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남에게 배울 수 없는 일들이 있다. 글을 쓰거나, 부모가 되고 아이를 키우는 건 직접 겪어봐야만 아는 일들이다. 이런 일 중에 누구나 겪었으니 알 법한데 시간이 흐르면 까맣게 잊어버리는 일이 있다. 아이 적 기억이다. 부모들은 어린 시절을, 사춘기를 통과해 어른이 되었지만 자녀를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다. 오죽하면 임정자의 단편 『꽁꽁별에서 온 어머니』 에서 아이와 부모가 말이 통하지 않는 건 어른들이 어릴 때 기억을 모두 꽁꽁별에 두고 왔기 때문이라고 했겠나.
추측컨대 사람은 누구나 제 나이에 맞는 고민만 하며 사는 것 같다. 사춘기는 사춘기의 고민이, 부모는 부모니까 겪는 고통이 있다. 나 역시 사춘기 시절 일기장에 적어두었던 깨알 같은 고민이 어느 순간 사라졌다. 내가 그런 고민을 했고 죽도록 어른들을 미워했다는 것조차도 잊고 살아왔다. 그 기억이 다시 깨어난 건, 아이를 키우며 그리고 어린이 책을 읽으면서부터였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사춘기에 접어든 내 아이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아이를 닦달하고 화를 내던 어른이었지만 어린이 책을 읽자 내 안에 웅크리고 있던 어린 소녀가 걸어 나와 내 아이의 손을 잡았다. 아이가 머리 모양이 마음에 안 들어 학교에 안 가겠다고 할 때 나는 심부름도 못 갈 만큼 외모를 신경 쓰던 사춘기를 떠올렸다. 아이가 아이돌 가수를 쫓아다닐 때는 팝 음악에 홀려있던 나의 십대가 생각났다. 이런 경이로운 경험은 순전히 어린이 책을 읽었기에 가능했다.
마치 새로운 일인 양 호들갑을 떨지만 모든 어린이 책 작가들은 이렇게 어린이 문학을 쓴다. 어른이지만 어린이의 마음으로 돌아갈 줄 안다. 그림책 작가 존 버닝햄은 늘 “좋은 그림책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어린 아이들과 의사소통하는 법”을 알아야 하며 “나의 정신 연령은 다섯 살에 멈춰 있다”고 말하곤 했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작가 로알드 달 역시 “좁고 어둡고 따뜻한 나의 글 쓰는 집필실로 내려가면 몇 분도 되지 않아 나는 여섯, 일곱, 아니 여덟 살의 어린아이가 되지”라고 말했다. 그러니 아이들 때문에 분통이 터지고 대체 그 시절에 나는 무얼 했는지 도통 생각나지 않는다면 어린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십대가 된 아이는 참 난감하다. 어릴 때는 출근도 못하게 엄마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아침 내내 눈물 바람을 하더니 이제는 엄마가 없는 걸 더 좋아한다. 아빠가 집에 일찍 오면 좋아서 폴짝폴짝 뛰었는데 어느새 아빠를 본 척도 안 한다. 껌 딱지가 붙었는지 컴퓨터 앞에만 착 달라붙어 있고, 식탁에 앉아서도 문자를 보내느라 밥이 코로 들어갈 지경이다. 하루는 가수가 된다고 했다가 또 다른 날은 댄서가 된다고 해서 부모를 기함시킨다.
어린이 책을 읽으면 이런 아이들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어린이 책을 읽으며 나는 잊고 있던 그 시절의 고민과 분노와 좌절과 희망을 되돌아봤고, 어린이 책 속에서 다양한 아이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학교 공부는 하기 싫지만 하고 싶은 건 많은 내 아이를, 여드름투성이 소녀였던 나를 되돌아봤다. 더 이상 옛날처럼 재잘거리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 십대의 아이들을 이해하고 대화하고 싶은 부모에겐 그래서 어린이 문학이 필요하다.
이 책은 어린이 문학을 통해 아이와 소통하는 길을 담았다. 예전만큼 소설을 읽지 않는다지만 나는 여전히 문학의 힘은 세다고 생각한다. 특히 자라는 아이들에게 문학 교육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세상 모든 일을 돈이 되는 일과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일로 나눌 수 있을지 의심스럽지만 설혹 그렇다 해도 여전히 돈이 되지 않는 문학은 소중하다. 아이들은 어린이 문학을 통해 정직과 용기와 열정과 우정과 사랑을 배우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문학이 아니라면 무엇으로부터 이런 소중한 가치를 배울 것인가. 전통 사회라면 마을 어른과 조부모를 통해 배우겠지만 이제는 그도 어렵다. 학교에서 경쟁은 심화되고 아이들은 점점 황폐해진다. 그럴수록 문학 교육이 절실하다. 억지로 가르치려고 하지 않아도, 이야기를 통해 느끼고 깨달은 가치는 아이들의 가슴 속에 소중하게 남기 때문이다.
아마 부모가 어린이 책을 읽고 있으면 아이들이 무척 궁금해 할 거다. 엄마가 밥하러 간 사이 책 제목을 몰래 살필지도 모른다. 그럴 때 책에서 읽은 재미난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면 끝이다. 절대 읽으라는 소리부터 하면 안 된다. 그저 아이가 궁금해서 책을 읽고 싶도록 자랑만 하면 된다. 그러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 책을 따라 읽는다. 책 읽는 아이로 키우고 싶다면 부모가 먼저 책 읽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말이 이래서 설득력이 있다. 그래도 아이가 책을 안 읽으면? 손해날 일이야 없다. 부모가 어린이 책을 읽고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고 아이를 이해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오히려 아이가 책을 읽건 말건 이기적으로 자신을 위해 책을 읽고 아이의 반응에 대해서는 느긋해져야 한다.
아이들은(물론 어른도) 하루아침에 달라지지 않는다. 부모가 아이의 잘못된 습관을 바로잡을 때도 그 일을 하고 있다는 것조차 잊을 만큼 시간이 흘러야 조금 달라진다. 책 읽기도 마찬가지다. 한두 달 혹은 1∼2년 했다고 기적이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몸에 밴 집중력과 이해력은 쌓인다. 공부 습관과 자발성이 필요한 십대가 되면 독서 습관이 붙은 아이들은 성적이 오르기 마련이다.
그러니 아이와 함께 느긋하게 책을 읽는 동안은 공부 잘하는 이웃집 아이, 책벌레 친구의 딸에 관한 소문일랑 귀담아듣지 말고 오로지 내 아이만 보자. 부모는 텔레비전 보며 아이에게 잔소리하지 말고, 아이의 마음도 모른 채 닦달하지 말고 아이와 눈을 맞추고 이야기해보자. 오늘 아이의 기분이 어떤지, 아이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지금 읽고 있는 책이 재미있는지를 관심 있게 봐야 한다. 아이와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해도 큰 어려움 없이 십대 시절을 넘어갈 수 있다.
독서 교육도 마찬가지다. 내 아이가 어떤 책을 좋아하는지, 어떤 책이 수준에 맞는지를 알아야 한다. 아이들은 저마다 개성과 취미와 기질이 다른지라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어렵다면 처음에는 재미있는 책으로 접근하다가 점차 관심사를 중심으로 폭을 넓히는 게 가장 좋은 길이다. 많은 책벌레들에게 “언제부터 책이 읽을 만했냐” 하고 물었을 때, 엄마의 강제 때문이라고 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결핍의 기억, 형제와 친구를 따라하다가, 할머니와 엄마가 책 읽는 모습이 좋아 보여서라고 답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부모는 아이에게 책 읽기가 즐겁고 행복한 경험이라는 것만 전해주면 된다. 이 책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세상의 모든 부모들처럼 나도 태어나 한 일 중에 가장 잘한 건 아이를 낳고 키운 일이다. 엉뚱하고 철없는 엄마를 만나 많은 시행착오를 함께 겪어왔지만 씩씩하게 자란 아이에게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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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읽는다는 것 한미화 저 | 어크로스
《아이를 읽는다는 것》은 아이들의 마음을 가장 잘 묘사한 어린이?청소년 문학 작품 40편을 골라 막 십대에 들어선 아이들을 이해하는 통로를 열어준다. 저자의 눈을 통해 그저 소설 속 캐릭터가 아닌 생생하게 살아 있는 내 아이의 모습으로 바뀐다. 이처럼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은 물론이고 엄마의 눈으로 예리하고도 따스하게 아이의 마음을, 부모의 마음을 읽어낸다는 점에서 더욱 공감하게 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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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화
독일문학을 공부했고 웅진출판과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일했다. 현재는 책과 출판에 관해 글을 쓰고 방송을 하는 출판칼럼니스트로 일하고 있다. [황정민의 FM대행진]에서 ‘한미화의 서점가는 길’을 진행하고 있으며, [한겨레신문]에 어린이책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 시대 스테디셀러의 계보』 『베스트셀러 이렇게 만들어졌다 1-2』 등의 출판시평과 『잡스 사용법』, 『책 읽기는 게임이야』, 『그림책, 한국의 작가들』(공저)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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