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따라야 루사는 러시아에서 11세기부터 유명했던 도시지만 사람들은 이곳을 도스또예프스끼의 도시로 기억하고 있다. 도스또예프스끼 가족이 이곳에서 안식처를 찾았을 뿐만 아니라 지방 소도시의 생활 관습이 작가의 문학 세계를 풍성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스따라야 루사의 집 이외에는 평생 자기 소유의 집을 가진 적이 없다. 뻬쩨르부르그에서 수없이 집을 옮겨 다녔지만 모두 세를 얻은 것이었다. 이것이 스따라야 루사가 도스또예프스끼와 그의 가족에게 각별한 이유이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스따라야 루사에 살면서 도시 풍광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곳에 사는 평범한 민중의 삶을 통해 지방 소도시 특유의 가부장적인 분위기와 세계를 이해할 수 있었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스따라야 루사의 조용한 거리와 아름다운 강변길, 강가에 놓인 작은 다리들, 시장 바닥의 혼잡한 상점들과 주변 골목길, 시끄러운 선술집들, 기선들과 철길 등을『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실제 모델로 삼았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사람들에게 새로운 이름과 생을 부여했고, 자신이 본 모퉁이 집으로 그들을 이주시켰으며, 그들의 손으로 그 집 문을 직접 열게 했다. 작품의 등장인물이 된 사람들은 지나가는 행인에게 말을 건네고, 심지어 젊은 여자들에게 유혹의 추파를 던지기도 했다. 신문에서 읽은 기사는 작가의 손을 빌려 인상적인 사건으로 재탄생했다. 사건의 주인공들은 아주 복잡한 뇌 수술을 받았고, 그후로 이상한 행동과 말을 하기 시작했다. 도스또예프스끼의 딸이 남긴 회상록을 보면 스따라야 루사와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사이의 연관성은 분명해진다.
스따라야 루사의 아름답고 평화로운 강변 산책로
아버지는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을 이 도시로 옮겨놓았다. 나중에 이 작품을 읽었을 때 나는 활자로 된 스따라야 루사를 쉽게 알아보았다. 까라마조프 노인의 집은 우리 별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리따운 그루셴까는 부모님이 스따라야 루사에서 알게 된 젊은 시골처녀이다. 상인 쁠로뜨니꼬프는 아버지가 좋아하는 납품업자였다. 마부 안드레이와 찌모페이는 우리와 친한 사이로 가을에 기선들이 정박하는 일멘 강가에 매년 우리를 태워다주던 마부이다. |
그녀의 지적대로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을 읽어보면 스따라야 루사를 연상시키는 거리, 장터, 다리, 도시 풍광들이 자주 등장한다. 스따라야 루사는 매우 작은 지방 도시다. 걸어서 두 시간이면 도시 전체를 둘러볼 수 있을 정도다. 걸어서 일멘 강가에 놓인 다리를 건너다 문득 걸음을 멈춰본다. 이 다리를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자주 오갔다. 일멘 강은 규모가 작아 큰 개천 정도밖에는 안 된다. 멀리 황금색으로 반짝이는 교회가 눈에 들어온다. 강가를 따라 난 산책길로 사람들이 여유롭게 거닐고 있다.
일멘 강변의 교회
숲 속의 초록색 집
도스또예프스끼의 집은 스따라야 루사의 도심에서 조금 벗어난 지역에 있다. 일멘 강 상류 쪽 숲이 우거진 곳에 자리한, 주변 집과는 분위기가 다른 녹색 2층 목조 건물이다. 한눈에 보기에도 집의 외형이 러시아식 집과는 다르다. 어딘지 모르게 유럽 스타일의 별장처럼 보인다. 도스또예프스끼의 딸은 회상록에서 “발트 해 연안 지역의 독일식 집”이라고 묘사했다.
건물 울타리를 지나자 녹색 정원이 시원하게 눈에 들어온다. 하늘을 덮은 키 큰 나무들이 짙은 그늘을 드리운다. 그 사이로 도스또예프스끼가 살던 집이 있다. 목조 건물인 이 집은 현재 도스또예프스끼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1층은 관리인들이 쓰고, 큰 계단으로 이어진 2층에 도스또예프스끼가 살던 방들과 거실, 서재, 침실, 부엌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도스또예프스끼 가족의 집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도스또예프스끼는 낡은 외투에 슬리퍼를 신고 혼자 책상에 앉아 어제 쓴 원고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넓은 집에는 도스또예프스끼밖에 없었다. 정오가 다 되어 일어나서 얼굴은 피곤하고 허약해 보였다. 그는 퀭한 눈을 비비며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방 안으로 들어오는 내 쪽을 흘끗 바라보았다. 그는 내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와 나 사이에는 무수한 시간의 틈새가 가로막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마치 오래된 사이처럼 편안하게 마주 보며 앉았다.
“커피가 식었군.”
도스또예프스끼가 허공에 대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
열린 창 너머로 느릅나무가 이리저리 몸을 흔들었다. 그 사이로 밝은 빛이 실내를 비추었다. 육중한 나무 널빤지 밑에서 가벼운 먼지들이 아지랑이처럼 솟아오른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원고를 옆으로 치우며 종잡을 수 없는 소리를 했다.
박물관 실내의 모습
“인간은 서로를 사랑해야 돼. 모든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죄가 있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지상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개인적인 죄를 짓고 있어. 하지만 우리는 자기 죄를 두려워해서는 안 돼. 죄를 속죄하고 뉘우치면 용서받을 수 있어. 죄를 인정하지 않으면 더 큰 죄를 짓게 돼. 결코 오만해서는 안 돼. 오만함은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는 마음의 병이야. 겸손한 마음으로 타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봐. 그럼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진실의 소리가 들리지. 그 소리는 사람들 사이를 연결하는 따뜻한 마음을 생기게 해. 그래야 우리는 진실로 살아 있는 생명을 이어갈 수 있어. 이게 사랑의 법칙이야. 사람은 사랑으로 참된 세상을 얻을 수 있는 거야. 눈물로써 속죄를 하고 나면 세상은 어느새 내 곁에 다가와 속살을 비비고 어리광을 피우지.”
도스또예프스끼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마쳤다. 속죄의 눈물이라도 흘리는 것일까. 그의 눈가에 물기가 번졌다. 고개를 숙인 모습이 마치 잘못을 고백하는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이때 갑자기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이 산책을 마치고 집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창밖에는 여전히 녹음이 울창했다. 어디서 우는지 나뭇가지 사이로 새 울음소리가 청아하게 들려왔다.
-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이병훈 저 | 문학동네
저자가 모스끄바 국립대학 재학 시절 도스또예프스끼 세미나에 참여하면서부터 모아온 방대한 자료와 더불어, 2009년과 2010년 여름, 도스또예프스끼가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낸 모스끄바, 대부분의 작품활동을 전개한 뻬쩨르부르그, 10년간의 시베리아 유형 중 4년간 감옥살이를 한 옴스끄, 말년에 가족과 전원생활을 즐긴 스따라야 루사 등 직접 취재한 기록을 담았다...
이병훈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고려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모스끄바 국립대학에서 러시아 문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아주대학교 기초교육대학 강의교수로 재직중이며, 같은 대학 의대에서 '문학과 의학'을 강의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모스끄바가 사랑한 예술가들』『백야의 뻬쩨르부르그에서』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미하일 부가꼬프의 『젊은 의사의 수기.모르핀』, 벨린스끼 문학비평선 『전형성, 파토스, 현실성』(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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