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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밀려오는 파도 - <관상>

바다를 바다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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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쟁이 역시 같은 욕심을 지니고 있다. 자신의 손에서 나온 문장이 무엇이든, 독자의 눈길을 끌어당겨 지면에 붙들어 매고, 엉덩이를 의자에 붙여 움직일 수 없게 하고, 동공은 오로지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활자를 게걸스럽게 탐닉하기 위해서만 움직이게 하고, 손목은 오직 장을 넘기는데 만 쓰게 하는 것, 그리하여 이야기와 문장만으로 상대의 영혼을 포로로 삼아 “제발, 무슨 말이라도 좋으니, 아무 말이라도 써주시오!”라고 외치게 만들고 싶은 것. 그것이 글쟁이가 바라는 것이다.

이집트엔 피라미드가 있고, 야구장엔 마운드가 있다. 그리고 바다엔 파도가 있다. 나는 모든 존재는 각자의 고유성을 입증할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여긴다(참고로, 예스24엔 ‘영사기’가 있습니다. 물론, 참고일 뿐입니다). 만약 바다에 파도가 없다면, ‘과연 그것을 바다라 할 수 있는가’ 하는 존재 자체에 대한 의문이 생길 것이다. 마찬가지로 피라미드가 없는 이집트나, 마운드가 없는 야구장(, 그리고 ‘영사기’가 없는 예스 24의 풍경)은 (나로선) 도무지 상상 할 수 없다(좀 묻어갑시다). 즉, 파도가 없는 바다란 ‘단지 육지가 경계인 호수’, ‘지구라는 거대 행성의 약동하지 않는 저수지’, 혹은 ‘녹아버린 빙하의 유수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바다를 바다이게 하는 것은 파도인데, 그 파도를 특징짓는 것은 또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람이 살아있는 한, 파도는 죽지 않는다. 

자, 폼은 그만 잡고 영화칼럼이니까 이제 영화 이야기를 하자. 소설이건, 영화건 길이를 기준으로 했을 때 우리는 단순히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고자 하는 말만 담백하게 한 후 작별인사를 하고 떠나는 부류, 그리고 하고자 하는 말이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장황하지만 그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 요지 따위야 상관없이 오로지 혼비백산케 할 그 톤과 어투만으로도 매력적인 부류. 나는 둘 다 좋아한다. 굳이 따지라면 후자를 더 좋아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 역시 어디로 흘러가는 지 알 수 없으며, 때로는 지루하게 반복되며, 행여 생의 거대한 이야기 중 조그만 단서 하나라도 눈치 챘을 때 느껴지는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다음 달 헤어질지 모르더라도 새 애인을 만났을 때, 역시 몇 주후면 악마 같은 직장 상사의 실체가 밝혀질지 모르더라도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우리는 거대한 생이라는 책의 한 챕터를 막 펼쳐낸 느낌을 받는다.

장황한 이야기 매력에 빠진 나는 긴 러닝타임의 영화들을 사랑해왔다. <대부>가 그러하고,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가 그러하고, <장고>와 <바스터즈>도 그러하다. 소설 역시 그러하다. 일독을 위해선 독서의 근육이 필요한 <백년의 고독>도, 주인공이 장장 30페이지에 걸쳐 잠자리에서 뒤척이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아령 대용으로 사용해도 좋을 만큼 무거운 <율리시스>도 모두 그러하다.


만약 이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나에게 ‘이야기꾼’이라는 호칭을 허락해준다면, 나는 이야기꾼들을 대변해 한 마디 하고자 한다. 사실, 이야기꾼들에게는 희망이 있다(동의하지 않는다면, 이야기꾼을 희망하는 사람에게는 희망이 있다, 로 바꿔 읽어도 좋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가 끝나기를 아쉬워 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그 호사가의 입에서 무슨 말이라도 나오면 귀를 열고, 눈을 크게 뜨며 들어주며, 이런 대사를 읊어주길 바란다. 

 “거. 똑같은 이야기를 내가하면 재미없는데, 당신이 하면 어째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소?”

글쟁이 역시 같은 욕심을 지니고 있다. 자신의 손에서 나온 문장이 무엇이든, 독자의 눈길을 끌어당겨 지면에 붙들어 매고, 엉덩이를 의자에 붙여 움직일 수 없게 하고, 동공은 오로지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활자를 게걸스럽게 탐닉하기 위해서만 움직이게 하고, 손목은 오직 장을 넘기는데 만 쓰게 하는 것, 그리하여 이야기와 문장만으로 상대의 영혼을 포로로 삼아  “제발, 무슨 말이라도 좋으니, 아무 말이라도 써주시오!”라고 외치게 만들고 싶은 것. 그것이 글쟁이가 바라는 것이다. 

그것이 실현될 때, 글쟁이의 손가락은 지금 무엇을 쓰는지 자각할 틈도 없이 빠르게 움직이고, 흰 종이 위에는 휘갈겨 쓴 검은 글씨들이 마치 독자의 시야를 뒤덮을 메뚜기 떼처럼 자욱하게 내려앉고, 급기야 쓰고 있는 자의 눈조차 붙들어 매어 (자신이 쓰고 있는) 글에 취해 어떻게 이 글을 썼는지 깨닫지 못하는 황홀경에 빠지게 된다. 그러면 스스로도 다음 장에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예견할 수 없으며, 어느새 자신이 쓰는 이야기의 독자가 되어 자기 손 끝에서 창조된 인물들을 응원하게 되고, 그 인물들의 고통에 어느 누구보다 절규하여 수십 번에 걸쳐 질주하듯 움직이는 손가락 위로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경험하지만, 그 눈물을 닦을 새도 없이 손가락은 또 다시 제 갈 길을 바삐 움직이게 된다. 그리고 그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자신의 손가락을 통해 빚어낸 이야기들이 금세 자신을 웃게 만들어 눈동자엔 눈물을 입술엔 미소를 머금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서야, 비로소 자신이 스스로 창조한 이야기의 첫 번째 포로가 되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그때서야 이야기의 주인은 이야기꾼도 아니요, 청자와 독자도 아니요, 오로지 작가의 상상과 망상, 그리고 독자의 기대와 오해 속에 태어나, 긴 여정을 걷고 있는 바로 그 인물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면, 이야기꾼은 인물들 각자가 발걸음을 옮기고 입을 열 때마다, 그 영혼에 빙의되어 임금이 되었다가, 역적이 되었다가, 창기가 되었다가, 열녀가 되었다가, 선비가 되었다가, 노비가 되었다가를 반복하다, 어느 순간 급기야 자신의 내면에 있는 또 다른 영혼에게 간절히 갈구하게 된다. 제발, 이야기가 끝나지 않게 해달라고!


<관상>은 길다. 러닝타임이 140분이다. 영화가 시작될 때 비행기를 탔다면 우리는 북해도에 도착해 있을 수도 있으며,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잠자리를 가졌다면 몇 차례나 가졌을 수도 있다. 그 만큼 길다. 그러나 나는 영화를 보는 동안 속으로 외쳤다. 제발 이야기가 끝나지 않게 해달라고. 그저 이 배우들과 이 시대와 이 분위기에 빠져 있게 해달라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주인공인 내경은 바다를 바라본다. 주인공인 내경도, 주인공과 함께 흥망성쇠를 경험했던 팽헌도, 그 주인공을 흥망성쇠의 길로 이끌었던 연홍도 모두 바다를 바라본다. 이들의 얼굴을 비춘 후, 카메라는 이윽고 바다로 시선을 돌린다. 그곳에는 파도가  끝없이 밀려오고 있다. 비록 영화는 여기서 끝을 내지만,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 그래서 저 극장문을 열고 나가더라도, 당신은 이제 자신만의 다음 이야기를 끝없이 써나갈 것이라는 듯. 그렇게 파도는 이야기처럼, 아니, 이야기는 파도처럼 밀려온다. 

마치 내가 끝없이 키보드를 두드리고 싶은 것처럼 말이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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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최민석(소설가)

단편소설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제10회 창비신인소설상(2010년)을 받으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능력자> 제36회 오늘의 작가상(2012년)을 수상했고, 에세이집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를 썼다. 60ㆍ70년대 지방캠퍼스 록밴드 ‘시와 바람’에서 보컬로도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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