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마디가 불거진 앙상한 모습… 50년생 어머니의 삶이 떠오르더라
첫날, 공항에 모인 답사팀원들과 인사를 나누자마자 베이징행 비행기에 오릅니다. 머리에 꽃은 안 달았습니다. 제가 앉은 좌석의 옆 두 분 -손선생님과 력균씨- 은 자리에 앉자마자 풍수지리와 작금의 한국 정치 현실, 대선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시고 외롭게 2시간을 허공에서 보내며 저는 한 남자를 그리워 합니다. 굳센 근육과 무성한 체모를 가진 그 남자, 약간 두툼하게 내민 아랫입술이 매력적인 그 남자…
2012.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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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예스24 블로거 껌정드레스입니다. 지난 8월 15일부터 18일까지 저는 베이징 답사여행을 다녀 왔습니다. 한길사의 『중국인 이야기』 발간 기념 리뷰대회 수상자들을 대상으로한 여행이었습니다. 역사와 문학에 관심이 많은 일행분들과 함께 다닌 3박4일, 정말 많이 배우고 즐거웠던 여행이었습니다.
구 베이징대학, 일명 홍루에서 찍은 단체 기념 사진. (소정씨 사진)
한길사의 연락을 받고, 베이징에 처음 가 보는 저는 많이 기대를 합니다. 예전 고교시절 고전문학 시간에 홍순학의 기행가사인 <연행가>를 배우면서, “쇼쇼 백발 늘근 년도 머리마다 채화로다”라는 대목에 감동을 받아 언젠가는 머리에 꽃을 꽂고 베이징에 가 보는 꿈을 꾸었는데 이제 뜻밖의 기회를 얻어 '늘근 년'이 되어 베이징에 가 보게 되었네요. 하하.
베이징의 유구한 역사
첫날, 공항에 모인 답사팀원들과 인사를 나누자마자 베이징행 비행기에 오릅니다. 머리에 꽃은 안 달았습니다. 제가 앉은 좌석의 옆 두 분 -손선생님과 력균씨- 은 자리에 앉자마자 풍수지리와 작금의 한국 정치 현실, 대선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시고 외롭게 2시간을 허공에서 보내며 저는 한 남자를 그리워 합니다. 굳센 근육과 무성한 체모를 가진 그 남자, 약간 두툼하게 내민 아랫입술이 매력적인 그 남자…
북경 원인. (아니, 무슨 상상을 하신거죠? -_- )
그렇습니다. 1929년 저우커우덴(周口店)에서 발굴된 베이징원인은 약 50만년 전인 구석기 전기에 활동했던 인류입니다. 지금 제가 가는 베이징의 유구한 역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북경원인의 화석인거죠. 연경, 유주라 불리던 이 지역은 원나라 때부터 명, 청 시대를 거쳐 각각 대도, 칸발리크, 베이핑, 베이징이라 불리며 지금의 베이징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흔히들 통일 왕조의 수도가 된 원 시기 이후의 역사만 따져 베이징의 역사를 800년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자그마치 50만년전까지 올라가게 된답니다.
여하튼, 현재 베이징(北京)의 이름은 1430년 명나라 때 영락제가 이 곳을 수도로 정하고 이전의 수도인 난징(南京)에 격을 맞추어 부른 데에서 유래했죠. '옌징((燕京)'이란 옛 이름은 이 지역의 로컬 맥주인 옌징맥주에 남아 있을 뿐입니다. 북경원인과 옌징 맥주. 제가 사랑하는 두 가지 - 역사와 맥주를 가진 도시, 베이징으로 날아가는 마음이 마냥 설레는군요.
젊은 작가들의 열정이 넘치는 송치앙(宋庄) 예술촌
이런 생각을 학구적으로 하는 사이 비행기는 어느덧 베이징 동북에 위치한 수도공항에 내립니다. 중식을 먹고 답사팀은 송치앙(宋庄) 예술촌으로 향합니다. 1994년, 베이징 시내 칭화대학(淸華大學) 인근 원명원 근처에 모여 살면서 반체제적 활동을 하던 예술인들을 베이징 당국이 강제 해산시키자 이들 중 상당수가 베이징 외곽 통주(通州)로 옮겨 오면서 이곳에 예술촌이 형성됩니다.
이번 답사여행에 함께 하신 『중국인 이야기』의 저자 김명호 교수님과 한길사 김언호 사장님의 말씀에 의하면 위의 원명원사태 이후로도 계속 중국 전역에서 청년 예술가들이 모여들어 현재 약 5000명의 예술가들이 이곳에서 집단 거주하며 세계에서 가장 큰 예술촌을 이루어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햐, 5000명이라니요!
버스에서 내려 송치앙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을 둘러 봅니다. 상당히 난해한 설치작품들이 많았습니다. 미술을 잘 모르는 저는 이렇게 작가와 동떨어져 있는 작품 자체보다 작가의 이야기와 역사에 더 관심이 가는 스타일인데, 고맙게도 젊은 작가의 스튜디오를 방문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송치앙 예술촌 내 어느 작가들의 공동 작업실모습. (력균씨 사진)
답사팀이 방문한 곳은 천장 높은 창고를 복층으로 개조하여 여러 명이 나누어 쓰고 있는 스튜디오였습니다. 이 더운 여름날, 작은 선풍기 하나에 의지해 작은 방 하나 크기의 공동 작업실에서 네 분이 이젤과 파레트를 펼쳐놓고 그림 그리는 장면을 봅니다. 이들의 열정에 저 또한 에너지가 충전되는 기분이 듭니다. 오 헨리의 단편 소설 『마지막 잎새』의 배경인 뉴욕 이스트 빌리지의 가난한 예술인 마을이 생각나기도 하고, 어디선가 뮤지컬 <렌트>의 주제가인 “Seasons of Love”가 들리는 것도 같았습니다. 그러면서, 편하게 안일하게 남탓 환경탓만 하며 꿈을 위해 노력하지 않고 살아왔던 제가 마구 부끄러워지더군요.
마음을 울리는 그림을 발견, 작가분께 부탁해서 작품과 함께 사진찍다.
3층으로 올라가는데, 공중에 떠 있는 한 여인을 그린 그림이 제 마음에 들어옵니다. 회청색의 색조와 뼈마디가 불거진 앙상한 모습이 피카소의 청색 시대 초기작인 <다림질하는 여인>이 떠오르게도 하고, 불모지에 떠 있는 고통받는 어머니 여신 같은 이미지가 살바도르 달리의 <내전의 예감>을 떠오르게도 합니다. 그림은 모르지만, 저는 이 그림 앞에서 발을 떼기가 어렵습니다. 이 그림의 무언가가, 제 마음을 건드렸습니다.
그런 저를 보고, 이 그림을 그리신 작가분이 말을 겁니다. 우리는 안 통하는 영어로 대강 대화를 나눕니다. 그림의 모델은 작가의 어머니시고, 작가의 고향은 윈난성이라고 합니다. 이 설명을 듣자, 상상력이 풍부한 저의 눈앞에 두루마리 역사책이 펼쳐집니다. 이 젊은 작가의 어머니 연배라면 아마 1950년대 생으로 중국의 격동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은 여인일 것입니다. 이 작가분은 그러한 어머니의 삶의 이야기를 담아 이 그림을 그렸겠죠. 사진을 찍고 고맙다고 인사하며 스튜디오를 나오는데 가슴이 벅찹니다. 제 마음이 왜 이럴까요.
거대한 갤러리촌, 798 예술촌
차에 올라 다음 행선지로 향합니다. 오늘의 일정은 중국 현대 미술 탐방이 목적인가 봅니다. 『중국인 이야기』를 읽으면 마오쩌둥이나 장제스, 차이어, 위안스카이 등 정치적 인물 외에 쉬베이홍, 치바이스, 예첸위, 장다첸 등 화가들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등장합니다. 이렇게 미술에 관심이 많으신 김명호 교수님 덕에 답사팀은 798예술구까지 방문하게 되는 행운을 누립니다.
공장 건물을 그대로 살린 798 예술촌 풍경
798은 원래 이곳의 번지수를 말합니다. 1950년대 중반 이곳에는 동독의 기술지원으로 군수공장단지가 세워집니다. 그러나 냉전 시기가 지나고 개혁개방의 시대가 옴에 따라 철거 위기에 놓여진 이 곳의 폐공장 부지에 가난한 예술가들이 모여들면서 자연스럽게 예술가촌이 형성됩니다. 중국 경제의 도약과 세계 미술 시장에서 중국작가들의 급부상에 따라 이곳 798에 갤러리들도 모여 듭니다. 이에 중국 정부도 당초의 철거 계획을 수정하고 지원에 나서게 됩니다. 현재 베이징 시 당국은 기존 건물을 그대로 두고 내부의 리모델링만 허용하고 있어서 이곳 798예술촌은 과거 냉전시대 군수공장의 분위기와 현대 예술의 분위기가 공존하는 독특한 분위기를 띄게 되어 전세계 미술 애호가를 불러 들이게 됩니다.
늘 전시회가 열리고 있어 벽면의 전시회 포스터만 봐도 큰 볼거리.
그러나 자본력 있는 갤러리들이 몰려들면서 임대료가 폭등하자 가난한 예술가들은 이곳을 벗어나 더 저렴한 공간으로 이주하게 되어 현재 798은 창작촌의 기능은 거의 사라지고 거대한 갤러리 촌이 되어버린 역설적 상황에 놓였다고 합니다. 실제로 보니 좀전에 방문한 송치앙 예술촌과 비교해볼 때 이 곳은 작가촌이라기보다는 상업지구같은 느낌입니다. 마치 상하이의 신천지처럼 카페 거리같은 분위기가 강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사회주의 국가이면서 개혁개방으로 뉘늦게 자본주의의 맛을 알아버린 자신들의 나라 중국을 스스로 풍자하는 내용의 작품들이 많은 점이었습니다. 1989년, 천안문 사태를 겪은 중국 현대미술가들이 작품에 냉소적 풍자적 성향을 반영하게 되어 이런 현대중국 미술은 ‘냉소적 사실주의(cynical realism)’, ‘정치적 팝(political pop)’이라 불리게 된다고 여기 저기에서 주워 읽은 기억이 나는데, 그런 맥락일까요?
상당히 풍자적인 조각상
그래서일까요? 이곳 798 예술촌의 작품들은 무식한 제가 보기에도 무언가 어울리지 않는듯한 조합의 풍자성을 띄고 있는 경우가 많아 보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런 자신들의 부조리한 모습까지 작품화하고 상품화하여 판매하는… 아 어렵군요. 사회주의 국가의 실용적 자본주의적 마인드. 그러면서도 냉소와 풍자를 잃지 않는 중국 예술가들의 대륙적 개김성.
저는 그냥 송치앙 예술촌에서 받은 감동만 고이 간직하고 베이징 오리 요리와 옌징 맥주로 하루를 마감합니다. 혼자 누워 바라보는 낯선 호텔의 낯선 천장에 아까 본 젊은 작가의 회청색 그림이 아른거립니다. 가슴이 뭉클합니다. 아, 답사 첫날 첫 행선지에서부터 저는 너무 많은 것을 얻은 것 같습니다. 이에 저는 평생 한길사와 예스24에 충성하기로 옌징 맥주 한 캔을 걸고 다짐합니다.
구 베이징대학, 일명 홍루에서 찍은 단체 기념 사진. (소정씨 사진)
한길사의 연락을 받고, 베이징에 처음 가 보는 저는 많이 기대를 합니다. 예전 고교시절 고전문학 시간에 홍순학의 기행가사인 <연행가>를 배우면서, “쇼쇼 백발 늘근 년도 머리마다 채화로다”라는 대목에 감동을 받아 언젠가는 머리에 꽃을 꽂고 베이징에 가 보는 꿈을 꾸었는데 이제 뜻밖의 기회를 얻어 '늘근 년'이 되어 베이징에 가 보게 되었네요. 하하.
베이징의 유구한 역사
첫날, 공항에 모인 답사팀원들과 인사를 나누자마자 베이징행 비행기에 오릅니다. 머리에 꽃은 안 달았습니다. 제가 앉은 좌석의 옆 두 분 -손선생님과 력균씨- 은 자리에 앉자마자 풍수지리와 작금의 한국 정치 현실, 대선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시고 외롭게 2시간을 허공에서 보내며 저는 한 남자를 그리워 합니다. 굳센 근육과 무성한 체모를 가진 그 남자, 약간 두툼하게 내민 아랫입술이 매력적인 그 남자…
북경 원인. (아니, 무슨 상상을 하신거죠? -_- )
그렇습니다. 1929년 저우커우덴(周口店)에서 발굴된 베이징원인은 약 50만년 전인 구석기 전기에 활동했던 인류입니다. 지금 제가 가는 베이징의 유구한 역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북경원인의 화석인거죠. 연경, 유주라 불리던 이 지역은 원나라 때부터 명, 청 시대를 거쳐 각각 대도, 칸발리크, 베이핑, 베이징이라 불리며 지금의 베이징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흔히들 통일 왕조의 수도가 된 원 시기 이후의 역사만 따져 베이징의 역사를 800년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자그마치 50만년전까지 올라가게 된답니다.
여하튼, 현재 베이징(北京)의 이름은 1430년 명나라 때 영락제가 이 곳을 수도로 정하고 이전의 수도인 난징(南京)에 격을 맞추어 부른 데에서 유래했죠. '옌징((燕京)'이란 옛 이름은 이 지역의 로컬 맥주인 옌징맥주에 남아 있을 뿐입니다. 북경원인과 옌징 맥주. 제가 사랑하는 두 가지 - 역사와 맥주를 가진 도시, 베이징으로 날아가는 마음이 마냥 설레는군요.
젊은 작가들의 열정이 넘치는 송치앙(宋庄) 예술촌
이런 생각을 학구적으로 하는 사이 비행기는 어느덧 베이징 동북에 위치한 수도공항에 내립니다. 중식을 먹고 답사팀은 송치앙(宋庄) 예술촌으로 향합니다. 1994년, 베이징 시내 칭화대학(淸華大學) 인근 원명원 근처에 모여 살면서 반체제적 활동을 하던 예술인들을 베이징 당국이 강제 해산시키자 이들 중 상당수가 베이징 외곽 통주(通州)로 옮겨 오면서 이곳에 예술촌이 형성됩니다.
이번 답사여행에 함께 하신 『중국인 이야기』의 저자 김명호 교수님과 한길사 김언호 사장님의 말씀에 의하면 위의 원명원사태 이후로도 계속 중국 전역에서 청년 예술가들이 모여들어 현재 약 5000명의 예술가들이 이곳에서 집단 거주하며 세계에서 가장 큰 예술촌을 이루어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햐, 5000명이라니요!
버스에서 내려 송치앙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을 둘러 봅니다. 상당히 난해한 설치작품들이 많았습니다. 미술을 잘 모르는 저는 이렇게 작가와 동떨어져 있는 작품 자체보다 작가의 이야기와 역사에 더 관심이 가는 스타일인데, 고맙게도 젊은 작가의 스튜디오를 방문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송치앙 예술촌 내 어느 작가들의 공동 작업실모습. (력균씨 사진)
답사팀이 방문한 곳은 천장 높은 창고를 복층으로 개조하여 여러 명이 나누어 쓰고 있는 스튜디오였습니다. 이 더운 여름날, 작은 선풍기 하나에 의지해 작은 방 하나 크기의 공동 작업실에서 네 분이 이젤과 파레트를 펼쳐놓고 그림 그리는 장면을 봅니다. 이들의 열정에 저 또한 에너지가 충전되는 기분이 듭니다. 오 헨리의 단편 소설 『마지막 잎새』의 배경인 뉴욕 이스트 빌리지의 가난한 예술인 마을이 생각나기도 하고, 어디선가 뮤지컬 <렌트>의 주제가인 “Seasons of Love”가 들리는 것도 같았습니다. 그러면서, 편하게 안일하게 남탓 환경탓만 하며 꿈을 위해 노력하지 않고 살아왔던 제가 마구 부끄러워지더군요.
마음을 울리는 그림을 발견, 작가분께 부탁해서 작품과 함께 사진찍다.
3층으로 올라가는데, 공중에 떠 있는 한 여인을 그린 그림이 제 마음에 들어옵니다. 회청색의 색조와 뼈마디가 불거진 앙상한 모습이 피카소의 청색 시대 초기작인 <다림질하는 여인>이 떠오르게도 하고, 불모지에 떠 있는 고통받는 어머니 여신 같은 이미지가 살바도르 달리의 <내전의 예감>을 떠오르게도 합니다. 그림은 모르지만, 저는 이 그림 앞에서 발을 떼기가 어렵습니다. 이 그림의 무언가가, 제 마음을 건드렸습니다.
그런 저를 보고, 이 그림을 그리신 작가분이 말을 겁니다. 우리는 안 통하는 영어로 대강 대화를 나눕니다. 그림의 모델은 작가의 어머니시고, 작가의 고향은 윈난성이라고 합니다. 이 설명을 듣자, 상상력이 풍부한 저의 눈앞에 두루마리 역사책이 펼쳐집니다. 이 젊은 작가의 어머니 연배라면 아마 1950년대 생으로 중국의 격동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은 여인일 것입니다. 이 작가분은 그러한 어머니의 삶의 이야기를 담아 이 그림을 그렸겠죠. 사진을 찍고 고맙다고 인사하며 스튜디오를 나오는데 가슴이 벅찹니다. 제 마음이 왜 이럴까요.
거대한 갤러리촌, 798 예술촌
차에 올라 다음 행선지로 향합니다. 오늘의 일정은 중국 현대 미술 탐방이 목적인가 봅니다. 『중국인 이야기』를 읽으면 마오쩌둥이나 장제스, 차이어, 위안스카이 등 정치적 인물 외에 쉬베이홍, 치바이스, 예첸위, 장다첸 등 화가들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등장합니다. 이렇게 미술에 관심이 많으신 김명호 교수님 덕에 답사팀은 798예술구까지 방문하게 되는 행운을 누립니다.
공장 건물을 그대로 살린 798 예술촌 풍경
798은 원래 이곳의 번지수를 말합니다. 1950년대 중반 이곳에는 동독의 기술지원으로 군수공장단지가 세워집니다. 그러나 냉전 시기가 지나고 개혁개방의 시대가 옴에 따라 철거 위기에 놓여진 이 곳의 폐공장 부지에 가난한 예술가들이 모여들면서 자연스럽게 예술가촌이 형성됩니다. 중국 경제의 도약과 세계 미술 시장에서 중국작가들의 급부상에 따라 이곳 798에 갤러리들도 모여 듭니다. 이에 중국 정부도 당초의 철거 계획을 수정하고 지원에 나서게 됩니다. 현재 베이징 시 당국은 기존 건물을 그대로 두고 내부의 리모델링만 허용하고 있어서 이곳 798예술촌은 과거 냉전시대 군수공장의 분위기와 현대 예술의 분위기가 공존하는 독특한 분위기를 띄게 되어 전세계 미술 애호가를 불러 들이게 됩니다.
늘 전시회가 열리고 있어 벽면의 전시회 포스터만 봐도 큰 볼거리.
그러나 자본력 있는 갤러리들이 몰려들면서 임대료가 폭등하자 가난한 예술가들은 이곳을 벗어나 더 저렴한 공간으로 이주하게 되어 현재 798은 창작촌의 기능은 거의 사라지고 거대한 갤러리 촌이 되어버린 역설적 상황에 놓였다고 합니다. 실제로 보니 좀전에 방문한 송치앙 예술촌과 비교해볼 때 이 곳은 작가촌이라기보다는 상업지구같은 느낌입니다. 마치 상하이의 신천지처럼 카페 거리같은 분위기가 강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사회주의 국가이면서 개혁개방으로 뉘늦게 자본주의의 맛을 알아버린 자신들의 나라 중국을 스스로 풍자하는 내용의 작품들이 많은 점이었습니다. 1989년, 천안문 사태를 겪은 중국 현대미술가들이 작품에 냉소적 풍자적 성향을 반영하게 되어 이런 현대중국 미술은 ‘냉소적 사실주의(cynical realism)’, ‘정치적 팝(political pop)’이라 불리게 된다고 여기 저기에서 주워 읽은 기억이 나는데, 그런 맥락일까요?
상당히 풍자적인 조각상
그래서일까요? 이곳 798 예술촌의 작품들은 무식한 제가 보기에도 무언가 어울리지 않는듯한 조합의 풍자성을 띄고 있는 경우가 많아 보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런 자신들의 부조리한 모습까지 작품화하고 상품화하여 판매하는… 아 어렵군요. 사회주의 국가의 실용적 자본주의적 마인드. 그러면서도 냉소와 풍자를 잃지 않는 중국 예술가들의 대륙적 개김성.
중국의 20세기는 성공한 반역자들의 시대였다. 아주 없는 것보다는 나았지만, 전통 타령이나 해대는 사람들은 난세에 별 쓸모가 없었다. 예술계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인 이야기』 295쪽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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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냥 송치앙 예술촌에서 받은 감동만 고이 간직하고 베이징 오리 요리와 옌징 맥주로 하루를 마감합니다. 혼자 누워 바라보는 낯선 호텔의 낯선 천장에 아까 본 젊은 작가의 회청색 그림이 아른거립니다. 가슴이 뭉클합니다. 아, 답사 첫날 첫 행선지에서부터 저는 너무 많은 것을 얻은 것 같습니다. 이에 저는 평생 한길사와 예스24에 충성하기로 옌징 맥주 한 캔을 걸고 다짐합니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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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채널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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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engwoo
2012.09.13
앞으로 나올 2탄과 3탄도 기대할께요~~
엔냥
2012.09.13
꼭 한번 가보고 싶네요~~^^
무한도전에서 싸이 말춤 추었던데가 혹시 여긴가요??아닌가??
노라미미
2012.09.12
자본주의를 맛 본 사회주의 국가라...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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