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주간지 시사인 인터뷰(2012년 5/12 제 243호)에서 “영화 덕에 소설이 다시 베스트셀러가 된 것이 어떻냐”는 질문에 소설가 박범신은 이렇게 말했다. “좋으면서도 싫었다. 한국의 독자들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은교』는 깊은 주제 의식과 서사의 힘이 있는 좋은 소설이다. 그런데 영화화가 안되었을 때는 독자가 안 찾고 영화화되어 독자가 찾는다는 것이 씁쓸했다. 독자들에 대한 섭섭함이 있다.”라고. 그 기사를 읽고 문득 느낀 것은 시간이었다. 박범신이라는 소설가가 경험한 예전의 독자들과 지금의 독자들, 그 간격을 메꾸는 시간.
“2010년에 이 책이 나왔는데, 지금 이 책을 고치거나 바꾼 것이 없잖아. 표지나 텍스트가 그대로야. 근데 이렇게 지금 열화와 같이 책을 사는 독자들은 어디 숨어 있다 나오나 그런 생각이 드는 거지. 나는 문학의 힘이 셌던 시대를 살았거든. 작가가 독자를 영화관으로 데려가던 시절이 있었어. 원작 소설이 어떻게 영화화되었는지 궁금해서 사람들이 영화를 보러 갔거든. 문학이 영상보다 셌던 시대를 나는 온몸으로 경험했어. 1980년대에 영화화 된 게 열 편 정도 되거든. 내 생애에 이렇게 세상이 바뀌었구나,는 것을 느끼는 거지. 섭섭함이 뭐 있겠어. 책 잘 나가면 좋은 거지.”
지금 내 눈 앞에서 호기심 어린 반짝이는 눈으로 웃고 있는 반백의 소설가, 이제는 역사책에서 만나야 할 것 같은 박정희가 제8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있었던 1973년에 등단하여, “문학이 영상보다 셌던” 한 복판을 거쳐온 소설가다.
그의 소설 중 영화화된 열 편 중 대한민국 영화사를 얘기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영화가 ‘죽음보다 깊은 잠’(1979 개봉), ‘풀잎처럼 눕다’(1983 제작), ‘불의 나라’(1989), ‘물의 나라’(1990). 소설 『불의 나라』는 1988년에 출간되어 그 이듬해인 1989년에 영화화되었고, 이 영화로 배우 장미희가 스타 배우로 떠오르게 된다. 또 그 이듬해인 1990년에 KBS에서 드라마화되었다. ‘불의 나라’가 텔레비전에서 방영될 시, 극장에서는 그의 또 다른 소설을 원작으로 한 <물의 나라>가 개봉 중이었고, 1991년에 <물의 나라>는 다시 드라마화된다. 박범신은 소설을 쓰고, 그 소설이 독자들에게 많이 팔리고, 영화업자들은 그 소설을 영화로 만들고, 드라마 피디들은 그 소설을 드라마로 만들던 숨가쁜 그 시절, 그는 그 시절이 “늘 괴로웠고 고통스러웠다”고 한다.
“내가 동지라고 부르고 싶은 자들이 나를 대중작가로 폄하하고, 책이 잘 팔리니까 독자들에게는 찬미 미사를 받는데, 문단 내부의 일부 지식인들에게는 매일 인민재판 같은 평가를 받아야 하는 상황. 그 시대의 어떤 그런 것과 작가의 사회적 책임의 문제. 1970년대 말에 이른바 인기작가가 되었을 때 생활이 갑자기 환경이 무지하게 달라졌지. 그거 피해서 안양으로 이사 갔어요. 밀실에 있다가 광장에 불려 나온 심리적 부담감. 한마디로 말할 순 없어. 늘 괴로웠고 고통스러웠지. 소설을 쓰면서도 쓰는 행위 자체가 자랑스럽지 않았던…. 시대 때문이지. 난 광주로 가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었던 상황. 총체적인 거야. 그 시대는 굉장히 불안정했어.”
올 봄에 나온 그의 에세이 『나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밖으로는 정치적인 억압이 목을 조르는 시대와 불화를 겪어야 했고 안으로는 ‘동지’라고 부르고 싶었던 문단 내부와 불화를 겪어야 했던 것입니다. 자학이 깊어 안양으로 도망치듯이 이사했고, 그것도 모자라 동맥을 자르고 더러운 안양천변에 누워 있었던 끔찍한 사건을 저지른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습니다. 세 아이의 엄마였던 아내가 아파트 경비원을 총동원해 실신한 나를 찾아 병원으로 옮기던 날 저녁 풍경이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나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304 P) | ||
문학평론가들이 좋아해 줄 것 같은 작품이 아니라, ‘단독자’로서, ‘작가’로서 자신이 쓰고자 하는 작품을 쓰겠다는 마음과 작가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 하는 죄책감 사이에서 괴로워하고 우울해하고 급기야 자살을 시도해 안양천변에 쓰러져 있어야 했던 사십 대의 박범신과 그 시절을 상상해본다. 고작 삼십 년도 안 되는 시간이지만, 또 아득히도 긴 시간. 그러나 지금 명백하게 주어진 사실은 박범신은 지금도 왕성하게 소설을 쓰고 있으며, 독자와 관객이 그의 작품을 좋아한다는 것. 그가 사십 대였을 때처럼 말이다. 그 때와 달라진 것은 없다. 사십 대의 박범신처럼 육십 대의 박범신은 홀로 있고 싶어하면서도 외로워서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하고, 가끔은 우울해하고, 사랑하고 싶어하며, 좋은 소설을 쓰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 차있다. 그래서 “좌질투 우변덕”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마음이 갈팡지팡 변화무쌍 하면서도, 문학에 대한 마음은 이십대 청년처럼 순진무구한 그의 모습이 담긴 에세이 『나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은 잔잔하지 않다. 울퉁불퉁하고, 파닥거린다. 그의 마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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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고향인 논산으로 내려가셨습니다. 편한 서울을 두고, 논산엔 왜 내려가시게 되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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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있는 게 훨씬 편하죠. 아내도 있고 친구들도 있고. 이제 가난하지 않기 때문에 환경도 나쁘지 않고. 말년에 얼마나 편안하고 행복하겠어요. 논산은 혼자 있어야 하고, 춥고, 집을 고치지 전이었기 때문에 고생이죠. 내 자신의 변혁에 대한 강렬한 욕구가 없으면 못 가죠. 1994년에 절필하고 1996년 소설을 다시 쓰기 시작한 후 15년은 갈망기였어요. 삶의 유한성에 대한 존재론적인 작품을 쓰고 싶었어요. 그것에 대해 쓸 만큼 쓴 것 같아요. 더 이상 발언할 게 없어. 계속 쓰면 동어 반복이 되기 쉽고. 전, 제 소설을 라이벌로 삼거든요. 『은교』처럼 판매도 성공적이면 이걸 깨뜨리고 싶은 욕망이 강해져요. 자기 혁신, 자기 변화에 대한 욕망이 강한데 이걸 편안하고 안락한 환경 속에서 변혁에 대한 욕망을 따라가기 쉽지 않거든. 그럴 때 환경을 극적으로 바꾸거나 결단을 통한 자기 갱신을 꾀해요. 평생 써온 방법이에요. 명지대에서 붙잡았는데도 때려 치고 놀았잖아요. 오로지 작가로서 내 변화의 욕망을 정면 돌파하는 방법으로 써먹는 거죠. 그래서 이번에도 논산에 간 거죠. 강의도 뿌리치고 가을, 겨울 있었더니 거기서 외로워서 못살겠대. 나 왜 이렇게 갈팡질팡해.(웃음) 한 2, 3년 세상과 끊으려고 했어요. 이적요처럼.
겨울 동안 금단 현상 오더라구요.(웃음) 그래서 상명대 석좌교수로 강의하고 있어요. 저는 감정 편차가 심한 인간인 것 같아요. 사람 속에 가고 싶은 욕망과 사람과 등지고 싶은 욕망이 갈팡질팡해. 작가로서는 그게 에너지지. 그래서 청년작가로 불리는 거지. -
에세이집 보니까 소설 안 쓰면 우울하다고 하셨는데요, 요새 소설을 안쓰시니 우울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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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하고, 자기 학대하는 마음도 생기고. 그러지. 조금 불안정해요. 그러니까 논산 같은 책(『나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을 쓰는 거야. 자기가 고민하는 게 명백해지는 게 중요해요. 글을 쓰지 않으면 문제가 추상적이에요. 문장으로 쓰면 자기 결핍과 고통이 명백해져요. 그게 첫 번째 이유에요. 이 책을 다시 읽고 나서 지난 나의 가을과 겨울이 무엇인지 알았어요. 이 책의 주제는, 나는 왜 논산으로 왔을까?예요. 한 인간으로서 질문이 아니라 한 작가로서의 질문이지. 내가 느끼지 못하는 새에 논산에 왔는데 뒤늦게 질문하는 거야. 난 뭘 쓰러 왔지? 어떤 이야기가 닥칠까? 난 뭘 준비해야 할까. 이번 책을 낸 후 내 고민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게 되었어요.
또 이번 글을 쓰면서 고향을 새로 알게 되었어요. 내가 알던 고향이 아니더라고. 옛날에는 고향을 몰랐어. 이 나이에 고향에서 살아보니 내가 몰랐던 고양을 보게 되요. 고향 선전도 하고 싶고. 그런데 더 분명한 것은 소설을 못쓰니까 불안해서 대부분 페이스북에 술 취해서 쓴 거야. 너무 술 냄새 나는 문장들은 고치기도 하고 빼기도 했어요. 내 자신을 정직하게 내던짐으로써 지금 한 시기 문학이 끝나고 한 시기 문학이 시작되지 않은 불안정하고 불안한 침묵을 독자들에게 한번 내 던져 보는 거지… -
논산으로 후배 작가들이나 지인들이 놀러 오잖아요. 밤새 술 마시며 놀다가 모두들 다 가버리고 혼자 눈을 뜨시게 되는 상황이 종종있는 것 같더라구요. 그럴 때 마음이 어떠세요? 무척 헛헛하실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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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오고 안 오고는 게 외로움을 구원하는 건 아닌 것 같아. 논산에서 느낀 건데, 인간은 환경의 동물이 아니구나. 환경에 의해 행복해지는 게 아닌 것 같아. 옛날에 고향을 떠날 때의 나를 생각하면, 가난하지. 아무런 사회적 전망이 없었어. 그걸 생각하면 지금 얼마나 복 돼요? 집도 있고 이렇게 인터뷰도 하고. 행복하죠. 근데 고향을 떠날 때의 나로부터 어떤 충만감, 행복감을 기준으로 본다면 한 걸음도 못나갔다는 느낌. 나는 여전히 눈물 나고, 고독하고 불행함을 느껴요. 내가 행복지수가 높아진 것 같진 않아요.
맨날 헛헛하지. 죽겠어.(웃음) 근데 나는, 작가라고 하는 건, 단독자라고 봐요. 평생. 자기 혼자 사는 거 아니겠어요. 단독자로 세상을 보고, 단독자로 세상과 맞짱 뜨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고독감을 덜어낼 수 없지만, 고독감이 내 안에 습관화되지 않도록 애를 쓰죠. 그런 고독감을 항상 새로 느끼는 고독인 것처럼, 느끼도록 노력해요.
난 내공이 잘 안 쌓이는 것 같아. 슬픔과 고독에 내공이 안 쌓여. 60년 동안 고독했으면 이제 널널하게 고독할만도 한데, 항상 처음 고독한 것처럼 그렇게 눈물이 나. 개인적으로는 저주받은 삶이라 생각하지만 한편으론 나는 세상에 진 건 아니구나. 말하자면, 자본주의적 논리 구조가 판치는 소비 중심의 세상이 나를 훼손하지는 못했다,라는 것. 나는 굉장히 중요한 거라고 봐요. 나에게는 문학 지상주의 같은 순정이 아직 강하게 남아 있어요. 내 삶에서 그게 불편하고 세상과의 불화를 일으킬 수 있겠지만 세상으로부터 내가 훼손된 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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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문학 지상주의와 같은 순정을 느낀 것이, 『은교』를 선생님 블로그에서 개인적으로 쓰셨다는 얘길 듣고 입니다. 보통 소설가들은 청탁에 의해서 작품을 쓰시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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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는 늙어가는 문제에 대해 집중적으로 토로한 소설이잖아. 내 안에 너무나 폭풍 같은 것이 가득 들어있어서 이걸 문을 열면 쏟아져 나오리라는 예감이 있었어요. 연재는 정해진 시간에 보내야 하는 규칙 같은 게 있잖아. 규칙대로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는 내 블로그에 20명도 안 들어올 때야. 독자는 생각도 안하고 썼어요. 그랬는데 10일 지나니까, 1000명, 2000명 들어오더라구요. 소설에 대한 반응이 성공적이라는 느낌이 왔어요. 하루에 30매도 쓰고, 20매도 쓰고 내 맘이지. 그 소설은 한두 장 쓴 적이 없어. 제어가 안되더라고. 말들이 내 안에서 거의 쏟아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시작하니까 줄지어서 떡가래 나오듯이 나오더라고. 단번에 끝내버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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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께서 가장 그리워하시는 건 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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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지. 은교는 모든 남자의 로망일 거라고 보는데. 그 아이는 10대지만, 세상으로부터 훼손되지 않는 사랑에 대한 강력한 지향을 갖고 있는 아이에요. 보통의 우리들은 이성을 보면, 사랑을 해야 할 놈과 안 해야 할 놈을 빨리 계산하는 훈련을 많이 받아서 찬스가 와도 스스로 훼방 받죠. 여자만 그렇겠어. 남자도 그래요. 은교는 그런 것이 없어요. 자기 사랑이 가면, 70대 노인네도 사랑할 수 있는 애고, 십대 소년과도 사랑할 수 있는 애고, 외국인하고도 사랑할 수 있는 애고. 약간 까지고 못된 것처럼 보이지만 걔가 가진 고귀한 것은 어떤 사회적 편견도 마음 속의 본질적인 것을 훼손하지 못한다는 거지. 모든 남자의 로망이 아닐까 싶어요.
언제 망할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그렇게 살기 두렵죠. 은교라는 애는 극단적으로 그런 두려움이 없어요. 소설적 재미를 위해서 은교 나이를 17살로 설정했지. 은교에게는 마흔도 들어있고 예순 살도 들어있어요. 관능이라는 게 뭐겠어. 슬픔을 이해하는 능력이 관능이라고 봐요. 기쁨만 가득한 여자가 섹시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폐허가 깃든 얼굴이 섹시한 거지. 나이와 상관없어요. 10대지만 놀랍게도 슬픔을 이해하는 애가 있고, 60대인데도 슬픔을 이해하는 능력이 없는 여자도 있고. 슬픔과 상처와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 본원적인 능력이야말로 사랑이고 관능이 아닐까 생각해요. 은교는 내가 좋아하는 여성상을 그린 거야. 소설적 긴장감을 위해 10대로 설정한거구. 은교가 30대라 해도 소설이 달라지진 않아요. 성적 긴장감이 떨어질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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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에 오시면서 다짐한 두 가지가 고전을 읽자와 일기를 쓰자 입니다. 고전 읽기는 잘 되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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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읽어.(웃음) 젊은 청년 작가 시절로 돌아가서 한 시기의 문학을 준비하려는 마음으로, 20대 전후에 읽은 책을 두어 박스 쌓아갔지. 아직 다음 소설을 정하지 못하고 내 마음이 떠 있어요. 독서가 제대로 안되더라고. 4~5페이지 읽으면 집어 던지고, 다른 책을 들어. 또 책을 들다 금방 나가서 소주를 먹고 다시 읽고. 독서 자체에 빠져 있을 수가 없었어요. 빨리 좀 안정 되었으면 좋겠는데 뭘 써야 할지 알아야 되지 않겠어요. 어떻게 써야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무엇이냐 하는 문제인데, 아직 무엇이 잘 보이지 않는. 무명 속에 있는 거지. 논산일기는 그런 고백이에요. 그렇지만 매우 뜨거운 상태죠. 굶주린 맹수. 걸리기만 하면 가차없이 뜯어 먹겠다 하는 맹수. 위험한 과도기에 놓여 있죠. 과도기에 쓰여진 일종의 부산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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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은 어떤 곳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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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논산 일기하면 병영일기인 줄 알아. 논산 훈련소로만 논산을 기억하는 거죠. 나도 고향을 떠난 20대 때는 내 고향을 잘 몰랐어요. 나도 내 고향을 깊이 공부하는 기간이었지. 계룡산과 대둔산 사이에 논산이 끼어 있는데, 논산은 두 지역이 있어요. 상업적 지구가 있고 북부는 유림적 전통이 깊고, 서인이 조선 중 후반을 지배했던 서인 세력의 본거지에요. 조선의 옛 법이 전부다 논산 출신 학자들에게 총 정리되었거든요. 서인 그룹의 정통성으로 볼 때는 율곡 이이로부터 사계 김장생, 그 밑으로는 윤중, 송시열 등이 법통을 이어받죠. 중간에 그 역할을 하는 김장생이 조선 예법을 총정리한 사람이에요. 조선 중 후반부 체제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낸 거라고 할 수 있죠.
노론의 영수는 송시열인데 논산 김장생 밑에서 수학했고, 논산을 왔다 갔다 하면서 실질적인 지지기반의 하나로 삼았어요. 매우 깊은 조선 체제를 만들고 지켜냈던 세력들이 논산을 근거로 하고 있어요. 동학이 폐할 때 접주들이 장렬하게 순사한 것도 대둔산이고. 충절의 고장이기도 하지.
젊었을 땐 잘 몰랐어요. 우리 고장에 너무나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구나. 내가 이것 때문에 여기 왔구나, 생각했어요. 서울에 계속 살았더라면 몰랐거나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을,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의 기록이나 논산의 이야기가 나를 건드리고 있는 상태지. 내가 살아 생전, 너무나 많은 고향 이야기를 지나쳤구나. 내가 요즘 논산시 홍보대사야.(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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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소설 정하신 후에도 일기는 계속 쓰실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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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모르겠어. 출판사 사장에게 일년에 한 권씩 일기를 내야겠다고 했는데. 나이 든 작가니까 그가 어떤 걸 고뇌하고 어떻게 살았는지 기록을 남기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싶어서요. 계획은 일년 이맘때마다 일기를 한 권씩 내는 거야. 계획은 그런데 그렇게 될는가 모르겠네.(웃음)
- 나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박범신 저 | 은행나무
『나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는 그가 논산에 내려가 틈틈이 SNS ‘페이스북(FACEBOOK)’에 썼던 일기를 모은 것이다. 호수를 마주 보는 ‘논산집’에 적응하며 홀로 생활하면서 겪은 일, 문학적 감수성을 배태하게 해준 고향 이야기, 논산과 서울을 오가며 떠오른 오늘날의 세태에 대한 단상들을 주로 썼다. 글과 함께 ‘페이스북’에 올라갔던 사진들도 책에 수록했는데, 노 작가답지 않게 휴대전화로 찍은 사진들이 글과 어우러져 소소한 재미를 안겨주는 동시에 세상에 대한 작가의 시선을 온전히 느끼게 해준다…
김정희
독서교육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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