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녕, 왜 하필 거기여야 했을까?
인간 존재의 시원(始原)과 그 여정(旅程)에 끊임없이 천착해온 작가 윤대녕. 그가 2011년 10월부터 2013년 9월까지 2년여에 걸쳐 월간 『현대문학』에 연재한 글을 모은 책, 『사라진 공간들, 되살아나는 꿈들』이 출간됐다. 독자와의 만남에서 그는 차분하면서도 깊이 있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글ㆍ사진 송인희
2014.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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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공간들, 되살아나는 꿈들』은 쉰의 문턱을 막 넘어서며 절절한 마음으로 찾아 떠나는 과거로의 시간 여행이다. 작가로서는 일종의 커밍아웃이다. 자신을 존재하게 한 고향집과 어머니 이야기로 시작해 그가 지나온 특별한 공간과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특유의 서정적인 문체와 짙은 감수성이 더해져, 아득한 과거의 시간이 현재로 복원되었다.

 

2014년 7월 29일, 논현동 토끼의 지혜에서 윤대녕 작가와의 만남이 열렸다. 1990년 『어머니의 숲』으로 등단해 어느덧 스물네 해를 맞았다. 시인 겸 문학평론가 박상수가 사회를 이끌었고, 이상화 시인은 낭독의 시간을 가졌다. 에세이의 문장들을 발췌해 작가를 소개하며 만남을 시작했다.

 

자기표현에 인색한 충청도 내륙 출신의, 말수가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는 가르침을 받고 자란, 운동을 오래 해서 전체적으로 몸의 균형이 잘 잡혀있고 걸음걸이도 초식동물처럼 경쾌한, 연극 관람 때에도 마스크를 착용하는, 바다에서 낚시로 잡은 고기를 회를 뜨고 졸여서 식구들을 먹일 줄 아는, 무엇보다 삶의 희로애락을 독자에게 전하는 우체부 같은 작가.

 

윤대녕

 

작가의 말에 추억의 장소들을 다시 찾아가 봤다고 썼다. 글을 쓰는 중간에 찾아갔을 때 느껴졌던 감정은 무엇이었나?

 

쉰둘의 나이를 넘어가는 과정에서 인생을 돌아보게 됐다. 뜨거움과 차가움을 방황하며 살아온 느낌이 들었다. 소설을 20년 넘게 써왔는데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더라. 정체성을 찾기 위해 현재 내가 있는 시공간을 복원하자는 마음으로 썼다. 앞으로 계속 쓰고 살기 위한 디딤돌을 마련한다는 마음이었다.

 

벽돌 쌓듯이 무의식 속에 잊힌 것을 되찾아 차곡차곡 모자이크 방식으로 재구성했다. 아홉 살 때부터 2년 동안 살았던 온양 남성리의 양철 지붕 집은 나에게 특별한 느낌으로 남아있는 공간이다. 신작로 길옆에 있는 오두막 같은 분위기였고, 길 건너 전원의 풍경도 무척 아름다웠다. 그 집을 떠나온 지 30년이 지나 우연히 그곳을 지나게 됐는데, 집은 사라지고 휴게소가 세워져 있었다. 거기 들어가 천장을 한참 쳐다보며 환청처럼 양철 지붕 위로 떨어지던 빗소리를 떠올렸다. 그때의 삶과 지금의 모습의 간격이 문득 크게 다가왔다. 그 사이의 시공간을 복원하는 게 앞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하다고 느꼈다.

 

책 전반적으로 아득한 느낌이 강하다. 특히 어머니와 집에 대한 부분이 그렇다. 오래 살던 집을 팔고 나서 어머니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는 장면은 슬프게 느껴진다. 그 순간 어떤 감정이었나?

 

셋방살이를 전전하다 처음 갖게 된 집은 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집 자체가 어머니였다. 가족을 먹여 살리고, 출가시키며 희로애락을 겪은 곳이다. 집은 곧 어머니의 영토이기도 했다. 그랬던 집을 어느 목수에게 팔았다. 얼마 안 있어 양철 지붕에 비가 새던 그 집은 말끔하게 수리돼 있었다. 그 소식을 전하던 수화기 너머 어머니 목소리를 듣자 내 몸이 들끓는 듯했다. 내 몸이 곧 어머니라는 느낌이랄까, 서로가 서로에게 속해있다는 걸 느꼈다.

 

어머니 말고도 고향집과 할아버지, 큰아버지도 작가의 문학성에 큰 영향을 준 인물인 것 같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아홉 살까지 부모를 보지 못하고 조부 밑에서 자랐다. 내가 버려진 짐승 같다는 느낌이었다. 좋게 표현하자면 미학적 감수성이 생겼다. 외로움과 고통, 억압의 감정을 많이 가지게 됐다. 겨울밤에 방에 누워 있으면 눈 내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적막하고 고요한 집이었다. 고향집은 방황과 예외적 감수성을 겪어야 했던 공간이었다. 지금 나 자신을 이루는 요소의 상당 부분이 그 집에서 만들어졌다.

 

이웃이 없는 집. 1년 내내 손님이 찾아오지 않는 집. 어쩌다 식구나 친척들이 다니러 와도 곧 떠나버리고 마는 집. 까닭을 모르겠으나 내 부모조차 찾아오지 않는 집. 늙은 부부가 밤마다 사과나 깎아 먹으며 사는 을씨년스러운 집… 내가 비롯된 곳이 왜 하필이면 그곳이었을까? 나의 운명은 어쩐지 태어날 때부터 그 집에서 이미 결정지어져 세상으로 내보내졌다는 쓸쓸한 생각이 든다.  ( 『 사라진 공간들, 되살아나는 꿈들』 中 <고향집> )

 

백부는 집에 있는 걸 못 견뎌 해서 처자식을 두고도 떠돌아다녔다. 그를 못마땅해하던 할아버지가 던진 베개에 맞고 외양간에서 잠들던 분이었다. 머리를 장발한 그가 외양간에서 하모니카를 불고 있던 모습이 내 눈에는 경이로웠다. 그때 모습이 마음속에 어떤 이미지로 각인됐는지, 나도 나이 들어 떠돌며 살았다.

 

오래전 한 잡지 인터뷰에서 ‘미인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난 이성에 미숙하다. 그건 이미지에 불과하다.’라고 대답했다. 또 한 번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당신은 미인을 좋아하는가?

 

당시 잡지 인터뷰에서 상당히 발끈했다. 미인을 좋아하지 않는 남성은 하나도 없다. 사람은 태도와 표정이 중요하다. 마음과 영혼 등 모든 게 다 드러나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이 생각했는지, 사랑을 받고 자랐는지, 남을 배려하고 염려하며 사는지, 관용과 선의가 있는지가 다 묻어난다.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나면, 남에 대한 생각에도 관용과 선의가 생긴다. 남도 나만큼 중요하며, 상대는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그런 생각에 이르면 자연히 표정과 태도에 반영된다고 생각한다.

 

2003년부터 2년간 제주도에서 지냈던 시간이 특별한 이유는 무엇인가?

 

슬럼프가 찾아와 돌파구를 찾기 위해 이주했다. 삶에 주기적으로 찾아와서 재생의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당시엔 그렇게 생각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건강도 좋지 않았고 모든 게 와해되어 글 쓰겠다는 의지도 없었으며, 쓸 수도 없었다. 그때 제주도가 내게 큰 계기가 됐다. 주로 낚싯대를 가지고 나가 있었다. 하루 12시간 정도 바다 앞에 서 있었다. 밀물과 썰물로 하루 두 번씩 변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단순한 주기가 아니라, 순환을 통해 수많은 생명체가 회복되고 다시 생성된다는 걸 느꼈다.

 

어떤 소설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우리는 끊임 없이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그게 내가 낚시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150미터 낚싯대를 고기가 물었을 때의 진동은 내 몸에 고스란히 전달된다. 바다를 통해서 생명체의 진동을 받을 때 내가 가졌던 삶에 대한 질문에 응답이 오는 기분이다. 그 떨림과 절대적인 황홀경을 제주에서 자주 경험했다. 그것은 곧 순수한 생명체로 회복하는 기간이었기에, 제주에서의 시간이 무척 애틋하다. 제2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름다운 제주의 풍경과 사람들에게 고마운 마음도 크다. 나를 다시 살아가게 하는 계기를 제공해준 곳이기 때문이다.

 

윤대녕

 

자동차에 관한 부분은 꽤 이질적이었다. 왠지 면허도 없을 것 같은 이미지인데, 스포츠카를 십 년이나 몰고 질주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자동차는 늦바람이었다. 나는 모든 게 조금씩 느렸다. 지금 사는 작은 집도 어렵사리 구했고 면허도 느지막이 땄다. 워낙 떠돌며 살다 보니 남들처럼 미리 준비하지 못했다. 차는 삼십 대 중반 즈음에 글 쓰러 다닐 때 필요해서 샀다. 당시 우연히 갤러리 화랑에 갔다가 한 화가가 몰던 하얀 스포츠카에 충격을 받아 티뷰론을 뽑았다. 주변에서 상당히 밉상스럽게 보더라. 거기에 스포츠카 동호회까지 가입해서 스티커도 붙이고 속도에 빠져 질주하고 다녔다. 그러다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내려놓게 됐다. 최근엔 운전 자체를 즐기지도 않고, 걷는 게 좋다.

 

책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공간이나 최근에 관심이 있는 곳이 있는가?

 

발리에 있는 ‘서머 호텔’에서 머물며 글을 썼던 적이 있다. 그곳에선 뭘 하려고 해도 시간이 천천히 흘러갔다. 그 호텔엔 담장이 있는데 사시사철 풀이 덮고 있다. 침대에 누워 쳐다보면 그 너머로 해가 넘어가는 게 보인다. 아침이면 호텔 여직원이 맨발로 양동이를 들고 담장에 열린 꽃을 따는 모습이 보였다. 홀로 있던 적막함 속에서 외롭고 고독함을 많이 느꼈다. 후텁지근한 기후가 주는 묘한 분위기 속에 머물다 보면 시간이 이원 되는 느낌을 받는다. 글을 쓰거나 맥주를 먹다가 호텔로 돌아오면, 여기가 원래 내가 있고 싶어 했던 장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특별히 좋았거나 행복했던 게 아니라 나에게 존재감을 부여해주는 장소다.

 

지금 사는 정릉 이야기도 해 보고 싶다. 곧 재개발되겠지만, 70~80년대 분위기가 고스란히 남아있어 좋다. 주말이면 시장에 가서 호떡도 사 먹고 걸어 다니며 구경하는 걸 즐긴다. 어떤 대단한 사건이 아니라 삶의 순간순간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이번 작가와의 만남에는 다양한 연령대와 배경의 독자층이 모였다. 그들의 질문에 작가가 답했다.

 

20년째 작가의 팬이다. 언제 다시 장편을 만나볼 수 있을까? 앞으로의 계획은?

 

오랫동안 장편을 쓰지 못한 건 제주에서 올라온 뒤에 생활에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2008년부터 동덕여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적응하는 데 4년 정도 걸렸다. 교육에 집중하고 싶었다. 사실상 작품을 쓰기 힘들기도 했고, 쓰고 싶은 마음이 일지도 않았다. 미루고 미루다 올여름 문학동네 문학지에 장편을 연재하고 있다. 내년 봄에 마무리할 예정이다. 그러니까 10년 만의 장편이다. 지금껏 살아온 연대와 공동체, 앞으로의 삶 등 여러 가지 복합적인 부분을 담고 싶다. 어제 막 2회분을 마쳤다. 매 순간 고민하면서 쓰고 있으니 읽어주시면 감사하겠다.

 

『상춘곡』을 읽으며 한 편의 시를 읽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작품을 썼던 계기가 무엇인가?

 

1996년에 쓴 글이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기 전, 세상은 온통 잿빛에 춥기만 했다. 당시에 한 동년배 여성을 만났는데, 출소한 뒤에 외롭게 지내던 사람이었다. 나도 많이 지쳐 있어서 쉬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선운사로 내려가던 길이었다. 함께 술을 한잔 했는데, 그 뒤로 같은 세대 여성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졌다. 나와 같은 세대이면서, 상처받은 영혼을 가진 이들에게 편지하는 마음으로 단편을 써내려 갔다. 당시 내 마음속에 동시대의 상처받은 사람이 화인처럼 각인되어 있었다. 삶의 생명력을 다시 회복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쓰다 보니 분량이 꽤 길어졌다. 선운사를 떠나기 하루 전날, 동백기름을 팔고 있기에 하나 사서 상춘곡이 담긴 문학사상 계간지와 함께 그 여성에게 보냈다. 어쨌든 잘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을 함께 적었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나와 특별한 사이였단 소문도 났는데, 그런 건 아니다. 요즘도 가끔 만나곤 한다.

 

작가를 지망하는 고등학생이다. 작가가 되려면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할지 궁금하다.

 

가장 힘든 질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혼자인 시간이 많았다. 전학을 자주 다녀서 친구도 없었기에 도서관을 자주 갔다. 고등학교 때 수업시간에 소설을 읽다가 선생님한테 공개적으로 망신당했던 게 큰 계기였다. 반드시 소설가가 되어 보이겠다고 다짐했다.

 

매 순간 왜 작가가 되려 하는지를 스스로 물어야 한다. 나의 경우는 그거밖에 할 게 없었다. 아니, 그런 경우가 자주 발생했다. 작가가 정말 되고 싶어 간절하면, 자꾸만 그런 일이 생긴다. 작가는 특별한 천재가 하는 일이 아니다. 소설은 특히 그렇다. 변화하고자 하는 욕망, 열의나 열망 자체가 구심력으로 작용해서 자신을 자꾸 그쪽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사법고시처럼 등단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다. 그때부터 시작이다. 꽤 힘든 일이다. 끊임없이 자신을 점검해야 하고, 자아비판도 해야 하며, 자신을 통해 세상을 봐야 하기 때문이다. 작품 하나를 쓸 때마다 도전이다. 자기 표현에 대한 욕구로 시작하지만, 결국은 삶의 의미에 대해서 탐구하고 근본적인 존재론적 의문이 강한 사람들이 하는 직업인 것 같다.

 

에세이를 읽어 보니 평탄한 삶을 살지 않은 것 같다. 살면서 가장 극적인 순간은 언제였나?

 

내 삶이 특별히 불행하다거나 평탄하지 못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평범한 삶은 지극히 얻기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극적인 순간은 지금의 배우자를 만난 때를 꼽고 싶다. 그 사람을 만났기 때문에 건강을 유지하면서 매 순간을 지탱하며 글을 쓸 수 있다. 나를 세상에 속하게 해주는 매우 불가사의한 존재다. 집사람을 만나고 나서 나도 어서 집에 들어가고 싶다는 남들이 하는 평범한 생각을 하며 살게 됐다. 부다페스트의 공중전화에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던 순간이 가장 결정적인 인생의 순간이지 않았나 싶다.

 

윤대녕은 독자를 만날 때 자신이 비로소 작가임을 느낀다고 했다. 이번 에세이를 통해 독자들 삶에도 현재를 복원하는 모티브가 됐으면 한다는 바람을 담아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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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공간들, 되살아나는 꿈들 윤대녕 저 | 현대문학
2011년 10월부터 2013년 9월까지 2년여에 걸쳐 월간 『현대문학』에 절찬 연재되었던 글들을 모은 이 책은, 독자들의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연재 시작부터 단행본 출간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온 바 있다. 작가는 이 책에서 자신을 존재하게 한 고향집과 어머니에서 출발해 자신만이 겪은 특별한 시간과 공간을 묵직하게, 때론 경쾌하게 서정정인 문체와 문학적인 깊이로 새롭게 재탄생시킨다. 사라진 기억들 속에 이미지로만 남겨져 있는 장소, 그때의 놓치고 싶지 않은 특별한 순간들은 윤대녕의 아득한 시간으로부터 그렇게 살아나와 그의 과거를 복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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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녕 #사라진 공간들 #되살아나는 꿈들 #eBook
2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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샨티샨티

2014.08.15

소설가의 꿈을 품었고 그 길에 매진하여 지금도 소설을 쓰고 간간이 수필을 쓰는 작가로 살아가고 있는 윤대녕 작가님의 수필을 최근에 읽어서인지 친밀감이 더하네요. 자기 점검을 통해 자신을 관리하여 가는 일이 소중하여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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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당

2014.08.14

다양한 경험이 글에 자연스럽게 녹아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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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희

홋카이도의 매력에 흠뻑 빠져 삿포로에서 살고 있다.
새로운 언어와 문화, 일상을 여행한다.
먹고 마시는 것과 사소한 순간을 좋아하며, 종종 글자를 읽고 쓴다.
song_soon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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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녕

1962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대전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단국대 불문과에 문예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대학을 졸업하던 198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원」이 당선되었고, 1990년 [문학사상]에서 「어머니의 숲」으로 신인상을 받아 등단했다. 출판사와 기업체 홍보실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1994년 『은어낚시통신』을 발표하며 전업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이 책을 통해 존재의 시원에 대한 천착을 통해 우수와 허무가 짙게 깔린 독특한 문학적 성취를 이루며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 후 9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떠오르며 '존재의 시원에 대한 그리움'을 그만의 독특한 문체로 그려나가고 있다. 오늘의 젊은예술가상(1994), 이상문학상(1996), 현대문학상(1998), 이효석문학상(2003), 김유정문학상(2007), 김준성문학상(2012)을 수상했다. 2019년 현재 동덕여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여섯 살 이전의 기억은 전혀 뇌리에 남아 있지 않다는 그의 최초의 기억은 조모의 등에 업혀 천연두 예방 주사를 맞기 위해 초등학교에 가던 날이다. 주사 바늘이 몸에 박히는 순간 제대로 소리 한번 지르지 못하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일곱 살 때 조부가 교장으로 있던 학교에 들어갔다. 입학도 안 하고 1학년 2학기에 학교 소사에게 끌려가 교실이라는 낯선 공간에 내던져진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할아버지에게 한자를 배웠다. 한자 공부가 끝나면 조부는 밤길에 막걸리 심부름이나 빈 대두병을 들려 석유를 받아 오게 했다. 오는 길이 무서워 주전가 꼭지에 입을 대고 찔끔찔끔 막걸리를 빨아먹거나 당근밭에 웅크리고 앉아 석유 냄새를 맡곤 했던 것이 서글프면서도 좋았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독서 취미가 다소 병적으로 변해, 학교 도서관에서 빌린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어 대기 시작한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들어가 우연히 '동맥'이라는 문학 동인회에 가입한다. 그때부터 치기와 겉멋이 무엇인지 알게 돼 선배들을 따라 술집을 전전하기도 하고 백일장이나 현상 문예에 투고하기도 했고 또 가끔 상을 받기도 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거의 한 달에 한 편씩 소설을 써대며 찬바람이 불면 벌써부터 신춘 문예 병이 들어 방안에 처박히기도 했다. 대학에 가서는 자취방에 처박혀 롤랑 바르트나 바슐라르, 프레이저, 융 같은 이들의 저작을 교과서 대신 읽었고 어찌다 학교에 가도 뭘 얻어들을 게 없나 싶어 국문과나 기웃거렸다. 1학년 때부터 매년 신춘 문예에 응모했지만 계속 낙선이어서 3학년을 마치고 화천에 있는 7사단으로 입대한다. 군에 있을 때에는 밖에서 우편으로 부쳐 온 시집들을 성경처럼 읽으며 제대할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그때 군복을 입고 100권쯤 읽은 시집들이 훗날 글쓰기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제대 후 1주일 만에 공주의 조그만 암자에 들어가 유예의 시간을 보내면서 자신을 투명하게 보려고 몸부림쳤다. 이듬해 봄이 왔을 때도 산에서 내려가는 일을 자꾸 뒤로 미루고 있었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뻔한 현실론에 떠밀려 다시 복학했고 한 순간 번뜩,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문학이라는 것을 아프게 깨닫는다. 데뷔 이래 줄곧 시적 감수성이 뚝뚝 묻어나는 글쓰기로 주목을 받은 윤대녕은 ‘시적인 문체’를 지녔다는 찬사를 받는다. 그의 글에서는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는 그만의 시적 색채가 느껴지는 문체가 있어서이다. 동시에 그의 글에서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의 일상을 마치 스냅사진을 찍듯 자연스럽게 포착하여 그려내는 뛰어난 서사의 힘이 느껴진다. 윤대녕은 고전적 감각을 견지하면서 동시에 동시대적 삶과 문화에 대한 예리한 감각을 지니고 있다. 그의 작품들을 지향점을 잃어버린 시대에 삶과 사랑의 의미를 찾아 헤매는 젊은 세대의 일상에 시적 묘사와 신화적 상징을 투사함으로서 삶의 근원적 비의를 탐색한다. 내성적 문체, 진지한 시선, 시적 상상력과 회화적인 감수성, 치밀한 이미지 구성으로 우리 소설의 새로운 표정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작품으로『남쪽 계단을 보라』,『많은 별들이 한 곳으로 흘러갔다』,『대설주의보』를 비롯해 장편소설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추억의 아주 먼 곳』,『달의 지평선』,『코카콜라 애인』, 『사슴벌레 여자』, 『미란』 등을 발표했다. 산문집 『그녀에게 얘기해 주고 싶은 것들』, 『누가 걸어간다』, 『어머니의 수저』,『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사라진 공간들, 되살아나는 꿈들』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