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셋째 주부터 격주 월요일, 하지현 건국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가
추천하는 심리책 이야기, ‘하지현의 마음을 읽는 서가’가 연재됩니다.
본래 사람 사는 것은 주고받음의 연속이다. 내가 뭘 해주고 나면 그것을 언젠가는 돌려받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큰 신세건 작은 도움이건 크기와 상관없이 받고 나면 그에 상응하는 것을 되돌려줘서 마음의 빚을 갚지 않으면 끝까지 편치 않은 것이 사람의 보편적 심리다. 그래서 일부러 부담스러운 선물을 이유 없이 하고, 호의와 향응을 베풀어서 은연중에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은밀하고 음흉한 사업가들의 대표적 영업방식이다. 또한 이는 사실 무리를 지어 살아가는 대부분의 동물들의 생존방식이기도 하다.
어떻게 하면 이런 사람을 대처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법칙이 작동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기브-앤-테이크’가 없이 ‘테이크-앤-테이크’만 있다. 한 두 번은 그런가 싶다. 이러다가 한 번에 갚겠지, 은연중 기대하다 나중에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라는 감이 오면 거래를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묘한 게 이 사람이 참 매력적이고 능력이 있어 보인다는 것이다. 더욱이 개인적 능력은 평균 이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고 무슨 말을 하면 호소력이 있고 그럴듯해 보인다. 도움을 청할 때에는 당당하기 까지 하다. 헷갈린다.
지금까지의 우리의 삶의 경험으로 볼 때 사기를 칠 것 같거나 캥기는 것이 있다면 눈동자가 흔들리거나 목소리가 떨리는 것 같은 불안한 기색이 살짝 비친다. 그런 징후들을 눈치 채고 나면 쉽게 거절을 하거나, 완곡하게 요구를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사람, 하나도 흔들리지 않는다! 도리어, 내가 지금 여기서 이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나쁜 사람이 될 것 같은 죄책감이 생긴다. 얘기를 하면서 내가 상대를 코너로 밀어붙이는 양상이 되었는데도, 또 객관적으로 관찰을 해보면 저 사람이 분명히 궁지에 몰려있는 게 분명한데도 불안해 보이는 기색이 없다. 그러니, 뭔가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럴 것이라는 심증을 갖고 그의 편에 서게 된다.
그러나, 그는 받는 것만 있을 뿐 고마움을 표시하거나, 신세진 것을 미안해하지 않는다. ‘너희들이 도와주고 싶어서 도와준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고, 정당한 거래를 하고 있다고 여긴다. 또 한 번 도와주기 시작했으면 끝까지 도와주는 것이 옳은 것 아니냐며 매번 내놓을 걸 내놓으라고 한다. 속으로는 화가 나고 질질 끌려가기만 하지만 헤어 나올 수 없는, 그런 노예가 되어버린 것 같은 상황은 당연한 현실이 되어버린다. 이런 사람 한 번은 만나봤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런 사람을 대처할 수 있을까?
나 역시 살아가면서 이와 유사한 사람을 여럿 만났던 것 같다. 주마등같이 머릿속에 사람들이 떠오른다. 그러면서 동시에 한 권의 책을 서가에서 꺼냈다. M.E. 토머스의 『나, 소시오패스(Confession of a Sociopath)』다. 원어 제목이 『소시오패스의 고백』이다. 지금까지 소시오패스나 사이코패스를 다룬 책들이 주로 연구자들이 그들에 대해 관찰하고 분석한 책이었다면 자신을 소시오패스라고 규정한 저자가 자신의 삶을 찬찬히 리뷰하면서 쓴 일인칭 관점의 책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저자의 이름은 가명이지만 사실 끝까지 읽고나면 아마도 가까운 사람들은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낼 것 같다는 점에서 그녀가 가명을 쓴 이유는 아마도 나름의 흥미를 자아내기 위한 방법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저자는 로스쿨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로펌에 취직을 해서 유능한 변호사로 근무하다, 자진해서 실업상태로 2년을 지내다, 원할 때 다시 법대교수가 될 정도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성공이 사실은 소시오패스적 기질 덕분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인간관계를 조종하는 것에 천부적 재능
사이코패스가 아닌 소시오패스라고 규정한 것은 사이코패스가 주로 범죄자적 행동유형을 묘사하는데 치중하는데 반해서 소시오패스는 그보다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은 가능하나 행동하는 본질적인 유형은 지극히 자기애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으로 약간은 다른 개념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소시오패스는 정신분석적으로는 반사회적 인격장애보다는 ‘병적인 자기애적 인격장애(Pathological Narcissistic Personality Disorder)의 특성을 더 많이 갖고 있다.
이들은 인간관계를 조종하는 것에 천부적 재능이 있고, 전적으로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한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다. 문제는 평소 우리가 내 것을 챙겨야겠다고 벼를 때에는 얼굴표정부터 달라지는데 비해 이들은 평온하고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언제나 일관되게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특별히 다르게 생각하거나 전투의지를 상승시키거나, 갈등이나 고민을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내가 이번에 이걸 가져가면 상대방은 좀 힘들겠지, 많이 미안하지만 다음에 잘 해줘야지라는 공감이나 연민은 1%도 없다. 그러니 오직 이성적인 판단을 할 뿐이다. 이것이 나에게 이로운가 해로운가의 관점에서만 판단하며 타인의 요구를 묵살하고 자신을 돌보는 것만이 이익을 확대한다. 남들이 망설이는 동안 매우 빨리 결정을 내린다. 그러니 성공을 할 확률도 높아진다. 일종의 ’효율적 위반‘을 하는 셈이다. 그러나 이는 일반적 공동체의 관습이나 행위규범을 고려하지 않은 행동이기에 주변사람들은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 있냐”고 수근거린다. 보통사람이라면 양심의 가책이나 죄의식을 느끼고, 집단으로부터 퇴출당하는 형벌을 받을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에 다음번에는 조심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이 능력이 충분하고, 집단에 소속해있는 것은 그 집단에 자기가 취할 게 있을 때, 뿐이기 때문에 별다른 소속감도 느끼지 않는다. 그러니, 그런 무언의 압력은 어떤 영향력도 갖지 못한다.
만일 내가 부당하다고 화를 내고 몰아붙여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 뱀과 같은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뭔가 오고가는 것이 없이 동요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으니 도리어 무서워지게 되고, 더 밀어붙이지 못하고 피한다. 그게 보통 사람의 생존방식이니 말이다. 덕분에 소시오패스는 주는 것이 받기만 하는 삶을 살면서도 세상의 응징을 당하거나 인과응보의 대상이 되지 않은채 승승장구를 할 확률이 높다.
소시오패스가 다가올 때, 나를 지키는 방법
속 터지고 화가 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책에서 말하기를 소시오패스들은 ‘우리는 이렇게 태어난 다른 존재다’라고 당당히 말한다. 그러면서 이런 말도 한다. 만일 “당신에게 얻을 것이 없으면 거래하지 않는다. 만일 소시오패스가 다가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제안할게 없는 사람이다. 즉 가진 게 없고 영양가가 없는 사람이다.”라고. 소시오패스가 다가와 어떤 거래를 하자고 한다면 그건 나름대로 이 세상에서 쓸모가 있는 존재란 뜻으로 알고 감사하라는 역설도 성립하는 것일까? 그들은 우리 안에 있는 괴물 같은 마인드가 극단적 스펙트럼의 끝에 서있는 이들인지 모른다. 이런 사람으로부터 우리를 지키는 방법은 무엇일까?
가장 분명한 방법은 이들과 마주치지 않는 것이다. 그게 사실상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그런데, 만일 이들이 뭔가 얻을 것이 있다고 여기고 접근을 하기 시작한다면 이를 피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만일 이와 유사한 풍취를 풍기는 이가 다가온다면 바로 위에서 썼듯이 ‘알고 보면 제가 영양가가 없어요’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알리는 것이 안전해지는 방법이다.
그들은 매우 효율적이고 이성적인 존재다. 그들에게 얻을게 없는 존재에게 쓸 시간과 에너지는 낭비일 뿐이다. 무척 자존심상하고 기분 나쁜 일이 아닐 수 없겠지만 만일 소시오패스적 인간형이 내게 매력적인 태도로 다가와 유혹적인 거래를 제안한다면 이를 싸워 물리치거나, 이들을 상대로 이익을 보려는 섣부른 욕망을 꾹꾹 누른다. 그리고, “어떻하죠? 저는 가진게 하나도 없고, 별로 해드릴 것도 없는 존재에요”라고 밝히는 것이다.
그들이 투자한 에너지가 적을수록 그들은 쉽게 물러난다. 별로 가진 게 없어서 얻을 것도 없는 존재에게 붙어 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성적 사고를 역이용하는 것이 제일 효율적인 회피방식이 된다는 것을 알아두고 인생을 살아가야한다. 내가 조금씩 가진 게 많아지고 성취를 하고, 사회적으로 지위가 올라갈수록 어느 순간부터는 소시오패스의 레이다망에 들어가 좋은 먹잇감이 될 확률도 올라간다는 것, 잊어서는 안 되겠다. 불조심만 중요한 게 아니다, 소시오패소도 잘 조심해야 한다.
- 나, 소시오패스 M.E.토머스 저/김학영 역 | 푸른숲
전 세계 백만 명 이상이 방문한 블로그 소시오패스월드 닷컴(www.sociopathworld.com)의 운영자이자 현직 법학 교수인 M. E. 토머스. 제 발로 의사를 찾아가 소시오패스 검사와 진단을 요구했던 그녀는 자신의 삶을 뼈대로 검증된 이론과 블로그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나눈 간접 경험을 더해 어렴풋한 소시오패스의 이미지를 선명하고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어린 시절부터 학창시절, 검사와 변호사로 활동한 때 그리고 존경받는 법학 교수가 된 지금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삶을 소상하게 독자들 앞에 펼쳐놓으며 소시오패스라는 다르면서도 특별한 인간형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를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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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현(정신과 전문의)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읽는 것을 좋아했다. 덕분에 지금은 독서가인지 애장가인지 정체성이 모호해져버린 정신과 의사. 건국대 의대에서 치료하고, 가르치고, 글을 쓰며 지내고 있다. 쓴 책으로는 '심야치유식당', '도시심리학', '소통과 공감'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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