 끊임없이 그것이 중요하다는 사회에 노출되어야 하는데, 대학이 역할을 못하고 있어요. 지난 정부의 민간인 사찰, 국정원의 대선 개입에 대해서 대학생과 이야기를 해 보면 이런 사건이 민주주의를 훼손했다는 점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가슴이 아픈 사람도 없어요. 살 2kg만 쪄도 진심으로 슬퍼하면서 다이어트 하려는 학생은 있지만요.
다시 세월호 이야기인데요. 많은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세월호 선장이 나빠서 아이들이 죽었다, 불쌍하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개발 독재 유산 때문이라고까지 하는 건 음모론이라고요. 이럴 때 대학은 음모론을 구체화시켜서 가설이 맞고 틀리고를 적극적으로 토론해야 하는데, 지금은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어요. 민주주의는 훼손되고, 경제제일주의로 가는 거죠.
음모론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연예인 스캔들을 사회학자 시선으로 본다면 어떤가요. 정부가 사건을 덮기 위해 터뜨린다, 이런 분석이 나오잖아요.
연예인 스캔들만이 아니에요. 많은 사람이 일부 언론의 선동 형태를 비판합니다만, 사실 기자들은 독자가 원하는 기사를 쓸 뿐이에요. 대중이 각성되어 있다면, 뭘 덮으려고 하더라도 못 덮겠죠. Wag the Dog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꼬리가 어떻게 몸통을 흔들겠어요. 꼬리가 몸통보다 더 똑똑하니까요. 대중은 각성되어 있을 때 힘이 셉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각성하려면 주말에 책 한 권 읽는다고 되는 거 아니거든요. 몸짱 되기 위해서만 해도, 얼마나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노력합니까.
다이어트를 향한 열정에 비하면 우리 사회는 책을 읽으려는 노력은 미미한 듯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죠. 아빠가 책 사 준다고 하니까 아이가 이런 말을 한대요. 왕따 당하기 바라냐고. 책 읽는 게 유난 떠는, 진지 빠는, 오글거리고 어색한 사회가 되었다는 데는 이 사회만의 독특한 사회 철학이 있는 거죠. 어떤 의미에선 사회 철학이 없다고 할 수 있고요. 서구에서는 어떤 행동이 마이너가 되었다고 해서 함부로 바라보지 않는 시선이 있어요. 그들은 역사적으로 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학습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나라는 책 덮고 공부하는 사회였고, 예전에는 언어영역 대비한다고 책 읽기라도 했는데 지금은 사교육이 완전 장악해버렸죠.
스마트폰 때문에 책 덜 읽는다고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겠죠. 저녁이 있는 삶이 히트를 쳤잖아요. 걱정거리 없고 여유가 있어야 책을 읽을 수 있을 텐데, 한국사회는 너무 일이 많고 걱정 많고 쪼들리고 하니까 자기계발 책만 좀 읽지 다른 책은 읽을 엄두를 못 내죠. 책 읽으려는 노력을 하기가 참 힘든 사회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관심사는?
공무원 시험 준비하는 청춘이 굉장히 늘었다는 게 지난 15년 정도의 추세인데요. 요즘은 나이 든 사람도 공무원 준비를 많이 하고요. 그 친구들에게도 꿈이 있었을 텐데, 어떤 순간이 꿈을 잃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지 여러 사연을 채집하고 한국사회를 드러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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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격의 대학교오찬호 저 | 문학동네
‘효율’이라는 잣대로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평가에서 살아남기 위해 대학은 기업(의 자본)에 종속되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기업이 요구하는 부단한 ‘개혁(!)’의 과정을 통해 아무런 고민 없이 취업의 전초기지가 되는 길을 택했다. 하지만 대학이 한 사회의 최고 교육기관인 이상 대학의 문제는 그곳만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대학은 기본적으로 ‘시민’을 배출해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와 같은 문제의식 아래 이 책에서 현재 대학의 실상을 가감 없이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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