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식’이라는 말은 더러 안 좋은 어감을 남긴다. 특히 타국의 문화와 한국의 어떤 현상을 비교할 때 한국식이라는 말은 교묘한 비아냥거림으로 쓰인다. 그중에서도 ‘한국식 드라마’라는 말이 그렇다. 이 말은 종종 한국 고유의 정서를 담은 드라마의 공식을 비꼬는 말이 된다. 병원에선 의사가 경찰서에선 경찰이 법정에선 검사 혹은 변호사가 연애를 하고, 알고 보니 옷깃만 스친 너도 내 혈육이라는 한국 드라마의 공식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뻔한 한국 드라마에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것보다 인간 간 관계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정서만큼은 오히려 어떤 타국의 드라마보다 흥미롭게 대중을 유혹하곤 한다. KBS2 <스파이>는 이런 가정을 입증하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보이는 드라마다, 사실은 타국에 원작을 따로 두고 있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로.
<스파이>는 이스라엘 드라마
출처_ KBS
<스파이>는 원작의 여러 설정을 적절히 녹여낸다. 이스라엘의 불안정한 정국을 바탕으로 한 원작의 갈등은 분단국가인 우리나라의 남북 갈등으로 대치된다. 소련 KGB 소속의 스파이는 북한 스파이가 되고, 이스라엘 공군 소속 이얄 고딘은 국익을 위해 애쓰는 국정원의 대북정보 분석팀 소속 요원 김선우라는 이름을 단다. 스파이 업무 수행 과정이나 관련 법의학, 법학, 범죄학 등 특정 학문에 집중해 장르적 재미를 얻는 대부분의 스릴러물에서 등장인물 간 관계성은 소홀히 다뤄지곤 한다. 하지만 <스파이>는 대부분의 한국 드라마들이 그러하듯 캐릭터 하나하나의 관계를 강조한다. 전 상사와 부하, 남편과 아내, 연인, 정보원과 스파이, 아들과 어머니.
흥미로운 것은 얽히고설키는 관계의 중심에 혜림(배종옥)이 있다는 것이다. 스파이 박혜림은 뛰어난 공작원이며 자신의 미래를 위해 상사를 버릴 정도로 냉혹하고 걸출한 스파이였다. 드라마는 상사 황기철(유오성)과 혜림의 과거를 암시함으로서 그들의 관계성을 강조한다. “그래, 그땐 정말 나도 죽는 줄 알았어. 피부가 하도 너덜너덜해져서 수술만 몇 번 받았는지 몰라. 다 네 생각하면서 버텼지 뭐냐.”,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지, 그래도 한때는 살 부비고 살던 사인데. 그땐 너도 나 좋아했잖아.” 기철은 혜림에게 비아냥대거나 미련을 드러내고, 혜림은 기철을 끔찍하게 증오한다. 한편 가족 안에서 혜림은 남편 우석(정원중)을 너무나 사랑해서 임무를 버린 한 사람의 여자이며, 무엇보다 아들을 가장 먼저 생각하는 평범한 한국의 어머니다. 기철이 가족을 볼모로 혜림을 협박하자, 그녀는 현재의 행복을 버리고 떠나기로 결심한다. 당연히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다. 하지만 혜림의 결심을 눈치챈 우석이 그녀를 붙잡고, 여러 상황이 여의치 않자 혜림은 아들 대신 스파이가 되어 아들의 행복을 지키기로 결심한다.
다양한 관계 속 혜림이 중심을 잡는다는 것은, 이 드라마가 가족 간 애정과 신뢰의 문제를 다룰 것임을 드러낸다. 그녀는 어머니이고, 아내고, 여자다. 자신이 하나하나 일구고 가꾼 아름다운 가정을 지키기 위해 그녀는 분투한다, 대부분의 한국 드라마에서 어머니들이 그러하듯이. 다만 그 무대를 가정이 아닌 첩보원들이 뛰는 필드로 옮겼을 뿐이다. 드라마는 이런 생각을 뒷받침하듯 혜림이 아들의 여자친구 윤진(고성희)에게 미묘한 적대심과 긴장감을 느끼는 장면을 묘사한다. 처음 만남부터 혜림은 윤진을 탐탁찮아하고 터무니없는 트집을 잡는다. 시청자들은 아들을 미행하는 부부의 행보에 팽팽히 긴장했다가, 아들의 몰랐던 음식 취향에 당혹해하는 혜림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린다. 아들이 국정원 직원이라는 충격이 미처 가시기도 전인데, 혜림은 임무 전에 여자 친구를 만나고 대신 집안일을 해 주는 아들의 모습에 시어머니다운 못마땅함을 드러내고 아들의 애정행각을 끝까지 도청하겠다 고집을 부린다. 아들에 대한 애정은 혜림을 기철과 맞서 싸우게도 하고, 아들의 여자 친구에 대한 비합리적인 아집에 빠지게도 하는 셈이다.
이처럼 <스파이>는 이념적 대립을 그리는 첩보물의 특성과 인간 사이, 특히 혈연의 관계성을 강조하는 한국 드라마의 특성을 맛깔나게 섞는다. 혜림은 아들이라면 무슨 일이든 하는 어머니이며, 가족을 지키려 퍼렇게 성이 난 짐승이기도 하다. 능숙하게 칼을 휘두르고 폭탄을 터뜨리는 볼거리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법한 소소한 가족적 위트까지, <스파이>는 갖가지 색을 갖춘 드라마다.
주의(主義)라는 말이 붙을 정도로 가족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한국 사회에서, <스파이>가 가족적 애정을 바탕으로 한 첩보물이라는 점은 더없이 흥미롭다. 금요일 밤 2회 연속 편성이라는 공격적 마케팅과 배종옥, 유오성, 김재중 등 누구나 안심할 만한 배우들의 포진은 이 드라마에 대한 KBS의 자신감을 느끼게 한다. 4회가 방송된 지금, KBS의 자신감은 꽤 납득할 만한 것처럼 보인다. 금요일 밤, 가족들과 함께 TV 앞에 앉아보는 것은 어떨까. <스파이>는 가족 드라마에 익숙한 부모님 세대부터 긴박감 넘치는 장르물을 즐기는 아들딸까지 모두 잡아 둘 수 있는 선택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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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우
사람과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이 길어 주절거리는 것이 병이 된 사람. 즐거운 책과 신나는 음악, 따뜻한 드라마와 깊은 영화, 그리고 차 한 잔으로 가득한 하루를 보내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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