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장기판에서 뛰어 내려 자신의 삶을 산, 왕비 안네
단 한 번의 결혼에서 얻은 교훈으로 자신의 운명을 바꾼 클레베의 안네, 이 언니를 보라. 정략 결혼에 이용당할 작은 공국의 공주로 태어나 전 왕비이자 왕의 사랑받는 여동생으로 자신의 영지에서 살다 죽은 여자, 이 언니를 보라.
글ㆍ사진 박신영
2013.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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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역사에 우리나라의 숙종과 장희빈, 인현왕후 만큼이나 영화와 드라마, 소설로 많이 다뤄진 인물들이 있다. 영국의 헨리 8세와 여섯 왕비들이다. 숙종이건 헨리 8세건, 이 남자들의 아내 갈아치우기와 처형에는 사랑과 변심 외에 다양한 갈등 요소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책을 읽다보면 입맛이 쓰다. 여자들의 궁중 암투나 부적절한 행실, 외모에 대한 언급과 희화화 내용이 많기 때문이다. 왜 책들은 남성 권력자의 문제점과 당시 상황보다 상대 여성의 문제점을 더 강조해 서술하는 것일까?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나 ‘버림받을 만해서 버렸고, 죽일 만해서 죽였다’는 식의 서술이 말이 된다고들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헨리 8세의 초상화, 한스 홀바인 그림 [출처: 위키피디아]



헨리 8세의 왕비들에 대한 서술이 부당한 이유

헨리 8세의 왕비들에 대한 부당한 서술, 그 이유는 역사, History가 말 그대로 His story였기 때문이다. 역사는 남성들이 기록한, 남성들이 활동한 이야기였다. 일부 상류층의 여성들의 삶만 아버지나 남편, 남자 형제, 아들과 관련하여 역사에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것도 남자들이 보는 입장에 따라서만. 그래서 헨리 8세의 첫 부인인 아라곤의 카탈리나(에스파냐 공주, 영어로는 캐서린)은 아들도 못 낳은 주제에 고집불통 늙은 여자여서 이혼당하고, 마녀로 몰려 간통죄까지 뒤집어쓰고 처형당한 둘째 부인 앤 불린은 끼가 넘쳐 남자를 홀리는 여자이고, 왕자 출산 후 사망한 셋째 부인 제인 시모어는 순종적인 착한 아내이고, 결혼하자마자 이혼당한 넷째 부인 클레베의 안네(독일 클레베 공국의 공주, 영어로는 클리브즈의 앤)는 추한 외모 때문에 버림받은 신부이고, 간통죄로 처형당한 다섯째 부인 캐서린 하워드는 몸을 마구 굴린 철부지이고, 여섯째 부인 캐서린 파는 헨리 8세가 먼저 죽었기에 단지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고들 한다. 이거 사실일까?

물론 작가들도 여성 비하를 위해 의도적으로 그렇게 쓴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게 쓴 작가들은 당대에 기록된 역사적 문서들을 보고 썼기에 정확한 사실을 썼노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 사료에는 실제로 그렇게 서술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대에 실존했던 인물들이 직접 보고 들은 후에 기록한 문서라고 다 옳은 기록일까? 난 그렇지 않다고 본다. 그 사람들은 모두 각각의 정치적 입장이나 이해 관계에 따라 그녀들과 관련한 사건에 대해 자신의 사적인 생각을 말하고 썼을 뿐이니까 말이다. 그런 편파적인 기록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은 정확한 역사 서술이 아니다. 내 생각에는, 이럴 경우에는 작가의 바람직한, 약간의 주관적인 해석이 들어간 서술이 오히려 더 정확한 서술인 것 같다.


헨리 8세의 넷째 부인 클레베의 안네

헨리 8세와 관련한 여인들 중, 넷째 부인인 클레베의 안네의 경우는 특히 더 주관적인 해석이 필요하다. 결혼 이전에 상호 교감이 있었으며 어느 정도 행복한 신혼 생활을 보내다가 헨리에게 꼬투리잡히거나 문제가 생겨 이혼, 혹은 처형당한 다른 부인들과 달리, 클레베의 안네는 얼굴을 보자마자 헨리로부터 거부당했다. 그랬기에 그녀는 ‘얼마나 못생겼으면 얼굴 보자마자 이혼당하느냐, 헨리가 얼마나 그녀의 못생긴 외모에 화가 났으면 결혼을 추진한 자신의 총신 토마스 크롬웰을 죽였을까’, 하는 식의 조롱거리로 부당하게 서술되곤 하기 때문이다. 아래의 인용처럼.


헨리 8세의 여섯 부인의 초상화 모음
그 후 재상 크롬웰은 헨리를 설득하여 루터파의 공주 앤(Anne of Cleves)과 결혼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해서 신교국의 동맹을 강화하자는 속셈에서였다. 그 여자가 도착하였을 때 헨리는 이 ‘플란더즈의 암말’을 보고 기겁을 하였다. 헨리는 크롬웰에게 분노를 터뜨리고 말았다. 크롬웰은 헨리가 마음대로 움직여 온 나라의 건축기사와도 같은 존재였지만 처형되고 말았다. 아울러 앤은 이혼당하였다.-「영국사 1(p.163), 해롤드 술츠 저」

홀로 된 헨리를 위하여 크롬웰은 1540년 1월 클리브즈(Cleves)의 앤과의 결혼을 주선했다. 클리브즈(클레베)는 플랑드르 지방에 있는 루터파의 작은 공국이었는데, 크롬웰은 이 결혼을 통해 개신교 세력과의 동맹을 도모하고자 했던 것이다. 결혼식은 치렀지만, 이른바 이 ‘플랑드르의 암말’을 보고 기겁한 헨리는 신방에 들기를 거부하고 결국 결혼을 무효화했다. 이 일로 해서 크롬웰은 헨리의 분노를 사 십 년 권좌에서 쫓겨났고 그의 권력을 시기한 정적들의 공격을 받아 그해 7월에 마침내 목이 잘리고 말았다.-「영국의 역사 上(p.291), 나종일ㆍ송규범 공저」

헨리는 앤에게서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그녀의 육중한 몸매와 늘어진 피부에 혐오감을 느껴 그녀를 ‘플랑드르의 암말’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는 잠시동안 그녀와 같은 침대를 쓰기는 했지만 단 한 번도 관계를 가지려 하지 않았다. 헨리는 구실을 만들어 앤과의 결혼을 무효화했다. -「튜더스(p.400), C.J. 마이어 저」
클레베의 안네의 결혼과 이혼 과정이 기존의 영국사 책에 어떻게 기록되었는지를 위의 세 책을 통해 알아 보았다. 그런데 이 정도는 약과다. 흥미위주로 서술하는 대중 역사서의 경우, 아래와 같이 희화화된 서술도 흔하다. 심지어 미술 관련 책에도 홀바인이 그린 안네의 초상화와 관련하여 그런 서술이 보인다.
다음은 클레베스의 앤, 일명‘ 플랑드르의 암말’ 차례가 되었다. 비록 그녀가 눈에 띌 정도의 추녀이긴 했지만 이 결혼은 정치적인 견지에서 좋은 아이디어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 결혼은 앤이 그다지 매력적인 여성이 아니라고 느낀 헨리가 이혼을 요구함으로써 둘의 짧은 결혼 생활도 끝이 났다. 크롬웰은 애초에 이 결혼을 꾸민 장본인이었기 때문에 불쌍하게 난도질을 당했다. 친구 잘 되라고 호의를 베풀다가 억울하게 봉변을 당할 때가 가끔 있는 법이다.-「유머러스 영국 역사(p.97), 존 파머」

클레베의 안네 초상화, 한스 홀바인 그림

이렇듯 정통 역사서이건 대중 역사서이건, 헨리 8세의 네 번째 이혼 이유로는 클레베 공국의 공주인 안네의 추한 외모가 주로 거론된다. 안네의 외모에 실망한 헨리 8세가 그녀를 ‘플랜더즈의 암말(Flanders mare)’이라고 불렀다고는 하나, 이는 이혼하고 싶어하는 헨리가 한 말이었다. 이를 당대의 주위 사람들이 듣고 기록으로 남겼지만 이 ‘플랜더즈의 암말’이란 표현을 후대인인 우리까지 안네를 평가하는 데에 사용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일까? 헨리는 새 신부를 처녀로 남겨 두며 침대를 같이 사용하기만 한다.다. 그리고 안네의 암내가 심하다며 투덜거린다. 암내란 근접한 거리에서나 맡을 수 있는 것, 안네의 암내는 헨리만 맡고 헨리만 하는 말이다. 그러나 당시 헨리 다리의 종양에서 풍기는 고름내는 같은 방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맡을 정도로 심했다고 한다. 자, 그렇다면 당시 49세로 네 번째 결혼에 나선 비둔하고 썩은 고름내 풍기는 헨리를 늙은 신랑으로 맞은 25세의 새신부 안네는 과연 그에게 만족했을까? 왜 책들은 안네의 입장에서 그들의 결혼과 이혼을 서술하지는 않고 그녀가 못생기고 암내 풍겨서 버림받은 신부였다고만 기록하는 것일까? 이혼 이후 안네는 일반적인 영국 통사를 다룬 책에 등장하지 않는다. 이후 안네는 어떻게 되었을까? 버림받은 신부로, 평생 불행하게 자신의 운명을 원망하며 살았을까?

클레베의 안네는 현재 독일과 네덜란드의 국경 지역에 있던 클레베 공국의 공작 요한 3세의 두 번째 딸로 태어났다. 안네와 헨리 8세의 결혼은 카톨릭 국가인 프랑스, 에스파냐에 맞서 개신교 국가들과 동맹을 맺을 필요에 따른 정략 결혼이었다. 당시 공주들은 외교적 실익에 따라 움직이는 장기판의 말이었다. 상대가 이혼과 아내 처형으로 악명 높은 헨리 8세였지만, 아버지 사후 공작 지위를 계승한 그녀의 남자 형제, 엄격한 신교도인 빌헬름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던 안네는 예비 신랑의 과거에 크게 개의치않고 외국에서의 새출발을 꿈꿨다고 한다.


안네가 결혼 전 살던 클레베의 슈바넨부르크(백조의 성, Schwanenburg)

그러나 1540년 1월. 신부인 안네를 처음 보자마자 신랑 헨리는 크게 실망했다. 한스 홀바인이 그려온 그녀의 초상화를 보고 기대했던 것과 달랐다고 화를 냈다고도 한다. 하지만 당장 결혼을 무효로 돌릴 수는 없었다. 국가간의 결합이라, 모욕감을 느낀 클레베 공작 빌헬름이 전쟁을 선포할 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헨리는 결혼식을 올리고 형식적인 동침을 계속하면서 결혼을 주선한 토마스 크롬웰에게 새 왕비에 대한 불만을 말한다. 그러나 크롬웰은 외교적 이익만을 이야기하며 안네와의 결혼 생활을 계속하라고 권하여 점차 헨리의 총애를 잃어간다. 안네는 전형적인 현모양처 스타일의 교육을 받았고 정숙했지만 아직은 영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다. 헨리의 전 왕비인 아라곤의 카탈리나나 앤 불린에 비해 지적 교양과 재치가 부족했다. 아마 재기발랄한 여자들을 좋아하던 헨리에게 외모보다 이 부분이 더 매력없게 보였을 가능성이 크다. 헨리의 다음 왕비인 캐서린 하워드와 마지막 왕비인 캐서린 파에 비해 안네의 외모가 더 나았다는 다른 기록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어를 못해서 겉으로만 어둔하게 보였을뿐, 안네는 실제로는 영리했다. 그녀는 자신이 어떤 위험한 상황에 처했는지를 알아차리자마자 언행에 신중을 기했다. 헨리 뿐만 아니라 왕의 새 왕비에 대한 마음을 읽고 이번 기회에 왕의 환심을 사고자하는 궁정의 귀족들에게도 꼬투리를 잡히지 않도록 조심했다. 이미 왕의 관심은 자신의 시녀인 10대 소녀 캐서린 하워드에게 가 있다는 것을 알고 안네는 헛된 기대를 버린다. 이혼을 거부하고 명예를 추구하다 유폐된 첫 왕비 카탈리나도, 이미 다른 여자에게 빠져서 사랑이 식은 남편에게 마녀로 몰려 간통죄까지 뒤집어쓰고 비참하게 처형당한 둘째 왕비 앤 불린도 되지 않겠다고 안네는 다짐한다.


영리했던 안네

한편 헨리는 이혼 방법에 대해 고민한다. 종교개혁까지 하며 첫 왕비인 아라곤의 카탈리나와 이혼할 때와 달리 이 시기는 이미 왕이 영국 국교회의 수장이었기에 교황청의 허가를 받을 일도 없다. 성적 결합이 없었기에 안네만 동의하면 이혼이 아니라 혼인 무효로 돌려 간단히 끝날 일이었다. 문제는 안네의 친정인 클레베 공국과의 전쟁 가능성이었다. 헨리는 안네가 자신이 받은 모욕을 고자질하고 클레베 공작 빌헬름을 부추겨 전쟁을 일으킬 것을 걱정, 안네에게 오가는 편지들을 뜯어 조사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안네는 지혜롭게도 영국에서의 생활에 만족한다는 내용만을 편지에 써서 친정에 보낸다. 자칫,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갇혔다가 처형당할 수도 있었던 위험한 순간이었다. 긴장 속에 반년이 흐른다. 안네는 이혼을 원한다는 내색도 먼저 보일 수 없었다. 헨리의 남자로서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 또한 위험했기 때문이다. 안네는 자신이 매력적인 왕을 몹시도 원하고 그의 사랑을 갈구하고 있다는 허영심은 왕에게 심어주면서, 동시에 성공적으로 이혼하고 살아남아야 했다. 어려운 일이었다.

7월 11일에 안네 왕비는 추밀원의 요청에 따라 왕에게 편지를 써서 이혼을 공식인정했다. 편지 속에서 그녀는 힘겹고도 슬픈 일이지만 최고로 존귀한 왕에게 품은 큰 사랑으로 이혼 판결을 인정한다고 확언했다. “판결 결과와 폐하와의 지고지순했던 결혼생활을 고려해서 스스로를 폐하의 아내로 여길 수도 없고, 또 그러지도 않을 작정입니다.” 그러면서도 폐하의 고귀한 존재가 되는 기쁨을 누리고 싶어서 다음과 같이 썼다. “폐하가 절 누이로 여겨주시는 것에 만족하며 겸허히 감사드립니다.” 그녀는 왕의 무병장수를 기원한 뒤에 마지막으로 서명을 했다. “폐하의 미천한 여동생이자 종이며 클레브스 공국의 공주인 안네로부터.”
사실 이 외교술의 걸작품은 추밀원에서 치밀하게 계산해서 짜낸 작품이다. 확인 편지로써 혼인 무표 판결에 정당성을 부여한 것은 물론, 왕비가 상실감에 젖어 있음을 암시해서 왕을 기분좋게 만들어준 것이다 안네는 예상과 달리 이혼으로 인해 그리 큰 상처를 입지 않았다. 오히려 굴욕적인 결혼의 덫에서 벗어나 난생 처음으로 홀로 서는 온전한 자유를 맛보게 되었다.-「헨리 8세와 여인들 2(pp.162~163), 앨리슨 위어 저」


1540년 7월 12일, 안네와 헨리 8세의 결혼은 공식적으로 무효화되었다. 안네는 이혼 후 ‘왕의 사랑받는 여동생(the King's Beloved Sister)’이 되어 켄트 지방에 있는 히버 성을 비롯한 영지와 후한 연금을 받고 영국에 정착한다. 이후 안네는 왕의 재혼을 열렬히 찬성하여 두 왕비와 친하게 지내고 왕실 행사에 가족으로 존중받으며 참석하고, 헨리 8세의 자녀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 특히 비슷한 나이 대의 메리(헨리 8세와 첫 왕비 아라곤의 카탈리나 사이에 태어난 딸)와는 친구처럼 지냈다. 살아남은 왕비 안네는 헨리가 다섯째 왕비 캐서린 하워드를 처형하는 것도, 한때 형식적 신랑이었던 헨리 8세의 죽음도, 여섯째 왕비 캐서린 파의 죽음도, 헨리 8세의 아들 에드워드 6세의 죽음도, 9일 여왕이었던 제인 그레이의 처형도 다 목격한 튜더 왕가 역사의 산증인이 되어 1553년 10월 메리 1세의 대관식에 참석한다. 안네는 재혼을 하지도, 친정 모국인 클레베 공국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자신의 영지를 다스리며 전원 생활을 만끽하다가 1557년 첼시에서 사망한다. 마흔 두 살 생일 몇 주 전이었다.


드라마 <튜더스> 중 클레베의 안네 역을 맡은 배우 사진

물론 안네의 생존 이유에는 안네의 지혜로운 처신뿐 아니라 여러 상황이 같이 얽혀 있었다. 안네는 첫 왕비인 아라곤의 카탈리나와 마찬가지로 공주 신분이었다. 헨리는 자신의 신하의 딸인 앤 불린이나 캐서린 하워드의 경우처럼 안네를 쉽게 처형할 수는 없었다.

당시 영국 궁정 내의 권력 암투 상황도 안네에게 유리했다. 헨리 8세의 총신이었던 토마스 크롬웰은 앞서, 불린가의 권력을 빼앗고자 둘째 왕비 앤 불린의 처형에 적극적으로 나선 바가 있다. 그런데 이번 안네와의 결혼은 크롬웰 자신이 신교도 국가 동맹을 위해 주선했기에, 크롬웰은 헨리에게 동맹의 유익함을 설득하며 안네와의 결혼 유지만을 권하게 된다. 이에 헨리의 불만을 알아 차리고 다음 왕비가 되는 캐서린 하워드를 내세워 권세를 얻고자하는 노퍽 공작 토마스 하워드의 공격에 의해 토마스 크롬웰은 권력을 잃고 목숨까지 잃게 된다. 엄격한 개신교도인 크롬웰은 당시 프랑스 내 영국의 영토였던 칼레에 개신교도들을 보호하고 있었는데 이 사실이 헨리에게 발각되자 분노한 헨리는 크롬웰의 정적들이 그를 공격하도록 놔 둔 것이다. (헨리 8세가 로마 교황에게서 독립하는 종교개혁을 하기는 했지만 그가 성립한 영국 국교회의 교리는 개신교보다 카톨릭에 가까웠다. 헨리는 보수적인 입장에서 개신교도들을 탄압했다.) 그밖에 헨리 8세가 영국의 종교 개혁 중 압수한 수도원의 재산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국내에 형성된 불만을, 이 일을 맡아서 한 크롬웰을 희생양 삼아 해결하려 했던 이유도 크롬웰 처형의 한 이유였다. 국제 정세도 마침 카톨릭 국가들과 사이가 좋아졌다. 굳이 클레베 공국과 동맹을 유지할 필요도 없어졌기에 신교도 국가와의 동맹을 내세운 크롬웰의 결혼 권고는 이제 가치가 없어졌다. 이렇게 살펴보았을 때 앞서 인용한 대중 역사서에 서술되어 있듯, 크롬웰의 처형이 단순히 못생긴 신붓감을 잘못 주선한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런 해석은 안네 외모의 추함을 더욱 부각시키는 편견만을 독자에게 조장할 뿐이다. 여하튼, 만약 크롬웰이 안네에게 실망한 왕의 마음을 알자마자 앤 불린 때처럼 얼른 왕비를 제거하는 음모 실행에 나섰다면, 아마 안네의 운명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이 점에서 안네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결혼과 이혼을 통한 헨리 8세의 속셈

안네와의 이혼 이후 헨리의 다섯째 왕비가 된 캐서린 하워드를 제거할 때는 하워드 집안의 권력을 노리는 크랜머가 공격에 나선다. 이렇게 헨리 8세의 결혼과 이혼 소동에는 영국 내 권력자들간의 암투와 국제 정세가 얽혀 있었다. 그리고 헨리는 이를 이용해 의회와 귀족, 신학자와 법률가들을 길들이고 자신의 절대 권력을 구축한다. 결코 헨리 8세의 결혼과 이혼 소동은 헨리의 사랑 놀음이나 여인들의 외모나 성격, 품행의 문제로 일어난 단순한 희비극이 아니었다. 우리나라 숙종 시기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중전 자리 다툼에 서인과 남인 세력 다툼과 이를 왕권 강화에 이용한 숙종의 속셈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안네의 삶을 읽을 때에는 헨리 8세가 실제로 말한 ‘못생긴 플랑드르의 암말이라는 사실’이 그대로 안네에 대한 평가로 기록된 역사서보다, 저자의 의도가 많이 들어간 허구의 역사 소설을 통해 읽는 것이 오히려 더 안네의 ’사실적인 모습‘을 접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 아닐까. 물론 그 허구는 여러 사람들이 서술한 1차 사료들을 가지고 다각도로 접근해서 재구성한, 진실에 근접하고 정당한 허구여야만 한다. 그런 생각으로 여기 내가 읽은 책들 중 안네에 대해 가장 호의적으로 서술한 소설의 한 구절을 소개한다. 이혼 후에도 늘 언행을 조심하며 살던 안네가 헨리 8세 사망 후 독백하는 부분이다.
나는 내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 과거에 헨리의 칼날만 피할 수 있다면 내 뜻대로 내 인생을 살겠노라고, 정당한 권리를 지닌 여자로서 세상에서 내 몫을 하겠노라고 약속했다. 나는 그 약속을 지켰다.
나는 이제 자유로운 여자다. 그에게서도, 그리고 마침내 공포에서도 해방되었다. 이제 누군가 한밤중에 문을 두드리더라도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떨지 않을 것이다. 낯선 사람이 집에 찾아와도 왕이 보낸 첩자가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 내게 궁정 소식을 물어도 혹시 함정에 빠지는 건 아닌지 두려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앞으로 고양이를 키울 것이고 나를 마녀라고 해도 겁내지 않을 것이다. 춤도 출 것이고 헤픈 여자라 불릴까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말을 달려서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갈 것이다. 흰 바다매처럼 하늘 높이 훨훨 날아오를 것이다. 나만의 삶을 즐기며 살 것이다. 자유로운 여자가 될 것이다.
여자에게 자유는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다.
-「불린가의 유산 2(p.311), 필리파 그레고리 저」
위의 소설에서 클레베의 안네는 지혜롭게 살아남아 당시 귀족 여성으로서는 보기 드문 자유를 누린다. 그런 점에서 소설 제목인 <불린가의 유산>은 중의적이다. 실제로 안네는 이혼이 댓가로 히버 성을 영지로 받는데, 그 성은 원래 불린 가의 소유였다. 앤 불린은 히버 성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안네가 앤 불린의 삶에서 얻은 교훈만이 불린가의 유산인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안네와 앤, 둘은 이름도 같다. 하지만 인생의 끝은 판연히 다르다. 프랑스에서 배운 세련미와 밀당 기술로 왕의 마음을 사로잡아 왕비가 된 후 아들을 못 낳자 처형당한 앤, 그리고 다른 왕비들의 삶에서 교훈을 얻어 왕비 자리를 내놓고 자유를 얻은 안네.


앤 불린이 어린 시절을 보낸 히버 성. 클레베스의 안네가 영지로 받았다. [출처: 위키피디아]

누군가는 안네의 삶을 보고, 이런 것이 뭐가 지혜로운가? 남자 권력자의 비위를 맞춰주고 자신의 이익을 챙겼을 뿐 아닌가? 그런 점에서는 다른 왕비들과 같지 않은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렇게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혼 이후 안네의 삶을 보면 그녀는 정말로 앤 불린을 비롯한 다른 왕비들의 삶에서 교훈을 얻고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간 여자라는 생각이 든다.


안네는 자유를 얻었다

그녀는 친정 나라로 돌아가서 다른 외교적 목적을 위한 정략 결혼에 재활용당하지 않았다. 이 점은 혼인 무효와 사별 후 고국에 돌아가 다시 정략 결혼을 거듭한 다른 귀족 여성들과 확실히 다른 점이다. 안네는 영국에 남아 스스로 자신의 영지를 다스리며 전원 생활에 행복을 느꼈다. 또, 그녀는 헨리 8세 사후 그녀의 재산과 지위를 탐내는 남자들이 접근해도 재혼하지 않았다. 이 점은 나이 많은 남자와 정략결혼을 해서 어린 나이에 이미 두 번 과부가 된 후 헨리 8세와 세 번째로 결혼한 마지막 왕비 캐서린 파와도 달랐다. 당대의 가장 지적인 여성으로 손꼽히던 그녀는 헨리 8세 사후 그녀의 지위와 재산을 이용하여 권력을 획득할 욕망에 눈먼 토마스 시모어와 네 번째로 결혼했다. 그러나 남편의 배신으로 괴로워하며 아이를 낳은 후 35세에 사망했다. 안네는 이 모든 삶을 생생한 역사로 다 목격하고 헨리 8세의 아내들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아 남았다. 나는 궁금하다. 그녀는 과연 이 모든 과정을 다 지켜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단 한 번의 결혼에서 얻은 교훈으로 자신의 운명을 바꾼 클레베의 안네, 이 언니를 보라. 정략 결혼에 이용당할 작은 공국의 공주로 태어나 전 왕비이자 왕의 사랑받는 여동생으로 자신의 영지에서 살다 죽은 여자, 이 언니를 보라. 그녀는 남성 권력자들의 장기판의 말로 살아갈 운명을 거부하고 스스로 장기판에서 뛰어 내려 자신의 삶을 살았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내 운명은 다른 사람이 쥐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공정한 게임이 아니라 이미 승패는 정해져 있는 게임에서 내가 엑스트라 역할만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타인들이 나에 대해 이미 부당한 결론을 내려놓고 멋대로 나의 가치를 낮춰 말할 때, 클레베의 안네, 이 언니가 살아간 방식을 보라.

그리고 어차피 질 게임, 난 니들이 정한 규칙대로 게임하느니 차라리 안 할거야,라고 조용히 외치고 마음 속에서 장기판을 엎어 버려라. 그리고 훌훌 털고 당신이 원하는 길을 가라. 사람들은 그런 여자들을 못생겼다느니 별나다느니 그래서 버림받았다느니 맘대로 말하겠지만, 그건 우리가 알 바 아니다. 클레베의 안네, 남들이 정한 대로 살지 않는 삶에도 여자의 행복이 있다는 것을 이 언니가 말해주고 있으니까. 버림받은 여자가 불행하다는 것, 그건 장기판의 졸로 평생 살아가다 죽는, 그런 용기없는 여자들이나 하는 말이니까. 그러나 우린 내 인생이란 장기판의 영원한 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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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베의 안네 #헨리 8세 #튜더스
3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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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ara20

2016.02.01

자신의 영지에서 자유롭게 살았다. 목숨을 유지하는 현명함이 있었다는 말만 계속 되풀이 하고 있군요. 남자들의 시각에서 여성을 재단하는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점은 알겠지만 어찌보면 자기 목숨 하나 부지하기 위해 전전긍긍한 비참한 삶으로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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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2014.07.07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지혜롭게 영위하기란 참 많은 인내를 필요로 합니다.결국 자유를 얻은
그녀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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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2013.09.06

역사팩션의 의미를 다시 한번 확인하네요. 사실과 허구, 역사적 가치와 상상력이야말로 정확한 판단력을 갖게 하는 독서 덕목인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소개해주신 [불린가의 유산]이 눈에 들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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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영

한글을 뗀 이후로 책 읽고 글 끄적거린 것 외에는 한 일이 없다. 《소년중앙》과 계몽사 세계 명작 동화 전집, 삼중당 문고와 창비 시선, 문학과 지성사 시선을 통해 세상을 배웠다. 숙명여대 국문과 입학 후 대하 역사소설을 쓰겠다는 커다란 꿈을 품고 사학을 부전공했다. 그러나 신춘문예에 몇 번 떨어진 이후 그동안의 과대망상과 능력 부족을 깨닫고 겸허하게 독자로 돌아가기로 결심, 한동안 조용히 책 읽고 밥벌이를 하며 살았다. 그렇게 혼자 놀다 보니 너무 심심해서 블로그(blog.yes24.com/mkkorean)에 ‘껌정드레스’라는 닉네임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래, 무작정 읽고 쓰다 보면 언젠가는 되겠지’라는 게으른 배짱으로 역사를 공부하며 독서 기록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기록들이 모여 어느새 한 권의 책이 되었다. 그 책이 2013년 1월 출간한 <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이다.지금까지 문학, 역사, 인간이라는 세 개의 열쇠로 세상을 여는 역사 에세이를 쓰는 데 주력해 왔다. 앞으로도 익숙한 이야기들에 낯선 질문을 던지는 즐거운 탐험을 계속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