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옛날
어민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한 비닐하우스는 더없이 따뜻했다. 새참거리를 나누며 허기를 달래는 모습도 정겨웠다. 그렇게 저녁 식사까지 이어질 모양이었다. 홍조 띤 양 볼을 손으로 만져보니 따뜻했다. 막걸리 두어 잔에 금세 열이 올랐나 보다. 나는 이곳까지 와서 어민들이 입을 모아 자랑하는 옹기를 지나칠 수가 없었다. 옹기장이를 만나려면 어디로 가면 되냐고 물어보자 여러 손가락이 한 방향을 가리켰다. 옹기 자랑에 흥이 붙었다. 예전에 우리 포구가 말이야……, 내가 아주 어렸을 적……, 사람들이 도시로 나가기 전만해도……. 옛날에 대한 그네들의 어투와 표정이 달지만은 않았다. 말과 말 사이에 내쉰 깊은 한숨, 그리움과 체념이 뒤섞인 탄식과도 같은 한숨이 모든 걸 말해주었다. 분명 지나간 시절에 대한 이야기였다.
어느새 사위가 어슴푸레해졌다. 비닐하우스에서 나서자, 서산 너머로 해가 기울고 있었다. 날선 해풍이 밀려왔다. 바닷물은 마른 둑을 적셨다. 굽이 길을 돌자마자 옹기를 볼 수 있었다. 돌담도 대문도 없이 너른 마당에 옹기만이 가득 들어찬 집이었다.
불현듯 어린 시절 장독대를 열어본 기억이 떠올랐다. 옥상 구석에는 서너 개의 장독대가 있었다. 검고 둥근 장독의 뚜껑은 꺼칠하면서도 묵직했다. 김칫독 위에 고인 물기를 손으로 스윽 닦았던 그날, 독 뚜껑을 떨어트려 절반이 깨졌다. 화들짝 놀란 나는 깨진 독 뚜껑을 이리저리 맞춰서 덮어두다 포기하고 옥상에서 내려왔다. 그때 처음 보았던 독의 색, 검은 유약으로 덮이기 전의 점토색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던 모양이다.
봉황 포구에서 만난 옹기는 유년기 시절로 나를 또 한 번 이끌었다. 너무 오래되어 버린, 미술시간이었다. 우리는 찰흙으로 모형을 만들고 있었다. 햇살이 차양에 가렸는지, 3분단까지 들어차던 날이었는지 기억할 수 없다. 무엇을 만들어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물을 바르고 반죽하기를 반복하는 동작과 찰흙의 질감은 사라지지 않고 손끝에서 느껴진다. 어쩌면 그 시절, 무언가를 만들어 내기 위한 그 마음이 아직까지 내 안에서 자라나고 있는지도.
장인의 솜씨
중요무형문화제 정윤석 옹기장은 여행객을 반갑게 맞이했다. 황토색 개량 한복을 입은 그는 양팔에 토시를 끼고 있었다. 옷과 손바닥에는 점토가 묻어 있었다. 진흙이 구워진 고소한 향이 그에게서 풍겨왔다. 일흔이 넘은 장인(匠人)을 만난 순간, 작은 전율이 일었다.
창조를 위한 최초의 동작이 평생 동안 지속될 때, 우리는 비로소 장인이라 부른다. 정윤석 옹기장은 옹기 상인인 부친과 외숙부의 영향을 받아서 16세에 처음 옹기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한평생을 옹기 만드는 일에 전념했으니 그의 손에서 만들어진 옹기는 이뤄 셀 수가 없을 정도다. 그 독에 담겼던 양념과 식재료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따뜻하게 해주었을지 나는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옹기 하나를 가볍게 두드렸다. 웅숭깊은 울림은 여운을 남겼다. 옹기장은 동그랗고 펑퍼짐한 옹기가 전라도 양식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마당의 옹기들은 모두 배가 나왔다. 전라도가 손맛 좋고 인심 좋기로 소문난 것도 배가 나온 옹기와 관련이 있을 것만 같았다. 칠량면 중에서도 특히나 봉황리는 흙이 좋고 가마터가 있던 곳이라 했다. 옹기장의 설명을 듣다보니 봉황 마을이 이렇게 바다와 가까이 있는 이유도 알게 되었다. 35년 전만해도 완성된 옹기를 풍선(風船)에 싣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옹기를 가득 실은 풍선은 배가 닿는 곳이면 어디로든 갔다. 부산, 마산, 경상도, 제주도. 봉황 옹기의 황금기였다. 하지만 80년대 중반까지 운행하던 마지막 옹기운반선마저 사라지고 결국에는 옹기장이들도 하나 둘 마을을 떠나게 되었다. 결국 봉황 포구에 남은 옹기장은 단 한명 뿐이었다.
옹기장은 직접 만든 가마를 보여주었다. 2층 집 높이로 이뤄진 긴 가마는 높아질수록 폭 좁아졌다. 한 치 정도마다 나 있는 연기 구멍을 깨진 옹기 조각이 막고 있었다. 깨진 옹기라도 그만큼 내구성이 높았다. 옹기장은 마침 가마를 청소해두었기에 들어가도 좋다고 말했다. 불현듯 <취화선>의 마지막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조선 3대 화가 중 한 명인 장승업은 이뤄내고자 하는 경지를 찾다 결국 불타는 가마 속으로 들어갔다. 조선의 운명과 장인의 예술 경지를 절묘하게 취합한 명장면이기에 잊을 수가 없었다. 하필이면 죽음을 결정한 곳이 옹기를 굽는 가마터였을까. 나는 영화를 떠올리며 가마 안으로 한발 내밀었다. 어두컴컴한 가마 안에는 짚을 태운 향이 났다. 장인의 손을 거친 흙이 1000℃가 넘는 고온에 구워져야 비로소 단단한 옹기기 됐다. 얼마나 많은 작품이 태어나고 깨지길 반복했을까. 수많은 시행착오와 불타는 열정에야 비로소 예술은 완성된다. 영화 속 장승업은 가마 속으로 들어갔다. 죽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영원한 예술이 되기 위해 육체를 벗어난 것이었다.
옹기장이 마지막으로 나를 이끈 곳은 반죽을 하고 모양을 만드는 작업실이었다. 옹기장은 직접 시범을 보이겠다며 쪼그려 앉았다. 흙에 물을 바르고 온 힘을 다해 주물러 반죽을 만들었다. 앉은 자세가 불편해보였지만 어디까지나 나의 입장에서였다. 작업을 시작한지 수초도 지나지 않아 흙의 모양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 몰입은 공기마저 사로잡아 나는 숨조차 허투루 내쉴 수 없었다. 옹기장은 가늘고 긴 길을 걷고 있는 듯 했다. 작은 숨소리 하나가 그의 걸음을 흐트러트릴지도 몰랐다. 그 움직임에서 살아있는 무언가를 느꼈다. 한평생 같은 동작을 뻗은 발레리나의 발끝처럼 날카로우면서도 우아한 그의 행위에 나는 숙연해졌다.
아름다운 순간들
언젠가 부토(舞踏)에 대해 다룬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부토란 일본 전통예술인 '가부키', '노'와 서구 현대 무용이 만나며 탄생한 아방가르드 무용의 한 장르다. 배우들은 삶 속에서 예술을 창조했다. 발에 가시가 찔린 사람의 동작,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는 부자연스러우면서도 독특한 찰나적 행위가 부토의 핵심이다. 그 전반에는 육체를 공간, 즉 자연에 속한 일부로 보는 시선이 녹아 있다. 공기의 흐름에 따라 육체도 움직이는 진리가 담긴 행위인 것이다.
처음에 나는 옹기장의 동작이 조금 불편해 보였다. 즉 부자연스러운 자세에 대한 불안이 있었다. 하지만 그 불안은 나에게서 유발된 감정이었다. 정윤석 옹기장의 흙치기는 기계적인 반복이 아니었다. 손과 흙이 하나가 되고, 공기와 조화를 이루는 모습은 부토의 배우 같았다. 그는 자신만의 호흡을 뱉었다. 마치 생에 첫 주연을 맡게 된 배우의 숨소리처럼 생명력이 있었다. 옹기장은 자신이 조각한 여신상에게 숨결을 불어넣은 피그말리온이 되고, 흙을 금으로 만드는 연금술사가 되었다. 생명을 불어넣고 향기를 주는 일. 나는 울컥, 감정이 북받쳤다. 영화를 만들고 소설을 쓰고 싶어 잠 못 들던 지난날, 조급하고 불안한 청춘을 핑계로 분명 중요한 무언가를 잊고 지냈다. 내가 쓰는 문장과 카메라에 담긴 이미지가 살아있다는 믿음이 나에게는 얼마나 있었던가. 얼마나 간절히 애써야 그 결에 닿을 수 있을까. 나는 확신에 찬 그의 손동작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는 타래를 돌려가며 옹기를 만들고 아가리를 올렸다. 수레질을 하며 옹기에 들어갈 무늬를 새겨넣었다. 그 결은 늙은 연극배우의 주름과 닮았다. 그것이야 말로 장인의 경지였다. 가만히 보니, 옹기 무늬와 장인의 주름과 바다의 파도가 닮았다. 같은 동작을 얼마나 많이 반복하면 항상 최초처럼 보일까. 세상에는 사라져가는 것들이 있다. 한줌의 흙이 되어 되돌아가는 모든 생명, 그 생명이 누린 시간, 시간이 이뤄낸 시절이……. 하지만 사라지지 않는 것 또한 있기 마련이다. 봉황의 바다와 옹기. 모든 장인들의 마음가짐. 아름다운 순간들이다.
오성은
바다를 사랑하는 사람
씨네필
문학청년
어쿠스틱 밴드 'Brujimao'의 리더.
heliokjh
2013.06.25
즌이
2013.05.31
아기전중
2013.05.30
나름 이유가 다 있네욯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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