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저 없이 사람들은 자신의 어린 시절은 행복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절대 그렇지 못했고 그 시절부터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을 뿐이다. 다만 지금은 그 지옥에서의 한 시절을 잊을 수 있기에 사람들은 그때가 행복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희망도 변화도 없는 지옥의 한철 같은 사춘기를 겪는 소녀가 주인공인 영화 <인형의 집으로 오세요> (토드 솔론즈, 1995) 속 대사다. 작고 뚱뚱하고 못생긴 돈 위너는 학교에서는 왕따, 집에서도 무시당한다. 대부분의 성장영화들이 훌쩍 큰 주인공의 속내와 마음에 주목하고, 달라진 현실을 보여주지만 이 영화는 다르다. 일련의 소동을 겪은 후에도 돈의 생활은 한 치도 나아지지 않는다.
홀로 세상과 맞서야 하는 아이들의 이야기는 이상적인 결말에 이르는 법 없이, 그 절망의 순간이 엄연한 현실이라는 점을 생채기처럼 관객들의 마음에 새긴다. 아시아 아르젠토 감독의 <아리아> 역시 지독한 성장통을 겪는 소녀의 이야기다. 9살 소녀 아리아는 유명한 피아니스트인 엄마와 유명한 배우 아빠 사이에서 태어나 개성 강한 두 언니 사이에서 아무런 존재감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아리아에게 필요한 것은 가족의 사랑과 관심, 이해다. 하지만 가족들 누구도 아리아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던 중 엄마와 아빠는 크게 싸워 따로 살게 되고, 아리아는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고 서로에게 떠밀려 엄마와 아빠의 집을 오간다. 그런 그녀를 위로하는 건 단짝친구 안젤리카와 들고양이 딕이다. 아리아는 자신을 봐달라고 계속 요구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지독한 현실에서 아리아는 끝내 달아나거나 구원받을 수 있을까?
아역배우 출신의 영화감독 아시아 아르젠토는 이탈리아 출신의 세계적인 감독 다리오 아르젠토와 배우 다리아 니콜로디 사이에서 태어났다. 알려진 것처럼 <아리아>에는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 감독의 자전적 경험이 깔려있다. 자식보다 자신의 일을 더 사랑하는 부모 밑에서 평범한 가정의 아이처럼 충분한 사랑을 받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아시아 아르젠토 감독은 그런 자신의 경험과 어린 시절 모두가 겪어봤을 오해(incompresa : 영화의 원제)와 사랑받고 싶은 갈증을 아리아라는 소녀를 통해 그려낸다. 16mm 카메라를 통해 담아낸 화면의 질감은 오래된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아련하고 아날로그적 감성을 자극한다. 또한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알록달록한 색감과 배경은 애정결핍에 시달리는 아리아의 황량한 내면과 그 결핍을 달래기 위한 상상이라는 상황을 효과적으로 담아낸다. 빈티지한 가구와 분위기 역시 관객들이 과거,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게 만드는 효과적인 소품이다. 아시아 아르젠토 감독은 자신이 겪었을 법한 유년의 상처와 외로움을 아리아라는 소녀를 통해 보편적 이야기로 그려낸다. 지울리나 살레르노는 깡마르고 기다란 몸에 동그랗고 겁에 질린 눈망울로 ‘아리아’를 연기하는데, 편견 없는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주인공 아리아의 마음이 그 속에 담겨있다.
결핍이 심할수록 상상력은 풍부해지는 법이다. 무채색을 제외한 모든 색감을 한데 모아놓은 것 같은 영화의 질감은 아리아의 황량한 내면의 또 다른 표현이 되어, 아리아의 건조한 마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부모의 집에서 쫓겨나듯 나와 거리를 떠도는 아리아의 모습은 흡사 동화 속 성냥팔이 소녀를 떠오르게 만든다. 추위와 무관심을 극복하기 위해 성냥팔이 소녀는 성냥을 하나씩 켠다. 성냥이 켜질 때마다 소녀는 자신의 처참한 현실과 다른 환영에 빠진다. 하지만 성냥불은 너무 금방 사라진다. 행복과 배려가 결핍된 인생을 살다보면 그렇게 상상력이 넘쳐 과잉이 되는 법이다. 그러니 아리아가 처한 건조한 인생과 대비되게 화려하고 노골적인 색감은 너무나 건조해 숨을 쉬기 어려운 소녀가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낸 일종의 환영의 세계라고 이해해도 무리는 없다. 의외의 순간, 아버지 다리오 아르젠토 감독의 고딕 호러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한 아름다운 장면은 동시에 비현실적이고 위험해 보인다. 학대에 가까운 아빠와 엄마의 강박과 이기심은 쉽게 용인되지 않지만, 세상에는 상상보다 훨씬 더 나쁜 부모가 ‘엄연히’ 있는 법이다.
함께 보면 좋을 영화
귀여운 반항아
끌로드 밀러 /샬롯 갱스부르 | 에이나인 미디어
아리아의 엄마로 나오는 샤를로트 갱스부르는 여전히 건조하고, 깡마르고, 깊다. 세계적인 음악가 세르쥬 갱스부르와 배우 제인 버킨의 딸로 자라난 그녀의 성장기도 아시아 아르젠토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 역시 <아리아>의 지울레나 살레리노처럼 1985년 끌로드 밀러의 성장영화 <귀여운 반항아>를 통해 얼굴을 알렸다. 샤를로뜨 갱스부르의 성장 환경과 그녀의 영화 <귀여운 반항아>는 자연스럽게 한 소녀의 지독한 성장담 <아리아>와 오버랩 되면서 묘한 아우라를 만들어 낸다. <귀여운 반항아>는 지겨운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한 소녀의 욕망을 담아낸 영화였다. 그녀는 자신이 꿈꾸던 모든 것(미모, 재능, 부유하고 다정한 부모)을 가진 동갑내기 소녀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바꾸고 싶어 한다. 결국 어느 곳으로도 도망가지 못하고 현실이라는 구심점으로 되돌아오는 현실, 아무런 추진력 없이 현실의 틈새를 부유하고 마는 사춘기 소녀의 이야기는 지금 봐도 그 뒷맛이 떫고 아득하기만 하다.
[추천기사]
- 마음의 지도를 그리는 여행 <와일드>
- <백설공주 살인사건> 세 치 혀와 세 마디 손가락이라는 흉기
- 이기적이고 거친 박동의 오르가즘 <위플래쉬>
- 개 같은 개 인생을 책임지라는 경고 <화이트 갓>
- 영리한 반전, 오차 없는 감동 레시피 <장수상회>
최재훈
늘 여행이 끝난 후 길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된 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느라, 아주 멀리 돌아왔고 그 여행의 끝에선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음악, 공연, 문화예술계를 얼쩡거리는 자칭 culture bohemian.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씨네서울 기자,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