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목록을 잘 살펴보자.
"구둣주걱, 반지, 대야, 부채, 넥타이, 손수건, 담배, 신호등, 주사위, 벽..."
이 '사물'들에 대해 얼마나 이야기를 풀 수 있을까. 사물에 대해 생각을 끝까지 밀고 간 경험이 흔한 것은 아니니 아마도, 얼마 못가 하던 생각을 내던지고 말 일이다. 고가도로에서 미장센을 읽고, 레고에서 우주의 본질을 찾고, 시스루에서 욕망을 발견하는 일이 가능하다고는 이 책 『사물의 철학』
을 만나기 전까지는 크게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저자 함돈균은 문학평론가다. 그간 한국 문학에 대해 평론을 해온 그가 '사물'에 대해 '생각의 생각을 계속해 생각의 끝까지 밀고 가'는 '사물의 철학'을 한지 어느 덧 2년이 훌쩍 넘었다. 저자는 말한다. "이렇게 사나워진 세상에서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일상의 평범한 사물들과 지극하게 만나는 시간이 필요할지 모른다."(7쪽)고.
누구나 곁에 두고 흔하게 사용한 적 있는 사물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무척 효과적이다. 가령, 건강의 차원에만 머물렀던 '담배'에 대한 그의 생각을 좇다 보면 "담배라고 하는 건 단순히 건강에 관해서만 얘기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인문학적 사고란 이처럼 어떤 대상에 대해 '다층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면에 숨은 의미를 찾고, 복합적으로 사고하는 것. 사나운 세상, 이분법적인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반드시 필요한 생각의 힘이 아닐까.
절박한 마음으로 한 글쓰기
『사물의 철학』은 새로운 형태의 글쓰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로 한국 문학에 대한 글을 많이 쓰셨으니까요. 이 글을 쓰신 계기가 있을까요?
작가들의 스펙트럼이 넓은 것처럼 문학 평론하는 사람들도 자신의 성격에 따라 다른 글쓰기를 하거든요. 저는 문학 평론을 하는 사람들 중에도 조금 사변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에요. 문체가 건조한 글을 쓰는데, 추천사 써주신 신형철 선생님과는 대조되는 스타일이죠. 신형철 선생님은 문장이 맛있고, 화려하고, 에로틱함을 가지는 굉장히 부러운 글쓰기를 하세요. 저는 그것과는 다른 형태의 문체로 철학적인 글쓰기를 많이 하는데, 그런 글쓰기는 대체로 독자들이 읽기에는 어려워요. 문학 평론도 몇 가지의 목적이 있는데, 독자를 위해 잘 소개하는 문학 평론을 하시는 분도 있고, 작가를 위해서 어떤 해설을 내주시는 분들도 있고, 작품 자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의 바닥까지 가서 그것 자체를 드러내는 데 목적을 두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사람들은 그 자체에 올인하는 경향이 있어서 크게 독자를 염두에 두고 그렇진 않아요. 제가 그런 글쓰기를 하는 사람이에요.
그런 것에 비해 이 책은 굉장히 다른 형태의 글쓰기였어요. 작정하고 독자들과 대화하기 위해서 쓴 본격적인, 최초의 시도거든요. 에필로그에 자세한 이야기를 썼는데요. 한국 사회가 물질적으로는 단기간에 놀라운 일을 해왔지만 사회가 가지는 생각의 깊이나 정신의 두께를 생각하면 개탄스러울 정도로 얕아요. 생각과 정신의 층위가 굉장히 납작한 사회라고 할 수 있고, 안타까운 면이 좀 있습니다.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거의 듣지 않으려고 하고, 자기의 존재 긍정을 타자의 부정을 통해서 획득하려고 하는 부분이 있어요. 어떻게 보면 타자 생각의 부정 자체가 자신의 긍정성을 획득하게 만든다고 하는 착각 같은 걸 하고 있는 사회거든요. 마침 신문 연재의 기회를 갖게 됐는데 글은 짧지만 굉장히 절박한 마음을 가지고 글쓰기에 임했다고 보면 됩니다. 보기에는 경쾌하고, 접근 방법이 가벼워 보이지만, 사회의 생각이 얕고 공격적이고 타자 부정적인 것들에 대한 실천적 개입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의미에서 쉽게 대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어요.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100여 가지의 사물을 관찰하고 사유를 이어오셨어요. 왜 사물이었을까요?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우리 사회는 어떤 현명한 현자가 훌륭한 이야기를 한다 하더라도 당신은 정치적으로 무슨 파다, 누구 찍은 사람이니까 그렇게 얘기하지, 라고 하면서 어떠한 이야기도 그것을 순수하게 듣지 못하는 위험한 사회거든요. 아예 듣지 않는다면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해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글쓰기 방법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요. 사회나 정치를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 방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선입견을 직접적으로 주지 않고 말이에요. 가능한 많은 사람이 같이 공유할 수 있는 대상을 말하는 거예요. 어린 아이부터 노인까지, 공부를 많이 해본 사람이나 안 해본 사람이나, 시장에서 물건 사시는 분이나, 시골 사람이나 강남사람이나, 보편적으로 모두가 그것에 대해 만만하고, 그것에 대한 경험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생각해보고 이야기해볼 수 있는 공통거리를 가지고 얘기해보자, 해서 공통 대상을 찾은 것이고요. 연필, 생수에 대해서도 얘기를 했는데요. 연필은 아이들도 잡고 있는 거고, 물은 시골 사람들도 먹는 거잖아요. 보편적인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이야기 바탕을 시작해보자라고 생각했어요.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제가 사회, 정치 등에 대해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되고, 읽는 분들도 그런 형태의 선입견을 갖지 않고 읽을 수 있으니까요. 방어 본능을 해제해야 이야기가 되거든요. 그런 방법론을 고민했던 거죠.
사물을 계속해서 관찰해오셨으니 일종의 습관 같은 것도 생겼을 것 같습니다.
습관이라기보다는 뭘 찾아야 된다는 강박이 있는 거죠.(웃음) 이것도 일종의 평론이잖아요. 사물에 대한 평론인데요. 평론은 자기 얘기를 직접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는 글쓰기거든요. 평론하는 모든 대상이 새로운 대상이기 때문에 새로 출발하는 거거든요. 평론은 지식이 아니에요. 대상이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잘 보는 눈이지 내가 가지는 어떤 지식을 가지고 덮어씌우는 건 좋은 평론이 아니거든요. 3년 정도 쓰고 있는데 능력치가 키워지는 게 아니라 매번 허둥대고 마감 10분 전에 보내요. 힘이 드니까요. 글쟁이로서 저는 세상에 책도 많고, 정보들이 많기 때문에 비슷한 얘기를 하면 안 된다는 강박이 있어요. 글쓰기 하는 사람으로서의 최소한의 직업적 윤리거든요. 그렇게 한 결과가 뭐냐고 하면 결과는 신통치 않아요. 완전히 새로운 얘기를 할 수는 없지만 완전히 비슷한 얘기를 하고 있다, 이런 짓을 하면 안 된다는 강박이 너무나 심해서 그게 힘들죠. 힘들어요.
이번 책을 쓰면서 특별히 주안점을 둔 부분이 있다면요?
일단은 보편적 사물을 가지고, 같이 생각해볼 수 있는 그런 사물을 택한 거예요. 우리가 생각한다고 하지만 대체로 생각하지 않아요. 생각이라고 하는 건 깨달음을 태어나게 한다는 말이거든요. 굉장히 능동적인 말이에요. 그러나 우리가 대체로 생각한다고 할 때의 생각은 대체로 어디서 들었던 것, 책에서 봤던 것, 충분히 정확하게 검토하지 않고 그냥 관성적으로 알게 된 어떤 풍문적 사고들의 집합을 의미해요. 그렇긴 해도 사회가 가지고 있는 수준에 따라서 관성적이고, 정확하지 않은 풍문적인 사고, 자동화된 사고의 방식으로 사는 퍼센티지가 적은 사회가 있고, 상당히 높은 사회가 있거든요. 지금 한국 사회는 그것이 상당히 높은 사회예요. 때문에 책의 주안점은 사고의 자동화, 이런 것들을 중단시키는 것이었어요. 문학도 자동적으로 사고하는 것들을 중단시키는 것이거든요. 시가 어려운 이유는 사고의 자동성을 중단시키려고 하기 때문이에요. 시가 너무 쉽게 읽히면 약간 이상한 거예요. 연필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지만 시인은 낯설게 설명해요. 연필 아닌 것을 설명하는 게 아니라 못 보던 연필을 설명하는 것이죠. 이 책에서 접근하는 방식도 제가 시에 대한 평론을 하는 것처럼 만들어져 있는 사물들에 대해 같은 방식의 발견을 하고, 사고가 자동화되어 있던 것들을 중단시켜 다른 부분을 보여주는 노력이었어요. 그렇게 본다면 사실은 되게 이상한 짓을 한 건 아니에요.
발견을 위해서는 오래 머물러야
우리 사회가 어떤 대상에 대해 충분히 소화시키지 못하고 있고, 생각이라는 것도 어느 곳에서 빌려온 것이나 찾아온 것이 대부분이라는 것인데요. 이런 것들의 가장 큰 적은 무엇일까요?
문명론적 차원에서 보면 세상의 속도가 너무 빨라진 것이 큰 문제가 돼요. 우리가 어떤 것을 발견하려고 하면 거기에 많이 머물러야 하거든요. 인간에 대해 이해하려고 하더라도 가까이 있다고 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오래 머물러야 하죠. 사물에 대해서도 그렇고요. 머물러야 하는데 생각이 머무를 수 있는 여유를 세상이 주지 않아요. 『소크라테스, 예수, 붓다』라는 책도 있지만요,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에서 2,000년 전 사람들이 인간이 이를 수 있는 가장 전위적이고 현명하며 인간을 넘어서는 사유들을 이미 다 했거든요. 사람들은 휴대전화가 나오고, 비행기가 날아다니고, 자동화되고 하니까 굉장한 착각을 해요. 그건 정말 착각이에요. 저 시기 이후부터는 인간의 사고 자체가 어떻게 보면 계속 후퇴한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제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고전 읽기를 가르치는데, 매 학기 빠지지 않고 제일 중요한 커리큘럼으로 다루는 것이 그리스 비극이에요. 소크라테스 시대인데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고민이 실은 무척 오래 됐고, 잘 제거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죠. 그것에 대해 얼마나 이 사람들이 깊이 생각했는지 보면, 현대적인 것들을 완전히 뛰어 넘을 정도로 대단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동화 된 사고를 하는 퍼센티지가 좀 낮은 사회와 높은 사회의 차이는 어떻게 나느냐하면요. 문화를 성숙시키려고 하는 개별적인 노력들은 각자 이루어져야 하거든요. 그런 부분이 교육이라고 생각을 하는데요. 가령, 우리나라 사람들이 미국을 수용하는 것에 양가성이 있죠. 리퍼드 대사 사건처럼 미국에 대해 적대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는가 하면 미국이라고 하면 난리를 치면서 식민지처럼 하는 사람들도 있고요. 중간이 없는 사회거든요. 그런데 사실 미국사회를 관찰해보면 생각보다 사회가 다층적이에요. 제가 시민행성이라고 하는 인문 공동체를 하는데 함께 시작했던 조성택 선생님의 강의 중에 인상 깊었던 대목이 있어요. 오바마 이야기예요. 대선 당시, 이라크 전쟁 중이었어요. 오바마의 표를 깎기 위해 TV토론 중에 공화당 진영에서 이라크 전쟁을 찬성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대요. 오바마가 전쟁을 찬성하는 사람들에 대해 비토를 놓으면 그 사람들의 표가 깎여 나가는 거고, 그렇다고 이라크 전쟁을 옹호하기도 어려운 딜레마적인 질문이었죠. 그의 대답은 "이라크 전쟁을 찬성하는 사람도, 반대하는 사람도, 모두 미국을 사랑하는 사람이다."였어요. 한 번 더 어려운 질문을 했던 게, "하나님은 지금 미국의 편이냐?" 라고 물었더니, 거기에 오바마가 일초도 생각하지 않고 바로 대답이 나오더래요. "당신 질문이 잘못 되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냐고 물으면 안 되고,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얘기했다는 거예요. 조성택 선생님이 그것은 미국 교육의 힘이라고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우리도 엘리트는 많아요. 그런데 그렇게 대답하는 정치인을 본 적이 없단 말이죠. 오바마의 대답은 국민을 포용하는 대답이면서 철학적인 질문을 다시 던지는 것이죠. 우리는 정의의 편에 서 있는가 하는 부분을 말이에요. 저는 그런 오바마의 시선 자체가 교육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그 대답은 가짜, 신을 참칭하는 얘기가 아니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고의 수준을 한 정치인이 굉장히 높은 차원에서 업그레이드 시키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얕은 형태의 분별을 지적한 것이에요. 장자는 그걸 와각지쟁(蝸角之爭)이라고 했거든요. 막 싸우는데 알고 보면 달팽이 뿔 위에서 싸우는 그런 굉장히 웃긴 것이다, 라는 얘기를 했어요. 그러한 시선은 정치가의 시선이기 전에 인문적인 거예요. 그런 형태의 사고의 깊이를 확보하는 교육이 지금 한국 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가, 그 문제가 크다고 봐요.
'인문정신'이랄까 이런 부분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시는 것 같은데요. 지금 시대에 필요한, 혹은 부족한 정신이나 사유에 대해 말씀하신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인문이라는 것은 무늬를 얘기하는 것이거든요. 문양이요. 옛날에 천문이라고 하면 하늘에 무늬가 있어서 주역 같은 경우 점을 치면, 문양이 보인다고 했어요. 점이라는 게 하늘이 가지고 있는 기운을 받아서 문양을 해석한다, 그런 거거든요. 인문이라고 할 때 무늬는 단순히 인간의 무늬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점을 칠 때 하늘과 연결되어 있는 기운이나 신의 표정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좁은 것들을 벗어나서 이 세계의 넓고 깊이 있는 관점에서 확인한다는 것이에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시야의 좁은 것들을 탈락시키고 반성하게 하는 사고거든요. 간단히 말해 사고의 관점의 깊이를 확보하는 일이죠. 오바마 같은 경우가 그런 관점의 깊이, 다양한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좀 더 보편적으로 얘기하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좁은 이해관계, 이데올로기, 관념, 선입견을 초월해서 더 큰 보편적 눈을 우리가 가질 수 있느냐에 대한 반성이에요. 그건 굉장히 인문적인 시각이죠.
객관적으로 사물에 대해 사색하는 듯해도 읽을 때는 사물에 대한 호불호가 느껴졌어요. '아도르노'도 말씀하셨는데 '삶의 구체성에 대한 파악'이 사회의 빠른 속도 때문에 분리된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고요.
일단 이 책에서 말한 사물 중에는 아날로그적 사물이 많아요. 현재까지도 전자 기기와 관련된 사물은 대체로 선택을 안 해요. 그 사물에 대해서 단순히 부정적이어서 그런 건 아니에요. 두 가지 이유인데요. 전자 기기에 관련된 사물들은 보편적이지 않죠. 시골 분들은 전자 기기를 잘 사용하지 않잖아요. 누구나 얘기할 수 있는 걸 가지고 이야기해야겠다는 생각에서 그랬고요. 또 디지털 기기들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제가 아직 파악이 되지 않아요. 가령, 제일 많이 들고 다니는 게 휴대전화인데 이 핸드폰에 대해 말하지 않았거든요. 휴대전화가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르겠어요. 원고 5, 6매가 양은 적어도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판단은 있어야 하잖아요. 아직 이 사물들이 어떤 형태의 것들을 이 세계에 만들어낼지 판단이 잘 들지 않아요. 뭔지 잘 모르겠어요.
인터넷의 경우, 인터넷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 인터넷이 전자 기기로 출현한 것 같지만 굉장히 철학적인 관점, 문학적 관점이 있었다고 하는 부분을 이야기한 것이에요. 보르헤스를 들었는데요, 보르헤스가 그걸 인터넷이라고 얘기한 바는 없어요. 다만 제 독서의 느낌으로는 보르헤스가 묘사한 끊임없이 확장되는 도서관에 대한 발상이 인터넷에 영향을 주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도서관이 옆으로 확장되기도 하고, 안으로 확장되기도 하고, 책장과 책장 사이에 무수한 책장들이 나오기도 하고, 한 단어는 한 단어와 연결되어서 무수한, 이런 것들이 나오는 그런 형태의 문학적 영감에 대해 얘기한 속내가 그것이에요. 인터넷 자체, 디지털 기기에 대한 얘기를 하기 보다는 말이죠. 괴상하고 추상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사변적인 공상처럼 보이는 한 작가의 소설적 발상들이 인터넷을 처음 완성한 사람들에게 영감을 줬으리라고 봐요. 디지털 얘기할 때 그런 차원에서 얘기하는 거고 일부러 아날로그에 대해서 많이 얘기를 했죠.
호불호는 없습니다. 사물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능성의 측면에서 얘기하는 거죠. 내비게이션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었어요. 지금 내비게이션이 없으면 힘들죠. 저는 모더니스트거든요.(웃음) 주로 평론하는 것도 모더니즘 문학이에요. 박사학위 논문도 이상 같은 사람을 했고요. 기본적인 감각은 현대성에 대한 매료가 있고, 현대성을 좋아하고 그래요. 현대성에 매료됨과 동시에 현대성이 가지고 있는 위험에 대한, 이것이 가지고 있는 문제도 같이 생각하는 것이죠. 양면을 봐야 하는 그런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디지털 기기에 대한 호불호가 있는 건 아니에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가능성을 다 염두에 둔 거죠.
"'인문학'은 사람 '인(人)' 자로 되어 있다. 이 '사람 인'을 옛날이라면 동물이나 자연과 구별되는 말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오늘날 관점에서 보자면 기계와 구별되고, 기계가 되지 않으려는 노력과 능력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핵심은 사람으로서 '도덕적 판단능력'을 갖는 일이다."(222쪽)
"철학도, 예술도 우리가 의지해 사는 확고한 상식이 실은 별 근거 없는 관성의 법칙에 불과할지 모른다는 의심에서 시작된다."(176쪽)고 하셨어요. 이 글이 책의 핵심이 아닌가 싶었는데요. 또 "진지성으로부터 일탈"이나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대한 얘기도 계속 하셨는데 이런 계속된 질문이 말씀하신 인문정신의 실천이었나요?
먼저 오해하시면 안 되는 것은, 가벼움이라는 자체는 나쁘지 않습니다. 사회는 무거움과 경쾌함, 진지함과 가벼움이라는 것이 같이 섞여 있어야 하죠. 문명에는 예나 지금이나 두 가지 진지한 층위가 다 있었다고 봐요. 최근에 쓴 사물은 바둑알인데, 공자를 인용했거든요. 공자가 그런 말을 하죠. '밥 먹고 배부른데 아무것도 할 일 없으면 그것도 힘든 거다. 바둑이나 두지 않겠니.' 번역을 굉장히 가볍게 해놨어요. 논어 번역을 보면 '했는가', '하지 않겠느뇨' 이런 식으로 되어 있잖아요. 저는 그 어투를 진짜 '바둑이나 두면 얼마나 재미있겠니', '이렇게 해봐' 처럼 번역했어요. 저는 공자가 그런 사람이었을 거라고 봐요. 제자들이 인(仁)에 대해 물어보면 제자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에 따라서, 기질에 따라서 다르게 대답하거든요. 예수가 사랑에 대해서 랍비가 얘기할 때, 사마리아인이 얘기할 때, 다 다른 방식으로 대답을 하는데요. 대답은 다르게 하는데 번역투는 다 무겁게 되어 있어요. 사실 그건 공자에 대한 약간의 오해가 있다고 봐요.
어떤 면에서 한국 사회는 그 진지함과 무거움을 선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건 일종의 기분이죠. 선과 악이라는 내용으로 얘기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그걸 선과 악이라는 내용으로 접근하는 것이 한국 사회에서는 공부를 많이 한 사람에서부터 많이 하지 않은 사람, 무식한 사람부터 유식한 사람, 심지어는 작가들 사이에서도 그런 게 다 있어요. '스냅백'에 대해 쓴 부분이 있는데요. 진지한 사람들이 보면 불량한 모자예요. 모자가 구부러져 있지도 않고, 올라가서 쓰기도 하고, 거꾸로 뒤집어쓰기도 하고요. 하지만 젊은 사람들은 경쾌해야 하는 거죠. 어느 시대나 젊은 사람들은 다 경쾌했을 거라고 봐요. 그게 젊은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가벼움에 대해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도 인문적인 사고는 아니라고 봐요. 관점의 깊이가 없는 거죠. 이것 역시 다른 관점을 확보하지 못한 거예요.
인문학의 방향성
많이들 문학과 인문학의 위기를 말하는데, 그렇다면 이 시대 인문학의 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저는 인문학이 중요하고, 중요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인문학은 정치나 경제, 사회 등 어떤 특정 분야를 가리지 않고, 시선의 편 가르기 없이 포괄할 수 있는 관점을 확보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 같아요. 그런 차원에서 한국 사회에서 인문학 열풍이 있었죠. 그것에 대한 아쉬움이나 어떻게 방향이 조정되어야 하느냐고 물으면 저는 '인문학의 방향성'을 말합니다. 서울시에서 하는 서울시민강좌를 하나 위탁을 받아서 하는데 사물의 철학으로 하거든요. 그것 역시 글을 쓰게 된 이유와 관련되는 거예요. 시민행성이란 인문 공동체를 하면서도 그런 형태의 토론을 굉장히 많이 했는데요. 지금 한국 사회의 인문학은 방향성이 없다는 거예요. 그걸 '무중력의 인문학'이라고 얘기를 했어요.
인문학에도 방향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주 원론적으로 얘기하면 관점의 깊이를 확보하는 거죠. 관점의 깊이가 없으면 이런 일이 발생하는 거예요. 가령 담배를 '이데올로기로서의 숭고한 대상'이라고 썼는데요. 슬라보예 지젝이라는 사람이 쓴 얘기예요.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사물이라고요. 그런 관점에서 보면 담배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흔히 건강의 문제로 담배에 접근하고, 정부는 세금을 걷는 방식으로 치사하고 비겁하게 접근을 하죠. 국가가 세금을 당연히 걷어야 하지만 공평하면서 품위가 있어야 해요. 담뱃값을 올린 것은 공평하지도 않고, 품위도 없죠. 그런 게 문제가 되는데요. 이 사람들이 대의명분으로 내세운 게 건강이고,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합의된 이야기처럼 되어 있기 때문에 그걸 내세우면 뚫고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지만 담배라고 하는 건 단순히 건강에 관해서만 얘기할 수는 없어요.
지금 인문학의 유행에서 아쉬운 것은 그런 관점의 깊이를 확보하는 '인문 정신'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고 교양적 지식의 사회적 확산으로 생각 하는 부분이거든요. 지식이라는 것은 그것이 바탕이 되어 몸과 일체가 되어야 해요. 대학이 인문학의 보고처럼 되어 있지만 사실은 대학이 그런 인문적 관점과 정신, 우리 몸에 실제 살아있는 체험으로써의 인문 정신을 키워주지 못했어요. 그런 것에 대한 반대급부, 하나의 사회적 요구에 의해서 바깥에서 인문학 단체도 생기고 정부도 그런 걸 하는데 이걸 하는 방식 역시 방향이 없어요. 시민행성 같은 경우 시민인문학이라는 것을 내세웠어요. 공동 공간에서 필요한 최소한의 인문적 정신을 자기 안에 흡수하고 체화하고 그걸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같이 살 것이냐에 대한 최소한의 도덕의 지점을 생각하는 것이죠. 그 도덕을 지식으로써의 규율이 아니고 체득된 형태의 지행일체가 되는, 그런 방향이 우리에게 필요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담배'나 '자동문'처럼 생각을 확장시키는 사물들이 역시 인상적이었습니다.
다른 신문에 얼마 전에 '담배 휴머니즘'이라는 칼럼도 썼는데요. 한국 예술의 거물 시인인 김수영 시인이 쓴 글 중에 보면, '릴케'에 대한 시에 대해 얘기하면서 시라고 하는 것이 결국 신의 입김이 인간의 입김을 통해서 나오는 소리는 아니냐, 이런 얘기를 해요. 그러면서 뜬금없이 담배 얘기를 합니다. 작가들에게는 그게 단순한 농담은 아니에요. 어느 유명한 작가 분이 담배를 끊고 나서 시가 그렇게 안 써지신대요. 글을 쓴다고 하는 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성적 사고가 아닌 다른 사고를 갖게 되는 것이죠. 멋있게 얘기하면, 지금 사는 현실이 아니라 다른 현실로 가는 과정이 필요한 거거든요. 근데 이 현실에서 다른 현실로 바로 넘어가게 되지 않아요. 그게 되면 미친놈이죠. 갑자기 딴 소리하는 거니까요. 다른 현실, 다른 사유로 넘어가려면 굉장히 메마른 감정의 골짜기를 건너가는 과정이 필요해요.
그때는 약간 미쳐요. 신경증에 걸리는 거죠. 어떤 사람은 술을 먹어야 하기도 하고요. 그런 과정에서 작가들에게는 담배가 중요한 사물이 되기도 해요. 글에도 있지만 군대 다녀온 사람들에게 담배라는 건 유일한 휴식시간이 돼서 약간의 일상의 틈새를 내요. 건설현장 인부가 새벽부터 출근해서 일을 하는데 기계가 아니기 때문에 쉬어야 하거든요. 관리자가 보고 있기 때문에 갑자기 쉴 수가 없어요. 그때 담배를 피워요. 단순히 담배를 피우는 게 아니라 기계적인 어떤 것에 틈을 내면서 사람이 시선의 억압으로부터 방어막을 치는 것이죠. 그런 것을 개방하는 게 담배의 시간이라고요. 제가 대학 다닐 때는 여학생들이 일부러 담배를 피웠어요. 사회가 남녀평등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세상은 남녀평등이 아니고, 그런 실질적 불평등에 대해서 남자들이 주로 하는 것에 대한 반대급부로서의 심리적인 저항도 있는 거거든요. 이 담배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건강이라는 하나의 층위로 볼 수 없는 굉장히 많은 삶의 다른 관점들을 확보할 수 있는 사물이에요.
자동문 얘기도 그런 거잖아요. 문이 열고 나가는 것으로만 생각하면 자동문이라는 것은 편리하죠. 그러나 삶의 경험이라고 하는 건 그냥 나가고 여는 것만이 아니에요. 안에 아기가 자면 천천히 열고, 배가 고프면 신나게 빨리 열고, 지각 했으면 미안한 마음 때문에 늦게 열고 하면서 열고 닫는 도구적 목적 외에 찌꺼기로써의 세계가 있는 거거든요. 그런 걸 통해서 삶의 깊이가 확보되는 것이고, 그게 인문적 사고의 깊이라는 거예요.
'시민행성'의 올해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 있는데, 처음 '시민행성'이 만들어졌을 때 우리의 모토는 '인문정신으로 사회를 디자인한다.'는 것이었어요. 강의만 하는 게 아니고 프로그램을 통해 사회에 제안하고 저희가 발명하기도 하는 것인데요. 우리가 인문적 관점을 갖게 된다면, 사회의 여러 제도라든가 각 영역에서 어떤 방식이 이루어졌을 때 우리가 어떻게 프로그램화 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 그 모토를 썼던 것입니다. 이제 2년 되었는데요. 올해 내세우는 건 '생각할 때 시민이다'는 것이에요. 그건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는 뜻이겠죠. 시민이라고 하는 것은 서울이라는 공간에 산다고 부여되는 네이밍이 아니라는 것이고요. 생각을 할 때 우리는 시민이 됩니다. 조성택 선생님은 '시민은 백성이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는 사람'이라고 했거든요. 제가 연등에 대해서도 쓴 게 있는데요. 불교에서는 중생이라고 하는데 그 중생이라는 게 짐승이라는 말에서 온 거예요. 기본적으로는 사람이 그냥 짐승이라는 거죠. 짐승이 꼭 나쁜 건 아니고 짐승을 모독하는 것도 아니지만요.(웃음) 자기 안에 생각을 갖게 되고 각성된 정신을 갖게 됐을 때 불교에서는 중생이 아닌 보살이라고 하고, 보살이 깨닫고 완료된 형태가 되면 부처가 된다고 하는데요. 조성택 선생님의 그 말은 시민이라고 하는 건 결국 중생이 보살이 되는 것처럼, 백성이라는 노예적 정신이나 관성적 사고가 아니고, 자기 안에 주체성을 획득하고 능동적 사고를 하게 되면 결국 시민이 아니냐 하는 것이었어요. 연등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그런 식의 사고가 들어가 있죠.
쓰시면서 특별히 새롭게 생각하게 된 사물이 있었나요? 물티슈도 재미있게 읽었어요.
아무래도 많이 사용하시니까요.(웃음) 전체적으로 어떤 사물에 대해 썼을 때 선악과 미취에 대한 판단은 없어요. 다만 객관화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것이 뭔지를 알고 그 곁에서 그것을 사용하자는 거죠. 그렇게 얘기해도 물티슈를 쓸 사람은 써야 하는 거고 그걸 보면서 안 쓰는 사람은 안 쓰는 건데요. 평론이라고 하는 건 굉장히 간단해 보이는 것에서 예민한 징후를 보는 거거든요. 어떤 사람은 기침을 열 번 정도 해야 감기 든 것을 아는데, 기침을 두 번 정도 하는 것만 보고 감기 들었구나, 병들었다, 하는 걸 파악하는 해석이 평론이에요. 그보다 앞서 더 예민한 것은 시인이죠. 작가들, 소설가들이에요. 시인이 먼저 그런 걸 알아챘으니까 그 바탕에서 저희가 그런 얘기를 하는 거고요. 그걸 제일 예민하게 보는 건 문학과 예술이죠.
물티슈, 포스트잇 같은 사물들이 하나의 그럴싸한 거짓말입니다.(웃음) 그럴싸한 거짓말이 그럴싸하게 들린다면 설득력을 갖는 거죠. 맞고 틀리고는 없어요. 그럴싸한 거짓말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거예요.
독자들이 이 책을 어떻게 읽었으면 하시나요?
아유, 그런 건 없습니다.(웃음) 마음대로 보시는 거고요. 글쓰기 수업할 때, 좋은 글쓰기에 대해 이렇게 얘기하거든요. 책을 그냥 통째로 한 권 쓸 생각을 한다거나, 문단을 통째로 쓴다고 생각한다거나 아니면 어떤 테마에 대해 한 편의 논문을 쓴다고 생각하면 글을 못 쓴다, 좋은 글을 쓰려고 하면 문장 단위로 써야 한다고 항상 얘기를 해요. 문장에만 집중하면 문장과 문장에 허튼 문장이 없이 촘촘한 문장들로만 이어지게 되거든요. 저는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할 때도 문장처럼 너무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해야 좋은 생각을 한다고 말을 해요. 인문학, 인문적 사유, 굉장히 거대하고 힘들어 보이는데 이 책은 우리가 손에 들고 있는 물통 하나 가지고도 생각을 끝까지 이어나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요. 뭔가를 너무 거대하게 생각할 게 아니고, 거대하고 대단하게 생각하는 것도 손 안에 쥔 생수 하나 안에서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에요. 또 짧잖아요. 논문이나 책을 보지 않아도 원고 5, 6매의 짧은 글 안에서, 구체적인 것에서 보편적인 생각을 할 수가 있는 거죠. 사소한 것에서 중요한 생각을 할 수도 있고요. 특수한 것에서 추상적이고 보편적 사고들이 가능합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 같아요. 이렇게 읽혀지면 좋겠어요. 이런 식의 사고방식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이에요.
근대 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가 사고하는 방식에 대해 네 가지 규칙을 가르쳤거든요. 첫 번째는 방법적 회의를 말하죠. 의심하라, 이렇게 얘기하고 두 번째는 복잡한 것을 간단하게 자르라고 얘기해요. 사물이든 뭐든 세계는 복잡하게 얽혀있거든요. 그것을 단순한 요소로 잘라라. 세 번째는 가장 쉽고 간단한 것에서부터 출발하라, 마지막은 검토해라. 이런 규칙이 있는데요. 간단하게 만들고, 쉬운 것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연암 박지원도 비슷하게 얘기한 게 있거든요. 최고의 문장가고 정말 사고가 전위적이었던 사람인데 간단한 데서 출발하라고 해요. 간단한 데서 출발할 수 있다는 용기를 가졌으면 좋겠어요. 우리에게 여러 가지로 용기가 부족하잖아요. 많이 배운 사람만 뭘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그렇기 때문에 자기 문제를 주체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누구에게 가서 들으려고 해요. 그래서 힐링이 유행하기도 하고 멘토들도 많아졌고요. 제일 좋은 멘토들은 사실 책이거든요. 예수, 부처, 소크라테스, 이런 분들이 훌륭한 얘기는 다 해놓으셨는데 너무 쉽게 하려고 하는 게 있어요. 내 문제, 우리 시대의 문제를 우리가 해결할 수 있다고 하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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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철학 : 질문으로 시작하여 사유로 깊어지는 인문학 수업함돈균 저 | 세종서적
이처럼 사물에 대한 기존의 정의를 넘어서는 발상은 단지 저자의 직관적 분석에 의지하여 탄생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와 문화의 맥락에서 종합적으로 파악한 사고의 결과물이며, 무엇보다 철학적 성찰이 그 기저를 이룬다. 예를 들면, 굴러가는 자전거의 바퀴에서 저자가 알아차린 것은 바퀴와 바퀴 사이의 빈 공간의 운동이며, 여기에서 저자는 노자의 ‘무용지용(無用之用)’을 연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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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연선
읽고 씁니다.
서유당
2015.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