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천 “미칠 수 있다면, 4할은 가능하다”
뇌과학자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가 최근 흥미로운 시도를 한 권의 책으로 엮어 세상에 발표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 혼자만의 시도가 아닌 57명, 각양각색 직업을 가진 야구 애호가들이 집단지성을 통한 이뤄낸 결과물이었다. 이름하여 『백인천 프로젝트』 이다. ‘4할 대 타자는 왜 사라졌나’라는 의문에서 시작된 결과물치고는 놀랍기 그지없다. 백인천 감독의 이름이 프로젝트의 명이자 책의 제목이 된 이유는 그가 바로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유일한 4할 타율의 보유자이기 때문이다.
2013.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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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우리나라 프로야구 원년, MBC 청룡의 선수이자 감독으로 백인천 감독이 세운 4할1푼2리의 타율은 전설이 됐다. 미국 프로야구에서는 1941년 테드 윌리엄스가 세운 4할 6리 이후 4할 타자 등장은 이뤄지지 않았고, 우리보다 오랜 야구 역사를 가진 일본에서는 4할 타자의 등장 자체가 없었다. 이쯤 되면 백인천 감독의 기록이 왜 대단한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감이 잡힐 것이다. 정재승 교수를 비롯한 ‘백인천 프로젝트’ 멤버들은 미국의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가 자신의 저서 『풀하우스』 에서 제기한 ‘시스템의 진화적 안정화로 인해 4할 타자가 사라진 것’이라는 가설을 우리나라의 상황과 데이터를 적용해 입증해 냈다. 하지만 그 가설에도 불구하고 백인천 감독이 세운 기록은 설명할 방법이 없다. 덕분에 백인천 감독은 상식과 예측을 깬 ‘외계인’으로 규정됐다. 불가능한 것을 이뤄낸 사람에게 보내는 찬사(?) 치고는 좀 독특하다. 각설하고, 어쨌든 야구팬의 한 사람으로서 4할 대 타자의 출현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가설은 그리 반갑지만은 않다. 이유야 어찌됐든 프로젝트에 중요한 시발점이 된 백인천 감독의 생각은 어떨까?
노병은, 죽지 않았다!
무시무시하게 배트를 휘둘렀던 전성기의 모습과는 다르지만 두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안광(眼光)의 기백만큼은 청년과 다름없었다. 오랜만에 자신의 이름이 거론 된 것이 한 권의 책 덕분이라는 사실은 그 역시도 신기한 듯했다. 덕분에 가슴에 담아왔던 이야기를 쏟아낼 기회가 생겨 기쁘다고도 했다. 살아있는 전설을 보는 순간은 그렇게 시작됐다.
최근 건강이 좋지 않으셨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으신가요?
1년2개월 전에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져 고관절이 부러졌어요. 완전히 부러졌다는데 난 그것도 모르고 열흘 동안 걸어 다녔죠. 물론 아픈 건 있었지, 그래도 병원에 안가고 버티고 있는데 우리 딸이 아무래도 이상하니 병원에 가보자고 해서 사진을 찍었더니 완전히 부러진 거예요(웃음). 처음 그 소리를 듣고는 ‘난 완전히 끝났구나’ 싶었지. 우리 나이에 뼈가 상하면 끝이거든(그는 70세가 넘었다) 부랴부랴 수술을 하고 철심을 3개 박았어요. 그러다 닷새 전에 철심을 뺐지. 의사는 나이가 있어서 그냥 둬도 된다고 했는데, 난 영 불편했어요. 신기하게 철심을 빼고 나니 절던 걸음걸이도 바로 잡히는 거야.
지난해 초쯤인가, 프로젝트의 누군가에게 전화가 와서 신촌의 카페에서 모임이 있다고 해서 알고 가보게 됐어요. 가서 얘기를 해보니 재미있기도 하고, 한편으로 이렇게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전문적으로 뭔가를 한다는 생각을 못했었는데 신기하기도 했어요.
감독님의 성함이 들어간 책을 봤을 때 소감을 말씀해주신다면?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후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막상 책을 보니 고마움이 앞서더군요. 다만 누구도 무엇 때문에 4할이 가능했다고 답을 낼 수 없는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요. 미국서 테드 윌리엄스라는 선수가 4할을 쳤다는 얘기는 오래전부터 들었어요. 근데 그 선수의 성격이 유별났다고 하더군요. 굳이 나와 공통점을 찾자면 그거인 듯싶어요. 내가 유별나다는 소리는 사실 내 스스로 생각한 것이기 보다 제자들이나 나하고 야구를 같이 한 사람들이 말한 건데, 아무튼 4할 타율이라는 건 나를 포함해 경험한 사람들도 설명하기 힘들어요. 미쳐야지만 가능한 것이거든, 사람들한테 ‘나같이 미쳐야 한다’고 말은 해도 그게 어느 정도인지는 경험해 보지 못하면 모르거든요.
4할 타자, 어떻게 이뤄졌나?
미쳐야 가능하다는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백인천 프로젝트팀’은 4할 타자의 재현은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백인천 감독의 생각은 좀 다른 셈이다. 기록과 통계를 넘어선 그 무엇, 그는 가장 중요한 요소를 정신으로 꼽았다. 그렇다면 그의 4할1푼2리의 신화는 어떻게 쓰이게 된 것일까. 궁금증은 계속 이어졌다.
책에서는 한국 야구에서 4할 대 타자가 나오기 힘들 것이라고 했는데요. 감독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야구 이전에 주위에 환경, 상상을 뛰어넘는 각오 같은 것이 갖춰지지 않으면 좀 힘들다고 봐요. 미쳐야 한다고 했지만, 야구만 하면 미칠 수가 없거든요. 일종의 사명감이 있어야 되요. 내가 일본 프로야구선수로 스카우트 돼서 갈 때 상황이 특수했어요. 국교도 수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을 왜 가냐는 비난이 많았거든. 나로서는 힘겨운 순간이었고 쇼크도 받았지만, 덕분에 더욱 강한 신념을 쌓게 됐거든요. 그 정도의 신념으로 미친 사람이 나온다면 굳이 야구가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두각을 낼 거예요.
4할 타자 불가능을 제기한 그 이유로 선수들의 기량이 상향평준화 됐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감독님이 보시기에 우리나라 선수들의 기량은 어느 수준이라 보시는지?
모든 면에서 다 좋아졌죠. 우리때만해도 일제 강점기를 거치고 한국 전쟁도 있고 해서 어려운 시절이었잖아요. 그때는 배트로 공을 치면 공이 찌그러지던 시절이었어요. 배트도 그렇고…. 정말 어려운 시절이었죠. 지금 후배들을 봤을 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진정한 프로페셔널의 경지를 지향하는 선수들이 많지 않다는 점이에요. 진정한 프로페셔널은 지식은 물론 많은 경험, 단련의 경험이 필요해요. 특히 야구라는 스포츠가 그렇죠. 게임을 할 때는 머리가 필요하지만 단련을 할 때는 머리가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거든요. 그러려면 상당한 인내도 필요하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기(氣)에요. 기가 생기려면 육체적인 고통을 극복하고 단련해야합니다. 거기서 강한 신념이 생기고 거기서 강한 기가 생기거든요.
4할1푼2리를 쳐내셨던 1982년 당시 감독님의 상황은 어떠셨나요?
그때 내 나이가 42살이었어요. 감독을 같이 한 것은 남들이 볼 때는 어떨지 모르지만 더 좋았어요. 단순히 멀리 떨어져 코치만 하는 게 아니라 직접 가까이에서 상대선수들의 컨디션을 체크할 수 있었으니 최상의 코치를 할 수 있었죠. 상대 투수가 지금 뭘 던지려고 하는지가 딱 읽혔어요(웃음). 물론 시합이 끝나면 피곤하긴 피곤했어요. 그래서 당시 기자들이 오해를 많이 했죠. 피곤하니까 시합이 끝나면 인터뷰를 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기자들 중에는 나를 상당히 건방지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죠. 간혹 그런 기자들에게 ‘시즌이 끝나서 성적 나쁘면 그때 날도와 줄 거냐’고 묻기도 했어요. 그때 가서 당신들 비난을 받아도 좋으니까 지금은 두고 봐 달라고 했죠. 역시 성적 좋으니까 아무도 비난하지 않더군요.
솔직히 실감이 안 되는 타율인데요.
간단해요. 10번 나가서 4번 이상 치면 되는 거예요. 야구에서는 3할 정도면 공식적으로 A급 타자로 인정받아요. 나 역시 솔직히 말하면 4할을 친다는 목표는 세운 적이 없었죠. 단지 한국 프로야구가 자리 잡아야 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개인적으로 프로야구 선수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죠. 4할1푼2리는 마지막 타석 전까지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이상하게 마지막 시합을 하는데 유백만 코치가 ‘마지막이니 그냥 쉬는 것이 어떠냐’고 해서 무슨 소리냐고 하고 무시했는데, 그때가 아슬아슬하게 4할이었던 거예요. 첫 번째 두 번째 안타를 치고 세 번째 못 치다가 마지막 타석을 가나는데 또 유 코치가 잡더군요. 나중에 기록 때문이라고 들었는데, 결국 마지막 타석에서도 안타를 쳤죠. 감독으로서 타율 관리가 쉬웠다고 하지만, 전 제 타석에서도 컨디션이 좋은 선수를 대타로 내보내곤 했어요. 확률적으로 봤을 때 내가 칠 확률이 높았지만, 기회를 주고 싶었던 거죠. 개인적인 타이틀 생각은 시즌 내내 한 번도 하지 않았어요.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그런 기록이 세워졌을지도 모르죠.
해외 진출 1호 선수 시절
19세에 일본 도에이 플라이어스(현 닛폰햄 파이터스)에 스카우트 된 그는 곧바로 수퍼 루키가 되지 못했다. 2군 생활 1년 반 만에 1군에 오른 것이다. 한국 선수로서 해외 진출 1호였다고 하지만 그 이면에는 피나는 노력이 존재했다.
19년을 일본 프로야구 A급 타자로 살아오셨는데, 최고의 순간을 꼽는다면 언제일까요?
역시 수위타자가 됐던 1975년 시즌이겠죠. 그때는 눈에 살기가 성성하던 시기였어요. 야구는 아웃 당하면 죽는 거라는 생각으로 했죠. 내가 아웃 당하면 상대편도 아웃시켜야 직성이 풀렸고요. 현역 한창 할 때는 주위사람들이 날 보면 얘기하기가 겁날 정도로 무서웠다고 하더군요(웃음).
당시에는 일본과 국교가 수립되지 않았던 시절인데 입단 초기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이 심하지 않았나요?
처음에는 어려운 게 많았어요. 일제 강점기 일본인을 경험한 아버님께서 편지를 써주셨는데, 그 내용이 아직도 기억나요. 절대 남한테 신세를 지지마라, 남이 싫어하는 일을 해선 안 되고 남이 하기 싫어하는 것을 네가 솔선해서 먼저 해라. 그리고 언제나 나보다도 상대편을 챙기라는 말들이었죠. 우선 내가 그들보다 야구를 못하니까 조금이라도 미움을 받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그때는 목욕탕에 물을 데우려면 불을 때야했는데 그 당번을 도맡아 했죠. 세탁을 할 때도 선배들 옷을 모두 세탁하고, 물론 미운 놈 옷은 빼먹기도 했지만(웃음). 깨끗이 빨라서 갖다놓으면 ‘이야, 이거 누가 했냐’는 말이 나왔고 그렇게 좋은 인식을 심어줬어요. 일본어도 열심히 배웠죠. 좀 지나니까 연습하면 도와주고 폼을 교정하는데 조언도 해주고 그러더군요. 당시에는 생존을 위한 방법이었죠.
처음 2군 생활을 하면서 혈서를 쓰시기도 하셨다고 들었는데요. 당시 하루 일과가 어떠셨는지 또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궁금하네요.
당시에는 인간이 최초로 달에 갔다는 시절이었는데, 오죽하면 달을 친구삼아서 훈련했어요. 달이 비치면 달빛으로 훈련을 하고 안 비치면 훈련을 게을리 해서 달이 화났다고 생각하며 훈련을 했죠.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지만 그렇게 밤새도록 훈련을 하곤 했어요. 예전에 박찬호를 만났을 때 ‘찬호야 너 많이 울었지’ 하고 물으니까 어떻게 아시냐고 하더라고. 나도 같은 경험을 했으니까 알죠. 그런 경험을 한 사람은 롱런할 수 있어요.
감독님의 뒤를 이어 한참 후배들이 메이저리그와 일본으로 진출하는 모습을 보며 흐뭇함도 있으실 텐데요.
박찬호나 추신수는 고생을 했는데 비해 지금 해외진출을 한 선수들은 그런 과정이 없다는 것이 독일 수도 있어요. 그러다 야구 외적인 것에 신경을 쓰게 되면 무너질 수 있거든요. 주위에서 가만히 두질 않아요. 스스로를 경계하며 야구만 생각했으면 해요.
현역 감독 시절 그는 독불장군이라 불릴 정도로 고집 세고 자신만의 방식을 고수하는 감독으로 유명했다. 그로 인해 선수들과 트러블도 종종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곤 했다. 얼마 전 노장인 김응룡 감독이 현직에 복귀한 상황에서 그 역시도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실제 그의 생각이 궁금했다.
현역 감독 시절 호랑이 감독으로 유명하셨습니다. 다시 감독이 되신다면 그때와 같을 까요?
그건 희망사항이지만, 생각이 없지 않아 있어요. 지금까지는 정말 미치다시피 밀어붙였는데 이젠 많은 경험이 있으니까 좀 더 부드럽고, 좀 융통성 있고 그렇게 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해 보죠. 하지만 결론은 역시 ‘그건 아니다’로 끝나더군요(웃음). 그렇게 해서는 제대로 된 야구를 할 수 없거든요. 성공하려면 절대 편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요즘 선수들은 그 단계를 넘기 싫어한다는 것이 문제죠. 어느 정도에서 적당히 하려는 것이 있어요. 적당히 하면 좋을 것 같지만 오래 가지 못하거든요. 야구선수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포기해야 할 것이 많아요.
향후 우리나라에 4할 대 타자가 재등장할 수 있을까요?
물론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요즘 선수들 봤을 때 전부는 아니지만, 조금 안타까운 점이 있어 쉽지는 않을 거라고 봐요. 가장 큰 문제는 프로선수 답지 않은 플레이가 많이 나온다는 거예요. 또 하나 안타까운 것은 야구 해설의 질을 높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해설위원도 끊임없이 공부를 해야 되는데, 전문적인 입장에서 봤을 때 간혹 너무 아닌 이야기를 하는 해설위원이 있어 마음이 편치 않아요. 야구를 보는 일반 팬이나 어린아이들은 그걸 믿을 거 아니에요? 가장 중요한 것은 팀을 야구 전문가, 즉 감독에게 일임해야 한다는 것이에요. 감독 스스로 목표치 성적을 말하게 하고 달성하지 못할 때는 그만 두게 하는 책임을 지우면 그만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우리나라는 시즌 중에도 감독을 너무 흔드는 경향이 있어요.
선수와 감독 시절, 그리고 그 후 찾아 온 뇌경색, 고관절 부상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그의 철학은 더욱 확고해진 듯하다. 하기야 미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데 그 이상은 말해 뭐 할까. ‘우리나라에 4할 대 타자가 나올까’라는 질문은 ‘백인천처럼 야구에 미친 선수가 또 나올까’라는 질문으로 수정되어도 무방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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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982년 한국 프로 야구 원년 MBC 청룡의 감독 겸 4번 타자로 활약한 백인천 선수를 끝으로 한국 프로 야구에서 사라진 4할 타자의 미스터리를 다뤘다. 하지만 오래된 야구 화젯거리를 다룬 단순한 야구학 책은 아니다. 야구학이나 통계학등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적없는 일반 시민들이 SNS를 통해 모여 야구학 미스터리에 도전한 공식 연구 논문이며, 과정이다. 한국 최초의 집단 지성 연구 프로젝트이자, 자발적 창단이기도한 시민 과학의 전개 과정을 추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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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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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황정호
최선을 다해서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합니다. 언제나 꿈꾸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앙ㅋ
2014.07.15
맞는 말이네요.
destinydesigner
2013.09.26
뿅뿅
2013.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