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필리핀에서 막을 내린 아시아 남자 농구 선수권대회에서 대한민국 남자농구 대표팀은 16년 만에 세계 농구 선수권대회 출전 티켓을 획득했다. 16년 만에 세계 무대 출전권을 획득한 성과 못지 않게 더욱 반가웠던 것은 남자 농구 대표팀이 보여준 경기력이었다. 남자 농구 경기를 보면서 이처럼 설레고 흥미진진한 기분을 만끽했던 적이 상당히 오랜만이다. 마치 20년 전인 1993년 겨울에 느낀 그런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1990년대 들어 중, 고등학생 사이에선 농구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남자 농구 드림팀을 통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미국 프로농구(NBA)의 슈퍼스타들의 화려한 플레이는 보는 이들의 시선을 황홀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매직 존슨, 래리 버드, 마이클 조던, 찰스 바클리, 패트릭 유잉, 레지 밀러, 칼 말론, 존 스탁턴 등 개성이 뚜렷하고 화려한 개인기를 보유한 슈퍼스타들의 플레이를 지켜 보면서 어떻게 190cm가 훌쩍 넘는 장신 선수들이 전혀 어색하지 않게 유연함과 순발력을 과시할 수 있을까 하는 경외감에 빠져들곤 했다.
국내 농구는 이충희, 김현준, 최철권 등 180cm 초반의 슈팅 가드 포지션에 있는 선수들의 아기자기한 플레이가 팬들을 매료시켰지만, 신장이 195cm를 넘어가는 선수들은 미국 NBA 선수들의 유연함과 민첩함을 기대하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특히 2m를 넘어서는 이른바 ‘거인급’ 센터 선수들은 상당한 희소성을 지녔지만 동시에 부자연스러운 이미지가 늘 따라다녔다. 대표적인 선수가 남자 농구의 경우 한기범(207cm), 여자농구의 경우 한국화장품 간판 센터로 활약했던 김영희(202cm) 등이었다. 한기범의 경우 김유택(197cm)과 더불어 중앙대 시절부터 트윈 포스트를 구축하여 높이의 우위를 과시했지만. 키에 비해 지나치게 호리호리한 체구가 걸림돌이었다.
과연 언제쯤 우리 농구 무대에도 2m가 넘는 거구의 센터들이 유연함과 민첩함을 동시에 겸비하여 능수 능란하게 덩크슛과 블록슛을 구사하는 장면이 나타나게 될 것인지 가수 이승환의 노래 ‘덩크슛’의 가사처럼 주문이라도 외워야 하는 심정으로 학수 고대하던 것이 당시 농구팬들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주문은 오래지 않아 실현되었다. 1993년 겨울은 대한민국 농구의 터닝 포인트로 기억될 만하다. 농구에 대한 국민적인 관심이 증폭되기 시작한 시발점이었으며, 농구라는 컨텐츠를 더욱 맛깔스럽게 해줄 다양한 무대장치들이 마련되었다. 1990년대 초부터 공중파 방송을 통해 꾸준히 선보인 NBA 중계방송, 그리고 중, 고등학생 사이에서 시험 족보처럼 번지던 일본 만화 ‘슬램덩크’, 장동건, 손지창 등 당대 최고의 청춘스타와 ‘다슬이 신드롬’을 일으키게 만든 심은하가 함께 공연한 농구 드라마 ‘마지막 승부’, 그리고 당대 최고 인기가수 중의 한 명이었던 이승환의 노래 ‘덩크슛’ 등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모은 대중문화 컨텐츠 들이 농구라는 스포츠를 소재로 삼으면서 농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확산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다양한 무대장치 위에 선보이게 될 농구라는 컨텐츠였다. 당시 농구대잔치는 다소 뻔한 결과로 팬들에게 식상함을 안겨주던 상황이었다. 허재, 강동희, 김유택, 한기범 등의 초호화 멤버들을 앞세운 기아자동차가 1988-1989 농구대잔치부터 내리 5연속 우승을 거머쥐면서 독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와 현대전자는 기아자동차의 벽에 번번히 가로막혀 좀처럼 기를 펴지 못했다. 대학팀인 연세대가 1990년 농구대잔치부터 돌풍의 조짐을 보였지만 실업팀의 높은 벽 앞에 번번히 주저앉고 말았다. 1993-1994 농구대잔치는 시작부터 심상치 않은 조짐을 풍겼다. 기존의 남자농구 센터에 대한 패러다임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은 신인이 선을 보이면서 기존 판도에 큰 지각변동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바로 휘문고를 졸업하고 연세대에 입학한 93학번 새내기 센터 서장훈이었다.
국보급 센터 서장훈(출처 : KBL)
국보급 센터 서장훈의 등장
휘문고 재학시절부터 2m가 넘는 큰 키와 빠른 기동력을 보유하여 주목받았던 서장훈은 고등학교 졸업반 당시 대학 농구 라이벌인 연세대와 고려대의 집요한 스카우트 공세를 받으며 화제를 일으켰다. 결국 서장훈은 연세대를 택하였고 (최근에 ‘무릎팍도사’에 출연하여 연세대를 선택한 이유를 밝히기도 했는데, 대부분의 수험생들이 연세대를 택하는 흔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 연세대는 쾌재를 부르게 되었다.
연세대는 1990년 문경은, 1991년 이상민 등이 연이어 입학하면서 농구대잔치에서 삼성전자, 기아자동차 등의 실업 강호들을 격파하는 이변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돌풍은 태풍으로까지 진화하지 못했지만 연세대의 반란은 기존 실업강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만했다.
포인트 가드 이상민, 슈팅 가드 김훈, 스몰 포워드 우지원, 문경은, 그리고 파워포워드 겸 센터 김재훈 등의 탄탄한 멤버에 센터 서장훈의 가세는 연세대의 돌풍에 ‘화룡점정’을 찍은 것이나 다름 없었다.
207cm의 거대한 신장에 빠른 순발력과 기동력을 보유하여 자연스럽게 덩크슛과 블록슛을 구사하는 모습은 기존 농구대잔치에서 접할 수 없는 이른바 ‘혁신적인’ 플레이였다. 서장훈이 리바운드를 장악하자 기존의 문경은과 우지원 등의 슈터들은 편안하게 외곽슛을 구사할 수 있었고, 그들이 마음먹은 대로 슛은 들어갔다. 폭발적인 외곽슛에 든든한 센터가 버티고 있으니 가드 이상민의 볼배급의 범위는 LTE-A처럼 빠르게 확산되었다.
패기와 기술력을 동시에 겸비한 연세대의 돌풍은 1993-94 농구대잔치 최고의 화두로 떠올랐고 잠실학생체육관은 연세대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연일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연세대는 당대 최강 기아자동차와의 맞대결에서도 연장까지 가는 대접전 끝에 종료 직전 김훈의 절묘한 버저비터 드라이브인으로 승부를 마감 지으며 최고의 명승부로 장식하였다.
최강팀 기아자동차마저 잠재운 연세대의 기세는 거칠 것이 없었다. 라이벌 고려대와의 대결에서도 서장훈의 골밑 장악과 문경은의 신들린 듯한 외곽포를 앞세워 압승을 거두면서 상승세에 불을 지핀다. 거칠 것이 없는 연세대의 상승세는 그 해 농구대잔치 플레이오프까지 이어졌고 결국 연세대는 결승에서 상무를 3승 1패로 제압하고 농구대잔치 사상 처음으로 대학팀이 우승을 거머쥐는 장면을 연출한다.
1993-94 농구대잔치에서 연세대는 총 22번 경기를 치루었고 단 1번만 패했다. (상무와의 결승 3차전) 당시 신입생 신분의 서장훈은 경기를 치를수록 기량이 진화하면서 당시 농구대잔치 한 게임 최다 리바운드(26개), 최다 블로킹(10개) 기록을 전부 갈아치우는 기염을 토했다.
서장훈을 앞에 두고 골밑으로 돌진하는 것은 마치 수능 120점(1994년 당시에는 수능이 200점 만점이었음)을 받고 서울대에 배짱 지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만큼 서장훈의 벽은 빈틈이 없었고 그로 인해 그에게 ‘골리앗’이라는 별명이 붙게 된다. 당시 농구대잔치 결승전에서 192 cm의 정재근이 서장훈을 앞에 두고 원핸드 덩크슛을 꽂은 장면이 세간의 화제를 모을 정도였다. 정재근의 폭발적인 탄력도 화제 거리였지만, 서장훈이라는 거대한 장벽을 앞에 두고 과감한 슛을 연출할 수 있다는 자체가 더 큰 화제 거리였다. 그만큼 서장훈은 강력하고 완벽했다.
거칠 것 없던 서장훈에게 찾아온 악재
1년 후 1994-95 농구대잔치에서도 연세대의 기세는 거칠 것이 없었다. 14개팀이 출전한 남자부 풀리그에서 연세대는 실업 최강 기아자동차, 강력한 라이벌 고려대를 제압하고 또 다시 예선 전승을 기록하는 완벽함을 과시했다. 그 중심에는 한 차원 더 업그레이드 된 ‘국보급 센터’ 서장훈이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도 많은 농구팬들에게 회자되고 있는 1995년 2월 1일 올림픽 공원 제1체육관에서 펼쳐진 연세대와 고려대의 맞대결은 숱한 화제를 낳은 명승부였다.
양팀은 한치의 양보 없는 치열한 접전을 펼쳤는데 사실상 피가 보이지 않는 대단한 혈투였다. 그 과정에서 연세대 가드 이상민이 무릎에 큰 중상을 입고 실려가면서 경기장을 가득 메운 1만 5천여 오빠부대 들의 눈물샘을 자극시키기도 하였다. 양팀은 경기 종료 4초 전까지 75-75 동점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경기가 연장전으로 접어들 것 같은 무렵, 사이드라인에서 공을 받은 서장훈은 골밑으로 돌파하려는 듯한 동작을 취하다가 곧바로 솟구쳐올라 골대를 향해 두 팔을 뻗었다. 공은 거짓말처럼 그물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서장훈은 두 팔을 번쩍 치켜들고 코트를 질주했다. 농구대잔치 역사상 최고의 명승부는 서장훈의 손 끝에서 완성되었다.
예선 마지막 경기를 그림 같은 명승부로 마감한 연세대는 파죽지세로 농구대잔치를 다시 한 번 석권할 기세였다. 하지만 플레이오프에서 서장훈과 그의 소속팀 연세대는 예상치도 못한 악몽을 경험하게 된다. 예선 리그를 13전 전승 1위로 마친 연세대는 8위를 기록한 삼성전자와 8강 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된다. 전력으로 봤을 때 연세대의 우위가 점쳐지는 상황. 삼성전자는 기존의 김현준에 문경은, 김승기 등 대형 신인이 가세했지만 오히려 조직력이 흐트러지면서 예선 리그에서 상당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체면을 구긴 상황이었다. 삼성전자는 예선 막판 고려대, 기아자동차와 맞붙는 대진을 피해 고의로 ‘모 아니면 도’식의 전략으로 연세대를 8강 파트너로 선택했다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예선에서 13전 전승을 달린 연세대의 상승세는 쉽게 꺾이지 않을 것으로 전망되었다. 1차전을 85-76으로 낙승을 거두면서 연세대의 4강행은 기정사실화 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8강 플레이오프 2차전부터 경기의 양상이 레슬링을 방불케 하는 거친 난투극 형태로 변하면서 연세대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삼성전자는 시종일관 거친 수비로 신경전을 유도했고 이 전략이 맞아 떨어지며 2차전에서 승리를 거두게 된다.
1995년 2월 13일 벌어진 3차전 경기에서 서장훈은 농구 인생의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문제는 그 전환점이 좋은 의미가 아니었다는 부분이다. 전반전 서장훈은 삼성전자 박상관과 리바운드 볼을 다투다가 뒷목에 큰 충격을 입고 그대로 코트에 쓰러지게 된다. 경추에 심각한 손상을 입은 서장훈은 좀처럼 깨어나지 못했고, 어렵사리 일어나 코트에 다시 들어왔지만 이미 팔과 다리 신경이 마비된 그는 코트에 서있기조차 힘겨운 상황이 되었다.
연세대는 서장훈이 빠진 상황에서도 신입생 구본근이 심장이 약한 핸디캡을 극복하고 초인적인 투혼을 발휘하며 삼성전자를 시종일관 압도한다. 그러나 이상민이 이미 부상으로 빠졌고, 기둥 센터 서장훈마저 빠진 공백을 메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모두의 예상을 깨고 연세대의 농구대잔치 2연속 패권의 꿈은 8강에서 멈춰 버렸다. 올림픽 체육관을 가득 메운 소녀 팬들은 하염없는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응원하는 연세대가 탈락한 것에 대한 아쉬움의 눈물이 아닌 끝까지 경기를 포기하지 않은 선수들의 처절한 플레이에 안타까움 마음을 억제하지 못한 것이다.
경기는 이겼지만 삼성전자는 선배로서 떳떳하지 못한 승리를 거둔 것에 대한 비난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전자 슈터’ 김현준, ‘코트의 신사’ 김진 등 그 동안 팬들에게 보여준 깨끗한 이미지가 하루 아침에 무너지고 말았다. 승부에 집착한 나머지 한국 농구의 소중한 경쟁력이자 자산인 서장훈을 2개월 동안 중환자실에 입원시키게 만드는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였는데, 이후 서장훈은 경기에 출전할 때마다 목에 검투사 갑옷 같은 보호대를 착용하게 된다. 1994-95 농구대잔치 8강 플레이오프에서 안게 된 목 부상 트라우마는 서장훈이 은퇴할 때까지 그의 목에 족쇄처럼 따라 다니게 된다.
농구대잔치의 겁없던 신인이 프로농구 MVP로
만약 연세대가 정상적인 플레이로 8강, 4강을 넘어 결승에서 기아자동차 또는 고려대와 한판 승부를 펼쳤다면 한국 농구 역사상 기억에 새로 남겨질 또 다른 명승부가 펼쳐졌을 것이란 아쉬움을 곱씹게 만들었던 1994-95 농구대잔치였다. 1994-95 농구대잔치가 종료된 이후 서장훈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당시 창단 준비 중인 신생팀 진로의 지명을 피하기 위한 의도적인 유학이라는 의혹의 시선도 있었다. 유학을 다녀온 후 서장훈은 진로 입단을 거부하지만 도중에 진로 농구단이 SK로 인수되었고, 서장훈은 1년 가까이 SK와 입단 협상을 지속한 끝에 마침내 SK 유니폼을 입고 프로에 데뷔하게 된다.
그리고 잠시 동안이었지만 대학시절 최대 라이벌이자 휘문고 1년 후배인 현주엽과 한솥밥을 먹게 되면서 고등학교 시절에 이어 프로에서의 천하통일을 꿈꾸게 된다. 그러나 팀 전력의 효율성 향상을 위해 소속팀 최인선 감독은 현주엽을 나산으로 보내고 대신 슈터 조상현을 보강하게 된다. 1999-2000 시즌 서장훈은 발군의 활약을 펼치면서 소속팀 SK 나이츠를 창단 첫 우승으로 이끌이끈다. 당시 이상민, 조성원, 추승균 그리고 힘 좋은 외국인 센터 맥도웰이 버틴 최강팀 현대 다이넷을 상대로 6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4승 2패로 승리를 거두고 첫 우승의 감격을 거머쥐게 된다. 골밑에서 용병 맥도웰을 압도한 서장훈은 그 해 정규리그 MVP와 플레이오프 MVP를 함께 석권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서장훈의 농구 인생에서 최고의 하이라이트를 꼽는다면 신입생 시절 연세대를 농구대잔치 정상으로 이끌었던 장면과 바로 2002 부산 아시안게임 중국과의 결승전이다. 당시 NBA 정상급 센터로 군림하던 야오밍이 버티고 있는 중국을 맞아 대한민국은 경기 내내 끌려 다니며 패색이 짙었지만 후반전 막판 투입된 가드 김승현과 포워드 현주엽이 종횡무진 활약을 펼치면서 분위기 반전을 이끌어낸다. 거짓말처럼 동점을 이룬 대한민국은 극적으로 연장전에 돌입하게 되고 연장전에 접어들자 대한민국의 쇼타임이 펼쳐지게 된다.
결국 102-100, 두 점차의 승리를 이끌어낸 대한민국은 1982 뉴델리 아시안게임 이후 20년 만에 아시안게임 정상에 오르는 감격을 누리게 된다. 연장전에서 승부에 쐐기를 박는 중거리 슛을 성공시키고 포효하는 서장훈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한데 서장훈은 골밑에서 후배 김주성, 현주엽과 함께 중국의 장신 센터들을 상대로 전혀 밀리지 않는 활약을 펼친다. 이상민, 문경은, 서장훈, 현주엽 등 농구대잔치 전성기를 이끌었던 세대들이 팬들에게 선사한 마지막 선물이 바로 2002 부산 아시안게임 우승이다.
서장훈은 프로에서도 매 시즌 꾸준한 활약을 펼치면서 프로농구의 거의 모든 기록의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갔다. 김주성, 하승진 등 뛰어난 후배들이 입단하고 탄력과 파워가 넘치는 용병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그의 입지는 프로 입단 초기에 비해 좁아졌지만 꾸준한 자기계발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한다. 정확한 중장거리 슛 능력은 그의 가치를 입증할 수 있는 최고의 무기가 되었다. 15년을 프로무대에서 활동하면서 688경기에 출장한 서장훈은 22,834분의 출장시간 동안 13,231점, 5235 리바운드의 기록을 남겼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압도적인 프로통산 1위의 기록이다.
점점 빨라지는 현대 농구 추세에 그의 존재가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 심판 판정에 지나치게 과민 반응한다, 등의 편견이 늘 그의 프로생활에 꼬리표처럼 따라 다녔다. 그런 편견은 그가 쌓아놓은 위대한 업적마저 빛에 가려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서장훈이었기에 그런 편견이 따라다닐 수 밖에 없었고, 서장훈이니까 당연히 그 정도는 해줘야 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선입견이 우리들 자신도 모르게 생겨났을 것이다.
은퇴 이후
20년 전 그가 농구코트에 가져온 혁명의 울림이 너무도 강렬했기에 그 때 그 모습에서 농구팬들은 쉽게 빠져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20년 가까이 검투사 같은 목 보호대를 착용하고 상대 수비수들의 집요한 견제에도 그는 꿋꿋하게 버텼다. 그리고 승부를 위해 한편으론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심판 뿐만 아니라 농구를 하는 모든 이들에게 항변해야 했다. 한 때 농구선수로서의 생명이 끊어질 뻔한 적이 있었기에 자신을 지키려는 보호본능이 발휘되는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정당방위라고 볼 수도 있다.
농구 코트에서 그는 골리앗이었지만 세상 속에서 그는 다윗 같은 존재였고, 15년의 프로 선수 생활의 대부분을 다윗처럼 지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농구에 대한 강렬한 열정을 은퇴하는 그 날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 열정이 있었기에 서장훈은 프로농구에 쉽게 깨어지지 않을 강렬한 발자취를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은퇴 이후 ‘무한도전’, ‘무릎팍 도사’ 등의 예능 프로그램에 사복을 입고 등장하는 그의 모습을 보는 것이 아직은 어색하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그는 자신이 해줘야 하는 역할을 최선을 다해 보여준다. 그래서 새로운 재미를 안겨준다. 서장훈은 늘 그래왔다. 자신이 있어야 하는 곳에서 늘 꿋꿋하게 자신의 열정을 발휘해왔다. 국내 농구에서 2m가 넘는 거인 센터들은 움직임이 부자연스럽고 골밑에서 버텨주기만 하는 존재라는 선입견을 무너뜨린 서장훈은 한국 농구의 패러다임을 새롭게 바꾼 존재로 영원히 팬들의 기억 속에 남을 것이다.
양형진
모든 것이 풍요롭게만 느껴졌던 1990년대의 진한 향수가 느껴지는 흔적을 탐사하는 X세대 블로거. 스포츠와 영화를 보고 듣고 쓰는 것을 즐긴다. 늘 끄집어내도 변치 않는(不老) 추억들에 대한 글들을 함께 나누고 싶은 소박한 바램을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