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해 있는 노벨상 수상자 가운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한 과학자는 아마도 배리 마셜 서호주대 교수일 것이다. 헬리코박터 파일로리Helicobacter pylori라는 박테리아가 위궤양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발견해 2005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마셜 교수는 ‘위의 건강까지 생각한다’는 국내 한 요거트의 광고모델로 나오기도 했다. 사실 마셜 교수가 노벨상을 받기까지의 과정은 한 편의 드라마라고 할 만하다.
1984년 호주의 한 병원에서 일하고 있던 33세의 내과 의사 배리 마셜 박사는 위점막에서 발견한, 나선형으로 생긴 한 박테리아에 매료됐다. 난치성 질환이었던 위궤양이나 십이지장궤양 환자 대부분이 헬리코박터 파일로리라고 불리는 이 박테리아에 감염돼 있다는 걸 발견한 그는 헬리코박터가 궤양을 일으킨다는 가정을 세우고 이를 입증하기 위해 연구에 매진했다.
헬리코박터 파일로리(Yutaka Tsutsumi 제공)
박테리아 배양액 마셔 위궤양 걸려
위세포가 분비하는 강산(주로 염산) 때문에 강한 산성 환경인 위 안에서는 박테리아가 살 수 없다고 믿고 있었던 당시 주류 의학계는 위 안에 박테리아가 살 뿐 아니라 여기에 한술 더 떠 이 박테리아가 궤양을 일으킨다는 마셜 박사의 주장을 일축했다. 따라서 그의 논문은 게재가 거부되기 일쑤였다. 설상가상으로 자신의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 실험동물을 감염시켜 위궤양을 일으키려는 실험은 잘 되지 않았다.
이래저래 마음이 갑갑해진 마셜 박사는 어느 날 자신이 직접 헬리코박터가 우글거리는 배양액을 마셔보기로 했다. 동물실험 결과도 있고 해서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다행히도(?) 그는 곧 위궤양 증세를 보였다. 위내시경으로 충분한 ‘증거’?벌겋게 충혈된 위점막)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항생제를 먹었고 2주 만에 궤양이 나았다.
마셜 박사는 이 경험을 그에게 처음 헬리코박터 연구를 해보라고 제안했던 로빈 워런 박사에게 얘기했고, 다음날 워런 박사는 우연히 통화를 하게 된 미국의 선정적 신문인 <스타>의 기자에게 이 얘기를 "마셜 박사가 죽다 살아났다"는 식으로 과장해서 들려줬다.
다음날 이 스토리는 ‘기니피그(실험동물) 의사가 위궤양의 새로운 치료법과 원인을 밝혀냈다’는 제목으로 대서특필됐다. 이 보도 이후 헬리코박터와 위궤양의 관계가 대중들의 주목을 받았고 곧이어 위궤양 환자를 대상으로 한 항생제 치료의 효과를 알아보는 대규모 임상이 곳곳에서 진행됐다.
요즘은 건강검진에서 위내시경 검사를 할 때 헬리코박터가 있는지도 확인하는데, 만일 있을 경우 당사자가 원하면 2주간 항생제를 처방해 없애기도 한다. 위궤양이나 위암에 걸릴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한다는 취지다. 한 의과학자의 무모하리만치 집요한 노력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잠재적인 위험에서 벗어난 셈이다. 그런데 헬리코박터는 정말 우리 몸에서 퇴치해야 할 백해무익한 존재일까.
사실 인류는 오랜 세월 대다수가 헬리코박터에 감염된 상태였다. 그런데 20세기 들어 항생제가 만들어지고 처방되는 빈도가 높아지면서 헬리코박터에 감염된 사람의 비율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다른 질환을 치료하려고 복용한 항생제가 헬리코박터까지 죽인 것이다. 물론 최근에는 앞에서 얘기했듯이 헬리코박터를 없애려고 항생제를 복용하기도 한다. 아무튼 그 결과 오늘날 헬리코박터 감염률은 세계 인구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고 특히 선진국일수록 감염자 비율이 낮아 아이들의 경우 6%도 안 된다고 한다.
늘어나는 아토피와 비만의 배후에는…
그런데 최근 헬리코박터와 관련해서 전혀 뜻밖의 연구결과들이 발표되면서 이 박테리아의 실체가 무엇인가에 대해 과학자들이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지난 수십 년 사이 헬리코박터 감염자 비율이 줄어드는 동안 천식이나 아토피 같은 알레르기 질환이 늘어나고 비만과 당뇨병에 걸리는 사람이 늘어나 이 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을지 모른다는 정황이 포착된 것이다. 과학자들은 이를 입증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실험을 했고 그 결과 이 두 현상 사이에는 정말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헬리코박터는 왜 언제는 위궤양을 일으키는 유해균이 되고 언제는 면역계와 내분비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게 도와주는 유익균 역할을 할까.
지금까지 과학자들이 밝혀낸 사실에 따르면 헬리코박터는 균주에 따라 특성이 다양하다. 즉 위의 상피세포를 지나치게 자극해 궤양을 유발하는 헬리코박터는 세포독소를 만드는 유전자를 함유한 균주라는 것. 대장균 대부분은 해롭지 않지만 O157균주처럼 독소를 만들어내는 대장균은 치명적인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같은 헬리코박터 균주라도 숙주(사람)의 면역계 특성에 따라 궤양을 일으킬 수도 있고 아무런 증상을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그렇다면 헬리코박터는 어떻게 천식이나 아토피 같은 알레르기 질환을 억제하는 역할을 할까. 이 과정에 대해서는 아직 많은 부분이 미스터리지만 예를 들어 소아 천식의 경우 헬리코박터가 분비하는 단백질이 면역계의 T림프구 작용을 억제해 천식을 완화한다는 동물실험 결과가 있다. 헬리코박터가 비만이나 당뇨병을 억제한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헬리코박터는 위장 내벽의 상피세포와도 상호작용을 하지만 신경내분비세포에도 영향을 미친다. 가장 중요한 역할은 식욕호르몬인 ‘그렐린’을 분비하는 신경내분비세포의 작용을 억제하는 것. 실제로 항생제를 복용해 위에서 헬리코박터가 사라지면 혈중 그렐린 농도가 올라가고 식욕이 증진돼 체중이 늘어난다는 연구결과가 여럿 나왔다. 헬리코박터는 또 우리 몸의 혈당량 조절에도 관여한다. 헬리코박터가 없을 경우 혈당 신호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해 당뇨병이 생길 가능성이 높아진다.
사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인류의 절반은 헬리코박터에 감염된 상태다. 그럼에도 이들 대다수는 특별한 증상이 없이 잘 살고 있다. 최근 수년 사이 과학자들은 인류가 아프리카를 떠나 대륙 곳곳으로 이동하면서 현지의 특성에 맞게 진화해 인종이라고 부를 정도로 다양한 모습을 띠게 된 과정에서 사람들의 위 속에 있는 헬리코박터도 지역과 인종에 따라 다르게 진화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리고 이런 데이터를 해석한 결과 헬리코박터는 대략 11만 6000년 전부터 인류의 위 속에 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했다. 과학자들은 이 오랜 세월 동안 둘이 함께 진화하면서 서로 공생관계를 맺게 됐다고 설명한다. 즉 헬리코박터는 인체의 면역계와 내분비계의 조절자 역할을 하게 됐다는 것이다.
결국 진화의 맥락에서 보자면 인류와 오랜 세월 공존한 헬리코박터는 기본적으로 유익균이고 일부 변이체가 일부 사람에게 위궤양 같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게 최근의 관점이다. 따라서 요거트를 먹어 장내유익균을 보충하듯이 아이들에게 독소 유전자가 없는 온화한 헬리코박터 균주를 먹여 알레르기나 비만을 예방하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불과 20~30년 전 마셜 박사가 헬리코박터 배양액을 마셔 위궤양을 유발했던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반전이다. 헬리코박터에 대한 지난 10년의 연구결과는 사람과 주변 생명체의 관계를 단순히 ‘친구냐 적이냐’라는 이분법적 사고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과학을 취하다 과학에 취하다 강석기 저 | MID 엠아이디
첫 책 『과학 한잔 하실래요?』로 출간하자마자 2012년 교육과학기술부 우수과학도서, 두 번째 책 『사이언스 소믈리에』로 2013년 미래창조과학부 우수과학도서로 유래 없이 2년 연속 선정된 저자의 세 번째 과학에세이. 더 깊어진 과학적 전문성과 더 넓어진 학문적 지평으로 2013-2014년 과학계의 첨단 이슈를 샅샅이 파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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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기
서울대학교 화학과 및 동대학원(이학석사)을 졸업했다.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동아사이언스 《과학동아》와 《더사이언스》에서 과학전문기자로 일했다. 현재 과학칼럼니스트와 과학책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과학 한잔 하실래요?』(MID, 2012)가 있고 옮긴 책으로 『현대 과학의 이정표』(Gbrain, 2010, 공역)가 있다. 2012년 출간한 저서 『과학 한잔 하실래요?』는 출간 즉시 교육과학 기술부 우수과학도서,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권장도서로 선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