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nesty라는 거짓말쟁이의 정책
정말 완벽하게 거짓말을 해서 남을 속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차라리 진실을 말하는 것이 최선의 정책일 수 있다. 말하자면, 어설프게 속일 바에야 처음부터 진실을 말하는 게 훨씬 낫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글ㆍ사진 이택광
2014.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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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정상으로 살고 싶어 한다. 정상적인 것이 행복한 것이고 좋은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것은 뭘까. 영어로 정상적이라는 말은 normal이다. 이 말은 16세기부터 쓰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원래 뜻은 typical 또는 common였다. Typical은 모양만 봐도 알 수 있는 평범한 것을 의미한다. Common도 마찬가지다. 글자 그대로 옮기면 공통적이라는 뜻이지만, 모두가 함께 나눠 가지고 있으니 당연히 평범한 것일 테다.


Normal이라는 말은 아주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시대에 따라서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정상이 아닌지 구분하는 방식들이 제각각이었음을 암시한다. Normal은 처음에 전형적이고 공통적인 것을 의미하다가 17세기가 되면 생뚱맞게도  ‘stand at a right angel’이라는 뜻을 가지게 된다. 글자 그대로 옮기면 ‘착한 천사 쪽에 선다’는 뜻인데, 미국의 카툰이나 코미디에서 주인공이 갈등할 때 왼쪽에 악마, 오른쪽에는 천사가 나와서 서로 자신 쪽에 서라고 유혹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Normal이 ‘착하다’, ‘좋다’는 의미를 가지게 된 건 무엇을 정상이라고 판정하는 문제가 대체로 rule과 관련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시대이든 지배적인 rule에 잘 복종하면 정상적인 것이라고 부른다. 역설적으로 이 말은 정상적이지 않은 것은 그 시대의 rule을 따르지 않는 것임을 말해준다. Rule을 따르는 것은 평범한 것이다. 평범한 걸 좋은 것이라고 여기는 풍조가 만연하면 어떤 문제가 생길까. 존 스튜어트 밀이 지적한 것처럼 개인의 자유가 말살 당할 수 있다. 좀 더 확대하면 창조적인 행위가 금지 당할 수 있다. 이런 우울한 현실을 그린 소설이 바로 조지 오웰의 『1984』다.


오웰의 소설은 전체주의에 대한 영국인의 두려움을 가감 없이 드러낸 작품이다. 오스트롱이라는 독재자가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빅브라더의 역할을 한다는 설정은 독재 권력에 대한 원형적인 상상력을 만들어냈다. 원래 Science Fiction은 미래를 디스토피아로 그려냄으로써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퇴행성을 고발하는 장르이기도 했다. H. G. 웰즈를  Science Fiction이라는 장르가 형성되게 한 작가로 볼 수 있지만, 그 맹아는 영국의 유토피아 소설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웰즈는 유토피아 소설에 등장하는 터무니없는 낙관주의를 여러 과학적 가설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보여주면서 개연성에 근거한 소설을 썼다.

 

1984 

 


오웰에 버금가게 미래 사회를 끔찍하게 그린 단편소설로 커트 보네거트의 「해리슨 버거론」이 있다. 작품의 배경은 2081년이고 “모든 사람들은 마침내 평등해졌다”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평등은 모든 능력을 동등하게 만든 상태를 의미한다. 그래서 외모가 출중한 발레리나는 얼굴을 흉측한 가면으로 가려야하고, 운동능력이 월등한 남성은 몸에 쇠로 만든 족쇄를 차야한다. 보네거트는 이와 같은 기계적인 평등의 세계를 풍자한다. 결국 이런 문제의식은 앞서 살펴본 밀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면서 전체주의에 대한 오웰의 공포를 한층 강화해서 제시한다.


그러나 이런 전체주의의 문제는 멀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일상에 도사리고 있다. 정상적인 것에 대한 집착이 바로 이런 징후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이 정상이고 비정상인지 끊임없이 구분해서 비정상적인 것을 나쁘다고 배제해버린다. 이런 배제를 국가권력으로 실행하는 체제가 바로 전체주의다. 정상적인 것이 rule을 따르는 평범성의 문제라고 했을 때, 이렇게 정상적인 것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튀는 행동은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이런 사회가 문제인 것은 결국 변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웰즈는 이런 문제를 진화론적인 퇴행이라고 생각했고, 오웰은 폭력적인 국가권력에 의한 자유의 말살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런 사례를 영어에서 찾아보자. ‘Honesty is the best policy’라는 영어속담이 있다. ‘정직이 최선의 정책이다’는 조언에 모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착하고 진실되게 살면 문제없다는 의미로 들린다. 물론 여기에 함정이 있다. 다분히 문화 차이에서 오는 어긋남이 이 속담에 대한 이해에서 드러난다. 우리에게 정직이라는 말은 ‘마음에 거짓이나 꾸밈이 없이 바르고 곧다’는 의미이다. 영어에서 honesty는 ‘명예’나 ‘우아함’과 관련이 있는데 나중에는 여성의 처녀성이나 정조를 의미하게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honesty는 virtue나 reputation의 의미도 가진다. Virtue를 보통 ‘미덕’이라고 옮기지만, 내막을 뜯어보면 ‘능력’ 또는 ‘역량’이라는 뜻이다. 그리스어에서 변형되어 영어로 들어온 이 말은 원래 악기나 스포츠 같은 예기를 잘하는 능력을 의미했다.

 

이런 용법은 우리가 사용하는 정직이라는 말에 잘 들어맞지 않는다. 게다가 virtue라고 한다면, 이건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평소에 갈고 닦아서 숙달되어 있는 것이어야 한다. Honesty가 good manner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런 honesty가 good의 최상급인 best와 policy라는 말과 결합되어서 ‘Honesty is the best policy’라는 속담이 만들어진 것이다. 당연히 이 속담이 ‘착하고 진실하게 살라’는 의미만을 가졌을 리 없다. 


영어로철학하기

 

이 속담은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첫 번째, Honesty는 good thing이니까 모두에게 혜택을 줄 수 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나도 득을 보게 된다. 도덕적으로 남에게 잘 대하면, 그러니까 착하게 굴면 득을 본다는 것으로 보통 우리가 이 속담을 통해 떠올리게 되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렇게 득을 보려면 상대방도 정직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직한 사람이 손해를 본다. 이런 현실에 기반해 두 번째 해석이 나온다. 정말 완벽하게 거짓말을 해서 남을 속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차라리 진실을 말하는 것이 최선의 정책일 수 있다. 말하자면, 어설프게 속일 바에야 처음부터 진실을 말하는 게 훨씬 낫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어쨌든 둘 다 항상 진실을 말하는 착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정직하게 구는 것이 ‘최선의 정책’이라고 믿는다면, 그건 이미 정직하지 못하다는 말이 되어버린다. 정직을 policy라고 본다는 점에서 그렇다. Policy는 ‘way of management’라는 의미이다.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이 말은 행동을 계획하고 관리한다는 함의를 가진다. 정직한 행동을 계획하고 관리하는 사람이 정직한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해보자. 거짓말을 아주 능수능란하게 잘하는 거짓말쟁이를 영어로 a good liar라고 한다. 당연히 이때 good은 착하다는 뜻이 아니라 잘한다는 뜻이다. ‘I am good at swimming’이라고 하면 수영을 잘한다는 말이다. 이처럼 good은 우리에게 익숙한 ‘심성이 착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Moralist가 착한 사람을 지칭하지 않듯이 사실은 good도 착하다는 뜻이 아니라 뭔가를 잘한다는 말에 더 가깝다.


굳이 이 말에서 한국적인 의미를 찾아보면, 17세기에 아이들의 행동거지에 대한 표현으로 good을 사용하면서 well-behaved라는 뜻이 등장한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이때 well-behaved는 아이가 어른 말을 잘 듣고 무엇이든 잘 배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17세기는 귀족들 사이에서 세습을 위한 자녀 교육이 중요한 화두로 등장하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이른바 childhood라는 개념이 처음으로 탄생한 시기이기도 하다. 요즘은 흔하게 ‘유년시절’이라는 말을 쓰지만, 17세기 이전까지 아이라는 존재는 어른처럼 생겼는데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미숙한 존재로 취급당할 뿐이었다. Childhood라는 개념이 생긴 뒤에 아이들은 비로소 독립적인 개체로서 대접 받았다. 물론 이것도 세습의 원칙에 따라서 결혼 허락을 받은 장자의 자녀에게나 해당사항이 있었다.


따라서 당시에 아이가 착하다는 것은 아이이면서도 어른 못지않게 무엇이든 척척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착하다는 말을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는 뜻으로 사용하는 우리의 언어습관과는 크게 다른 맥락이다. Good이 normal이라는 말과 엮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결과적으로 normal은 rule에 순종하는 good manner를 의미한다. Normal이 곧 good한 것이다. 영어는 이런 normal을 결정하는 언어습관에 따라 작동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명한 것처럼 보이는 영어이지만, 사실은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을 구분해서 차별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을 나누는 차이는 무엇일까.

 

 There is a difference between the normal and the abnormal. 영어로 써놓으면 훨씬 더 명확해진다. Normal과 abnormal 사이에 difference가 있다. 이 difference는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정상과 비정상 가운데에 있는 ‘차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영어뿐만 아니라 모든 언어는 완벽한 듯 보이지만 차이라는 의미의 구분을 통해 엉성하게 작동한다. 이 사실을 발견한 사람이 바로 페르디낭 드 소쉬르라는 언어학자였는데 이 이야기는 다음으로 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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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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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ㅋ

2014.09.15

1984는 불후의 고전 명작이죠. 어쩌면 21세기 현존하는 문제의 핵심을 꿰뚫어본것 같아 오웰의 통찰력에 탐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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샨티샨티

2014.09.09

honesty 라는 단어로 이런 철학적인 해답을 찾아 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 심장한 글입니다. 정직성을 잃지 않고 살아간다면 세상의 규범을 강압적으로 적용할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이 단어의 의미를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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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사랑

2014.09.07

honesty is the best policy. 예전엔 못 느꼈는데, honesty와 policy란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단 말에 수긍합니다.
normal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되네요. 평범이라고만 생각했는데, good에 더 가까운 것 같고 normal에 치중하는 것이 전체주의를 조장할 수도 있단 생각에 두려움마저 드네요. 1984란 작품을 인상깊게 읽었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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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광

미술, 영화, 대중문화 관련 글을 쓰고 있는 작가. 경희대학교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영미문화전공 교수로 재직하면서 문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경북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자란 그는 어릴 적에 자신을 안드로메다에서 온 외계인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구환경에 한동안 적응하지 못했으며 우주여행을 떠나는 그림을 그려서 꽤 큰상을 받기도 했다고 추억한다. 그는 자신의 모토를 "그림의 잉여를 드러내는 글쓰기" 라고 밝히며 글쓰기는 그림 그리기의 대리물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림에 대한 글을 계속 쓸 생각이라고 포부를 이야기한다. 이러한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바탕으로 1999년, 영화주간지 <씨네 21>에 글을 발표하며서 본격적인 문화비평을 시작한 이후, 다양한 저서를 통해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