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의 의자를 내렸다. 높아서 제왕 같다며 낮은 곳에서 함께 호흡하기를 바랐다. 서로 연결되기 위함이었으리라. 그는 이날 모인 이들을 ‘마을 사람들’이라고 표현했다. 칠순을 훌쩍 넘은 노장은 여전히 ‘별들 사이에 길을 놓’는 순간을 꿈꾸는 것 같다. 그가 여러 사람과 함께 길을 놓은 ‘순천 기적의 도서관’을 말할 때는 감동적이었다. 고 정기용 건축가가 설계한 이 도서관, 그가 부탁한 것은 딱 하나였다. “밤하늘의 별을 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세요.” 정기용 건축가는 강당 옥상에 ‘비밀의 하늘정원’과 2층의 ‘별나라 다락방’을 만들었다. 밤하늘의 빛나는 별, 아이들에게 호기심을 발동시키는 제1의 대상임을 두 사람, 이심전심 통했다.
그는 문학평론가이자 도서관 운동가인 도정일 교수(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대학장)다. 지난 3월 27일의 봄밤, 서울 밤하늘에선 보기 힘든 별이 빛났다. 별에서 온 도 교수가 별들 사이에 길을 놓으며 서로가 연결된 까닭이다. 20여년 써낸 각종 칼럼을 모은, 도정일 문학선의 1, 2권으로 출간된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 출간 기념으로 독자들의 만남이 주선됐다.
질문과 답변을 통해 좋은 삶과 행복한 삶, 삶의 목적과 의미, 그리고 연결과 협력이 만든 세상을 꿈꾸도록 만든 시간. “노장에 대한 존경이 없는 사회의 노장은 불행하며, 존경의 대상을 갖지 못한 젊은이들은 더욱 불행한 법”이라고 했건만, 꼰대 아닌 좋은 노장을 만난 즐거움으로 마을 사람들은 가슴에 별 하나씩을 품고 갔다.
사람이 사는데 ‘절대적인 목표’ 같은 게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알고 싶다.
대단히 중요한 질문이다. 20세기 서양철학을 보면, 특히 2차대전이 끝나고 20세기 중후반, 서양사상계에 심대한 변화가 발생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을 거쳐 지금까지 서양의 대학교육에 깊은 영향을 주고 있다. 목적에 대한 담론을 내던졌다. 사람이 사는데 목적이 있다는 것을 목적론적 역사관(가치관)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내버린다. 목적을 말하면 현대 지식인이 아닌 것처럼 인식된다. 이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사조에 와서 절정을 이룬다. 이는 한국의 젊은 지식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면서 본질론, 목적론을 시궁창에 처박았다. 교양과목을 다루는 젊은 연배의 교수들이 그 영향을 아직 받고 있다.
개개인의 삶에 목적이나 목표, 방향의 설계가 없을 수가 없다. 인간의 삶에서 목적을 뺄 수 없다. 가령, 결혼을 하게 되면, 결혼에 대한 다양한 설계를 한다. 배우자, 아이, 자동차, 가전제품 등을 설계한다. 목적의 문제에 대처하는 것은 모두의 관심사다. 생각의 출발점은 자기 자신이다. 현대인의 사상, 지적인 조류에서 진보적 역사관이나 목적론적 역사관을 환영할까. 의견은 갈릴 것이다. 지금의 지적 조류나 지식인의 판도를 보면 역사에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향해 역사가 진행된다는 말을 하면 바보가 된다. 그런 주장에 반발과 비판, 거부감이 많을 것이다. 왜 그럴까.
그런 역사관의 폐해, 실수와 실패가 너무 심해서 사람들이 행복해지기는커녕 불행해졌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소련이다. 신이 웃건 말건, 인간은 목표를 세워야 한다. 강한 이유가 하나 있다. 목적이나 목표가 없으면 삶에 의미를 공급할 방법이 없다. 다만 경고를 하겠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목적론이 있다. 어떤 사회, 정치집단 등에는 자신들이 세운 목적을 향해 일사분란하게 행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이런 형태의 생각이 퇴조했다고 하지만, 그건 사상적 사조에서나 그렇다. 국가주의가 팽배하는 나라들, 지금의 대한민국을 포함해 거의 모든 나라들이 국가주의 운영방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대단히 위험하다. 하나의 목적을 세우고 국민들이 그것을 향하도록 몰아세우는 것, 수상쩍고 위험하다. 우리가 비판과 경계를 소홀하게 해선 안 되는 이유다.
그것을 빼고 개개인의 삶에서 설정할 수 있는 목표가 있다. 설정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목표는 내가 만들어야 한다. 남이 주는 것이 아니다. 내가 삶에 부여하고 싶은 목표와 가치, 이것을 없앨 수 없고 포기할 수 없다. 경계해야 할 것과 반드시 수행해야 할 것이 있다. 경계해야 할 것은 밖에서 강제로 주어져서 사람을 동원하는 목적론적 사회는 대단히 위험하다. 개인의 경우에도 폭군적이고 가부장적인 사회는 위험하다. 부모가 자식의 목적을 정하는 것이다. 현대인의 삶이 불안해지고 시달리는 가장 큰 이유는 자기가 자기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힘들고, 목표라는 것을 세우기 힘들어진데 있다. 그래서 안 한다.
목표를 설정하는 것은 위대한 기능을 한다. 방향을 준다. 자기 삶을 안내할 어떤 가이드도 없을 때 그 삶은 편안한가. 되는 대로 사는 것이 재미있을지는 몰라도 고생한다. 우리 삶에는 우리가 만들고 설정한 목표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없으면 삶은 공허해지고 방향을 잃고, 무의미해지며 손실이 많다. 의미와 목적은 떼려야 뗄 수가 없다. 내 삶에 의미를 집어넣을 때 여러분이 살고자하는 목표와 연결되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인간은 그 자신의 유한성, 그 자신의 죽음과 화해해야 하고 이 지상에 사는 동안은 자기 존재의 의미를 만들고 찾아내어 자신의 삶을 어떤 정당성의 문법 위에 올려놓지 않으면 안 된다. 과학과 기술의 시대에도 종교 등의 상징적 연결 체계가 사라지지 않는 것은 화해와 의미 추구가 인간적 삶의 생략할 수 없는 요청이기 때문이다.”(『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51~52쪽)
사회초년생이다. 현실적인 꿈과 이상적인 꿈 중에 어느 것이 이로울까?
이 험난한 사회는 고르지 않다. 불평등 사회다. 사람들을 불행하게 할 모든 준비를 갖추고 있다. 환영한다(웃음). 잘 헤쳐 나가길 기원한다. 현실의 요구가 있고, 그 현실의 요구에 굴종만 해서는 안 된다. 이상은 일종의 목표다. 내가 지키고 싶은 가치와 목표가 있는데, 현실에선 그것을 내동댕이칠 것을 요구한다. 많은 젊은이들이 고민하는 문제다. 현실과 이상의 갈등. 과격하게 말해보자. 현실과 이상을 나눠놓고 현실에 눈뜨라고 말하는 이야기는 쓸모없는 이야기다. 쓰잘데없는 것이 아니다(웃음). 아주 다른 뜻이다. 나눠서 생각해야 할 정당한 순간도 있는 한편, 이상을 접고 사회에 적응해야 한다는 소리를 하기 위해 현실과 이상을 나눈다. 현실주의자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 있고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 340세다(웃음). 이상을 버리라고 말하는 자는 일단 불신하는 것이 좋겠다. 자기도 모르게 자신이 옳다는 것을 과시하고 현실의 요구에 맞추는 것이 행복하다고 말하기 위해서 압력을 넣는 거다. 인간은 이상을 포기하면 안 된다. 그것이 자기 생애에 실현할 수 없는 아득하고 멀어도 이상을 포기하면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340년을 살았다.
이상을 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버리고 싶은, 버려야 할 이상도 있을 수 있다. 실현 불가능하므로 이상이다. 그게 왜 있어야 하는가! 이상이 있을 때에만 삶은 안내판을 받을 수 있다. 이상이 요구하는 종착역에 도달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이상이 없고 이상에 대한 집착을 자신의 중요한 목표로 간직하지 않는 사람과 사회는 망조가 든 것이다. 왜냐. 지금 현대 자본주의 삶과 세계화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기업자본주의적인 질서, 시장 전체주의 방식으로 시장 가치를 밀고 나가려는 세력들에겐 이상이 딱 하나다. 돈 벌자. 돈이 세상이고, 이상이다. 다른 건 아무 것도 아니다.
이런 시대에 필요한 이상은 무엇인가! 돈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되, 돈이 아닌 것, 돈과 관계없이 간직해야 할 이상과 목표가 있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삶은 쓸모없어 진다.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이 책 제목에는 이상도 포함한다. 이상이 없으면 내가 하고자 하는 모든 일과 관계가 무의미해 질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일수록 돈이 아닌 것을 이상으로 삼는 삶의 태도가 반드시 필요하다. 나는 상당히 가난하다. 그래서 돈의 가치와 중요성을 잘 안다. 잘 알아서 돈에 삶과 목숨, 인생의 행로 전체를 탑재해서는 안 된다고 늘 생각하고 있다. 이상주의자라는 소리를 들어도, 나의 이상은 당신처럼 살지 않는 것이라고 말해줘라.
교양이란 무엇인가, 우리 시대의 중요한 화두다. 우리 사회는 무교양 사회다. 얼마나 천박한지 모른다. 대학에서도 취직이 중요하다고 교양이 뭐가 중요하냐고 말한다. 정부 관료나 정치권에 교양이 있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그들조차 맥을 출 수 없는 사회가 지금의 대한민국이다. 『교양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주변에 나눠줘라. 교양에 대한 여러 정의가 있는데, 미국의 한 교수가 재밌게 정의한 것이 있다. 교양은 ‘이상에 대한 집착’이다. 이상을 지키려는 태도, 실현 못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 이것은 정신을 유지하고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어느 때 영혼이 병들지 않는가, 잘 생각해보라.
20대 초반인데, 관계에서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는 심리적 거리는 얼마나 될까?
어느 정도 심리적 거리를 유지할 때 관계가 원만할까, 생각을 많이 하겠지. 정답이 있을 수 없고 살면서 찾아야 한다. 살면서 목적이 구성되듯 남들과의 거리도 마찬가지다. 회사동료 사이에 형제자매처럼 붙어 다니는 관계를 보자. 공간적?심리적 거리 모두 가까운 경우다. 그렇게 가까운 거리를 만들면 사회생활의 관계가 잘 유지되던가? 내 경험으로는 안 된다. 그러면 굉장히 괴롭다. 가까운 것이 고통의 연원이 돼서 사람을 고생시킨다. 가깝다는 것을 이용해서 사람을 괴롭히면 미친다. 우리가 심리적 거리를 일률적으로 공식에 의해 정할 수 없다 할지라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거리가 너무 가까워지는 경우와 친밀하면서도 거리를 유지하는 경우 중에 어느 것이 관계를 건강하게 유지하는데 기여를 할까. 후자다.
특히 사람들이 가장 가까워질 때는 연애를 할 때다. 그래서 연애할 때 굉장히 조심해야 한다. 남과 남이 만나서 불가능해 보이는 친밀성을 형성하는 것이 연애다. 그건 기적이다. 사랑을 하면 환호작약을 하고, 온 세상을 얻은 것 같다. 사랑은 공통경험이면서 아픔과 배반, 상실, 상처가 반드시 따라붙게 돼 있다. 과하게 얘기한 것이긴 하나, 예나 지금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때도 젊은이의 사랑은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진다고 말했다. 이것이 인류사의 공통경험이다.
『안나 카레니나』를 보자. 안나와 브론스키는 불같은 사랑에 빠지나, 몇 달 후 브론스키가 헤어지자며 말한다. 안나는 차인 뒤, 자기의 길을 간다. 열차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지. 연애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있는 것 없는 것 다 내주고, 특히 비밀을 모두 공개하자는 의식을 행하자고 말하면, 그런 것에 절대 응하면 안 된다. 특히 한국 남자들 얼마나 저열한지 모른다. 우주에서 꼭대기다(웃음). 사랑의 유지를 위해서는 그 사랑을 존경할 필요가 있다. 존경하기 위해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비밀은 필요하다. 우리의 삶을 의미 있게, 쓰잘데 있게 하는 것이 비밀이다. 뭘 숨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가슴속에서 절대로 버리고 싶지 않은 경험과 기억, 가치가 비밀이다.
좋은 삶과 행복한 삶은 서로 다를까?
같아야 한다. 그런데 왜 새삼 이런 말을 꺼낼까. 지금 한국에서 행복을 구한다고 하면 좋은 삶과 관계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좋은 삶과 행복한 삶이 따로 있다고 여긴다. 행복이 우리 사회에선 타인의 기준에 의해, 자신이 동의할 수 없는 이상한 기준에 의해 결정되고 추천된다. 그런 행복은 추구하면 안 된다. 한국에서 중등교육을 마치고 대학에 온 사람들이 얼마나 유사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 보면 놀랍도록 균질하고 유사하다. 첫째가 돈이다. 물론 돈은 있어야 한다. 물질적인 토대가 있어야 하니까. 그러나 돈을 벌면 이만하면 됐다고 하나? 멈출 수 있는 선이 없다. 경쟁에 내몰리고, 그렇게 뛰는데, 그 결과가 무엇인가. 이건 절대 행복한 것이 아니다. 중등교육과정에서 지금은 경쟁사회니까 앞서거나 뒤쳐질 수밖에 없다고 주입받는다. 그러니 대학에 와도 내내 불안하지. 그렇다면 모두가 길을 잃은 상태에서 앞서고 뒤쳐진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개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행복이라면, 남보다 돈이 더 있고 없느냐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앞선다는 것은 행복의 결정기준이 아니다.
좋은 삶은 어떤 삶일까?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좋은 삶이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 있다면 좋은 삶이다. 좋은 삶은 간단히 정의할 수 있다. 살만한 가치가 있는 삶. 각자의 방식으로 좋은 삶에 대한 정의도 내려 보라. 살만한 가치가 있는 삶은 어떤 삶인지 생각해 보라. 나만 행복하면 된다? 아니다. 타인이라는 존재가 들어와야 한다. 나와 너 함께 만들어가는 공동체, 그런 삶이 살만한 가치가 있는 삶이다. 행복한 삶은 행복할 이유가 있는 삶이다.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첫 번째 자세
내가 행복할 이유가 있는가에 대한 기준과 판단을 자신이 세워야 한다. 남들이 내놓는 행복의 기준에 휘둘려선 안 된다. 그런 형태의 행복의 추구는 불행해진다. 좋은 삶을 추구하면 행복한 삶이 따라온다. 살만한 가치가 있는 삶, 산다고 말할 수 있는 삶, 개인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개인의 자기결정권에 맡겨야 할 것이긴 하나, 어떤 가치를 판단의 중심부에 놓을 수 있을지 짚어봐야 한다. 책에는 좋은 삶을 살 수 있는, 행복의 실마리가 모든 꼭지에 들어 있다. 의도한 것은 아님에도 그런 공통의 주제가 있다.
행복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공통점과 기준이 있다. 사람들과 연결을 지어라. 연결의 다른 이름이 협력이다. 인간 문명을 만들고 역사를 진행하게 한 원동력은 경쟁이 아닌 협동과 협력이다. 함께 일하고 함께 연결하고 함께 살아가야 한다. 책에도 연결을 주제로 한 글이 많다. 연결의 중요함과 아름다움을 말한다. 지금 우리는 상상력이 있는 사람을 길러야 한다고 말하는데, 구호만 있고 내용은 없다. 어떻게 하면 창조적 인재가 길러지는지 내용이 없다. 상상력 교육을 해야 한다고 아우성치면서 교육현장에 가면 상상력을 죽이는 교육을 한다. 그러면 상상력의 다른 이름이 창조일 텐데, 상상력은 무얼까. 연결하는 능력이다.
문학이 창조교육의 핵심이다
문학교육도 못하는 나라가 무슨 상상력의 교육을 하겠나. 과학의 창조적 역량에 가장 기여한 것이 문학과 예술이었다. 연결의 상상력을 적극 활용했다. 시적 상상력을 적극 활용하는 것이 과학이다. 과학사의 위대한 발견은 엉뚱한 것을 연결하다가 나왔다. 반드시 길이 트인다. 그것이 융합이고 통섭의 의미다. 또 있다. 창조성, 상상력은 무엇에 의해 자극받는가. 호기심에 의해 자극받는다. 그러나 사회에 나오면 호기심을 죽일 것을 요구받는다. 호기심은 창조성, 상상력의 근원이며 그것이 있어야 가치 있고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다. 지금 많은 대학생들 호기심이 다 죽고 없다. 정답만 교육받은 상황에서 무슨 상상력과 창조력이 나오겠나. ‘지붕위의 소년’(『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19쪽)이라는 글이 있다. 꼭 읽어봐 주면 좋겠다. 호기심이 우리의 삶을 좋은 삶이 되게끔 한다. 호기심을 죽이면 안 된다. 호기심을 유지하는 삶, 그것이 좋은 삶이다. 호기심을 지키기 위해 필요하다면 책을 보고 영화도 보고 지적인 화두를 잡아서 그것을 추적해보라.
인문학이 왜 중요한가?
연결과 관계의 학문, 가치와 의미와 목적을 끊임없이 사유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의미, 가치, 목적이 인문학의 3대 화두다. 인간이 인간에 대해, 자기가 사는 사회에 대해, 역사에 대해 문명과 자유에 대해, 인간의 책임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것이 인문학이다. 인문학과 행복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행복을 잡는 파리채가 인문학이 아니다. 인문학은 사람을 불안하게 하고, 질문을 던지게 한다. 질문을 포기하지 않고 불안하게 환기시키는 정신적인 노력, 그것이 인문학이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할 일이 참 많다. 그 일을 하자면 시간이 없다. 그래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삶과 직접 관계가 없어 보이는 기본적인 가치, 기본적으로 버릴 수 없는 것들을 망각하고 산다. 인문학의 3대 화두는 쓰잘데없이 소중하다. 그것을 시장에 내놓으면 똥값도 못 받는다. 그러나 그것이 없으면 우리가 하는 일 모두 무용해진다. 인간은 왜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까. 버릴 수 없는 그리움이 있어서인데, 우리는 그걸 잊고 다른 걸로 대체하고 산다. ‘이야기는 왜 끊임없이 만들어지는가’(『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215쪽)를 꼭 봐 달라.
우리가 삶의 가이드로 삼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삶을 살고 소중한 삶의 목록을 어떻게 짜든 관계없이 인간으로서 잊어버리면 안 되는 소중한 일은 없을까. 있다. 세 가지다. 의미가 없는 곳에 의미를 세우는 일, 희망이 없는 곳에 희망을 주입하는 일, 정의가 없는 곳에 정의를 세우는 일이다. 이 세 가지는 어떤 삶을 살든 우리가 버릴 수 없는, 소홀하게 할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선 자리, 사회와 집단 차원에서 생각해야 할 일이다. 그래야 좋은 삶과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조건은 물질적인 부가 아니다. 민주주의다. 더불어 사는 가치가 지켜지는 것이 좋은 삶의 기본 조건이다. 정의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는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일부 소수 계층에게만 의미, 희망, 정의를 주는 것은 불평등 사회다.
우리, 환대하자. 『레미제라블』을 보면 ‘환대의 식탁’이 나온다. 미리엘 주교는 식탁에서 늘 천대받던 장발장을 “오늘 저녁 우리를 찾아온 특별한 손님”이라고 소개한다. 장발장은 특별한 손님이라는 말을 처음 듣는다. 그 이후 장발장의 삶이 바뀐다. 환대는 사람을 바꾼다.
“지금쯤 우리는 쓰잘데없어 보이는 것들, 시장에 내놔봐야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것들, 돈 안 되고 번쩍거리지 않고 무용하다는 이유로 시궁창에 버려진 것들의 목록을 만들고 기억해야 할 시간이 아닌가? 그것들의 소중함과 고귀함을 다시 챙겨봐야 할 때가 아닌가?”(『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5쪽)
-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도정일 저 | 문학동네
도정일은 “지금쯤 우리는 쓰잘데없어 보이는 것들, 시장에 내놔봐야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것들, 돈 안 되고 번쩍거리지 않고 무용하다는 이유로 시궁창에 버려진 것들의 목록을 만들고 기억해야 할 시간이 아닌가? 그것들의 소중함과 고귀함을 다시 챙겨봐야 할 때가 아닌가?”라며 1권 표제의 의미를 전한다.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에서는 전방위 인문학자의 사상 전반이 총론처럼 제시된다. 그가 은연중 제시한 ‘목록’들이 앞으로 연이어 출간될 ‘도정일 문학선’의 안내자 역할을 하는 셈이다.
- 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 도정일 저 | 문학동네
『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에서는 그의 ‘목록’ 중 일부가 좀더 구체적으로 집약/제시되고 있다. ‘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라는 표제는 ‘이야기로 아들을 키운 여자’인 괴테의 어머니 회고록에서 한 구절을 따온 것이다. 책과 이야기의 개인적?사회적 효용을 ‘문학적’으로 역설하는 두번째 산문집은 저자가 문화운동가로서 ‘책읽는사회만들기국민운동’을 일으키고 ‘기적의 도서관’을 짓는 일에 몰두해온 맥락과 함께 읽히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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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준수
커피로 세상을 사유하는,
당신 하나만을 위한 커피를 내리는 남자.
마을 공동체 꽃을 피우기 위한 이야기도 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