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채소칸에 들어 있는 채소들을 꺼내보기로 합니다. 익히지 않고도 자주 먹는 채소는 무엇보다 특유의 신선한 맛과 아삭한 식감을 살리는 게 기본입니다. 그보다 더 기본적인 것은? 생으로 먹는 것이니 깨끗이 씻어야겠지요. 그럼 오늘은 채소를 깨끗하고 신선하게 유지하는 방법들을 얘기해보겠습니다.
예전에 요리 아카데미에서 일할 때였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셰프인 호시 노리미쓰라는 분이 강의를 하러 오신다고 해서 자료를 정리하는데 희한한 제목을 발견했습니다. ‘50도의 매직.’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보니, 생채소나 과일을 50도의 물에 세척하면 찬물에서 잘 씻기지 않는 불순물까지 씻어낼 수 있으며, 세포활성화가 일어나 각자가 가지고 있는 맛이 더욱더 좋아진다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가 땀을 흘리는 것과 마찬가지의 효과라고 했습니다. 목욕탕에 있는 열탕에 발을 담그면 ‘앗 뜨거워!’ 하는 느낌과 함께 소름이 돋는데, 이 온도가 대략 41도 정도입니다. 그런데 채소를 이것보다 뜨거운 물에 담그라니.
마침내 강의가 시작되었습니다. 강사는 큰 냄비에 물을 가득 받아 가열했습니다. 중간중간에 손을 담가보면서 “내 손은 온도계야”를 연발하며 온도를 맞추기 시작했습니다. 강사의 손이 벌겋게 달아올랐을 때 저에게 자신 있게 온도계를 꽂아보라고 말씀하셨지요. 온도는 정확히 51도. (“1도 틀렸네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50도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강사는 흡족해하며 테스트에 들어갑니다. 이미 찬물로 깨끗이 씻은 상태의 양배추, 양상추, 당근, 양파 갖가지 채소들을 50도의 물에서 씻어냅니다. 그리고 대나무 소쿠리에 받쳐 물기를 빼낸 다음 시식을 했습니다. 양배추, 양상추는 더 달고 진한 맛이 느껴지는 게 신기했습니다. 당근, 오이는 더 선명한 색깔을 띠었고 50도의 물에 수초간 넣었다 뺀 토마토는 껍질이 팽팽해진 듯했습니다. 한마디로, 채소가 가진 맛과 향, 색이 강해졌다고 느꼈습니다. 바나나를 50도의 물에 수십 초 담가 씻으면 실온에 두었을 때 껍질에 생기는 검은 반점(슈가 스팟)이 현저히 적게 나타났습니다.
실제로 채소를 씻은 냄비 바닥을 보니 불순물이 꽤나 많이 떨어져 쌓인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브로콜리나 토마토 꼭지처럼 씻어내기가 힘든 채소는 이 방법으로 안전하게 세척이 가능하겠구나 싶었습니다. 맛도 맛이지만 채소와 과일의 상태 자체가 미묘하게 변하는 걸 확인하는 굉장히 즐거운 체험이었습니다.
물론 맛이라는 게 각자 느끼는 바가 다르니 별 차이를 못 느끼는 분들도 계시겠지요. 또한 물의 온도를 50도로 맞춘다고 다 되는 게 아니라 채소별로 씻어야 하는 시간도 다르고 채소마다 상태도 다를 겁니다. 하지만 집에서 한번 실험해보시고 나한테도 맞는지 알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나중에 가게를 운영할 때 이 방법을 사용해봤는데요. 작업시간이 두 배는 길어지더군요. 주방 책임자와 직원들 간에 방법과 효과에 대한 공유가 충분히 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번은 고깃집에 갔는데, 상추가 싱싱하길래 홀에서 서비스하시는 아주머니께 “혹시 이 상추 50도 물에 씻으셨어요?” 하고 물어봤더니 저를 이상하게 쳐다보시며 아무 답도 안 하셨습니다. 상추 추가도 안 해주시더군요.
샐러드를 만들 때 채소를 깨끗이 씻은 다음 찢거나 잘라서 물에 담가두곤 하지요? 왜 그러는 걸까요? 잘린 채소의 단면으로 물이 더 잘 스미게 되기 때문입니다. 세포막을 통해 물이 침투해 채소가 부풀어오르면 우리가 느끼는 아삭아삭한 식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단 따뜻한 물이나 뜨거운 물에 채소를 담가놓으면 세포막이 부드러워지면서 숨이 죽게 됩니다. 그러니 생으로 먹는 샐러드라면 반드시 차가운 물에 담가두셔야 합니다. 찬물이라도 상온의 채소를 담가두면 금방 온도가 올라가니 얼음물이면 더 좋겠습니다.
하지만 무한정 담가둔다고 그 채소가 점점 더 아삭한 상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10분이 넘어가면 물을 너무 많이 먹어 모양이 휘기도 하고 식감도 물컹해집니다. 그러니 ‘접시에 담을 상태로 자르거나 찢은 채소를 차가운 물에 10분 담그기.’ 이렇게 알아두시면 편하겠지요.
그런데 양상추 같은 채소는 칼로 자르지 말고 찢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시는 분도 계실 겁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칼 같은 금속(철 성분)이 닿은 단면은 갈변이 빨리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래 두지 않고 바로 먹을 것이라면 칼을 이용해 다양한 모양을 만들어보는 것도 플레이팅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샐러드를 만들 때 섬유의 결을 알아두고 이용하면 모양과 식감을 다르게 만들 수 있습니다. 결의 반대로 자르면 더 부드럽고, 결대로 썰면 더 아삭한 감이 오래가지요. 당근의 경우, 돌려깎기를 해서 채를 썰 때 섬유의 결대로 썰면 볶음을 해도 숨이 빨리 죽지 않고 오래갑니다.
쓰고 남은 채소들, 다음에 쓰기로 한 채소들, 보관은 어떻게 하시나요? 어떤 것은 냉장고에 넣고 어떤 것은 상온에 두는지, 어떤 것은 씻어서 보관하고 어떤 것은 씻지 않은 채로 두는지 저한테도 많이들 물으시는데요. 정답은 마트에 있습니다. 채소의 상품성을 오래 보존하려고 노력하는 곳이 마트 아니겠습니까. 마트의 채소 코너에 가면, 감자는 흙을 씻지 않은 채 상온에 두지요. 파는 직접 냉기를 쐬지 않도록 냉장실 한편에 둡니다. 이 채소는 마트에서 어떻게 두었더라? 생각해보시면 됩니다.
집 냉장고에서 보관하는 방법을 좀더 자세하게 구분하자면, 아무래도 목적과 스케줄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데요. 오늘이나 내일 쓸 것 같다면 씻어서 ‘씻은 채소 전용칸’을 따로 만들어 보관하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이때 반드시 물기를 완전히 제거하셔야 합니다. 젖은 옷을 오래 입고 있으면 피부가 짓무르는 것처럼 채소도 마찬가지입니다. 밀폐용기에 페이퍼타월을 깔아 수분을 흡수할 수 있게 한 다음 보관하시는 게 좋습니다.
며칠 더 있다가 쓸 거라면 씻지 않은 채로 두는 게 낫습니다. 물론 씻은 채소와 다른 곳에요. 언제 쓸지 기약이 없지만 언제고 쓸 것 같은 채소들은? 그냥 안 사는 게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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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록/ (그림)조남준
일본요리 전공. 한때 조림요정이라 불리던 <마스터셰프 코리아 2> 우승자. 지금은 은둔형 맛덕후. 집에 틀어박혀서 맛을 실험해보기를 좋아함. <최강록의 맛 공작소>에서는 부엌을 구석구석 뒤져볼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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