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리누나 -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오늘도 흔들린다. 자전거를 타고 오는 한강변에서 바람이 세차게 부는 걸 보니 오늘은 마구 흔들려 보는 것도 꽤 괜찮지 않을까. 그의 시집을 곱씹으며 책장을 넘기다 보니 바람은 차갑게 불지만 왠지 마음은 더 따뜻하다. 조급해하지 않겠다. 흔들려도 괜찮다. 짜증내거나 불만스럽다면 참지 않아도 좋다. 좀더 솔직하게, 오늘을 대면하련다.
글ㆍ사진 김도훈(문학 MD)
2013.05.03
작게
크게
#1_삭막한 서울지하철에서 말랑말랑한 시인예찬

아침마다 자전거를 타고 집을 나선다. 노량진에서 여의도까지, 멀지 않은 거리라 가벼운 산보 나가는 마음으로 회사를 향한다. 겨우내 귀를 앗아갈 듯한 동장군의 위엄 앞에 무릎을 꿇고 대신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다녔는데, 지하철 안 풍경은 갈수록 내 마음을 씁쓸하게 했다. 열 사람 중 아홉은 스마트폰의 작은 화면을 들여다 보고 있었고, 나머지 한 사람은 모자란 잠을 청하고 있었기에. 마침 손에 쥐고 있던 함민복의 시집에는 이러한 서울 지하철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어서 새삼 흥미로웠다.

2
전철 안에 의사들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모두 귀에 청진기를 끼고 있었다
위장을 눌러보고 갈빗대를 두드려보고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옛 의술을 접고
가운을 입지 않은 젊은 의사들은
손가락 두개로 스마트하게
전파 그물을 기우며
세상을 진찰 진단하고 있었다
수평의 깊이를 넓히고 있었다
(p.86, 「서울 지하철에 놀라다」 중에서)
이렇듯 그의 시는 평범한 일상의 현장에서 시작된다. ‘영혼의 무게 달아주며’ 달리는 영구차를 타고 가면서, 현금지급기 앞에서 본 열쇠를 주렁주렁 매단 아저씨를 보면서, 그리고 ‘죽은 시계를 손목에 차고 수은전지를 갈러 가는 길’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래서 그의 시가 참 좋다. 대개 시를 보고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의 시는 어렵지 않다. 보통 사람들에게 친숙한 일상에서 시작하여 평범한 단어로 마음을 울리는 이야기를 펼쳐낸다. “빠름 빠름 빠름”을 외쳐대는 세상에서 빠르지 않아도 좋다고 말해서 좋다. 효율을 강조하는 딱딱하기만 한 세상에 말랑말랑한 힘을 노래해서 좋다. 무엇보다 과하지 않은, 소박하지만 진득하게 깊이가 있는 그의 생각과 표현이 참 좋다.

8년 만에 선보이는 시집인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에도 그만의 시가 가득 담겨 있다. 마음에 드는 구절을 표시하다 보니 시집 전체에 포스트잇이 가득하다. 시집이 덕지덕지 지저분해질수록 내 마음은 더 말랑말랑해진다.


#2_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리는 이치

집에 그늘이 너무 크게 들어 아주 베어버린다고
참죽나무 균형살피며 가지 먼저 베어 내려오는
익선이형이 아슬아슬하다

나무는 가지를 벨 때마다 흔들림이 심해지고
흔들림에 흔들림 가지가 무성해져
나무는 부들부들 몸통을 떤다

나무는 최선을 다해 중심을 잡고 있었구나
가지 하나 이파리 하나하나까지
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렸었구나
흔들려 덜 흔들렸었구나
흔들림의 중심에 나무는 서 있었구나

그늘을 다스리는 일도 숨을 쉬는 일도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직장을 옮기는 일도

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리고
흔들려 흔들리지 않으려고
가지 뻗고 이파리 틔우는 일이었구나
(pp.14-15, 「흔들린다」)
유독 곱씹게 되는 시다. 흔들림과 흔들리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의지와 흔들리지 말라는 소중한 이들의 응원과 흔들림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나라는 존재가 뒤엉켜 있던 지난 날의 시간이 생각나지만, 시는 여전히 내게 말하고 있다. 흔들려도 좋다고, 의미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일들이 실은 그런 것이 아니었노라고 위로한다. 중심을 잡고 서 있는 일도 중요하지만 가지를 뻗고 이파리를 틔우는 일 역시 흔들리지 않으려고 흔들리고, 흔들려 흔들리지 않으려는 것임을. 나무는 흔들리는 것과 흔들리지 않은 것이 함께 있기에 중심을 잡고 있을진대, 내 삶 역시 그러한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왜 그리 아둥바둥하면서 살았을까.

오늘도 흔들린다. 자전거를 타고 오는 한강변에서 바람이 세차게 부는 걸 보니 오늘은 마구 흔들려 보는 것도 꽤 괜찮지 않을까. 그의 시집을 곱씹으며 책장을 넘기다 보니 바람은 차갑게 불지만 왠지 마음은 더 따뜻하다. 조급해하지 않겠다. 흔들려도 괜찮다. 짜증내거나 불만스럽다면 참지 않아도 좋다. 좀더 솔직하게, 오늘을 대면하련다. 오늘도 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리누나!



img_book_bot.jpg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함민복 저 | 창비
생명은 물론 사물, 도구, 지구에 대해서도 겸손된 언어를 적는 시인 함민복의 시는, 그의 표현을 빌려보자면 “인간과 세계를 번역”한다. 새 시집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은 8년 만에 선보이는 그의 다섯 번째 시집이다. 찬찬한, 그의 느린 한 발 한 발에 담겨 있는 세월의 무게는 70편의 마디로 풀어 쓰여졌다. 선한 마음을 그리워하는 시인의 언어는, 오랜만의 시집에서 한결 부드러운 서정의 힘을 발휘한다. 가난한 삶 속에서도 희망의 불씨를 지피는 여유로움을 느끼게하는 그의 시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된 가난한 삶을 노래해온 지난날의 연장 선상에 있지만 한결 따뜻한 공감을 이끌어낸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함민복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8의 댓글
User Avatar

djsslqkqn

2013.07.15

함민복 시인 좋아했는데 이번 시집 제목만 봐도 좋습니다.
답글
0
0
User Avatar

sind1318

2013.06.01

함민복 시인님이 신작 시가 나왔군요.
답글
0
0
User Avatar

tvfxqlove74

2013.05.20

'괜찮다'라는 흔하디 흔하지만 마음을 울리는 위로가 느껴지는 책인 것 같습니다.
답글
0
0

더 보기

arrow down
Writer Avatar

김도훈(문학 MD)

고성방가를 즐기는 딴따라 인생. 모든 차별과 폭력에 반대하며, 누구나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Writer Avatar

함민복

자본과 욕망의 시대에 저만치 동떨어져 살아가는 전업 시인. 개인의 소외와 자본주의의 폭력성을 특유의 감성적 문체로 써내려간 시로 호평받은 그는, 인간미와 진솔함이 살아 있는 에세이로도 널리 사랑 받고 있다. 1962년 충북 중원군 노은면에서 태어났다.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북 월성 원자력발전소에서 4년간 근무하다 서울예전 문예창작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2학년 때인 1988년 [세계의 문학]에 「성선설」 등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1990년 첫 시집 『우울氏의 一日』을 펴냈다. 그의 시집 『우울氏의 一日』에서는 의사소통 부재의 현실에서 「잡념」 의 밀폐된 공간 속에 은거하고 있는 현대인의 소외된 삶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1993년 발표한 『자본주의의 약속』에서는 자본주의의 물결 속에 소외되어 가는 개인의 모습을 통해 자본주의의 폭력성을 이야기 하면서도 서정성을 잃지 않고 있다. 서울 달동네와 친구 방을 전전하며 떠돌다 96년, 우연히 놀러 왔던 마니산이 너무 좋아 보증금 없이 월세 10 만원 짜리 폐가를 빌려 둥지를 틀었다는 그는 "방 두 개에 거실도 있고 텃밭도 있으니 나는 중산층"이라고 말한다. 그는 없는 게 많다. 돈도 없고, 집도 없고, 아내도 없고, 자식도 없다. 그런데도 그에게서 느껴지는 여유와 편안함이 있다. 한 기자가"가난에 대해 열등감을 느낀 적은 없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부스스한 머리칼에 구부정한 어깨를 가진 그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가난하다는 게 결국은 부족하다는 거고, 부족하다는 건 뭔가 원한다는 건데, 난 사실 원하는 게 별로 없어요. 혼자 사니까 별 필요한 것도 없고. 이 집도 언제 비워줘야 할지 모르지만 빈집이 수두룩한데 뭐. 자본주의적 삶이란 돈만큼 확장된다는 것을 처절하게 체험했지만 굳이, 확장 안 시켜도 된다고 생각해요. 늘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해요."(동아일보 허문명 기자 기사 인용) 2005년 10년 만에 네번째 시집 『말랑말랑한 힘』을 출간하여 제24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이 시집은 그의 강화도 생활의 온전한 시적 보고서인 셈이다. 함민복 시인은 이제 강화도 동막리 사람들과 한통속이다. 강화도 사람이 되어 지내는 동안 함민복의 시는 욕망으로 가득한 도시에서 이리저리 부딪치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강화도 개펄의 힘을 전해준다. 하지만 정작 시인은 지금도 조용히 마음의 길을 닦고 있다. 『길들은 다 일가친척이다』는 포털 사이트 Daum에 5개월간 연재한 글에다 틈틈이 지면에 발표했던 글들을 묶었다. 과거를 추억하나 그에 얽매이지 않고, 안빈낙도하는 듯하나 세상을 향한 따뜻한 마음과 날선 눈초리를 잃지 않는 글들은 온라인에서 깊은 사랑을 받았다. 『미안한 마음』은 산골짝 출신인 함민복 시인이 10여 년 세월 강화도 갯바람을 맞으며 강화 사람들과 함께 부대껴 살며 보고 느낀 바를 표제처럼 정말 ‘미안한 마음’으로 담은 이야기다. 장가를 갔으면 싶은 노모의 모정을 읽을 수 있는 글, 때론 한 잔 술을 거절하고 파스 한 장 척 붙이고 ‘이제 안 아프다’ 위안하며 쓴 글 묶음이다. 그러하기에 함민복 시인의 문학적 모태가 되고 있는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그 밖에 시집으로 『우울 씨의 일일』, 『자본주의의 약속』,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말랑말랑한 힘』,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동시집 『바닷물, 에고 짜다』, 『노래는 최선을 다해 곡선이다』, 산문집 『눈물은 왜 짠가』, 『미안한 마음』, 『길들은 다 일가친척이다』 등이 있다.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김수영문학상, 박용래문학상, 애지문학상, 윤동주문학대상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