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이고 싶은 기억, 살리고 싶은 기억 - 김영하『살인자의 기억법』
알츠하이머에 걸린 살인마 이야기. 김영하 작가가 『너의 목소리가 들려』 이후 1년여 만에 들고 나온 신작 『살인자의 기억법』이다. 149쪽의 짧은 소설은 숨가쁘게 읽히지만 작가에 말에 따르면 “유난히 진도가 나가지 않아 애를 먹은 소설”이다.
2013.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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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그림자의 주인공은 왼손에 책인지 노트인지 모를 두꺼운 책자를 들고 거리를 걷고 있다. 70세 노인 김병수는 전직 수의사. 30년 동안 살인을 해오다 25년 전, 살인을 멈췄다.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을 거야”라는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정교한 살인 일지를 쓰기 위해 문화센터 시 창작 수업을 듣는 주인공 김병수는 “살인은 생각보다 번다하고 구질구질한 작업”이라고 말한다.
스스로 ‘천재적인 살인자’라고 칭하는 김병수. 아니, 그동안 저지른 모든 살인의 공소시효가 지났으니 천부적인 살인자가 맞을지 모른다. 금강경을 읽고 반야심경을 읊는 김병수는 알츠하이머 환자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손녀 뻘로 보이는 딸 은희와 함께 살며, 동네에 나타난 연쇄살인범 ‘박주태’가 은희를 죽일 것이라 확신하고 두 사람의 관계를 예의주시한다. 맹목이 일상이 되어 버린 김병수는 딸을 살리기 위해 매 순간을 기록하기로 한다. 수험생들이 오답노트를 쓰듯, 딸을 구하기 위한 또 다른 완벽한 살인을 상상하며 일기를 쓴다. 사실인지 허구인지 알 수 없는 기록들은 어쩌면 누구를 죽이고 살리기 위함에 아닌, 알츠하이머 환자 김병수 자신이 살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살인자의 기억법』 첫 장을 열었을 때, 김영하의 첫 장편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가 떠올랐다. 타인의 자살을 도와주는 자살안내인의 이야기. 살인을 자행하진 않지만 그는 2차적 살인자였을지 몰랐다. 두 작품은 모두 죽음을 다루는 동시에 ‘기억’을 주요 텍스트로 사용했다. 완벽한 살인을 위해 살인일지를 적는 김병수와 자살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대신 기록해주는 작가. 이들은 누군가의 죽음 앞에 서서, 또는 뒤에 서서 증언을 한다. 누구 하나 보지 못하더라도 기록의 쾌감을 즐긴다.
“오래 전 과거는 생생하게 보존하면서 미래는 한사코 기록하지 않으려 한다. 마치 내게 미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거듭하여 경고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계속 생각하다 보니 미래라는 것이 없으면 과거도 그 의미가 없을 것만 같다.”(p.116) | ||
“오이디푸스는 무지에게 망각으로, 망각에서 파멸로 진행했다. 나는 정확히 그 반대다. 파멸에서 망각으로, 망각에서 무지로, 순수한 무지의 상태로 이행할 것이다.”(p.129) | ||
김영하 작가는 오래 전부터 기억에 대한 관심을 작품 속에 표출해왔다. 이유인즉, 작가에게는 10살 때 연탄가스 중독으로 그 이전의 기억을 잃은 과거가 있다. 작가가 아닌 누구라도 유년기를 추억하는 일은 즐거운 일. 그것이 힘겨운 기억일지언정 지나보면 추억이 될 법한 일들이 더 많은 법이다. 김영하 작가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여자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내 머리 속의 지우개>의 각색을 맡기도 했다.
“사람들은 모른다. 바로 지금 내가 처벌받고 있다는 것을. 신은 이미 나에게 어떤 벌을 내릴지 결정을 내렸다는 것을. 나는 망각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p.144) | ||
- 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저 | 문학동네
수식어가 필요 없는 작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 김영하다. 올해로 데뷔한 지 19년. 하지만 그는 독보적인 스타일로 여전히 가장 젊은 작가다. 그의 소설은 잔잔한 일상에 ‘파격’과 ‘도발’을 불어넣어 우리를 흔들어 깨운다. 『살인자의 기억법』에서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은퇴한 연쇄살인범이 점점 사라져가는 기억과 사투를 벌이며 딸을 구하기 위한 마지막 살인을 계획한다. 아무렇지 않게 툭툭 던지는 잠언들, 돌발적인 유머와 위트, 마지막 결말의 반전까지, 정교하고 치밀하게 설계된 이번 소설에서 김영하는 삶과 죽음, 시간과 악에 대한 깊은 통찰을 풀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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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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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엄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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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yj314
2017.08.08
뿅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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