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쇄살인범과 억울하게 죽은 소녀 그리고 이웃사람들 - <이웃사람>
<이웃사람>에서 ‘범인’은 최초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스릴러는 은폐된 범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은폐된 범인과 그를 둘러싼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난다. 영화 <이웃사람>은 만화 속 거의 모든 에피소드를 화면 안에 불러들인다. 원작에는 없었던 새로운 에피소드는 주인공 경희와 여선 사이의 이야기인데, 원작 못지않게 사람들의 마음을 먹먹하게 만드는 훌륭한 에피소드로 재탄생했다.
2012.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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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얼마 전 회사 일대가 정전이 된 적이 있다. 더위와 어둠속에서 버텨야 하는 것도 괴로웠지만, 전자결재 시스템을 비롯하여 업무에 필요한 모든 자료가 담겨 있는 컴퓨터를 쓰지 못하기에 전기가 복구될 때까지 사무실의 직원들은 모두 멍하게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인터넷 회선에 문제가 생겨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컴퓨터와 인터넷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바보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에 당황스러운 순간이었다. 컴퓨터와 인터넷망이 우리의 일상에 얼마나 깊이 파고들어 있는지 보여준 드라마 <유령> 속의 픽션은 늘 닥칠 수 있는 우리의 논픽션이기에 더욱 그 충격은 컸다.
어느새 인터넷과 컴퓨터는 우리의 생활 그 자체가 되었고, 당연하게도 우리의 문화 역시 자연스럽게 변화해가고 있다. 종이신문을 대체하는 인터넷 신문을 비롯하여, 온라인 마켓, SNS의 열풍 속에 종이로 인쇄된 도서 대신 e-북과 종이만화 대신 등장한 웹툰이 등장했고, 기존 매체가 변화해 가는 속도는 빨라진 인터넷 속도만큼이나 재빠르다.
강풀, 모니터에 심장을 뛰게 하다
<마린 블루스>
2003년, 문화부에서 수여하는 ‘대한민국 만화, 애니메이션, 캐릭터 대상’의 대상 수상자는 정철연의 <마린 블루스>였고, 이는 만화계뿐만 아니라 문화계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일이었다. <마린 블루스>는 그간 성공한 만화가 수순처럼 밟아온 과정, 만화잡지→단행본→캐릭터상품→TV 혹은 극장용 애니메이션 제작 등 매체 확장(김수정의 <둘리>의 진화과정을 보면 이해가 더욱 쉬울 것 같다)의 수순과 확연하게 다른 형태로 제작되었다.
애초 제작단계에서부터 인터넷 환경에 적합한 색감과 단편적이면서 감성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는 <마린 블루스>는 회사에서 만든 홈페이지와 포탈에서의 연재 이후 네티즌들의 미니홈피와 각 포탈 게시판 등을 타고 빠른 속도로 퍼졌고, 인기 만화로 자리매김했다. 웹툰의 전성시대의 서막을 알리듯, 이후 만화계의 판도는 확연히 달라졌다. 단행본 출판 시장에 진출하지 못했던 수많은 만화작가들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그 새로운 시장이 업계의 판도를 역으로 바꿔버렸다.
<폐인 가족>, <위대한 캣츠비>
디지털 기술에 익숙한 젊은 작가 군이 형성되고, 웹툰의 인기는 다시 출판만화 시장으로 이어졌다. 초고속 인터넷 보급률과 비례하게 급속도로 형성된 인터넷 문화 속에서 웹툰은 수없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인터넷 문화의 커다란 한 맥이 되었고, 앞 다투어 인기 작가를 선점하기 위한 경쟁을 벌이는 포탈의 급속한 팽창도 그 원인이 되었다. 결국 인터넷을 통해 만화가 지망생은 별도의 등단 절차를 거치지 않고 자신의 만화를 유통시킬 수 있게 되었다. 출판사의 높은 벽을 뚫을 필요도 없고, 유명 만화가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오랜 시간 배경색을 칠하고 있을 필요도 없어졌다. 심의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표현의 자유를 확보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이렇게 인터넷은 작가로 등단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만화가 지망생들에게 손쉬운 ‘자력 등단’의 기회를 제공했다.
웹툰의 가장 큰 장점은 짧은 업데이트 기간과 접근용이성에 있다. 대부분의 출판만화는 여러 권에서 수십 권까지 스토리가 이어진다. 그리고 대부분 격주간지 형식의 만화잡지를 통해 연재된 후 단행본이 출간되기 때문에 단행본이 나오기까지 독자들은 지루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웹툰의 경우 하루에 한번 혹은 격일에 한번 정도로 연재기간이 짧을 뿐만 아니라 손쉽게 읽을 수 있고 또 다른 네티즌들과 공유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반응도 즉각적이고, 파급력도 순식간이다. 게다가 출판만화의 종이규격에 맞출 필요가 없기 때문에 컷도 자유롭게 구성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진다. 초창기 웹툰들이 엽기적이고 발랄한 내용으로 네티즌들의 즉각적인 반응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순정만화>
수많은 웹툰 작가들의 경쟁 속에서 본격적인 웹툰의 성공이라 할 수 있는 강풀의 성공과정은 더욱 흥미롭다. 그의 초창기 대표작인 <순정만화>는 가장 현대적이라고 할 수 있는 온라인 디지털 화면에 오히려 복고에 가까운 정서를 담아냈다. 수채화에 가까운 그림체에 감상적인 내용은 네티즌들의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호흡이 짧은 대신 깊게 생각하지 않고 즉각적인 감동과 자극을 받고 싶어 하는 네티즌들의 감성을 제대로 읽어냈기 때문이다.
<순정만화>는 그 동안 메마른 감성의 익명집단으로 분류되던 네티즌을 새로운 감성의 주체로서 이해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 작품에 공감한 네티즌들이 온라인 공간 여기저기에 ‘펌질’을 하면서 순식간에 유명세를 탔다. 이 만화가 네티즌과 교감했던 코드는 첫사랑과 추억이라는 아날로그 감성이었다. 깊은 밤 모니터 앞에 앉아 혼자 웹서핑을 하는 네티즌은 결집된 의사표현을 하는 집단에 앞서 외로운 개개인이었던 것이다. 결국 외로운 네티즌 개개인은 작은 공감대만 형성돼도 곧바로 깊은 유대를 나누게 되었다. 강풀 만화에 담긴 소소한 삶의 작은 이야기들에는 웹에서 찾을 수 없는 사람의 향기를 풍겼던 것이다. 작가 자신이 젊은 네티즌이고, 그런 네티즌의 속성을 잘 이해했기에 가능했던 성공이었다.
<바보>
<타이밍>
강풀의 만화는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소통이 다른 어느 매체보다 즉각적이고 긴밀하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고 있으며, 자신의 웹툰을 중심으로 형성된 커뮤니티를 이끌어 가는데 적극적이었다. 네티즌의 의견은 손쉽게 다음 작품에 반영이 되고, 또 반영된 결과에 대한 반응은 재빠른 것이었다. 강풀의 원작들은 하나의 스토리보드가 되어 충무로의 구미를 당겼고, 이미 검증된 네티즌들의 반응은 강풀에게 더욱 힘을 실어주었다. 시대를 읽는 힘에 감정 선을 자극하는 따듯한 심성만이 그가 가진 능력은 아니다. 그는 다양한 인물들을 끌어들인 복잡한 이야기를 하나의 정서로 묶어내는 뛰어난 스토리텔러이며 자칫 흔한 소재를 낯선 이야기로 만들어버리는 능력까지 가지고 있다.
<순정만화>는 세 커플의 단편적인 이야기를 이어주는 역학을 놓지 않고, 연애에 있어서도 타인과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크지 않지만 설득력 있는 목소리로 들려준다. <바보>는 한 여자만을 기다린 바보의 짝사랑을 그린 순정만화이지만, 타인과 가족, 이웃 공동체에 대한 애정을 담아냈고, <순정만화>에 이어 스크롤로 내려가는 만화에서 심장소리를 듣게 만들어 주었다.
만화 <아파트>는 한과 혼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사건과 미스터리보다는 인물에 대한 감정이 극의 중심이 되며 캐릭터 드라마로서의 미덕을 살리고 있다. 공포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강풀의 미덕이 살아있는 작품이었다. 참신한 소재를 끌어들인 <타이밍>도 결국에는 타인에 대한 관심이 이야기의 중심에 있다. 초능력이라는 호기심을 끄는 소재보다 공동체적 삶에 눈길을 주는 작품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26>년도 정치적인 배경보다 역사적인 소용돌이 속에 파묻힌 인물이 중심에 있으며,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노인들의 사랑을 그리고 있다.
강풀의 <이웃사람>
<아파트>, <순정만화>, <바보>, <그대를 사랑합니다>와 최근 촬영 중인 <26년>을 포함하면 <이웃사람>은 영화화된 강풀의 6번째 작품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앞선 4작품은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고, <26년>은 전직 대통령 암살이라는 자극적인 소재 때문에 몇 차례 좌초를 맞았던 프로젝트였다. 강풀 만화의 원작은 영화화하기에 적합한 소재와 충분한 재미를 가지고 있지만, 매번 실사화 되는 과정에서 캐스팅에 대한 독자들의 불만이 있었고 또한 강풀 특유의 복고적 감수성과 정서를 화면에 담아내는 과정에서 충분한 완성도에 대한 아쉬움도 있었다.
그런 점에서 개봉을 앞두고 있는 <이웃사람>은 다른 전략을 내세운다. 만화와 캐스팅된 사람들 사이의 싱크로율 100% 내세우면서, 만화 팬들이 실사화된 배우를 상대로 쉽게 느낄 수 있는 이물감, 그 거리감을 줄이고자 한다. 그리고 그 전략은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것 같다. 기존 강풀의 만화들처럼 스토리는 단순하다.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이 아파트에 살고 있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한 소녀가 억울하게 죽는다. 다른 표적이 된 소녀. 타이틀이 상징하듯 '이웃사람'은 위기에 빠진 소녀를 살리기 위해 힘을 모아 살인범을 찾아낸다. 강풀의 웹툰에서 우리는 무관심 속에 잊혀진 ‘이웃’이라는 복고적 감성을 스릴러의 형식 안에 담아낸다.
<이웃사람>에서 ‘범인’은 최초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스릴러는 은폐된 범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은폐된 범인과 그를 둘러싼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난다. 영화 <이웃사람>은 만화 속 거의 모든 에피소드를 화면 안에 불러들인다. 원작에는 없었던 새로운 에피소드는 주인공 경희와 여선 사이의 이야기인데, 원작 못지않게 사람들의 마음을 먹먹하게 만드는 훌륭한 에피소드로 재탄생했다.
우리가 흔히 뉴스나 다큐멘터리에서 보는 인터뷰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이웃사람 인터뷰 장면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조용하고 좋은 사람이었어요. 예의도 바르고…….” 하지만, 그들은 이웃의 정체를 모른다. 친근하게 말은 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웃이었지만, 그 사람을 제대로 모른다는 사실은 은폐하고 싶어 하는 건지도 모른다.
<이웃사람>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에 있다. 수많은 이웃사람이 힘을 합쳐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협동한다. 연쇄 살인범의 이야기를 다루지만, 잔혹한 장면을 배제하고 이야기의 틈새는 끔찍한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배우들의 연기로 채워 나간다. 사실 <이웃사람>은 캐스팅된 배우들의 면면으로만 봐도 충분히 볼만하고 즐길만한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김윤진, 마동석, 김새론, 김성균, 임하룡, 천호진, 장영남이 웹툰에서 그대로 튀어나온 것 같다는 사람들의 평가는 과찬이 아니다. 하지만, 정말 원작 그대로 잘 빠졌다는 평가는 영화 <이웃사람>의 최대 장점이자, 흥행에 있어서는 최대의 단점이기도 하다. 이미 너무 많이 본 웹툰의 팬들이 실사 애니메이션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게 될지는 여전히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바보>
개인적으로 영화화된 강풀 원작의 작품 중에서는 <바보>를 좋아하는데, 새로움에 대한 강박증은 지우고, 서로 다른 장르가 가질 수밖에 없는 간극을 우직한 순수함으로 채우며, 통할 수밖에 없는 진심을 담아내기 때문이다. 뻔하지만 마지막엔 눈물을 흘리게 되는 신파적인 감성조차 너무나 착해 흠을 잡아내기가 미안한 영화였다. 만화의 모티브와 명성만 빌어 왔던 <아파트>가 장르영화 속에서 강풀이 원작에 담아둔 고독한 디지털 세대의 단절감과 그를 극복하기 위한 소통과 사랑, 가족과 공동체의 복원에 대한 바람을 간과한 것과 달리 <바보>는 고스란히 원작에서 건져내고 있고, 그런 복고적 감성은 일련의 강풀 만화가 담고 있는 핵심에 가까운 것이다. 강풀을 통해서 네티즌들은 모니터에서 살 냄새를 맡게 되었고, 두근거리는 심장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우리가 보고 듣고 싶어 하는 것은 사람이며, 강풀의 작품들은 가족주의가 강한 한국인의 감성을 자극할만한 충분한 매력이 있다. 강풀이 가지는 공동체에 대한 열망은 타자에 대한 관심으로 연결되며 결국에는 가족에 대한 애정으로 완성된다. 게다가 호러, 멜로, 사회, SF 등 다양한 장르로 손을 내민 그의 스타일은 재미있지만, 그 감성은 여전히 ‘복고’에 닿아있다.
<26년>
아직 살아있는 전직 대통령을 영화의 중심에 끌어들여, 그 암살계획을 그리는 <26년> 역시, 큰 소재는 사회적인 함의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깊이 들여다 본 <26년>의 정서는 가족, 그리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의 복원이다. 그런 점에서 곧 제작 완료될 <26년>이 강풀의 감성을 영화에 얼마나 생생하게 살려낼지 기대된다. 강풀이 원안을 제공했던 <통증> 이후 대본작업에 참여한 <괴물 2>도 제작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하니 만화계와 영화계를 오가면서 강풀은 가장 핫하고 영향력 있는 인물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렇게 그는 트렌드의 중심에 서 있지만, 그 정서는 여전히 복고적이다. 그 점이 늘 그의 작품을 기대하고 믿어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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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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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최재훈
늘 여행이 끝난 후 길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된 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느라, 아주 멀리 돌아왔고 그 여행의 끝에선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음악, 공연, 문화예술계를 얼쩡거리는 자칭 culture bohemian.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씨네서울 기자,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활동 중이다.
즌이
2012.11.16
freewired
2012.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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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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