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를 시작하기 앞서, 무대 앞에 설치된 스크린을 통해 사진가 이상엽의 사진들 중 몇 장이 슬라이드 화면으로 전시되었다. 사진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그의 사진들은 나도 모르는 순간 내 마음을 툭 건드리면서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이게 만드는 것만 같았다. 카메라 렌즈를 통해 담긴 우리 시대의 기억. 그곳에 그가 있었다. 마주하고 응시하는 그가 있었다.
이날 행사는 정혜윤 PD의 사회로, 사진가 이상엽과 이갑철 이렇게 셋이 자유롭게 대화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그들에게 있어서 사진이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사진을 통해 무엇을 담으려고 하는지 같은 얘기부터 시작해 강정마을 해군기지, 밀양 송전탑 문제,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문제까지 우리 사회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되짚어 보는 시간도 가졌다. 강연이 열린 공간은 서울광장 근처에 위치한 곳이었는데, 마침 이날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100일 째 되는 날이었다. 광장에선 세월호 참사 100일 추모제가 열리고 있었다.
정혜윤: 출판사 편집자님이 오늘이 세월호 참사 100일이라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행사 날짜를 옮겼을 거라는 말씀을 하셔서 갑자기 뭉클해졌어요. 쉽지 않은 말이었을 텐데 감사드리고요. 이번 책 『최후의 언어』는 이상엽 작가의 손에 들려있던 사진기에 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어요. 오늘 이 사진기 이야기는 저는 빼고 갈게요. 그리고 제 옆에 계신 이갑철 선생님은 우리나라의 3,40대 다큐멘터리 작가라면 누구나 그의 사진을 보고 압도되고, 한번쯤 따라 해보고 싶어 하는 그런 분이시죠. 일단 먼저 이갑철 선생님의 사진 몇 장 보고 갈게요. 이 사진들은 2002년 열렸던 ‘충돌과 반동’이라는 선생님의 전시회에 쓰였던 사진들인데요. 여기서 충돌과 반동은 어떤 뜻인가요?
이갑철: 충돌과 반동은 제 책의 서문을 써주신 선생님의 내용 중에 있는 말인데요. 여러분들 아마 사진가 카르티에 브레송에 대해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그 분의 사진은 어떤 틀 속에서 제 위치를 찾고 앉아 있지만 저의 사진은 그 위치에서 가만히 있지 않고 역동적으로 충돌하고 반동하고 있다는 뜻으로 쓰신 것 같습니다.
정혜윤: 사진을 찍는 사람이 무엇을 찍어야겠다 하는 것은 어떻게 발견하게 되나요?
이갑철: 저 같은 경우에는 무의식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설정을 해서 가기 보다는 제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쫓아서 가는 거죠. 마음의 흐름을 쫓아가고 있습니다.
정혜윤: 내가 찍고 싶은 게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건 내 고민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는 것과 같잖아요. 사실 선생님 사진을 보고 있으면 초현실적인 느낌을 받아요. 선생님이 ‘나는 똑바로 찍었는데 이상하게 사진이 초현실적으로 나온다’고 말을 하신 적이 있어요.
이갑철: 보시는 분들은 그렇게 많이 말씀하십니다. 아마 저한테 보이는 것들도 그런 식으로 보일 거예요. 제가 평상시에는 멍하게 있지만 사진을 찍을 때에는 저 자신을 잃어버리거든요. 꿈을 꾸는 느낌 속에서 찍게 되는 것 같아요.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어서 이번 책 『최후의 언어』에 담긴 이상엽 작가의 사진들이 몇 장 더 이어졌다. 이상엽 작가와 이갑철 작가는 평소 함께 여행을 자주 다닌다고 했다. 같은 장소에서 찍은 사진들이지만 두 사진가의 카메라에 담기는 사진들엔 확연한 차이가 있는 것 같았다.
이상엽: 이갑철 선생님은 직관으로 사진을 찍는 편이고 저는 대상을 좀 이성적으로 봅니다. 둘이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전혀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함께 여행을 많이 다니는 이유는 서로 보완이 돼요. 그리고 사물을 관찰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데 있어서 늘 서로의 이야기가 재미있어요. 저 사진(해인사 지관스님 다비식)을 찍을 때에도 마찬가지에요. 저 사진을 찍을 때부터 책을 쓰기 시작해서 2년에 걸쳐 집필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퇴고하는 시간을 갖고 비로소 이제야 책이 나온 겁니다.
정혜윤: 저런 다비식 같은 모습을 필름 카메라로 찍을 때랑 디지털 카메라로 찍을 때랑 다른가요?
이갑철: 깊이 음미를 하자면 좀 다를 것 같아요. 예를 들면 CD를 들을 때와 LP를 들을 때의 느낌? 물성이나 입자감에 있어 차이가 있기는 하겠지만 한눈에 알아보기는 힘들 거예요.
이상엽: 20년 전 성철스님 때만큼은 아니지만 저 때에도 사진가들이 굉장히 많이 모였어요. 근데 그때와 비교하면 99%가 디지털 카메라를 쓰는 세상으로 바뀐 거죠. 저 자리에서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있으면 하루 동안 찍을 수 있는 게 아마 수천 컷 정도 될 거예요. 근데 필름 카메라로는 사진가들이 수천 컷을 감당할 수 없어요. 기껏해야 필름 한 롤에 36방 정도 되는데 그걸 현상하고 인화하고, 시간과 비용이 만만치 않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필름 카메라를 가져가서 사진을 찍을 때는 찍기보다는 살피는 거죠.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는 지를 느끼는 거예요. 표면적인 것은 같겠지만(디지털 카메라로 찍을 때와 필름 카메라로 찍을 때) 찍는 이유가 달라지는 거죠. 그러니까 저 대상도 관찰하면서 봐야 될 이유가 생기는 거죠. 필름 카메라를 사용할 때 카메라를 들었다고 해서 바로 셔터를 누르는 행위는 별로 의미가 없어요. 하지만 디지털 카메라도 장점이 있어요. 많이 찍으면 좋은 사진이 걸릴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는 건 사실이에요. 필름이나 비용에 대한 강박도 없고요.
정혜윤: 이갑철 선생님도 저 날 같이 찍으셨어요?
이갑철: 네, 그런데 이상엽 작가와 보는 시각이 다를 겁니다. 저는 어떤 정신적 문제, 직감적으로 영적인 것이 느껴지는 그 순간을 찍거든요. 둘이 같이 잘 다니기는 하지만 아마 사진 찍을 땐 서로 보는 모습이 다를 거예요.
찰나의 순간 속 느껴지는 무언가
단발에 정갈하게 빗은 머리, 허름하지만 청결한 드레스, 밀짚모자를 든 가려진 손과 정면을 응시하는 도도한 눈빛. 뭐랄까? 지금까지 살아온 이 소녀의 내력이 사진 속에 담겨 있다고 할까? 사진은 어차피 사물의 표면만을 찍어 낼 뿐인데도 이 사진에는 그 이상의 깊이가 있다. ( 『최후의 언어: 나는 왜 찍는가』 247쪽)
정혜윤: 저는 현장 사진을 보면, 이 사진을 찍기 전 날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사진을 찍고 난 다음날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참 궁금하더라고요.
이상엽: 사진은 동영상과 달라서 전후를 보여주지 못해요. 오직 그 순간만 보여줄 뿐이죠. 바로 그것 때문에 사진은 어떤 사람에겐 전과 후에 대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어떤 측면에서는 사진이 왜곡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정혜윤: 찰나의 순간에 찍은 것인데 어떤 사진에선 그 사람의 인생이 보이기도 한다고 책에서 말씀하시기도 했는데요. 이 사진은 비정규직 간병인 분의 사진이에요. 저는 좋은 인물 사진은 이 사람이 누구인지 보이는 사진인 것 같아요.
이상엽: 여기엔 제가 찍고도 조금 미묘한 게 있어요. 이분이 비정규직 노동자처럼 안보이죠. 게다가 비정규 노동자 중에서도 가장 어렵다는 간병인이에요 그런데 이분을 보면 마치 강남의 어느 아주머니처럼 꾸미세요. 나이는 상당히 있으실 수도 있는데 굉장히 젊어 보이세요. 어쩌면 그것이 이분의 정체성인지도 몰라요. 웃는 듯 우는 듯 그런 묘한 표정이 사진에 담기는 거예요. 지금까지 40명 가까이 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사진을 찍고 그들의 구술을 채록하고 있어요. 존 버거가 이야기한 것처럼 셔터를 누르는 순간은 100분의 1초 밖에 안되는데, 마치 그 사람이 살아온 생애를 표현하는 듯한 순간이 올 때가 가끔 있나 봐요. 저도 그런 사진이 담겼으면 좋겠다는 희망은 있지만 일단 그것은 나중에 사진을 보는 사람들의 평가일 뿐이고, 저는 그저 꾸준히 기록을 하는 거죠.
힐링, 희망과 같은 주제들이 범람하는 요즘, ‘정말 우리는 행복한가’ 라는 것에 대해 무뎌지는 것 같다는 그는 수잔 손택의 말을 빌어, 고통을 정면으로 직면하지 않는 한 우리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 수 없다고 말하며 아직까지 자신에겐 행복과 불행 중에서 불행에 부딪힐 수 있는 용기와 힘이 남은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이 사진이 정말 제대로 된 기록인가. 어떻게 하면 우리 사회에 있어서 유의미한 사진들을 기록하고 보존할 것인가. 이상엽 사진가는 끊임없이 고민하며 단순한 표면만을 찍는 것이 아니라 표면 속에 감춰진 내면을 담고 싶어했다.
“사진가의 태도가 몇 가지로 구분되는데요. 타인에게 아주 가까이 다가가서 동화되면서 사진을 찍는 경우가 있고요. 어떤 사진가는 대상에 거리를 두려는 사람들이 있어요. 근데 두 가지 경우 다 이유는 있어요. 한쪽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사진으로 찍어내겠다는 강렬한 소망이 있는 것이고, 한쪽은 그렇게 다가가면 객관적 실체를 볼 수 없다는 것이죠. 너무 가깝게 다가가면 그 사람의 전체는 보일 수 있는데 그 사람의 환경과 배경에 대해서는 사진가로서 기록해야 할 무언가를 놓치는 경우가 있어요. 다큐멘터리 사진 하는 사람들의 경우, 그 두 가지가 적절하게 나타날 때가 가장 좋겠죠.
그런데 인간은 사실 주관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칫하면 진실에 다가가기는커녕 내 멋대로 해석하게 되는 오류에 빠질 수도 있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 많이 하는 수밖에 없어요. 시간과 노력이 닿는 데까지 많이 해서 보편성을 얻어보자는 것이죠. 직관적으로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사람들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저처럼 평범한 사람은 시간과 노력을 어떻게 해서든 길게 가져가는 수밖에 없어요. 다큐멘터리 사진가들 중에 나름대로 성과를 얻었다고 하는 사람들은 두 종류예요. 아주 놀라운 감각과 직관으로 대상에 다가가는 사람, 능력과 소질은 그저 그런데 아주 성실하게 오랫동안 기록하는 사람. 이 두 사람은 결국 거의 비슷한 성과를 내는 것 같아요. 저도 그래서 늘 고민하고 있습니다.”
- 최후의 언어 : 나는 왜 찍는가 이상엽 저 | 북멘토
포토저널리스트이자 우리 시대의 대표적 다큐멘터리 사진가인 이상엽의 신작 사진에세이가 출간되었다. 100여 컷의 필름사진과 함께 담담한 어조로 쓰여진 에세이에는 가난한 사진가가 도시를 벗어나 변방의 삶을 살게 된 연유와 전국을 유랑하고 국경을 넘나들며 느낀 삶의 단상이 담겨 있다. ‘나는 왜 찍는가’라는 부제를 달고 출간한 『최후의 언어』는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날카롭게 현실 너머를 직시하는 ‘노마드 에세이스트’로서의 사진가 이상엽을 여실히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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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책과 함께 있을 때 가장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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