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과 올해 초를 후끈 달구었던 공공기관의 포스터를 기억할 것이다. 보건복지부, 국민연금관리공단, 그리고 한국생산성 본부에서 한 건씩 크게 하셨다. 관계에서 함께 분담해야 할 피임의 책임을 ‘셀프’라는 이름으로 여성에게 전가하며 여성혐오적 이미지를 사용하고, 노후 대책의 중요성을 강조한답시고 저소득층 노인들을 비하하더니, 이제는 ‘하나는 부족하다’며 외동아이를 불완전하고 ‘부족한’ 존재로 깎아내린 것이다. 우리나라는 삼세번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데, 곧 죽어도 세 번은 채우고 싶었던 모양이다.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관리공단의 광고가 문제가 된 지 얼마나 됐다고. 아 혹시 이 세 가지를 뛰어넘는 홈런을 준비하며 싸이클링 히트를 노린다면, 안돼 돌아가. 그거 아니야.
무언가를 권장할 때 어째서 그토록 자연스럽게 ‘비교’와 ‘폄하’가 따라붙는 걸까? 연애의 좋음을 이야기하는데 ‘솔로의 불쌍함’, ‘솔로의 비참함’이 전제된다. 꾸준한 운동의 장점을 이야기하는데 큰 몸을 ‘나태함의 상징’으로 호출한다. 공부 열심히 하라는 권유는 ‘대학 가서 미팅할래, 공장 가서 미싱할래’ 따위의 급훈으로 등장해서 공장 노동자를 모욕한다. 가장 최근의 한국생산성본부의 광고를 보자. ‘둘도 좋습니다’로는 안됐던 걸까? 무언가를 비하하고 우열을 가림으로써 증명할 수 있는 ‘좋음’이라면 그건 결국 그 자체로는 별로 좋지 못하다는 뜻이 된다. 마치 외동 가정이 ‘하나가 부족하다는 걸 몰라서’, ‘이기적인 선택으로’ 그런 삶을 선택했다는 듯한 계몽 의지 혹은 은근한 비난이 느껴진다. 저런 류의 포스터가 얼마나 많은 외동을 상처 입힐지. 한편 선택이 아니라 건강상의 문제 등 여러 가지 외부적인 이유로 ‘불가피하게’ 한 명 이상을 낳을 수 없는 이들에게 어떻게 다가갈지는 1도 고려 안 한 게 뻔하다는 말이다.
국민연금관리공단의 포스터도 마찬가지다. 노후 대비를 철저하게 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왜 저소득층 노인들의 생계수단인 폐지 줍는 수레와 여행 가방을 비유해야만 했을까? 이러한 시도는 최근 수많은 관객을 끌어모은 영화 <국제시장>의 세대, 그러니까 전쟁 이후 가장 아등바등 살았던 세대가 어째서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노인 빈곤율의 주인공이 되었는지 은폐하고, 그들을 공포와 기피의 대상으로 만든다. ‘저렇게는 살면 안 된다’는 공포가 ‘여행 가방을 드는 삶’을 선망하게 하고, 그 선망이 국민연금을 때려 붓는 원동력이 된다. 공포가 절박하고 극심할수록 국민연금에 매달리기 마련이니, 폐지를 줍는 저소득층 노인은 범접 불가능한 괴물이 되어야 한다. 노후대책을 적절하게 하지 못했으니 그렇게 산다는 혐의를 뒤집어쓴 채로.
까는 김에 모두 까기 인형이 되어 보건복지부 포스터로 간다! ‘피임은 셀프’가 맞다. 누가 그걸 대신해주겠는가. 관계 속에 있는 두 사람이 알아서 해야지. 그런데 저 이미지와 문구 때문에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다 못해 아주 밥상을 걷어차셨다. 위! 아래! 위위 아래! 우리나라는 유독 여성의 피임 주도권이 보장되지 않는다. 낙태율을 이야기할 때마다 젊은이들의 성적 문란이 도마에 오르지만, 의외로 낙태율의 상당수는 기혼 여성이 차지하고 있음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어 아이를 낳았는데도 피임을 합의 하에 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젊은 여성들은 툭하면, 아무 때나, 심지어 어떤 때는 되도 않는 이유로 ‘쉬운 여자’ 도장이 쾅쾅 찍힌다. 치마가 짧다는 이유로, 늦은 밤까지 돌아다녔다는 이유로, 웃음을 흘렸다는 이유로, 콘돔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심지어 사후 피임약조차 자유롭게 살 수 없는 상황에서 남성에게 모든 짐을 들게 한 여성의 이미지를 떡 하니 박아놓고 ‘피임은 셀프’라고 말한다. 와. 보건복지부에게 엉덩이가 있었으면 좋겠다. 피구왕 통키를 소환해 불꽃슛을 먹이게. 아니면 얼굴이 있어도 괜찮겠다. 김치 싸대기 한 번 시원하게 날리게.
주디스 버틀러는 사회제도적 권력, 규율, 규범들이 주체를 구성하는 것을 ‘주체들’과 ‘행동들’로 하여금 모습을 드러내도록 해주는 반복적인 수행 과정의 효과(『의미를 체현하는 육체』, 36쪽)라고 이해했다. 이 과정은 ‘포섭’과 ‘배제’라는 이중의 작용으로 진행된다. 특정 정체성이 권력 담론에 의해서 생산된다고 할 때, 이 담론은 지정된 정체성의 특징과 범위에 머물며 그 외의 것들은 배제하는 이중의 의미화 작용을 수행한다. 선택과 선별, 그리고 배제. 이 과정을 통해 산출되는 것을 버틀러 식으로 “담론의 구성적 외부”라고 명명할 수 있다. ‘내’가 속한 ‘여기 이곳’을 담론의 내부로 만들고, 여기에 속하지 않는 이들을 외부로 추방한다. 그리고 담론 내부의 존재는, 담론의 구성적 외부를 대상화함으로써 스스로를 주체화한다. 담론 바깥의 존재에게 경멸과 혐오를 덧씌울수록 내부의 나는 안전하고 정상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가장 낮은 레벨의 예시로는 ‘나빼썅’ 전법이 있다) 이는 바로 글의 앞부분에서 제기했던 의문, 어째서 무언가를 이야기할 때 비교가 폄하가 따라붙는가에 대한 답변이 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무수한 타자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나’는 담론의 바깥으로 쫓겨날 수 있고, 또 들어올 수 있다.
저 광고의 논리대로라면 저 광고를 만든 사람들이야말로 ‘사회성이 부족하고 이기적인’ 외동아이다. 외동아이에 대한 이러한 편견은 뿌리 깊고 오래되어 하나 새로울 것 없다. 연년생 언니와의 피 터지는 (부모님의 애정 겟☆하기) 경쟁으로 지친 필자가 ‘소원은 외동딸’하고 노래할 때마다, 주변의 어른들은 외동이 얼마나 외롭고 불쌍한 존재인지 역설하곤 했다. 산아제한이 막바지였던 80년대 말에 태어나 꽤 많은 외동아이 친구들이 있었고, 그 밑으로는 더더욱 많은 외동아이들이 태어났는데도 말이다. 제 1의 외동아이가 질주하오. 제 1의 외동이 무섭다고 그리오. 제 2의 외동이 무섭다고 그리오. 제 3의 외동이 무섭다…제 13인의 외동아이가무서운외동과무서워하는외동과그렇게뿐이모였소.(언니누나형오빠동생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이렇게 많은 외동을 만든 것은 결국 둘도 많다고 외치던 나라님인데, 이제 와서 외동이 이기적이고 사회성이 없다고 디스하네. 아이고 데이고. 하늘 아래 믿을 놈 하나도 없다더니 바로 그 꼴 아니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치 전범을 처벌하는 재판에서 한나 아렌트는 수없이 많은 유대인을 학살한 사람이 특별한 괴물이 아니라, 너무나 평범하고 부지런한 관료 아돌프 아이히만이라는 것을 목격한다. 그는 그저 위의 명령(무고한 유대인들을 학살하라는)에 아무 생각 없이 복종함으로써 악마가 되었던 것이다. 심지어 아이히만은 자신을 변론하며 유대인에게 어떠한 악감정을 가진 적 없고, 어린 시절 친하게 지낸 친구가 유대인이었다고 밝혔다. 그에게 결핍된 것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할 능력과,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기민한 사고와 의심이었다. 아이히만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면서 어느 때보다 빠른 승진을 이루었고, 당시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최고인 히틀러를 이상으로 삼았다. 한나 아렌트는 이를 바탕으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을 쓴다. 아이히만과 같은 ‘생각하지 않음’, 비(非활)동 결국 악의 진부함을 낳는다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나치 전범들은 아이히만처럼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도모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던 소시민이었기 때문이다.
나치 전범에 비유하는 것은 너무 멀리 갔다고 억울해 할 지도 모르겠지만, 아마 이 포스터를 만든 사람들의 실수도 결국 그러한 ‘생각하지 않음’에서 기인했다고 생각한다. 과정도 효과도 다르지만, 너무나 널리 퍼진 편견과 사고를 안이하고 무분별하게 수용했으니 말이다. 지금은 우리가 이 포스터를 보고 분노하는 쪽에 서지만, 또 모른다. 저 광고 3종 세트를 만들고 뽑은 이들도 “와! 욕하고 비하하고 조롱하자!” 하면서 덤볐을 리는 없으니까. 다만 내부에 내재된 오랜 편견과 차별적 시선에 대한 어떤 의문도 없이, 그것을 ‘세련되고 참신한 광고’라고 여기는 데서 문제는 발생했다.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부당함, 숨쉬듯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차별과 비하를 아무렇지 않게 넘긴다면, 우리도 언제 어디서든 한나 아렌트적 의미에서의 악을 저지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손을 잡고, 좀 더 민감해지며, 끝없이 생각하고 되돌아봐야 한다. 내가 보기엔 별 것 아닌 일에 파르르 떨며 천착하는 이들이 있다면, 도대체 그것이 왜 그토록 그 사람에게 중요한 일인지 들여다봐야 한다. 유난을 떠는 것 같은가? 천만에. 유난은, 떨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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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송
비연애인구 전용잡지 <계간홀로> 발행인. 문충이(文蟲)가 되고 싶은 그냥 식충이. 뭐든지 재미 있어야 하지만 재미의 기준은 내 마음. 읽고 쓰고 덕질합니다.
zentlekimbba
2015.02.01
rkem
2015.01.29
달팽이
2015.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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