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네’라고 할 때 ‘아니오’ 말하는 용기, 당신은 있나요?
So what? 은 말 그대로 ‘그래서 뭐?’라는 단순한 질문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답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내 글에 대해 누군가 “So what?”이라고 물어본다는 것은 한마디로 핵심 메시지가 없다는 부정적인 평가다. 자기 관점 혹은 의견을 분명하게 주장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2013.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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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메일이나 보고서, 프리젠테이션 슬라이드 등을 보다 보면 정리가 깔끔하게 잘 된 것들이 있다. 꼭 필요한 정보들이 군더더기 없이 담겨 있고 그 정보들의 관계 또한 일목요연해 큰 그림을 한 눈에 보여준다. 언뜻 보면 나무랄 데 없이 잘 된 글쓰기로 보인다. 하지만 뒤로 가다 보면 어딘가 허전할 때가 있다. 정작 글쓰기에 가장 중요한 한가지가 빠진 경우다. 정보들을 추려내고 나름대로 재구성한 결과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대한 해석, 즉 자기 주장이 없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하게 되는 말이 ”So what?”이다.
So what? 은 말 그대로 ‘그래서 뭐?’라는 단순한 질문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답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내 글에 대해 누군가 “So what?”이라고 물어본다는 것은 한마디로 핵심 메시지가 없다는 부정적인 평가다. 대개 이런 난감한 질문을 받게 되면 자기 글에서 다시 답을 찾게 되는데, So what? 이라는 질문 자체가 글에 없는 것을 물어보는 것이니 제대로 된 답이 나올 리 없다.
So what? 이라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결국 자기만의 관점이 있어야 한다. 수많은 정보를 검색해서 걸러내고 그것을 가지고 만든 논리의 결과를 자신의 사고와 언어, 글로 설명할 줄 알아야 한다.
자기 관점 혹은 의견을 분명하게 주장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간단하면서도 손쉬운 방법은 와이(Why)와 노(No)를 활용하는 것이다.
‘왜?’는 어떤 현상이나 사실에 대해 이유를 묻는 것이다. 가장 낮은 수준에서는 자신이 잘 이해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 답을 구하는 것이고 조금 더 올라가면 상대의 대답이 불충분하거나 그에 대해 자신의 생각이 다를 경우 서로의 견해를 주고 받는 것으로 나타난다. 쌍방이 ‘왜?’라는 질문을 묻고 대답하는 사이, 각자는 서로의 관점을 자연스레 갖게 된다.
모든 현상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하지만 항상 겉으로 드러나는 것, 또는 일반적으로 얘기되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아직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숨겨진 사실이 있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고리가 존재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어떤 것에 대해 좀 더 발전적으로, 새로운 생각을 해보려면 그 자체를 좀 더 심도 있게 이해해야 하는데 그 이면을 보는데 없어서 안 되는 것이 Why다. 그렇게 끊임없이 ‘왜?’를 묻고 그 질문에 대해 스스로 답을 구하는 과정에서 자기의 관점이 하나 둘 잡혀가는 것이다.
Why를 불편해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따지거나 대든다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why는 내 생각과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다. 다소 불편해도 ‘왜?’가 터져 나오는 편이 애매한 침묵보다 훨씬 낫다. 어떻게 ‘왜?’라는 질문을 하느냐는 또 다른 문제다. 기왕이면 듣는 사람이 기분 상하지 않게 하면서도 그 사람이 한 말에 대한 근본적인 취지나 원인을 더 잘 이해해 보다 나은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이 최선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직접적으로 ‘왜?’를 물어야 할 자리도 분명 있다. 함께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채 너무 앞서가거나, 맥락을 잡지 못해 토론이 지지부진하거나 혹은 보다 나은 아이디어를 구하려 할 때 가장 효과적인 것은 ‘왜?’라는 한마디다. 잘만 활용하면 ‘왜?’는 축 늘어져 있거나 심드렁한 분위기를 순간적으로 환기시키는 알람 역할을 한다.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무언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드는 위력을 발휘한다.
한발 더 나간다면 다른 사람이나 상황에서뿐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왜?’라는 질문을 서슴없이 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생각을 스스로 짚어보고 논리에 허점은 없는 지, 상대방을 설득하기에 충분한지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자신의 결정이나 판단, 주장에 대해서도 어떤 이유로 인해 그런 결과를 내리게 되었는지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이른바 ‘셀프 와이(Self Why)’의 단계에 이르러야 비로소 ‘왜?’가 체질화했다고 볼 수 있다. ‘왜?’를 묻고 대답을 구하는 과정은 처음에는 번거롭고 피곤하다. 하지만 일단 머리 속에 ‘왜?’가 자리를 잡으면 그것만큼 재미난 것도 없다. 물으면 물을수록 새로운 것들이 보이고 그것을 따라가다 보면 저절로 깊이를 깨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연히 자기 관점이 생길 수 밖에. 스스로 지적 호기심을 충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 ‘왜?’가 없는 세상은 심심하고 지루하다.
Why만큼 자기관점을 기르는 데 효과적인 것이 No다. No와 Why의 관계를 생각해보자. Why는 주어진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한 좀처럼 나올 수 없는 질문이다. No를 전제로 주어진 사실에 대해 한 발 더 나아가려 하거나 조금 더 깊숙이 들여다 보려고 할 때 Why도 가능하다. 좀더 쉽게 접근해보자. 자신이 잘 모르는 어떤 문제에 대해 ‘예’와 ‘아니오’로 대답하고 그 이유를 글로 써야 한다고 가정하자. 둘 중 어느 쪽이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당연히 ‘아니오’다. 하나의 사건 또는 현상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예’라고 동의해버리면 더 깊이, 더 넓게 파고들 여지도 줄어들게 마련이다. 반대로 No라고 부정한다는 것은 그에 대한 나름의 반론을 제시해야 하고 따라서 자연히 Why에 대한 답을 스스로 구할 수 밖에 없다.
보통 No는 Why보다 더 하기 어렵다고 여겨진다. 누군가의 말에 반대를 표하거나 부정적인 의견을 밝힌다는 것은 질문을 하는 것보다 불편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의견에 반대를 표했을 뿐인데 마치 그것이 그 사람 자체를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적지 않다. 특히 공개석상이나 윗사람에게 No를 하면 무례한 사람으로 인식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No 역시 Why와 마찬가지로 쓰기 나름이다. 긍정의 No와 부정의 No를 구별하면 된다. 부정적인 No는 반대에서 끝나 버린다. 충분한 근거를 제시하고 상대방과 진지하게 의견을 나누려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아니라고 단정해 버린다. 대화나 토론은 더 이상 발전할 수 없고 듣는 사람도 기분이 언짢을 수 밖에 없다.
긍정적인 No는 다르다. 무조건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상대방의 주장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관찰한 다음 그 중 부정할 만한 부분이 있다면 이를 밝히고 그에 대한 자신의 근거 또한 충분히 제시한다. 사실에 근거하고 나름의 논리가 있기에 듣는 사람도 다시 자기 나름의 근거와 논리로 주장하면 된다. 상대의 말을 근거로 그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펴는 과정이 바로 토론이다. 이처럼 긍정의 No는 Why와 마찬가지로 스스로 생각할 수 있게 하고, 자기 관점을 세우게 만든다.
모두가 ‘네’라고 할 때 ‘아니오’ 할 수 있으면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맞다. 생각 없는 동의보다는 나름 고민한 No와 Why가 백 번 낫다.
So what? 은 말 그대로 ‘그래서 뭐?’라는 단순한 질문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답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내 글에 대해 누군가 “So what?”이라고 물어본다는 것은 한마디로 핵심 메시지가 없다는 부정적인 평가다. 대개 이런 난감한 질문을 받게 되면 자기 글에서 다시 답을 찾게 되는데, So what? 이라는 질문 자체가 글에 없는 것을 물어보는 것이니 제대로 된 답이 나올 리 없다.
So what? 이라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결국 자기만의 관점이 있어야 한다. 수많은 정보를 검색해서 걸러내고 그것을 가지고 만든 논리의 결과를 자신의 사고와 언어, 글로 설명할 줄 알아야 한다.
자기 관점 혹은 의견을 분명하게 주장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간단하면서도 손쉬운 방법은 와이(Why)와 노(No)를 활용하는 것이다.
‘왜?’는 어떤 현상이나 사실에 대해 이유를 묻는 것이다. 가장 낮은 수준에서는 자신이 잘 이해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 답을 구하는 것이고 조금 더 올라가면 상대의 대답이 불충분하거나 그에 대해 자신의 생각이 다를 경우 서로의 견해를 주고 받는 것으로 나타난다. 쌍방이 ‘왜?’라는 질문을 묻고 대답하는 사이, 각자는 서로의 관점을 자연스레 갖게 된다.
모든 현상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하지만 항상 겉으로 드러나는 것, 또는 일반적으로 얘기되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아직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숨겨진 사실이 있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고리가 존재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어떤 것에 대해 좀 더 발전적으로, 새로운 생각을 해보려면 그 자체를 좀 더 심도 있게 이해해야 하는데 그 이면을 보는데 없어서 안 되는 것이 Why다. 그렇게 끊임없이 ‘왜?’를 묻고 그 질문에 대해 스스로 답을 구하는 과정에서 자기의 관점이 하나 둘 잡혀가는 것이다.
Why를 불편해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따지거나 대든다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why는 내 생각과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다. 다소 불편해도 ‘왜?’가 터져 나오는 편이 애매한 침묵보다 훨씬 낫다. 어떻게 ‘왜?’라는 질문을 하느냐는 또 다른 문제다. 기왕이면 듣는 사람이 기분 상하지 않게 하면서도 그 사람이 한 말에 대한 근본적인 취지나 원인을 더 잘 이해해 보다 나은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이 최선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직접적으로 ‘왜?’를 물어야 할 자리도 분명 있다. 함께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채 너무 앞서가거나, 맥락을 잡지 못해 토론이 지지부진하거나 혹은 보다 나은 아이디어를 구하려 할 때 가장 효과적인 것은 ‘왜?’라는 한마디다. 잘만 활용하면 ‘왜?’는 축 늘어져 있거나 심드렁한 분위기를 순간적으로 환기시키는 알람 역할을 한다.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무언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드는 위력을 발휘한다.
한발 더 나간다면 다른 사람이나 상황에서뿐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왜?’라는 질문을 서슴없이 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생각을 스스로 짚어보고 논리에 허점은 없는 지, 상대방을 설득하기에 충분한지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자신의 결정이나 판단, 주장에 대해서도 어떤 이유로 인해 그런 결과를 내리게 되었는지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이른바 ‘셀프 와이(Self Why)’의 단계에 이르러야 비로소 ‘왜?’가 체질화했다고 볼 수 있다. ‘왜?’를 묻고 대답을 구하는 과정은 처음에는 번거롭고 피곤하다. 하지만 일단 머리 속에 ‘왜?’가 자리를 잡으면 그것만큼 재미난 것도 없다. 물으면 물을수록 새로운 것들이 보이고 그것을 따라가다 보면 저절로 깊이를 깨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연히 자기 관점이 생길 수 밖에. 스스로 지적 호기심을 충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 ‘왜?’가 없는 세상은 심심하고 지루하다.
Why만큼 자기관점을 기르는 데 효과적인 것이 No다. No와 Why의 관계를 생각해보자. Why는 주어진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한 좀처럼 나올 수 없는 질문이다. No를 전제로 주어진 사실에 대해 한 발 더 나아가려 하거나 조금 더 깊숙이 들여다 보려고 할 때 Why도 가능하다. 좀더 쉽게 접근해보자. 자신이 잘 모르는 어떤 문제에 대해 ‘예’와 ‘아니오’로 대답하고 그 이유를 글로 써야 한다고 가정하자. 둘 중 어느 쪽이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당연히 ‘아니오’다. 하나의 사건 또는 현상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예’라고 동의해버리면 더 깊이, 더 넓게 파고들 여지도 줄어들게 마련이다. 반대로 No라고 부정한다는 것은 그에 대한 나름의 반론을 제시해야 하고 따라서 자연히 Why에 대한 답을 스스로 구할 수 밖에 없다.
보통 No는 Why보다 더 하기 어렵다고 여겨진다. 누군가의 말에 반대를 표하거나 부정적인 의견을 밝힌다는 것은 질문을 하는 것보다 불편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의견에 반대를 표했을 뿐인데 마치 그것이 그 사람 자체를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적지 않다. 특히 공개석상이나 윗사람에게 No를 하면 무례한 사람으로 인식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No 역시 Why와 마찬가지로 쓰기 나름이다. 긍정의 No와 부정의 No를 구별하면 된다. 부정적인 No는 반대에서 끝나 버린다. 충분한 근거를 제시하고 상대방과 진지하게 의견을 나누려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아니라고 단정해 버린다. 대화나 토론은 더 이상 발전할 수 없고 듣는 사람도 기분이 언짢을 수 밖에 없다.
긍정적인 No는 다르다. 무조건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상대방의 주장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관찰한 다음 그 중 부정할 만한 부분이 있다면 이를 밝히고 그에 대한 자신의 근거 또한 충분히 제시한다. 사실에 근거하고 나름의 논리가 있기에 듣는 사람도 다시 자기 나름의 근거와 논리로 주장하면 된다. 상대의 말을 근거로 그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펴는 과정이 바로 토론이다. 이처럼 긍정의 No는 Why와 마찬가지로 스스로 생각할 수 있게 하고, 자기 관점을 세우게 만든다.
모두가 ‘네’라고 할 때 ‘아니오’ 할 수 있으면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맞다. 생각 없는 동의보다는 나름 고민한 No와 Why가 백 번 낫다.
- 글 쓸 줄 아는 사람이 되라: 호모스크리벤스 김지영 저 | 21세기북스
저자는 20년 동안 신문기자 생활을 하며 생생한 현장을 취재했다. 기사를 쓸 때에는 몇 가지 법칙이 있다. 어려운 이야기일수록 쉽게 써라, 짧고 간결하고 신중하게 써라, 제목이 중요하다, 쓰고 나서 최소한 세 번 읽어야 한다 등이다. 저자는 이 법칙이 비단 기사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님을 발견했다. 일기, 서평, 이메일 등 어떤 글을 쓰더라도 이 법칙이 적용된다. 저자가 제안하는 글쓰기 과정에 귀를 기울인다면 우리 모두 호모스크리벤스만이 가진 다이내믹한 특권인 글 쓰는 하루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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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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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김지영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일보와 매일경제에서 18년째 기자생활을 하고 있으며, 엔터테인먼트와 라이프 관련 기사를 주로 쓰고 있다. 2000년 미국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에서 ‘1990년대 한국 댄스음악과 10대, 그리고 TV와의 삼각관계’를 주제로 커뮤니케이션 석사 학위를 받았다. 빠르게 변화하는 대중문화의 흐름 속에서 민감하게 파도타기를 하며 각 세대들이 즐기는 그들의 문화와 세대 간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그것들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깊은 흥미를 갖고 있다.
그녀의 최근 작 『헬로키티 성공신화』는 키티 맘 세대로서 네 살 난 딸로 인해 다시 헬로키티의 세계에 입문한 뒤, 만들어진 지 35년이 넘도록 변함없이 전 세계 어린이들의 로망이자 가족도 대신할 수 없는 비밀 친구 역할을 하는 키티에 주목하게 된 것이 동기가 되어 쓰게 된 저서이다. 헬로키티를 이미 잘 알고 있음에도 입이 없기에 모든 이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누구든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이입할 수 있게 만드는 헬로키티의 완벽한 디자인과 감성적인 마케팅 전략에 다시 한 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저자는 전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상의 시대 반항의 음악-60년대 미국음악과 사회』『살림지식총서-월트 디즈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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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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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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