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들은 사랑하는 방식도 파격적 - ‘사랑의 대가는 거세’
지성사에 획을 그은 거장들 중에는 그 이름만큼이나 유명한 연애담을 가진 경우가 종종 있다. 그들의 사랑은 나이와 인종, 심지어 성별을 뛰어넘는 경우도 많았으며, 그들이 가진 유명세만큼이나 세간의 화제를 몰고 다녔다. 그 중에도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아마도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계약 결혼일 것이다.
글ㆍ사진 주현성
2012.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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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사에 획을 그은 거장들 중에는 그 이름만큼이나 유명한 연애담을 가진 경우가 종종 있다. 그들의 사랑은 나이와 인종, 심지어 성별을 뛰어넘는 경우도 많았으며, 그들이 가진 유명세만큼이나 세간의 화제를 몰고 다녔다. 그 중에도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아마도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계약 결혼일 것이다.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는 전후 세계에서 실존주의를 대표하는 가장 대중적인 슈퍼스타 철학자였다. 그의 이름은 실존주의와 동의어처럼 취급되어왔으며, 그의 저서인 『존재와 무』는 실존주의의 경전처럼 여겨졌다. 그는 소설가로도 이름을 날렸으며, 노벨문학상을 거부하고 68혁명 등 현실문제에 과감하게 참여함으로써 대중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또한 프랑스 실존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의 거장이며, 페미니즘의 대모가 된 여자다. 그녀의 소설 또한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으며, 그녀의 대표작 『제2의 성』은 오늘날까지도 페미니즘의 경전으로 손꼽히고 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철학 교수 자격시험을 치루면서 시작되었다. 키 158㎝의 못생긴 남자 사르트르는 보름 동안 젊고 아름다운 보부아르와 함께 자격시험을 치렀다. 이 시험에서 사르트르는 수석을, 보부아르는 차석이면서 최연소 합격자가 된다.

“당신은 합격했소. 그러니 이제 당신은 나의 것이오.”

교수 자격을 얻은 날 소르본 대학 교정에서 사르트르가 그녀에게 한 말이다. 사르트르는 시험 과정에서 이미 그녀에게 사랑을 느꼈고, 그녀 또한 사르트르를 자신의 이상적인 남자로 생각하게 된다. 사실 당시 심사위원들은 보부아르가 더 뛰어나다고 생각했지만, 여자이기에 사르트르를 수석으로 선출했다고 한다. 하지만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에게 반한 순간을 ‘뤽상부르공원 분수 앞에서, 세 시간에 걸친 논박이 나의 패배로 끝났을 때’라고 말하고 있다. 그녀에게는 지적인 남자가 이상향이었으며, 실제 사르트르는 죽을 때까지 그녀의 사상에 있어서도 근원적 역할을 했다.

사르트르는 군입대 직전 그녀에게 청혼했지만 거절당하고, 이후 계약 결혼을 제안하면서 본격적인 연인 관계로 접어들었다. 그들의 계약 연애는 이제까지 보아왔던 그 어떤 연애와는 다른 것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고 소유했지만, 동시에 각자의 성생활을 허락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서로에게 거짓말하거나 속이지 말자고 약속하고 자신의 일이나 경험들은 물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행위까지도 솔직히 터놓자고 약속했다. 그들의 이 이상한 결혼은 사르트르가 죽는 날까지 51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들은 서로를 끊임없이 신뢰하고, 서로의 원고를 모두 검토해주었다. 동시에 각자 다른 많은 연인들을 만나 사랑을 나누었다. 특히 사르트르의 연애 행각은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으며, 보부아르의 동성 애인인 올가에게도 연정을 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올가의 동생인 완다, 보부아르의 제자인 비앙카, 러시아 출신 나타샤 등과도 관계를 맺었다. 보부아르도 이에 질세라 동성 연애는 물론 사르트르의 제자였던 보스트와 관계를 맺기도 하고, 미국 작가 넬슨 알그렌과 17년 동안 밀회를 즐기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서로를 신뢰하고 허용할 뿐, 질투와 분노의 감정은 없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성을 앞세웠지만 그들도 어쩔 수 없는 남녀였고, 종종 질투와 위기가 따르곤 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두 사람을 튼튼하게 묶어주는 대화와 지적 교감이 있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대화했고 지식을 교환했다.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에게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가 있는 것을 용인하면서도 ‘그의 지적 반려자’ 자리는 절대 양보하지 않았다. 사르트르 또한 보부아르를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귀’라고 생각했다.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의 죽음을 ‘다시는 내게 말을 걸지 않는 것’이라 정의했을 정도다.

그들의 지적 교감은 세상을 똑같은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 가능하게도 했다. 다음과 같은 보부아르의 말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들은 같은 도구, 같은 체계, 같은 열쇠를 사용했다. 때때로 한 사람이 시작한 문장을 다른 사람이 끝맺기도 했다. 누군가 우리들에게 질문을 던지면 우리들은 똑같은 답을 할 때도 있었다.”

그들은 열망도 같았다. 그들은 사회 속에서 스스로를 실험하고자 했다. 자신들이 내세웠던 자유, 존재, 실존의 문제, 페미니즘 등을 끝없이 토론하고 또 경험을 통해 검증해보고자 했던 것이다.


시위에 참가해 인터뷰를 하고 있는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그들은 언제나 같이 생각하고 같이 행동했으며,
그들의 적극적인 사회 참여는 행동하는 지식인의 상징이 되었다.

그들은 그렇게 하나가 될 수 있었고, 서로만 바라보는 부부보다 더 많은 대화와 더 많은 생각을 공유할 수 있었다. 둘 사이의 견고한 믿음을 사르트르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변하지 않았고 또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한 가지 사실은, 무슨 일이 일어나든 또한 내가 어떤 사람이 되더라도 난 그대 보부아르와 늘 함께하리라는 사실이라오.”

보부아르 또한 “나는 내 인생에서 확실한 성공 하나를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사르트르와의 관계이다”라는 말로 둘 사이의 강한 신뢰와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사르트르가 죽고 6년 후 보부아르도 같은 묘지에 나란히 묻혔다.

그들보다 약간 앞선 거의 같은 시대에 또 하나의 불같은, 그러면서도 그들만큼이나 지적으로 강하게 타올랐던 연인이 있었다. 그 주인공은 20세기 실존주의의 거장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와 그의 제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다.

대학 수업을 통해 34세의 유부남이었던 스타 강사 하이데거와 18세의 지적이고 열정적인 미녀 아렌트가 만났고, 뜨거운 사랑을 나누게 된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결코 결혼을 깰 생각이 없었고, 상처받은 아렌트는 하이데거의 소개로 야스퍼스의 제자가 된다. 하이데거가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대부라면, 야스퍼스는 유신론적 실존주의의 대부다. 그들은 실존주의의 대표주자였으며, 일면 라이벌 관계에 있었다. 아렌트는 이 양대 실존주의 철학자들에게서 배우고 익히며 자신의 철학을 단련시켜 나갔다.

나치 정권이 군림하자 그 둘의 운명은 정반대로 꼬여 나갔다. 당시 학장이 된 하이데거는 나치의 앞잡이가 되었고, 유태인이었던 아렌트는 망명을 해야 했던 것이다. 이후 두 사람은 1950년과 1952년, 1975년 등 단 세 번의 만남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아렌트는 하이데거를 마지막 만난 날 뉴욕에서 심장발작으로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렇다면 매정한 유부남 하이데거는 아렌트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이 밤 이 아침,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빈틈없이 확인된 것 같아요. 그때 그곳에서 웨이터가 부르는 당신의 이름을 듣는 순간 마치 시간이 정지해버린 것 같았어요.”

세월이 한참 지나고 두 사람의 밀회가 있은 후 아렌트가 하이데거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분이다. 적어도 그녀에게 하이데거는 스쳐 지나간 단순한 연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녀의 사상에는 하이데거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으며, 전후에는 나치 앞잡이였던 하이데거를 적극 옹호하기도 했다. 하이데거 또한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1923년에서 1928년까지의 기간이 나 자신에게는 가장 자극적이고 가장 침착하며 가장 파란만장한 시기였다.”

그는 아렌트가 없었다면 『존재와 시간』을 쓸 수 없었을 것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오늘 날 한나 아렌트는 그의 스승들 못지않게 정치철학 분야의 거목으로 자리 잡고 있다.


프라이부르크에 있는 ‘한나 아렌트 거리’와 젊은 시절의 한나 아렌트.
한나 아렌트는 하이데거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잠시 프라이부르크에 머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전후에 아렌트가 다시 독일을 방문했을 때
바로 프라이부르크에서 하이데거를 다시 만났다.

하이데거만큼이나 유명하고 명석한 스승과 아렌트만큼이나 지적이고 명석한 여제자의 사랑은 중세에도 있었다. 오랜 역사 속에 수없이 회자되었던 아벨라르두스와 엘로이즈의 사랑이 바로 그것이다.

아벨라르두스는 오늘날 스콜라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중세 대철학자이며, 탁월한 논리학자다. 그는 특히 대립되는 두 입장을 대립시켜 강의했는데, 이것이 이후 토론을 중시하는 스콜라철학의 방법론으로 자리 잡았다. 강사로 명성이 높았던 서른 중후반의 그는 당시 파리 전역에 소문난 미녀이며,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에 능통한 16세의 엘로이즈를 욕심냈다. 그는 엘로이즈를 키워준 숙부에게 자신이 직접 그녀를 가르치겠다고 접근했다. 당대 최고의 미녀와 최고의 지성이 만났고, 그들은 불타올랐다. 아벨라르두스는 당시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책은 펼쳐져 있었지만, 철학 공부보다는 사랑의 이야기가 더 많았고, 학문의 설명보다는 입맞춤이 더 빈번했으며, 내 손은 나의 책으로 가는 일보다는 더 자주 그녀의 가슴으로 갔던 것이네. 사랑은 두 사람의 눈을 교과서의 문자 위를 더듬게 하지 않고 서로의 눈망울 속에 머물게 했네.”

그러나 그들의 뜨거운 사랑은 엘로이즈의 임신으로 위기에 봉착하고 만다. 아벨라르두스는 엘로이즈에게 청혼했지만 그녀는 거절했다. 그녀는 당시 신학자요 철학자로 승승장구하던 그의 앞길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숙부는 가문의 명예를 위해 결혼을 원했고, 둘은 비밀결혼식을 올렸다.

문제는 그 둘이 엘로이즈의 뜻에 따라 결혼 후 헤어진 것이다. 그녀의 숙부는 분개했고, 하수인을 시켜 아벨라르두스의 남성을 거세해버렸다. 아벨라르두스를 위한 엘로이즈의 희생은 오히려 그를 더 큰 불행으로 몰아넣고 만 것이다.


아벨라르두스와 엘로이즈의 묘.
아벨라르두스가 죽은 후 엘로이즈는 간절한 편지를 보내
그의 시신을 자신이 머물던 수도원으로 오게 만든다.
엘로이즈는 죽으며 자신의 연인 곁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후 아벨라르두스는 수도사로, 엘로이즈는 수녀가 되어 15년 이상을 서로 다른 곳에서 살았다. 그들은 떨어져 있으면서 간간히 편지를 주고받았다. 거세된 아벨라르두스는 그녀에게 그리스도 안에 귀의할 것을 권했고, 엘로이즈는 수녀가 된 것 또한 하나님이 아닌 당신의 명령에서였다고 강조했다. 아벨라르두스에 대한 멈추지 않는 사랑은 그가 죽은 후에도 계속되었으며, 우여곡절 끝에 그의 곁에 묻혔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도 이들과 같은 지적 열망으로 가득한 열애를 목격할 수 있을까? 물론이다. 어쩌면 그것은 시대를 불문한 사건일 것이다. 단지 시대적 특성상 그 유효기간이라는 것에 더 큰 제약을 받기 쉽다. 현재 큰 반향을 일으키며 우리나라에서도 열화와 같은 관심을 받고 있는 지젝(Slavoj zizek)이 그 대표적인 경우가 아닐까?


지젝의 첫 번째 부인 살레츨과 현재 아내 요니.
첫 번째 부인은 미모를 겸비한 뛰어난 석학이었고,
두 번째 부인은 뛰어난 몸매와 모델 경력, 지적 능력을 갖춘 미녀다.

그는 라캉과 마르크스, 헤겔을 접목시키면서, ‘동유럽의 기적’으로 불릴 만큼 세계의 이목을 받고 있는 철학자다. 그의 첫 번째 아내는 그가 이끌고 있는 이른바 ‘슬로베니아 라캉학파’의 일원이면서, 역시 탁월한 라캉 연구자로 알려진 레나타 살레츨(Renata Salecl)이었다. 그들의 결혼은 11살이라는 나이를 극복한 탁월한 지성들의 만남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그의 아내는 뛰어난 외모를 자랑하는 모델 출신의 아날리아 요니(Analia Hounie)다. 재미있는 점은 요니의 부모 또한 모두 라캉 정신분석가였으며, 그녀 자신도 라캉 전공으로 학위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지젝과 그녀의 나이 차이는 무려 30세나 된다. 남자라면 부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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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 #보부아르 #하이데거 #한나 아렌트 #아벨라르두스 #엘로이즈 #지젝
9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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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다

2013.02.08

천재들의 사랑은 정말 파격적이네요. 그런 불꽃튀는 만남을 가졌다는 게 너무 부럽고 질투나네요! 특히 지젝은 다 가진 남자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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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quarid

2013.02.06

한국에는 누가 있으려나요? 언뜻 생각이 안 나네요.
지적인 경쟁자이면서 동지이고 연인인 그런 관계? 흠 누가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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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d1318

2012.12.31

지적 열망으로 가득한 열애 이야기! 흥미롭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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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성

학창 시절에는 실존주의와 니체를, 사회복지 분야를 전공하면서부터는 심리 치료와 사회학에 빠져 주로 시간을 보냈다. 사회학 방법론을 고민하면서 현대 철학에까지 관심을 가져왔다. 현재는 눈뜨면 매일 30분 이상 책을 읽었던 시간들이 쌓여 출판기획자의 길을 걷고 있다. 인문 분야에서는 『진화론의 유혹』 『뇌, 생각의 한계』 『궁정론』 『중국 지식인들과 정체성』 등을 기획 출판했다. 또 청소년 도서 〈강력추천 세계 교양 지도 시리즈〉를 기획, 그중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세계지도』는 인문 교양 분야의 베스트셀러가 되어 독자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그 밖에 기획한 책으로는 『우리 아이의 인생을 위한 첫 번째 수업』 『평범한 아버지들의 위대한 자녀교육』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