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4일 V-Hall은 인디 음악계의 녹(祿)을 먹고 있는 이들 모두가 모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계보도 없고, 정통성도 따로 없었던 한국 록계에서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한 헤비 메틀 밴드 노이즈가든(nOiZeGaRdEn)의 <1992-1999 Deluxe Remastered Edition > 앨범 발매 기념 공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전성시, 발 디딜 틈도 없었던 공연장은 그들을 변함없이 지지해온 팬들의 열기로 가득 찼다. 이 재발매 앨범은 1집 < Noizegarden >(1996)과 2집 < …But Not Least >(1999), 데모 및 부틀렉 음원의 3CD로 탄탄한 구성을 자랑한다. 상대적으로 비싼 가격이지만, 인디 차트를 1위를 차지하는 저력을 보이고 있다.
공연 직전 이즘에서는 팀의 리더인 윤병주와 서면 인터뷰를 진행했다. 공연준비로 바쁜 와중에도 모든 질문에 성심성의껏 답변을 주었고, 이모티콘 하나도 빼지 말아 달라는 세심한 부탁도 있었다. 윤병주는 로다운 30의 인터뷰 당시와 마찬가지로 모든 사항을 하나하나 챙기는 꼼꼼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오늘로써 또 다시 확인했다. 활발하게 활동하는 그의 모습을 통해서 힘을 얻는 음악가들이 분명 한둘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윤병주는 여러모로 많은 이들에게 감사한 뮤지션이다.
이즘과 인터뷰 이후에도 꾸준히 활동하는 모습을 지켜봐 왔습니다. 노이즈가든 인터뷰에서 만나서 더욱 반가운데요. 윤병주씨가 다시금 '노이즈가든'이라는 카드를 꺼내놓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카드를 꺼냈다'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시기가 맞았다고 봅니다. 어쩌다 보니 20년이 지났고 마침 강명수 대표님의 리마스터 음반 준비도 잘 진행되고 있었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의 밴드'인 로다운 30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현재 하는 일이 잘 안 풀리는 상황에서 '추억팔이'를 하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시기도 딱 좋다고 생각되는 것이, 로다운 30의 < 1 > 앨범 활동을 약 2년간 꾸준히 하고 이제 새 앨범 작업에 착수하려는 시점이어서 공백 기간을 이용하는 느낌이랄까요.
사실, 모든 것이 전설처럼 여겨지고 있죠. 그 모든 이야기의 중심이자, 팀의 중추인 윤병주씨는 어떤 면에서 노이즈가든이라는 밴드가 팬들의 애를 타게 했다고 생각하시나요?
글쎄요. 음반이나 음원을 구할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옛날을 기억하는 팬들 혹은 여러 글을 통해 소문이 부풀려진 탓도 있겠죠. 이번 음반의 라이너노트에도 적어놓았지만 진정 노이즈가든을 그리워하거나 이 밴드에 대해 궁금해 하는 팬들이 몇이나 될까 궁금했어요. 단지 '내가 냈던 앨범이 샵에 없다'는 이유만으로 판권에 대한 불만을 얘기하는 뮤지션들도 봐왔기 때문에, “나 말고 재발매를 진짜 원하는 사람들이 있긴 한 걸까?”라는 생각도 했죠. 어쨌든 노이즈가든의 '넘버원 팬'임을 자처하는 제작자 명수형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대충 다시 찍어내는 식의 재발매는 저도 원치 않았기 때문에. ^^
미국의 저명한 A&M 스튜디오를 통해 작업을 해오셨는데요. 특별한 계기나 이유가 있었나요? 혹시 이것도 사운드가든(Soundgarden)과 연관이 있나요?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아무래도 사운드가든(Soundgarden)을 패러디한 이름의 밴드이다 보니 해외 마스터링을 고려할 때 그분들의 앨범 크레딧을 최우선적으로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마스터링이라도 같은 곳에서 하면 왠지 기분이 좋을 것 같았죠. 에피소드라면... 당시 음반기획사라든가 레이블을 운영하시는 분들의 마인드는 사업가에 가까웠어요. 요즘 많은 인디레이블 오너분들 같은 '덕심'이란 게 없었죠. 따라서 음반에 관한 자료보존 등이 허술했고, 제 생각엔 노이즈가든의 자료들도 앨범 발매 이후엔 다 사라지거나 묻혀버릴 것 같았어요.
1, 2집의 해외 마스터링 진행을 제가 직접 이메일로 했었는데 '마스터를 두 개 보내달라'고 해서 하나는 제작자 측에 전달하고 하나는 제가 몰래 보관하고 있었어요. 그러지 않았다면 이번 리마스터 앨범은 나올 수가 없었겠죠. 최소한 이 정도 퀄리티로는 나오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다 예전 일이고, 이번 남상욱씨의 리마스터가 정말 대단했습니다.
활동 당시에 대한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1999년 서울 팝스 오케스트라와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이야기를 묻고 싶은데요. 어떤 계기로 하게 되었나요?
별다른 계기라기보다는 그냥 매니지먼트의 주선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엔 꽤 하기 싫은 일이었는데 그래도 끝나고 나니 좋은 추억거리로 남더라고요. 저희 곡과 유명한 해외 커버곡, 그리고 서울 팝스 오케스트라가 항상 연주하던 '베토벤의 5번 교향곡을 팝적으로 편곡한' 곡 등을 연주했던 기억입니다. 그쪽에 편곡을 담당하셨던 분이 록 음악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관계로 저희 곡과 해외 커버곡의 관현악 편곡을 동료뮤지션 '페인'(칼파, 언니네이발관, A Doom 등으로 활동했던)이 맡아서 해주었습니다. 이 역시 그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타의 기타리스트들이 그렇듯, 윤병주씨 역시 기타와 장비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당시에는 지금보다 다양한 장비를 자유롭게 구하기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장비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셨나요?
사실 장비, 사운드, 톤에 관한 이야기는 개인적으로 이제 좀 지겹습니다. 저의 장비에 관한 관심이나 사운드, 그리고 톤 같은 것들... '윤병주 정도가 기본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자신이 관심을 갖고 직접 해보는 수밖에 없는 건데 보통 그 단계를 건너뛰고 싶어 해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좋아하는 톤을 가진 기타리스트들의 인터뷰를 (웬만하면 원문으로) 읽고 최대한 모든 걸 따라해 보기를 권장합니다. '어떤 경로로 무슨 악기를 샀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무슨 무용담처럼 인터뷰에서 해야 한다면 저 자신이 조금 비참해질 것 같아서 이만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양해를... ^^;
해체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클럽에서 커버를 위주로 하는 밴드를 만들고자 2002년에는 로다운 30을 결성하고 지금까지 활동이 이어졌습니다. 음악적인 성과를 얻고, 매니아층의 큰 사랑을 받고 있었던 노이즈가든 해체의 '결정적 이유'를 지금 다시 물어본다면 실례가 될까요? 그것이 음악적인 이유인지, 아니면 음악 외적인 문제인지 궁금합니다.
노이즈가든의 당시 위상이나 지명도가 과대평가 되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물론 음악적으로는 과소평가 되고 있다는 건방진 생각도 했지만요. ^^ 제가 하고 싶은 음악을 계속 한다면 몇 년이 지나 다시 클럽에서 열 명 스무 명 놓고 하는 밴드로 돌아가리라는 예상을 했고 그걸 걱정하는 저 자신에게도 짜증이 났습니다. 또 같이 하는 멤버들이 그런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도 있었고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생각을 어른스럽게 멤버들과 터놓고 얘기하지 못한 점이 미안하게 생각되기도 해요. 하지만 당시엔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스타일의 음악을 추구하는데 이상하게 큰 밴드로 부풀려진' 노이즈가든을 거품 빠지기 전에 빨리 끝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윤병주씨의 기타에 새겨진 이름에 대한 의문이 항상 있었습니다. 고(故) 이상문씨는 어떤 음악인이었나요? (이 질문이 실례가 된다면 답변 안 해주셔도 좋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저의 가장 친한 친구로 정말 유쾌하고 쾌활한 성격에 주변 분위기를 항상 좋게 만들어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친구 덕에 음악의 매력에 빠져든 친구들도 많았고 그 중 몇은 아직도 음악 활동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정통 헤비메탈을 가장 좋아했지만 노이즈가든이나 언니네이발관에서도 무리 없이 활동했을 정도로 음악적인 스펙트럼도 넓었으며 레코딩이나 사운드에 대한 관심은 특별했습니다. 노이즈가든 앨범 사운드의 반 정도는 그 친구의 업적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네요. 2집 때도 멤버는 아니었지만 많은 도움을 주었거든요. 로다운 30 결성초기에도 그 친구 덕에 정말 즐겁게 음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 친구 이야기를 종종 하고, 죽은 사람임에도 슬프기보다는 웃긴 에피소드를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좋은 친구였어요.
라이너노트 앨범 크레딧에는 친숙한 이름들이 많이 보입니다. 마치 유명 뮤지션의 평전이나 자서전에서처럼 중간 마다 참여한 전설의 이름과 같아 반가운데요.
당시 저와 함께 작업했던 파트너들이 지금까지도 그 이름을 알리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기분 좋습니다.
얼마 전 총동문회도 가지셨다고 들었고요. 박건씨의 인터뷰에서처럼, “어쩌다 한 번씩 하는 밴드”가 되고 마는 것인가요? 노이즈가든의 차후 행보는 어떻게 될까요?
'되고 만다'는 표현은 마치 풀타임 밴드로의 재결성을 바란다는 말로 들리는데요. 전 기본적으로 그러한 감성적인 바람 등을 믿지 않습니다. 또한, '풀타임 추억팔이'로 저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구요. ^^ 저는 저 자신이 즐겁기 위해 음악을 하고 있고 현재 가장 즐거운 일은 로다운 30입니다. 건이도 밴쿠버에서 '앰버힐스(Amber Hills)'라는 밴드를 즐겁게 하고 있습니다. 서로의 밴드가 원하는 음악적 성과 혹은 뜻한 목표를 이루었을 때 가장 행복할 것이고, 그런 상황이라면 '노이즈가든 공연이나 또 한 번 해볼까?'가 나올 수 있겠죠.
일단 마음을 가라앉히고 가만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현재 활동이나 신곡 작업은 딱히 없는데 갑자기 옛 명성이라도 이용해 볼까 해서 전혀 다른 멤버로 이루어진 밴드를 급조하여 나온 경우를 본 적은 없는지, 항상 이름 뒤 괄호 속에 유명했던 전 밴드의 이름을 달고 다니는 뮤지션은 없는지, 그들을 보며 팬으로서 흡족한 기분이 들었는지... 안타깝게도 전 그런 게 좋아 보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로다운 30(Lowdown 30) 인터뷰에서도 비슷한 질문을 드렸었지만, 노이즈가든 활동 당시와 요즘 음악계는 너무도 많은 것들이 달라졌습니다. 이를 바라보는 여러 가지 상념들이 있으실 텐요. (이제는 로다운 30의 윤병주가 아닌 노이즈가든의 윤병주로서 바라보는 현 음악 시장은 어떻다고 생각하시나요?)
뮤지션이 음악 시장 상황에 대해서까지 생각해야 하는 이 상황... 이것이 바로 현 음악 시장의 슬픈 상황입니다. ㅠ
인터뷰 : 신현태
정리 : 신현태
사진 : 조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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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jimihendrix
2020.0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