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닮은 집, 당신을 닮은 집
지금 여기 이 땅에서 제 집을 짓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책은 그렇게 제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여 자신의 집을 직접 지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직접 짓지는 않았더라도 자기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공간을 스스로 찾아낸 사람들의 기록이다. 그렇기에 이들의 이야기는 더욱 귀 기울일 가치가 있다.
글ㆍ사진 최지혜
2014.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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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물질은 손을 탄다. 손가락이 닿고, 침이 묻고, 페이지 곳곳 귀퉁이를 접어놓으면 그건 ‘나만의’ 책이 된다. 같은 책을 사서 읽는다고 해도 내 손이 닿은 책과 당신 손이 닿은 책은 엄연히 다르다. 그건 물질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라서, 사람이 머무는 장소도 그 사람을 닮는다. 같은 모양의 책상에서 같은 버전의 컴퓨터와 같은 색깔의 키보드를 쓰지만 각자의 자리마다 뚜렷한 개성이 있듯이 말이다. 물질과 공간이 사람 손을 타는 것처럼, 장소도 사람을 길들인다. 어떤 공간 속에 오래 있다 보면 사람 역시 그곳을 닮아간다. 머무는 공간을 살펴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다.


여기 집과 사람을 함께 읽는 작업을 오랫동안 해온 사람이 있다. 찻집에서 세 시간 동안 이야기하는 것보다 살림집에 삼십 분 들어가 보는 것이 한 인간을 살피는 데 더욱 유효한 방법임을 알게 된 그는 10년 전부터 ‘집이 곧 사람’임을 주장을 해왔다.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여 자신의 집을 직접 지은 사람들, 직접 짓지는 않았더라도 자기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공간을 스스로 찾아낸 사람들을 인터뷰했다.

책에는 앞뜰의 연못이 내다보이도록 계단참에 창문을 크게 낸 집, 벽으로 꽉 막힌 사방에 하늘로만 둥근 창이 뚫린 명상의 방이 있는 집, 큰 살구나무를 품은 단독주택, 책으로 가득 찬 집, 네 귀가 버선코처럼 살짝 들린 집, 수많은 와인잔과 프라이팬이 천정 아래 매달린 집, 소리길과 바람길이 있는 집 등 개성 넘치는 열여덟 명의 집과 사람 이야기가 담겨 있다.

열여덟 채의 집은 하나 같이 그 주인을 닮았다. 마음 놓고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곧 ‘집’이니, 이는 당연한 결과일지 모른다. 공간이 말하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그곳에 사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다.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 자연과 함께 가는 사람, 사색을 필요로 하는 사람, 쉬지 않고 창조하는 사람, 책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는 사람 등. 집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뿐인데 공간을 넘어서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린다.

책장을 덮고 나니 우리 집 생각이 난다. 아주 어렸을 때 2년을 제외하고 나는 줄곧 아파트에서 살았다. 똑 같은 모양의 건물 안에 똑 같이 배치된 몰개성의 집에서 사는 지난 시간 동안 단 한번도, ‘공간’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강렬한 색채의 포스터나 독특한 디자인의 의자를 들여 기분 전환을 한 적은 있다. 또, 예술가의 집들을 찍어놓은 책을 보고 어설프게 흉내를 내 본적도 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건 ‘공간’에 대한 ‘진짜 고민’이 아니었다. 살면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 허물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유일한 공간, 끊임없이 소통할 수 밖에 없는 공간인 ‘집’. 나를 닮은 집은, 또한 당신을 닮은 집은 과연 어떤 집일까?

값비싼 가구나 화려한 장식을 집안 곳곳에 배치한다고 공간의 품격이 올라가는 건 아니다. “공간 안에 들어서면 처음엔 물건의 색과 형태를 보지만 곧 물성이 지닌 결과 질감을 느끼게 되고 결국 그 결과 질감이 만들어내는 공기를 감지하게 된다. 인테리어란 바로 그 공기의 감각을 디자인하는 것”이라는 인테리어 디자이너 마영범의 말처럼, 나에게 어울리는 ‘공기감’을 만들어 내는 것이 진짜 인테리어일 것이다. 남과 나와의 관계를 응시하고 세상과 내가 어떻게 어울려서 살아야 하는지 성찰하는 가장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이 집 짓기라던 한 건축가의 말처럼, 공간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로 거슬러 올라가 시작되어야 한다.

저자의 주장대로, 우리 각자는 자신에게 최적의 공간을 만들어낼 책임이 있다. 살 집을 직접 지을 여건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포기하긴 이르다. 제일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을 떠올려보자. 당장 그곳에 가서 보이지 않는 금을 긋자(가능한 크게!). 금 안의 공간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나만의’ 공간이 되는 것이다. 믿고 있는 가치를 표현할 수 있는 공간, 나의 결과 향이 느껴지는 물건이 숨어 있는 공간, 조용히 사유할 수 있는 공간, 무엇보다 내가 ‘사랑하는’ 공간 말이다.

인생은 공간 안에서 흘러간다. 공간 없이 우리는 존재할 수 없다. 그 때의 사람들은 없지만 그곳은 여전히 그들을 품고 있다. 그래서 그곳에 가면 잊은 줄만 알았던 그 사람들이 떠오른다. 모든 공간은 사연을 갖는다. 그리고 사연이 한 번 깃든 공간은 절대 잊혀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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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의 이야기가 있는 집 김서령 저 | 서해문집
칼럼니스트이자 탁월한 이야기꾼으로 이름난 김서령이 개성 넘치는 18인의 집을 다녀왔다. 이미 10년 전부터 줄곧 “집이 곧 사람이다”라고 외치고 다닌 덕에 이런저런 집 구경을 꽤 다녔다. 그런데 집이 사람이라면, 우리가 지금 앓고 있는 병통이 사는 집과 관련 있다면, 우리 사회의 피로와 불안과 결핍을 풀어줄 집은 어디에 있을까, 본격적으로 팔 걷어붙이고 집 구경에 나섰다. 이런저런 남의 집을 구경하면서 살 만한 살림집을 함께 고민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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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 #김서령의 이야기가 있는 집
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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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B612호

2014.02.20

똑같이 네모난 아파트에서 살다보니 생각도, 감정도 모두 똑같아지는거 같아요~
나만의 이야기가 있는 나를 닮은 집 꾸며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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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혜

좋은 건 좋다고 꼭 말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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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

칼럼니스트, 안동 출생, 경북대 국문과 졸업. 남의 이야기 듣기를 즐겨 급기야 사람을 만나 이야기 듣는 것을 직업으로 삼게 됐다. 사람이 우주이며 한 인간의 생애 안에 가히 우주의 천변만화가 담겨 있다는 생각에 동의한다. 숱한 사람들을 만났지만 지난 세기 초중반 한국 여자로 태어나 우리 역사의 우여곡절을 온몸으로 밀고 온 분들, 그들의 삶 앞에서 전율의 농도가 가장 컸다. 이 책은 그 감동의 기록이다. 앞서 간 사람의 발자국이 우리들의 가장 훌륭한 교과서가 된다. 과일이 서리를 맞아야 단맛이 돌고 향기를 풍기듯 인생도 고난 속에서 익어간다는 것을 믿는다. 여기 실린 이야기들이 지금 행복한 사람에겐 삶의 확장을, 지금 불행한 사람에겐 삶의 깊이를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팔뚝이 잘린 사람 앞에선 손가락이 잘린 고통쯤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앞 세대가 몸부림치며 살아온 이야기가 뒤 세대의 가슴을 울리기를, 그 울분과 통한이 서로를 연대하고 위안하고 사랑하게 만들기를, 더불어 고통을 뚫고 나와 더 너그럽고 강인해진 분들을 통해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통찰해내기를 희망한다. 한때는 국어교사였다가 신문, 잡지에 칼럼을 쓰기 시작했다. 지금은 사라진 잡지 [샘이 깊은 물]에서 인물 인터뷰의 매력에 눈떠 인터뷰 칼럼을 주로 써왔다. 펴낸 책으로 『김서령의 家』,『김서령의 이야기가 있는 집』,『삶은 천천히 태어난다』,『참외는 참 외롭다』 등이 있다. 2018년 10월, 향년 6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