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주어’의 표정과 감정
2013년 봄 나는 의식의 무대 한쪽 관객석에 쭈그리고 앉아 무대에 선 노장군을 쳐다보며 자문한다. 선배 세대가 싸웠던 독재자의 딸이 민주 선거로 대통령에 선출된 해, 1976년생의 기자는 자문한다. ‘노장군은 박제된 악마이거나 한물간 개그맨인가?’ ‘그는 연구할 가치가 없는 평범한 악일 따름’이라는 진보주의자들의 목소리가 클수록 반항심처럼 ‘민주주의가 1979년의 시대정신이었다면 7년간 성공적으로 시대정신에 맞서 싸운 그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반문이 솟아올랐다.
2013.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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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장군이 손을 든다. 팔꿈치를 절도 있게 꺾는다. 노장군의 손은 오른쪽 눈썹 근처에 가 있다. 입꼬리가 내려간, 굳게 다문 입술에서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는 게 엿보인다. 감정이 북받친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노장군은 58년 전엔 단상 아래에서 행진하고 있었다. 임관을 앞둔 청년 장교였다. 지금 노장군이 서 있던 자리에, 대통령 이승만이 서 있었다. 1954년에 경례하던 청년 장교는 2012년 단상에서 거수경례를 받는다. 58년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누군가 변했고, 많이 죽었고, 늙은 장군과 그의 군인 친구는 차례로 대통령을 지냈다. 그러므로 2012년 6월 8일 오후 태릉 육군사관학교에서 열린 ‘육사발전기금 200억 원 달성’ 기념행사는 마냥 잔치로 끝나지 못했다. ‘5ㆍ18 광주학살 원흉의 사열 책임자를 엄중 처벌하라’(민주통합당 광주시당)는 비판이 나왔고 ‘백담사의 종소리는 두 번 다시 전두환 씨를 용서하지 않는다’(5ㆍ18기념재단)는 성명이 발표됐다.
나는 1976년생이다. 노장군이 육사 선배를 총으로 쏘고 육군의 최고 수장을 체포한 1979년에 세 살이었으며 광주 시민 수백 명이 숨진 1980년에 네 살이었다. 1992년에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에 맞춰 YG 양현석의 회오리춤을 추는 일에 슬슬 질려가던 그해 말, 김영삼이 대통령이 됐다. 동기들보다 한 해 늦게 대학에 들어간 1996년에 이미 노장군은 기소된 상태였다. 뒤늦게 정의가 찾아온 것처럼 보였다. 95학번들은 ‘전두환 체포 투쟁’ 당시 연희동 골목길을 넘나들던 어느 봄날을 영웅담으로 기억했다. 1996년 장선우 감독의 영화 <꽃잎>이 개봉했다. 박정희주의자는 보였지만 전두환주의자는 보수 진영 안에서도 찾기 어려웠다. 노장군은 단죄를 받은 것처럼 보였다. 늙은 장군의 시대는 흘러갔다고 느껴졌으며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숨은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대중의 짧은 기억력이라는 엄폐물 뒤에 숨고자 했다.
요컨대 내게 늙은 장군은 악이었지만, 박제된 악마였다. 노장군은 내게 공포나 영감, 분노 같은 살아 있는 감정을 일으키는 인물이 아니었다. 기자가 된 뒤에도 한동안 그는 내 무의식의 캄캄한 구들장 아래 엎드려 있었다. 나보다 더 젊은 세대에게는 어떨까. 노장군의 이름을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대번에 ‘29만 원’이라는 단어가 뜬다. 노장군이 29만 원짜리 수표를 든 포스터도 있다. 진보 성향의 젊은 세대에게 그는 희화화의 대상인 것 같다. 20대가 노장군의 거수경례를 보며 느낀 감정은 분노라기보다는 비아냥거림일 게다. 마치 한물간 개그맨의 성대모사를 본 것처럼.
그러다 노장군이 다시 보였다. 2012년 6월 8일 그날, 통나무 아래에 웅크려 있다가 갑자기 몸을 드러낸 곰처럼, 그 사람은 거수경례 동작 하나로 내 무의식의 구들 아래서 의식의 무대로 올라왔다. 이명박 정부라는 현실은 때마침 좋은 스포트라이트가 되어주었다. 하나회의 멤버이자 육사 출신인 강창희 새누리당 국회의원이 그해 7월 대한민국의 제19대 국회의장에 뽑힌 현실은 맞춤한 BGM이었다.
노장군을 새로 발견하게 된 이유가 또 있다. 2년간 군사독재 시절에 활동한 정치인과 관료들의 회고록을 읽는 일에 빠져 살았다. ‘군사독재 덕후’로 불러도 될 정도였다. 박정희와 그의 시대를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싫어하는 한국 보수주의를 나는 잘 이해하고 있는가’라고 자문했다. ‘학생운동 세대가 아닌 내가 보수주의를 그토록 경멸하는 이유는 뭐란 말인가’라고 반문했다. 그 질문은 내 안의 다른 자아 2가 보수주의를 경멸하는 자아 1을 관찰하는 자기 객관화로 나를 이끌었다. “나는 정치에 관심 있습니다, 그러나 이념으로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기방어의 예술(art of self-defense)로서만 그렇습니다.” 미국의 르포 작가 헌터 톰슨(Hunter S. Thompson)의 이 문장을 빌려 말하면, 이 작업은 기자이기 전에 자유주의 성향을 가진 한 시민으로서 세상에서 상처받지 않기 위해 정신적 호신술을 연마하는 일이기도 했다.
2012년 6월부터 12월 19일까지 나는 정치부 기자로 여의도와 종로의 선거 캠프를 오갔다. 그 여섯 달 동안에도 나는 늙은 장군을 생각했다. 전두환에 대한 관심은 2012년에 생긴 ‘박근혜 현상’으로 더 커졌다. 그해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많은 진보적 지식인들이 시대정신을 이야기했다. 민주화 운동을 경험한 기자 선배들은 박근혜 대통령의 집권을 역사의 퇴보와 동일시했다. ‘장강의 뒤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낸다’라는 클리셰가 술자리에 유독 자주 들렸다. 새누리당조차 자신들이 패배하리라 예측했던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합당과 진보정당은 다수 의석을 얻지 못했다. 그런데도 진보 진영의 자기 최면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보수가 그해 겨울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이겼다. 개혁진보 진영의 주장을 적용하면, 새누리당이 장강의 뒤 물결에 맞섰고 정당한 시대정신과 싸워 승리했다. 정말 그런 걸까?
1979년 겨울에도 상식을 가진 시민들이 변화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유신은 악이었다. 절대 악이 사라졌으니 당연히 민주화가 와야 했다. 상식인들이 ‘당연히 와야 하고, 당연히 올 수밖에 없는 것’으로 여긴 민주화는 7년간 유예됐다. 격류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낚시꾼처럼, 노장군은 민주주의의 강물 한복판에서 권력을 낚아챘다. 강의 흐름을 틀어버렸다.
2013년 봄 나는 의식의 무대 한쪽 관객석에 쭈그리고 앉아 무대에 선 노장군을 쳐다보며 자문한다. 선배 세대가 싸웠던 독재자의 딸이 민주 선거로 대통령에 선출된 해, 1976년생의 기자는 자문한다. ‘노장군은 박제된 악마이거나 한물간 개그맨인가?’ ‘그는 연구할 가치가 없는 평범한 악일 따름’이라는 진보주의자들의 목소리가 클수록 반항심처럼 ‘민주주의가 1979년의 시대정신이었다면 7년간 성공적으로 시대정신에 맞서 싸운 그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반문이 솟아올랐다.
이 책은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답안지다. 학위논문이나 일간지의 정치 단신과는 다른 글을 쓰려 했다. 행동과 문장의 주어 자리에서 추상적인 단체와 기관, 조직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직책과 기관이라는 ‘가짜 주어’ 뒤에 숨은 ‘진짜 주어’를 포착하려 했다. 요컨대 철저히 사람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나는 1976년생이다. 노장군이 육사 선배를 총으로 쏘고 육군의 최고 수장을 체포한 1979년에 세 살이었으며 광주 시민 수백 명이 숨진 1980년에 네 살이었다. 1992년에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에 맞춰 YG 양현석의 회오리춤을 추는 일에 슬슬 질려가던 그해 말, 김영삼이 대통령이 됐다. 동기들보다 한 해 늦게 대학에 들어간 1996년에 이미 노장군은 기소된 상태였다. 뒤늦게 정의가 찾아온 것처럼 보였다. 95학번들은 ‘전두환 체포 투쟁’ 당시 연희동 골목길을 넘나들던 어느 봄날을 영웅담으로 기억했다. 1996년 장선우 감독의 영화 <꽃잎>이 개봉했다. 박정희주의자는 보였지만 전두환주의자는 보수 진영 안에서도 찾기 어려웠다. 노장군은 단죄를 받은 것처럼 보였다. 늙은 장군의 시대는 흘러갔다고 느껴졌으며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숨은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대중의 짧은 기억력이라는 엄폐물 뒤에 숨고자 했다.
요컨대 내게 늙은 장군은 악이었지만, 박제된 악마였다. 노장군은 내게 공포나 영감, 분노 같은 살아 있는 감정을 일으키는 인물이 아니었다. 기자가 된 뒤에도 한동안 그는 내 무의식의 캄캄한 구들장 아래 엎드려 있었다. 나보다 더 젊은 세대에게는 어떨까. 노장군의 이름을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대번에 ‘29만 원’이라는 단어가 뜬다. 노장군이 29만 원짜리 수표를 든 포스터도 있다. 진보 성향의 젊은 세대에게 그는 희화화의 대상인 것 같다. 20대가 노장군의 거수경례를 보며 느낀 감정은 분노라기보다는 비아냥거림일 게다. 마치 한물간 개그맨의 성대모사를 본 것처럼.
그러다 노장군이 다시 보였다. 2012년 6월 8일 그날, 통나무 아래에 웅크려 있다가 갑자기 몸을 드러낸 곰처럼, 그 사람은 거수경례 동작 하나로 내 무의식의 구들 아래서 의식의 무대로 올라왔다. 이명박 정부라는 현실은 때마침 좋은 스포트라이트가 되어주었다. 하나회의 멤버이자 육사 출신인 강창희 새누리당 국회의원이 그해 7월 대한민국의 제19대 국회의장에 뽑힌 현실은 맞춤한 BGM이었다.
노장군을 새로 발견하게 된 이유가 또 있다. 2년간 군사독재 시절에 활동한 정치인과 관료들의 회고록을 읽는 일에 빠져 살았다. ‘군사독재 덕후’로 불러도 될 정도였다. 박정희와 그의 시대를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싫어하는 한국 보수주의를 나는 잘 이해하고 있는가’라고 자문했다. ‘학생운동 세대가 아닌 내가 보수주의를 그토록 경멸하는 이유는 뭐란 말인가’라고 반문했다. 그 질문은 내 안의 다른 자아 2가 보수주의를 경멸하는 자아 1을 관찰하는 자기 객관화로 나를 이끌었다. “나는 정치에 관심 있습니다, 그러나 이념으로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기방어의 예술(art of self-defense)로서만 그렇습니다.” 미국의 르포 작가 헌터 톰슨(Hunter S. Thompson)의 이 문장을 빌려 말하면, 이 작업은 기자이기 전에 자유주의 성향을 가진 한 시민으로서 세상에서 상처받지 않기 위해 정신적 호신술을 연마하는 일이기도 했다.
2012년 6월부터 12월 19일까지 나는 정치부 기자로 여의도와 종로의 선거 캠프를 오갔다. 그 여섯 달 동안에도 나는 늙은 장군을 생각했다. 전두환에 대한 관심은 2012년에 생긴 ‘박근혜 현상’으로 더 커졌다. 그해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많은 진보적 지식인들이 시대정신을 이야기했다. 민주화 운동을 경험한 기자 선배들은 박근혜 대통령의 집권을 역사의 퇴보와 동일시했다. ‘장강의 뒤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낸다’라는 클리셰가 술자리에 유독 자주 들렸다. 새누리당조차 자신들이 패배하리라 예측했던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합당과 진보정당은 다수 의석을 얻지 못했다. 그런데도 진보 진영의 자기 최면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보수가 그해 겨울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이겼다. 개혁진보 진영의 주장을 적용하면, 새누리당이 장강의 뒤 물결에 맞섰고 정당한 시대정신과 싸워 승리했다. 정말 그런 걸까?
1979년 겨울에도 상식을 가진 시민들이 변화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유신은 악이었다. 절대 악이 사라졌으니 당연히 민주화가 와야 했다. 상식인들이 ‘당연히 와야 하고, 당연히 올 수밖에 없는 것’으로 여긴 민주화는 7년간 유예됐다. 격류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낚시꾼처럼, 노장군은 민주주의의 강물 한복판에서 권력을 낚아챘다. 강의 흐름을 틀어버렸다.
2013년 봄 나는 의식의 무대 한쪽 관객석에 쭈그리고 앉아 무대에 선 노장군을 쳐다보며 자문한다. 선배 세대가 싸웠던 독재자의 딸이 민주 선거로 대통령에 선출된 해, 1976년생의 기자는 자문한다. ‘노장군은 박제된 악마이거나 한물간 개그맨인가?’ ‘그는 연구할 가치가 없는 평범한 악일 따름’이라는 진보주의자들의 목소리가 클수록 반항심처럼 ‘민주주의가 1979년의 시대정신이었다면 7년간 성공적으로 시대정신에 맞서 싸운 그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반문이 솟아올랐다.
이 책은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답안지다. 학위논문이나 일간지의 정치 단신과는 다른 글을 쓰려 했다. 행동과 문장의 주어 자리에서 추상적인 단체와 기관, 조직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직책과 기관이라는 ‘가짜 주어’ 뒤에 숨은 ‘진짜 주어’를 포착하려 했다. 요컨대 철저히 사람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 아직 살아있는 자 전두환 고나무 저 | 북콤마
저자는 이 책 안에서 ‘관계자는’, ‘정부는’ 이란 주어를 쓴 문장을 사용하지 않고, 직책과 기관이라는 ‘가짜 주어’ 뒤에 숨은 ‘진짜 주어’를 포착하려 했다. 그러기 위해선 발로 뛰어서 5공화국 시대의 인물과 전두환 주위의 사람들을 인터뷰해야 했다. 2년 동안 군사독재 시절에 활동했던 주요 정치인과 관료들의 회고록을 읽는 일에 빠져 살았다. 전두환은 언론의 취재에 응하지 않기에 그에 대한 취재와 집필 과정은 죽은 자에 대한 전기를 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과정을 “전두환을 통해, 나는 2013년의 내게 영향을 미치는 아버지 세대의 역사 유산을 정리해보고 싶었다.”고 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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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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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우민
2013.07.28
슈퍼작살
2013.07.05
비는 많이도 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