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와 산수유꽃으로 시작하는 봄꽃의 향연은 개나리, 진달래를 거쳐 벚꽃으로 절정을 이룬다. 물론 꽃이 탐스럽고 향기도 진한 목련도 일품이다. 오월이 되면 라일락과 장미가 무대에 오른다. 봄꽃을 기다리는 건 사람만이 아니다. 약간의 인내를 갖고 꽃들을 관찰해보면 꿀벌을 비롯해 나비, 무당벌레, 꽃등에 등 다양한 손님들을 볼 수 있다. 벌레를 성가셔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만약 달콤한 화밀花蜜을 찾아 이 꽃 저 꽃 돌아다니는 이들 곤충이 없다면, 꽃밭의 풍경은 꽤나 삭막할 것이다. 물론 이런 극단적인 상황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 지난 한 세기 동안 인류의 과도한 활동에서 비롯한 급격한 기후변화와 생태계파괴로 꽃을 찾는 곤충이 급감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추세를 방치했다가는 곤충뿐 아니라 이들 덕에 수분을 해서 씨앗을 맺는 식물도 생존에 위협을 받을 수 있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이런 예측은 지나친 비관론이고 설사 수분을 하는 곤충 가운데 일부가 사라진다고 해도 우리의 믿음직한 친구인 꿀벌이 있기 때문에 별 문제는 없을 거라고 낙관하고 있다. 사실 꿀벌은 꽃가루 매개자, 즉 수분을 도와주는 동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꿀벌은 사회성 곤충으로 사람이 어렵지 않게 큰 무리를 만들어 데리고 다닐 수 있는 사실상 ‘가축화된’ 곤충이다. 또 식성도 까다롭지 않아 웬만한 꽃은 다 환영이다. 이러다보니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꿀벌을 키워 계절에 따라 꿀을 채취해 오고 있다. 꿀벌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아카시아꿀, 밤꿀, 유채꿀, 그리고 여러 꽃에서 채취한 잡화꿀을 맛볼 수 있었겠는가.
다양한 곤충
식물-곤충?상호작용 절반 이하로 줄어
먼저 미국 몬타나주립대학 생태학과 로라 버클 교수와 동료 연구자들은 일리노이주 칼린빌의 한 지역을 대상으로 식물과 꽃가루 매개 곤충의 관계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를 벌였다. 이 지역은 과거 두 차례 비슷한 조사가 이뤄졌는데 처음 조사는 무려 120여 년 전인 1888년과 1891년 생태학자 찰스 로버트슨이 수행했고, 두 번째 조사는 1971년과 1972년 행해졌다. 따라서 이번 조사는 같은 지역을 대상으로 한 세 번째 방문인 셈이다.
120년 전 로버트슨은 인내를 갖고 특정 식물의 꽃을 찾는 벌의 종류와 빈도수를 일일이 기록해 남겼다. 로버트슨은 식물 26종을 조사해 전부 109종의 벌을 기록했는데, 식물과 벌의 상호작용은 532가지에 달했다. 즉 벌 한 종당 평균 5종의 식물을 찾은 셈이다. 물론 특정한 식물 한 종만 찾는 벌도 있는 반면 꿀벌처럼 거의 대부분의 식물에서 발견되는 벌도 있었다. 그런데 120년만의 재조사 결과 로버트슨이 기록한 532가지 상호작용 가운데 불과 125가지만이 관찰됐다. 식물 26종은 여전히 모두 존재했지만 2년 동안이나 관찰했음에도 벌은 54종밖에 찾을 수 없었다. 한편 로버트슨이 기록하지 않은 새로운 식물-벌의 상호작용이 121건 관찰됐다. 아마도 특정 식물에 최적화된 벌이 사라지자 그 공백을 다른 종이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 둘을 합치면 오늘날의 네트워크는 246가지 상호작용으로 이뤄져 120년보다 훨씬 단순해졌다.
이런 네트워크의 단순화와 함께 꽃가루 매개자로서 벌의 역할도 예전만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자들은 클레이토니아 비르기니카Claytonia virginica라는 쇠비름과科의 야생화를 찾은 벌을 채집해 몸에 묻은 꽃가루를 조사했다. 그 결과 120년 전에는 약 70%, 40년 전에는 약 60%가 이 식물의 꽃가루였는데 비해 이번 조사에서는 20%를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120년 반에 3분의 1로 줄어든 셈이다. 이는 해당 식물에 특화된 벌은 사라지고 이 꽃 저 꽃 찾아 다른 식물의 꽃가루를 묻히고 다니는 벌의 비율이 늘어났다는 말이다. 이렇게 다른 식물의 꽃가루 비율이 올라가면 당연히 수분 효율은 떨어질 것이다.
연구자들은 이런 변화의 원인을 급격한 기후변화와 사람의 활동으로 인한 환경변화에서 찾았다. 즉120년 사이 이 지역의 겨울과 봄 평균 기온이 2도올라가면서 꽃의 개화 시기와 곤충의 활동 시기가 서로 어긋나게 바뀌면서 제 때 짝을 만나는 기회가 줄어들었다는 것. 또 과거에는 이 일대가 모두 숲이었지만 지금은 개발로 숲이 마치 조각보의 조각처럼 농지와 주거지 사이에 흩어져 있게 됐다.
바로아진드기
착과율은 야생 곤충 방문수와 밀접한 관계
아르헨티나 리오네그로대 루카스 가리발디 교수는 세계 각국의 공동연구자들과 함께 600곳의 현장에서 41가지 농작물을 대상으로 식물과 꽃가루 매개 곤충 사이의 관계를 조사한 방대한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이에 따르면 농작물 수확량에 밀접한 연관이 있는 착과율, 즉 꽃에서 열매가 맺히는 비율은 꽃을 찾은 꿀벌의 숫자보다는 야생 곤충의 숫자와 더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농작물 꽃을 찾는 곤충의 빈도를 조사하자 꿀벌 한 종이 절반을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미 꿀벌에 대한 의존도가 꽤 높아진 상태라는 말이다. 그러나 수집한 데이터를 통계처리한 결과 꿀벌이 찾는 횟수가 크게 늘어난다고 해도 착과율은 14% 높아지는데 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야생 곤충의 방문 횟수가 늘면 착과율도 크게 높아졌다. 아무래도 오랜 진화를 거쳐 특정 식물에 최적화된 곤충이 일(수분)도 가장 잘 한다는 말이다.
게다가 꿀벌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농업은 자칫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꿀벌에 치명적인 병이 퍼진다면 농사를 망칠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세계 곳곳에서 꿀벌이 진드기나 바이러스로 죽어가면서 양봉농가는 물론이고 농가의 부담도 늘어나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 아몬드 농장의 경우 꽃이 피는 시기가 오면 꿀벌을 들여와 수분을 시키는데, 과거에는 벌집 한통에 30달러였던 것이 이제는 150달러로 5배나 폭등했다고 한다. 이번 연구결과는 추후 농업정책에 새로운 시사점을 던져준다. 즉 농토 주변 곳곳에 야생 곤충의 터전이 되는 숲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효율성을 위해 넓은 땅에 특정 농작물 한 종만 심는 방식 대신 여러 종을 교차로 심어 식물의 다양성을 높여줘야 한다. 물론 살충제 사용에 대한 보다 엄격한 기준도 필요하다. 다들 경제적인 관점에서는 선뜻 내키지 않는 해결책들이지만 차일피일 미루다가는 더 큰 손해를 볼 수 있다. 연구자들은 "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야생 곤충은 계속 사라질 것이고 그 결과 농작물 수확량도 줄어들 것"이라고 경고했다. 종다양성 확보는 자연생태계뿐 아니라 인류의 활동 영역인 농업에서도 꼭 필요한 조건이라는 말이다.
과학을 취하다 과학에 취하다 강석기 저 | MID 엠아이디
첫 책 『과학 한잔 하실래요?』로 출간하자마자 2012년 교육과학기술부 우수과학도서, 두 번째 책 『사이언스 소믈리에』로 2013년 미래창조과학부 우수과학도서로 유래 없이 2년 연속 선정된 저자의 세 번째 과학에세이. 더 깊어진 과학적 전문성과 더 넓어진 학문적 지평으로 2013-2014년 과학계의 첨단 이슈를 샅샅이 파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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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기
서울대학교 화학과 및 동대학원(이학석사)을 졸업했다.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동아사이언스 《과학동아》와 《더사이언스》에서 과학전문기자로 일했다. 현재 과학칼럼니스트와 과학책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과학 한잔 하실래요?』(MID, 2012)가 있고 옮긴 책으로 『현대 과학의 이정표』(Gbrain, 2010, 공역)가 있다. 2012년 출간한 저서 『과학 한잔 하실래요?』는 출간 즉시 교육과학 기술부 우수과학도서,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권장도서로 선정됐다.
감귤
2014.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