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산문집 『잘 왔어 우리 딸』을 펴내며 엄마, 아빠 독자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은 서효인 시인은 2006년 <시인세계>로 등단하며 시인이 됐지만 전업작가의 길을 가지 않았다. 출판사에서 기획, 마케팅을 하다 최근에는 편집자로 책을 만들고 있는 서 시인은 “독자로 책을 대할 때는 편안하고 행복하지만, 편집자로 책을 대할 때는 조심스럽고 불안해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저자로서 책을 대할 때는 어떠할까? 그의 말에 따르면 질투하고 괴로워한단다. “독자로 존재할 때 책은 행복의 매개가 되는 것 같다”고 말하는 서효인 시인. 그는 오늘도 출판사로 출근을 하며 독자에게 닿을 책을 만들 생각에 설렌다.
서효인 시인은 그간 시집 『소년 파르티잔 행동 지침』,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을 펴냈고, 2011년에는 ‘어느 젊은 시인의 야구 관람기’라는 타이틀을 단 에세이집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를 썼다.
서효인 시인
배경음악이 있는 카페에서의 독서
최근 서효인 시인은 새로운 출판사로 이직했다. 멀어진 직장 탓에 출퇴근 시간이 늘어 많은 시간을 ‘길 위에서’ 보내고 있다. 덕분에 지하철 안에서 책도 읽고, 인터뷰 질문에 답변도 단다. 길 위에 있는 시간이 많아서 일까, 며칠 전에는 잭 케루악의 장편 소설 『길 위에서』를 다시 읽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주인공과 제 삶을 비교해봤어요. 저는 샐 파라다이스처럼 이혼을 (당)하지 않았고, 아이를 안달복달 키우고 있으며, 늘 같은 길을 왕복하고 있더라고요(웃음). 앞으로도 지금처럼 적절한 규칙성 속에서 아내, 아이들과 함께 ‘길 위에서’ 살 것만 같아요. 지금도 1시간째 지하철에 있어요. 덜컹덜컹 흔들리며 살죠. 하지만 어쨌든 목적지에는 잘 도달할 것도 같아요.”
작가에게 “책을 좋아하냐?”라는 질문은 우문이다. 그래도 ‘세계 책의 날’을 기념한 인터뷰이니만큼, 책에 대한 애정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살짝 묻기로 했다.
“보통 사람들처럼 지금 읽는 책보다 초등학생 때 읽은 책은 몇 배는 많아요. 각종 위인 전집에서부터 세계 명작 고전까지,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어요. 그 중 좋았던 건 초등학생용 전집이 아닌, 그냥 어머니 책장에 꽂혀 있던 별의별 책들이었어요. 어머니가 책을 좋아하셨거든요.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는 퇴근길에 동네 서점에 들러 슈퍼마켓에서 아이스크림 고르듯 책 한 권을 골라 집에 오시곤 했어요. 지금은 동네 서점이 없어져서 그런지 책을 고르던 어머니는 그저 텔레비전 드라마만 보시네요.”
한때 금서이기도 했던 『닥터 노먼 베쑨』에서부터 김용의 무협소설 『영웅문』까지, 그의 어머니의 손에든 책은 무척 다양했다. 좋은 책에 대한 강박이 없이 무작정 재미로 책을 읽었던 어린 시절, 그 때를 추억하면, 서 시인은 마냥 행복하다.
두 딸의 아빠가 된 지금, 집에서 책 읽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가끔 아내와 카페에서 데이트를 했을 때를 떠올리곤 하는데, 특별한 대화 없이 마주보고 앉아 책 한 권씩을 독파한 적도 여러 번이다. 서효인 시인이 가장 좋아하는 독서 공간은 타인의 대화와 배경음악이 있는 카페다. 단골이었던 카페 리스트를 묻자 쉴 새 없이 쏟아진다.
“홍대 용다방, 비플러스, 망원역 스타벅스, 신촌 할리스, 합정 카페 마로, 가로수길 포엠, 파주운정 한빛마을 6단지 앞 이디야 등을 전전했거나, 하고 있어요. 그중 토끼의지혜 홍대점은 최근 건물주의 요구로 없어진다고 하네요. 슬픕니다. 다음 세상에는 거북이의 지혜로움과 토끼의 넉넉함을 지닌 건물주로 태어나고 싶네요.”
경고등, 방향등을 켜 주는 책에게 반한다
시인에게는 책을 고르는 특별한 기준이 있을까. 그는 “소설인가, 인문서인가에 따라 해당 분야에서 오랜 시간 신뢰감을 쌓아 온 출판사를 찾는다”고 한다. 무조건 큰 출판사를 선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평소에 출판사마다의 목록을 챙겨 보는 편이다.
“큰 타이틀에서부터 신인 저자의 책까지 모두 아우르는 출판사가 좋아요. 책의 요소 또한 살피죠. 표지 디자인은 물론, 뒤표지의 추천 글이나 띠지의 광고 글까지 서점에 서서 샅샅이 봐요. 그것들이 편집자나 마케터가 독자를 상대로 벌이는 게임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과연 내가 이 책을 가지고 계산대까지 가서 신용카드를 내밀 것인가? 이 게임에 참여하지 않을 이유가 없죠.”
편집자만큼 책을 꼼꼼하게 읽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서 시인은 분량을 늘이기 위해 필요이상으로 줄 간격을 넓게 만든 책이나, 심히 낯 뜨거운 여백의 미를 살린 책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종종 ‘5년 후에 내 서재에서 부끄러움 없이 저 책이 살아 있을 수 있을까?’를 생각해본다. 쉽게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사라질 책도 꽤 많겠다고 짐작한다.
“제가 반하는 책은 기획이 좋은 책이에요. 최근에 음식 프로그램을 즐겨 보는데, 『음식의 언어』라는 책을 보고 완전 반했어요. TV가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허기를 채워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지금 우리가 움직이고 있는 방향성을 인정하고, 그 앞에서 경고등이나 방향등을 켜 주는 책에 쉽게 반합니다. 그런 책이 아직 많아 다행이에요.”
저자의 입장에서 “책을 읽어주세요”라고 말하면 민망할지 모르지만, 편집자의 입장은 다르다. ‘세계 책의 날’을 맞아 편집자 서효인이 하고 싶은 말은 하나, “책을 읽어 달라”는 이야기다. 누군가 왜 읽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그의 답은 “그냥”이다. 아무도 ‘그냥’ 책을 읽지 않는 시대이기에 서효인 시인은 “그냥 책을 읽어 보자”고 권한다.
“저는 책을 그냥 읽었어요. 집에 가면 그냥 TV를 켜고 데이트를 할 때면 그냥 영화를 보고, 길을 걸을 때면 그냥 음악을 듣는 것처럼 말이죠. ‘그냥’이란 말이 얼마나 좋아요? 책을 읽으면 영혼이 맑아진다거나, 똑똑해진다거나, 자녀교육에 좋다거나, 취업이 된다거나, 부자가 된다거나, 건물주가 된다는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아요. 꼭 책이 아니어도 살 수 있는 세상이잖아요. 하지만 그런 와중에 그냥, 그저 무심히 책을 읽어 주시는 독자 분들의 등 뒤에서 빛이 오로라처럼 빛이 뿜어지는 환영을 저는 자주 봅니다.”
“그냥 책을 읽다 보면 타인의 삶이 ‘그냥’ 구성된 게 아님을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는 서효인 시인. 그는 타인의 고통에는 뚜렷한 이유가 있고, 미세하게나마 모두에게 연결되어있다고 생각한다.
“책에 열쇠가 있다고 한다면 충분한 비약이겠지만, 책을 다루는 사람으로서 이러한 비약의 명분 역시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책을 그냥 읽어요. 독자 여러분도 그냥 읽어 줬으면 좋겠어요. 타인과 타인이 어깨를 걸쳐, 만인이 된다면, 책은 만인의 고통과 만인의 기쁨이 담긴 거대한 그릇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일단 한 모금만 드셔 보면 어떨까요?”
편집자 서효인은 젊은 시인 유계영의 첫 시집을 준비하고 있다. 제목은 아마 『온갖 것들의 낮』이 될 것 같다. 추천사를 써 준 이장욱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계영의 시는 “속이 보이는 심해어 같은 문장들”을 가지고 있다.
“독자들의 표정이 천천히 바뀔 거예요. 유계영 시인의 문장을 읽다 보면요. 우리는 그렇게 바뀐 자신의 표정을 감추고 싶어 하지만, 동시에 드러내고 싶은 욕망을 분명 가지고 있어요. 시는 그 사이의 마음을 단절시키고 또한 연결해준다고 생각해요. ‘온갖 것들의 낮’이 ‘온갖 것들의 낯’을 비추는 시간. 아마 유계영의 시집을 읽는 시간일 거예요. 기대하셔도 좋아요.”
'책의 날' 을 맞아 서효인 시인이 추천한 책
철과 오크
송승언 저 | 문학과지성사
35년 전 청년들이 이성복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를 읽었다면, 이제 우리는 송승언을 읽어야 한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내가 이제 35살이 되어서 하는 말은 아니다. 송승언 시집을 읽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끝의 시작
서유미 저 | 민음사
TV드라마에서 우리는 배우의 연기를 보고 캐릭터의 감정을 이해한다. 그래서 배우의 발 연기에 괴로워하는지도. 소설에서는 괴로울 필요가 없다. 『끝의 시작』은 독자 스스로 몽글몽글한 감정의 분화를 일으키도록 한다. 거기에서부터, 한국소설은 다시 시작이다.
스토너
존 윌리엄스 저/김승욱 역 | 알에이치코리아(RHK)
스토너의 일생은 평범하다. 이 작품에는 극적인 장치나 기발한 아이디어가 없다. 그저 삶이 있을 뿐이다. 흐르는 강물처럼, 스토너의 일생은 우리의 무릎 아래에서 독자의 세포를 간질일 것이다. 당신의 영혼이 깨어난다면, 스토너의 일생은 성공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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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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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um2
2015.0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