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차에 대해 - <러시>
영혼을 잔뜩 실어서 쓰는 주간 영화칼럼 ‘영사기’를 위해서 개봉영화 7편을 보았건만, 그 무슨 영화를 보든 간에 도무지 가을과 연관 지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이번 호가 낙엽처럼 생명력을 잃어 보인다면, 그건 모두 필자가 심각한 ‘가을무력증’에 빠져 있기 때문임을 고백한다.
글 : 최민석(소설가)
2013.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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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을 빌어서 고백을 하자면, 나는 지병을 하나 앓고 있다.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성기에 음모가 나기 시작한 학생시절부터 이 기구한 역사가 시작되는데, 대입을 앞둔 수험시절은 물론, 고작 닭다리 하나에 영혼까지 팔았던 졸병시절을 거쳐, 취업을 앞둔 대학 졸업시절까지 어김없이 이 질환은 나의 육체와 영혼을 잠식했으니, 그것은 바로 내가 심각하게 ‘가을을 탄다’는 것이다.

 

나는 평소에도 과묵하기 그지없으나, 가을이 되면 마치 뇌에서 언어를 이해하는 센서가 꺼져버린 것처럼 말수가 줄어들고, 카페에 가서 주문을 할 때에도 “늘 마시던 걸로”라고 주문을 한다(대부분은 “도대체 뭘 마셨던 거죠?”라는 반문이 돌아온다. 가을은 외롭다). 그런 탓에 영혼을 잔뜩 실어서 쓰는 주간 영화칼럼 ‘영사기’를 위해서 개봉영화 7편을 보았건만, 그 무슨 영화를 보든 간에 도무지 가을과 연관 지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이번 호가 낙엽처럼 생명력을 잃어 보인다면, 그건 모두 필자가 심각한 ‘가을무력증’에 빠져 있기 때문임을 고백한다.

 

이번에 쓰고자 하는 영화는 <러시: 더 라이벌>이라는 영화인데, 전설적인 두 카레이서가 경쟁자이자 동반자로서 함께 삶을 경주한 이야기이다. 영화 이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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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어째서 이렇게 간단할 수 있냐고 반문한다면, 다시 한 번 지금은 가을임을 비겁하게 밝혀둔다(삶에서 낭만을 빼면 도대체 무엇이 남는단 말인가). 이대로 빠지면 아쉬우니, 영화에 대해 궁금하신 분은 꼭 한 번 보시길. 영사기를 위해 개봉영화 7편을 본 영화광이 감히 추천하는 작품으로, 실제 고증이 완벽하고, 70년대의 정서와 분위기가 멋들어지게 배어있다. 그건 그렇고, 나는 <러시>를 보고 난 후, 운전을 하고 오면서 자동차에 얽힌 추억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밤의 암흑으로 흠뻑 젖은 강변북로에서 나는 쳇 베이커의 을 듣고 있었으니, 2013년 10월 24일의 시계는 속절없이 십년 전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십여 년전 나는 난생처음 내 돈으로 차를 샀다. 이름은 ‘뉴 프린스’였는데, 지금은 단종이 되어 그 흔적마저 찾아볼 수 없는 차다. 당시에도 이미 낡을 대로 낡아 ‘신 왕자’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뉴프린스는 거의 ‘신하’나 ‘몸종’과 같은 대우를 받고 있었다(그러고 보니 자동차 회사의 이름도 대우였다), 이 차는 원래 대단한 카사노바였던 내 친구가 타던 차로, 녀석은 내게 ‘단돈 50만원만’ 받을 테니 차를 넘기겠노라 했다. 그러면서 녀석은 쓸 데 없는 말을 많이도 늘어놓았는데, 우선 “여태껏 내게 입은 은혜나 우정을 생각하면 50만원도 도저히 받을 수 없으나, 단지 태생적으로 스피드를 사랑하는 자신이 이곳저곳에서 물게 된 범칙금의 합계가 50만원이니 그것만 처리해달라”고 했다. 나는 녀석의 우정이 눈물 겨울만큼 고마워서 그 차를 덥석 사진, 못했는데, 그 이유는 당시의 내가 끔찍하게도 가난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녀석은 쓸 데 없는 말을 더욱 덧붙이기 시작했는데, “카 오디오가 차 값보다 더 나가는 것이니 재즈를 틀어놓고 난생 처음 보는 여자와 드라이브라도 한 번 하면, 대부분 하루 만에 자기의 여자가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녀석은 쳇 베이커의 을 크게 틀어놓고 약장수처럼 차의 장점을 설명했다. 그 중 가장 어처구니가 없었던 것은 차의 이름이 프린스, 즉 왕자이고, 색깔이 흰색이라서 덧붙인 말이었다.


“아, 글쎄 여자들이 자지러지면서 ‘백마 탄 왕자’예요? 한다니까. 깔깔대며 난리도 아니야.”물론 당시의 나는 오로지 논리와 객관적 사실, 과학적 토대만을 신봉하던 대학원생이었으나, 무턱대고 녀석의 말에 차를 사기로 했다. 그것은 내가 한 여자에게 완전히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녀석의 말대로, 차 안에서 울려 퍼지는 쳇 베이커의 은 ‘작업송’으로 최고일 만큼 위력적이었다. 문제는 50만 원짜리 고물 프린스에 탄 사람은 정말 곡 제목처럼 자기 맘대로 ‘집에 다시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작가라는 탈을 쓰고 밤마다 도심을 질주하며 납치를 일삼는 현대의 하이드씨, 일리는 없고, 당시의 차는 조수석 문이 안에서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녀석은 약장수처럼 장점만 늘어놓았지, 그 차의 치명적 맹점, 즉 차문이 안에서 열리지 않는다는 ‘부작용’은 쏙 빼놓았다. 나중에 따지자, 녀석은 넉살좋게 차문을 열 수 있는 요령을 가르쳐주며 또 말을 덧 붙였다.


“마음에 들면 그대로 달려버리라고. 어, 문이 안 열려서 어쩌지? 하면서 말이야.”
 
그 탓에 내가 홀딱 빠졌던 여자는 언제나 내가 문을 열어줘야 차에 타고, 다시 문을 열어줘야 내릴 수 있었다. 이게 부끄러운 표현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사실 말이 조수석이지 50만 원짜리 프린스는 일단 이름이 왕자였으니, 녀석의 논리대로 따지고 보면 옆자리는 조수석이 아니라 공주석이었다. 그런데, 공주석이 문도 제대로 열리지 않았으니 내 체면은 땅에 떨어지다 못해 바닥 이리저리 굴러다닐 지경이었다. 그 탓에 나는 언제나 어딘가에 도착하면, 운전석에서 잽싸게 내려 공주석으로 후다닥 이동한 후 숙지한 요령대로 문을 밖에서 열어줄 수밖에 없었다. 다른 여자 같으면, “어째서, 이 따위 고물차를 끌고 다니는거죠”라며 타박할지 모르겠으나, 그녀는 언제나 내가 허둥대며 뛰어서 밖에서 문을 열어줄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었다. 그리고 50만 원짜리 고물차를 끌고 다니는 내가 무안하지 않게 “오빠가 문을 열어주니, 나는 이 문이 이대로 계속 고장 나 있었으면 좋겠어”라고 말했다. 그때는 그녀도 나도 가난했으니, 나는 그 말이 정말로 전액 장학금보다 고마웠다. 

 

지나간 사랑을 두고 이런 저런 말을 하는 건 신사가 할 일이 못 되므로 자제하려 했으나, 나는 결코 신사가 아니므로 말하자면, 그녀는 내가 만난 여자 중 가장 아름다웠고, 가장 마음이 잘 맞았고, 가장 사랑했던 여자였다. 우리 모두 세월의 매질을 맞아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지만, 그 생각만은 변함없다. 어쩌면 이렇게 여기는 데는 고물 프린스를 대했던 그녀의 태도가 작용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오늘 내가 이런 글을 쓰는 것도 영화 <러시>를 봤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니, 따지고 보면 가을이라서 지병이 도진 것일 수도 있다. 확실한 건 없다. 하지만 변함없는 사실이 있는데, 그건 정말 이름만 왕자였던 고물 프린스를 기분 좋게 타고 달렸던 시절이 있었단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절은 종종 내 가슴 안에서 부릉부릉 시동을 걸고 씩씩하게 달려간다. 오늘밤, 고물 프린스는 기름도 닳지 않고, 고장도 나지 않고 그때 우리들이 가지 못했던 흰 모래사장의 해변까지 달려간다.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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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석 #러시 #가을 #영화
6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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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mtoms

2014.01.30

하. 이 남자 누군가 했더니 토르였군... 하지만 난 그 영화보다 훨씬전에 나왔던 캐쉬(2010)라는 영화에서 처음 알았다.. 숀 헨과 같이 출연했는데 생각외로 코믹스런 내용이 재미있었던 기억난다... 생각보다 연기가 괜찮은 배우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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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kl0308

2013.11.22

아직...첫 차가....없는 일인입니다만, 느껴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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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ddo

2013.10.29

최민석 소설가님 버전의 구 남과여 라이딩 스텔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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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석(소설가)

단편소설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제10회 창비신인소설상(2010년)을 받으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능력자> 제36회 오늘의 작가상(2012년)을 수상했고, 에세이집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를 썼다. 60ㆍ70년대 지방캠퍼스 록밴드 ‘시와 바람’에서 보컬로도 활동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