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프리부르에서 같은 학교에 다니던 동생 프랑수아의 죽음은 어린 시절에 입은 깊은 내상으로 생텍스의 허무적이고 운명론적인 기질의 발단이 되었다고 한다. 누이동생 가브리엘의 아이인 멜쉬오르의 죽음 또한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남방 우편기』와 『야간비행』에는 어린아이의 치명적인 병에 대한 긴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는 대상과의 관계가 간접화되는 어른의 세계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어린 왕자』에는 어린 시절에서 성년의 세계로의 불가피한 이행으로 인하여 어린 시절의 숭고함이 파괴되는 데 대한 회한의 흔적이 깊이 각인되어 있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인간의 대지』의 마지막 몇 페이지의 일화는 1935년 『파리 수아르』에 기고한 글의 내용을 손질하여 붙인 것으로 어린이의 그 순수하고 숭고한 자질이 생텍쥐페리에게 있어서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를 감동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어린 왕자』의 육필원고. 천문학자와 어린 왕자.
피델리티 오니온 스킨 지에 잉크. 뉴욕, 1942.
생텍스는 기차여행중에 삼등칸에서 프랑스에서의 일자리를 잃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는 가난한 폴란드 노동자들을 보았다. 한 어린아이가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잠이 들어 있었다. “나는 아이의 아버지를 보았다. 돌처럼 반들반들한 머리였다. 작업복 속에 꼬부리고 불편한 잠을 자는 툭 튀어나오고 움푹하게 파인 몸뚱이. 그 사람은 무슨 진흙덩어리와도 같았다. 이제는 형체조차 없는 유실물들이 밤중에 이렇게 시장의 나무벤치 위에 무겁게 놓여 있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문제는 이 곤궁, 이 불결, 이 추악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이 남자와 여자는 어느 날 서로 알게 되어 남자는 여인에게 아마 미소를 던졌으리라…… 신비로운 것은 이제 그들이 이런 진흙덩어리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 무슨 지독한 거푸집을 거쳐 나왔기에 판박이 기계에 찍힌 것처럼 그 거푸집의 모양을 그대로 박아 가진 것인가! 짐승은 늙어서도 그 우아한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그 아름다운 인간의 진흙은 망가진단 말인가!” 이것이 ‘어른’이 된 남자 여자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그들 사이에서 잠이 든 어린아이는 어떤가? “자다가 몸을 돌리는 바람에 어린아이의 얼굴이 철야등 밑의 내 눈앞에 드러났다. 아, 얼마나 귀여운 얼굴이냐! 그들 부부에게서 이를테면 황금과실이 나온 것이다. 그 무거운 누더기 속에서 참하고 아담한 열매가 나온 것이다. 나는 그 빛나는 이마와 귀엽게 삐죽 내민 입술을 가까이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이것은 음악가의 얼굴이다. 어린 모차르트다. 이것은 생명의 아름다운 약속이다. 동화에 나오는 어린 왕자들도 그와 다를 바 없다. 보호해주고 위해주고 가꾸면 이 아이가 무엇인들 되지 못하랴! 돌연변이로 정원에 새 품종의 장미가 나면 모든 정원사들이 감격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 장미를 따로 옮겨심어서 정성껏 가꾸어준다. 그러나 인간들을 위한 정원사는 없다. 어린 모차르트도 다른 어린아이들과 마찬가지로 판에 찍는 기계에 찍히고 말 것이다. 모차르트는 술 파는 카페의 악취 속에서 부패한 음악을 최고의 기쁨으로 삼을 것이다. 모차르트는 가망 없게 된 것이다.”
이때 생텍쥐페리는 생각한다. “여기에서 상처를 입고 침해당한 것은 개인이 아니라 인류다. 나는 동정을 믿지 않는다. 나를 괴롭히는 것은 정원사의 관점이다. 나를 괴롭히는 것은 습관이 되는 것과 불안정함에도 결국 습관이 되는, 이 비참함이 아니다. 동방 사람들은 대대로 비천함 속에 살고 있으면서 그것을 즐거움으로 안다. 나를 괴롭히는 것은 국민의 무료급식으로도 고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나를 괴롭히는 것은 그 울퉁불퉁한 몸뚱이도 그 누추함도 아니고 다만 그 한 사람, 한 사람 안에서 모차르트가 살해당한다는 사실이다. ‘정신’의 바람이 진흙 위로 불어야만 비로소 ‘인간’은 창조된다.”(『인간의 대지』)
『어린 왕자』는 바로 우리들 각자의 내면 깊은 곳에 잠재하는 모차르트를 살려내고 진흙에 정신의 바람을 불어넣기 위하여 쓰여진 한 편의 단순하고 위대한 우화다.
- 어린 왕자를 찾아서 김화영 저 | 문학동네
명실공히 우리나라 최고의 불문학자이자 개성적인 글쓰기와 유려한 번역으로 우리 문학계와 지성계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해온 김화영 선생이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와 만났다. 이 책 『어린 왕자를 찾아서』는 『어린 왕자』를 번역하면서 ‘어린 왕자’를 태어나게 한 진정한 어른이었을 생텍쥐페리의 삶을 조망하고, 작품이 가지고 있는 문학적 의미를 풀어냈다. 단순한 흥밋거리를 넘어 ‘어린 왕자’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해 줄 것이다.
| |||||||||||||
김화영
문학평론가이자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1942년 경북 영주에서 태어나 서울대 불어불문학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프로방스 대학교에서 알베르 카뮈 연구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뛰어난 안목과 유려한 문체로 프랑스의 대표적인 문학 작품을 국내에 소개해 왔으며, 고려대학교 불문학과에서 30여 년간 학생들을 가르쳤다. 정치한 문장과 깊이 있는 분석으로 탁월한 평론을 선보인 전 방위 문학인으로, 1999년 최고의 불문학 번역가로 선정된 바 있다.
저서로는 『지중해, 내 푸른 영혼』 『문학 상상력의 연구―알베르 카뮈의 문학세계』 『프로베르여 안녕』 『예술의 성』 『프랑스문학 산책』 『공간에 관한 노트』 『바람을 담는 집』 『소설의 꽃과 뿌리』 『발자크와 플로베르』 『행복의 충격』 『미당 서정주 시선집』 『예감』 『시간의 파도로 지은 성』 『흔적』 『알제리 기행』외 다수가 있으며, 역서로는 『알베르 카뮈 전집(전20권)』『알베르 카뮈를 찾아서』 『프랑스 현대시사』 『섬』 『청춘시절』 『프랑스 현대비평의 이해』 『오늘의 프랑스 철학사상』 『노란 곱추』 『침묵』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팔월의 일요일들』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짧은 글 긴 침묵』 『마담 보바리』 『예찬』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 『최초의 인간』 『물거울』 『걷기예찬』 『뒷모습』 『내가 사랑했던 개, 율리시즈』 『이별잦은 시절』 등이 있다.
dkdldodh
2013.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