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위라는 이름의 트로피
“내 관점으로는 다섯 개의 트로피가 있다. 첫째는 프리미어 리그 우승, 둘째는 챔피언스 리그 우승, 셋째는 챔피언스 리그 진출, 넷째는 FA컵 우승, 다섯째는 리그컵 우승이다. 최고의 선수들을 불러오려고 할 때, 그들은 당신에게 '리그컵에서 우승했는가?'라고 묻지 않는다. 대신, '챔피언스 리그에서 뛰고 있는가?'라고 묻는다.”
글ㆍ사진 hungarida
2014.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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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주변의 많은 일들을 성공과 실패라는 두 가지 잣대로 나눠서 평가하곤 한다. 시험을 보고 합격하면 성공, 불합격하면 실패.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하고 사귀면 성공, 거절 당하면 실패. 축구에서 상대팀에게 이기면 성공, 지면 실패. 실은, 우리네 삶이란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데 말이다. 당장은 실패처럼 보이는 일이 밑거름이 되어 미래의 더 큰 성공의 발판이 되기도 하고, 당장의 성공에 방심하다가 본전도 찾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단 성공을 원한다. 바로 오늘, 우리는 잘되길 바란다. 아직 찾아오지 않은 내일을 위한 인내심을 요구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 중에서 스포츠팀의 감독이라는 자리는 가장 냉정하게 평가받는 직업 중 하나일 것이다. 매주 승리와 패배라는 결과로 세상에 의해 평가되기 때문이다. 어떤 감독이 완벽한 1년의 장기 계획을 세우더라도 지금 패배를 면치 못하고 있다면, 팬들은 결과에 분노하고, 능력없는 감독이라고 이야기하며, 구단주는 감독 교체를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프리미어 리그에서 시즌 중에 서너명의 감독들이 중간에 자리를 잃는 것은 이제는 놀라운 일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스날에서 18년간 감독직을 이어오고 있는 아르센 벵거는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축구 감독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가까이에서 아스날을 지켜보고 있는 팬들의 시선은 조금 다른 것 같다.

 
아스날

[출처 : BT Sport]

 

아르센 벵거는 18년의 재직기간동안 프리미어 리그 우승 3회(1997-98, 2001-02, 2003-04), FA컵 우승 4회(1997-98, 2001-02, 2002-03, 2004-05)를 차지했으니 많다고 할 수는 없지만, 팀을 여러차례 우승으로 이끈 훌륭한 감독이라고 할 수 있다. 얼마전 벵거는 자신의 1,000번째 경기를 맞이하여 이와 관련된 여러가지 통계들이 나왔는데 그 중에 눈길을 끌던 것이 있었다. 1996년 아스날 부임 이후 첫 500경기를 치르는 동안 7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렸고, 그 다음 500경기에서는 아무 트로피도 들지 못했다는 것이었다.(물론, 올해에 FA컵 우승의 가능성이 있다.) 빅클럽이라고 불리는 명문 축구팀에서 8년 넘게 작은 트로피조차 하나 들지 못하고 그가 감독직을 유지하고 있는 일은 전세계에 아르센 벵거가 유일무이하다. 무리뉴가 벵거를 두고 비아냥거린 ‘실패의 전문가’ 코멘트가 참 따갑고 한편으로는 공감되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아르센 벵거 “올해는 처음으로 핵심 선수를 잃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핵심적인 선수를 영입했다. 중요한 점은 기대치가 높다는 것이다. 지난 몇 년간, 우리는 선수들을 잃어왔고 기대치가 낮을 수 밖에 없었다. 이 점은 내게 매우 힘들었다. 2005년까지 우리는 우승을 놓고 다투는 팀이었다. 새로운 경기장으로 옮긴 후, 갑자기 우승에서 멀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몇몇 시즌에는 우리가 우승에 가까웠지만 이루지 못했다. 어쩌면 약간의 경험과 4월에 차이를 만들어낼 퀄리티가 부족했던 것 같다. 이번에 돌아오는 4월에는 우승을 놓고 예전보다 좀더 경쟁적인 위치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매시즌 시작이 될 때쯤 아르센 벵거가 늘상 하는 말들이 있다. “올해는 우승을 할 수 있다. 뭔가를 이루겠다.” 라는 맥락으로 올해만큼은 작년 혹은 제작년과 다르다고 이야기한다. 기세좋게 시즌을 시작하고 나아가다가 12월쯤 하나둘씩 부상 선수들이 늘어난다. 그리고 겨울 이적시장이 끝날 때쯤에 ‘새로운 영입과도 같은’ 부상자들이 복귀하면서 새로운 선수는 영입하지 않은 채 시즌 후반기를 맞이한다. 3, 4월이 되면 선수들의 누적된 피로와 부상으로 무승부와 패배가 계속 늘어가고, 결국 5월이 되면 4위 언저리에서 시즌을 마친다. 매년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아스날의 1년은 놀라울 정도로 반복되는 레파토리였다. 그래서 올해 한참동안 아스날이 1위를 달릴 때에도 사람들은 후반기에 추락할 거라고 예상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실수 혹은 문제점이 수년간 개선되지 않고 재발되고 있으니, 아스날팬들은 답답해하며 벵거의 능력 혹은 고집을 탓할 수 밖에 없다.

 

아르센 벵거 “내 관점으로는 다섯 개의 트로피가 있다. 첫째는 프리미어 리그 우승, 둘째는 챔피언스 리그 우승, 셋째는 챔피언스 리그 진출, 넷째는 FA컵 우승, 다섯째는 리그컵 우승이다. 최고의 선수들을 불러오려고 할 때, 그들은 당신에게 '리그컵에서 우승했는가?'라고 묻지 않는다. 대신, '챔피언스 리그에서 뛰고 있는가?'라고 묻는다.”

 


아스날

[출처 : BBC Match of the Day]

 

지난 주말은 이번 시즌 프리미어 리그의 향방을 결정짓는 중요한 맞대결이 있었다. 리버풀과 우승을 다투는 맨체스터 시티, ‘4위 트로피’를 놓고 아스날과 경쟁중인 에버튼, 이 두 팀의 한 판 승부였다. 결과는 3-2 맨체스터 시티의 승리. 이로인해 맨체스터 시티는 우승을 향한 희망의 불씨를 이어가게 되었지만, 반면 4위 자리를 놓고 아스날과 경쟁하던 에버튼은 패배로 승점 차이를 좁히지 못하면서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 획득이 무산되었다.

 

프리미어 리그에서 4위와 5위의 차이는 매우 크다. 왜냐하면 4위는 다음 시즌 챔피언스 리그에 참가할 수 있지만, 5위는 그보다 하위 대회인 유로파 리그에 참가하기 때문이다. 권위적인 부분이나 금전적인 이득, 그리고 흥행 면에서도 챔피언스 리그와 유로파 리그는 그 차이는 굉장히 크다. 그러므로 리그에서 우승 경쟁만큼이나 치열한 것이 4위 경쟁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스날은 17년간 챔피언스 리그를 진출해왔으니, 트로피를 들지 못하고 무관의 시기를 보내고 있던 시절에도 사실은 꾸준하게 훌륭한 성적을 거두고 있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아스날은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여기가 아르센 벵거에 대한 비판론자와 옹호론자가 갈라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아스날 

[출처 : BT Sport]

 

아르센 벵거 “우리는 클럽을 계속 성장시켜야 했고, 우리는 재정적으로 조금 어려워질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 결정(새 경기장 건립)을 했다. 하지만, 이 시기에 맨체스터 시티는 커다란 투자를 감행했고, 첼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중으로 타격을 받은 것이다. 당시에 우리는 이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다.”

 

2006-07 시즌, 아스날은 기존의 하이버리 구장을 떠나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으로 홈 경기장을 옮기게 되는데, 이 새로운 경기장은 아스날에 막대한 부채를 안겨준다. 이는 즉각적으로 팀에 금전적인 압박으로 작용했고, 이후 아스날은 기량이 만개한 선수를 영입하는데 돈을 쓰기보다는 어린 선수를 길러내는 길을 택하게 된다. 또한, 이 시기에 억만장자의 구단주를 등에 업은 첼시와 맨체스터 시티가 등장하면서 리그에서 아스날의 위치를 더욱 어렵게 만든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팬들의 시각으로는 비록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지만, 그 안에서 분명히 아스날에게 우승 기회가 있었다는 것. 특히, 벵거는 겨울 이적시장에서 소극적이었는데, 팀에서 성장하는 유망주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며, 부상자가 돌아온다며, 혹은 "우리에겐 퀄리티가 있다"며 단기적인 보강을 꺼려왔다. 시즌의 절반을 넘어오는 동안 팀에 드러난 문제점들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다면 이야기는 많이 다르지 않았을까. (실제로, 2008-09 시즌 겨울 이적시장에서 아스날로 이적한 안드레이 아르샤빈은 흘렙과 플라미니의 이탈로 추락하고 있던 팀을 구해냈다.)

 

아스날

[출처 : 2008-09 Arsenal Season Review]

 

이번 시즌도 마찬가지였다. 작년 여름부터 반 페르시의 공백을 메울 월드클래스 스트라이커 영입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지만, 벵거는 20살 유망주 야야 사노고를 데려온 것이 고작이었다. 결국, 단 한 명의 스트라이커 올리비에 지루로 5개월을 버틴 것이다. 아스날이 전반기에 128일간 리그 1위를 달렸지만, 그 사이 오른쪽 측면의 공격을 전담했던 테오 월콧마저 십자인대 부상을 당했다. 그러므로 겨울 이적시장에서 아스날이 공격수를 영입하는 것은 누가 봐도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벵거는 모두의 예상을 비웃듯이 31살의 미드필더 킴 셸스트룀을 임대해온 것이 전부였다. 이후, 아스날은 5위까지 떨어졌다가 부상에서 돌아온 아론 람지와 메수트 외질의 활약에 힘입어 간신히 4위를 턱걸이로 마친 것을 두고, 17년 연속 챔피언스 리그 진출을 이뤄냈다며 축하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이것은 성공일까 실패일까. 성공이라고 하기에는 기대치에 턱없이 못 미치고, 실패라고 부르기에는 나름의 성과는 성과이므로, 정리하자면 실패를 면한 정도라고 해야할까.

 

아스날

[출처 : BT Sport]

 

때마침 이번 시즌이 끝나면 아르센 벵거의 계약기간이 만료된다. 그와 재계약을 하는 것이 맞을까, 하지 않는 것이 맞을까. 혹시 재계약을 하게 되면, 아스날은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4위 언저리에서 헤매는 것은 아닐까. 차라리 좀더 승부사적 기질이 있는 감독을 데려와 우승을 노려보는 것은 어떨까. 혹시 감독을 바꿨다가 맨유처럼 작년 1위였던 팀이 7위로 추락하는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그렇다면 좀더 벵거를 믿어봐야 하나.

 

아르센 벵거 “날 보라. 당신은 다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FA컵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당연히 챔피언스 리그에 진출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는 명백한 일이다. 여러차례 말했듯이, 나의 헌신에는 변함이 없으며 실제로 내가 클럽에서 쓸모있는 존재라고 느끼는 것과 관련이 있다. 클럽에 의심을 품었던 순간조차 없다. 내가 만약 아스날의 감독직에 의심을 품었다면 몇 년전에 떠났을 것이다. 수많은 제의를 거절해야 했고, 나는 많은 압박을 받으며 이 클럽에서 헌신했다.”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팬들의 찬반 의견에 관계없이 벵거는 재계약을 하고 아스날에잔류하는 모양새다. 어찌하겠는가.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해봤자 우리는 구단주가 아니라 일개 팬일 뿐인걸. 금전적인 압박이 사라진 지금, 실망스러운 시기를 뒤로한채 아르센 벵거의 시대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까. 그의 커리어에서 유일하게 없는 트로피가 챔피언스 리그 트로피인데, 벵거는 과연 은퇴하기 전까지 비어있는 챔피언스 리그 트로피를 채워 넣고, 다시 한 번 프리미어 리그 우승을 아스날에서 이뤄낼 수 있을까.

 

아스날

[출처 : FA TV]

 

비록, 올해도 프리미어 리그와 챔피언스 리그 우승은 남의 집 잔치지만, 아직 우리에게는 FA컵 결승전이 남아있고, 끝없이 흘러가기만 했던 무관의 시계를 드디어 멈출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이 아쉬운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내가 꿈꾸었던 곳은 더 높은 곳이었다면서 아스날의 4위에 뾰루퉁한 표정을 짓고 있기 보다는, 멀게만 느껴졌던 트로피가 손에 잡힐듯 가까이 다가왔으니 일단 잡았으면 좋겠다. 이번 시즌의 많은 아쉬움들을 FA컵 우승으로 달랠 수 있기를. 그리하여 이 우승의 기운이 다음 시즌까지 이어져서 내년 프리미어 리그와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더 멋진 추억을 만들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

 

이제는 4위라는 이름의 무형의 트로피 말고, 손으로 직접 만질 수 있는 트로피와 함께.


교정 : @yesdo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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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날 #아르센 벵거
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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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ngkyung

2014.05.15

부제가 가슴을 아리네요. FA컵은 우승할 수 있길 바래봅니다.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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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garida

음악과 미술을 사랑하는, 주변에 흔한 보통의 서울 남자. 아스날과 12년째 연애중. 트위터 아스날 가십(@AFC_Gossip)에서 아스날 소식을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