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섦과 두려움은 설렘과 떨림의 다른 이름
나는 부다페스트에서 수많은 겹겹의 문을 만났다. 하지만 에스프레소의 낯선 맛과 화해하고 난 다음부터는, 조금씩 더 큰 설렘과 기대감을 느끼며 활짝 그 문을 열곤 했다. 거기엔 다른 방식으로 살아온 사람들의 새로운 세계가 있었다. 나는 그들의 소박한 우아함에 감동했고, 여유로운 마음에 동화되었다.
글ㆍ사진 장윤현(영화 감독)
2012.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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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그저 떠밀리듯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순간들이 있다. 멈출 수도, 곁길로 벗어날 수도 없어서 그저 앞을 향해 발부터 떼어놓던 시절. 그때의 두려움과 막막함이란, 그 상태에서는 절대로 스스로를 조망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매순간 선명하게 느끼는 데서 비롯될 것이다. 내게는 1990년의 봄이 그런 시절이었다. 1990년 3월, 나는 오래도록 봄이 오지 않을 것만 같은 한국을 떠나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향했다. 그때의 상황이며 내 나이가 막무가내로 나를 떠밀고 있었다. 그렇게 흘러들어 간 부다페스트를 나는 낯설고 두렵게만 여겼고, 그 이면의 설렘과 떨림에 대해서는 오래도록 알지 못했다.

방콕과 파리를 경유해 부다페스트까지 스물두 시간의 비행 동안, 내 머릿속에는 1989년 겨울부터 이듬해 3월까지의 일들이 자동으로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봄부터 여름까지 달려온 영화 <파업전야>의 취재와 시나리오 작성, 강추위 속에서의 촬영, 그리고 곧바로 이어졌던 편집……. 어느 과정 하나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정작 가장 힘든 후반 작업과 영화 상영 과정을 고스란히 남겨두고 도망치듯 부다페스트로 유학을 떠났다. 공항까지 마중을 나온 장산곶매 선배들은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의연한 선배들 앞에서 나는 혼자 떠난다는 두려움과 미안함, 안타까움을 감춰야만 했다.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여주기 위해서 더 크게 싸워야 하는 이상한 나라, 그 닫힌 세계에서 벗어나 나는, 반대로 이제 막 세상을 향해 문을 연 동유럽의 새로운 땅으로 떠났다. 하지만 그 땅, 부다페스트에도 역시 한 점 기대감조차 가질 수 없었다. 동과 서를 가르는 정치의 벽이 아직 무너지기 전, 함부로 문부터 일찍 열어젖힌 그 동쪽 나라의 공기는 과연 순수하기만 할 것인지를 생각하면 씁쓸함이 먼저 마음을 내리쳤다.

부다페스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이었다. 3월의 스산한 부다페스트 밤공기는 서울의 그것보다 차가웠다. 교직원들이 마중 나와 있다가, 마치 재회라도 하는 사람들처럼 과장스럽게 반겨주었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굳어졌다. 저마다 어색하게 따로 노는 일행들과 학교 버스를 타고 기숙사로 향했다. 낯선 도시와 반갑게 인사를 나눌 마음의 여유는 없었다. 서울의 밤에 비해 어두운, 납작 엎드려 일찍 잠이 든 도심에선 아무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이미 그곳의 모든 골목과 건물에 익숙해진 사람처럼 덤덤하게 밤풍경을 보아 넘겼다. 지독한 피로가 무겁게 몰려왔다. 가장 큰 싸움을 뒤로하고 떠나와서일까, 나는 이 도시에서 오래 외롭고 피곤할 것이라는 예감에 몸서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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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정민(물나무)

 

다음 날 새벽, 시차 때문에 일찍 일어나 기숙사 근처로 산책을 나갔다. 도시는 아직 어두웠다. 벌써 하루를 시작한 사람들이 허름한 겨울 외투 차림으로 총총히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1990년의 부다페스트는 마르크스와 시인 페테피 산도르의 이름을 딴 거리와, 레닌과 음악가리스트의 동상이 이물스럽지 않게 뒤섞여 있었다. 어떤 사상이나 책을 금하는 땅, 길을 가다가 가방을 열어 소지품을 보여주는 일이 자연스러운 나라에서 온 나에겐 그 조화가 오히려 낯설었다. 그 낯섦은 곧 불편함과 어색함으로, 마침내는 불쾌함으로 변해갔다. 그곳에선 서투른 영어조차 통하지 않았다. 원, 투, 스리도 알아듣지 못하는 부다페스트의 상인들은 부러 영어를 못 알아듣는 척 고집을 부리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들만의 세상에 잘못 섞여든 이물질처럼 어색해져서 서둘러 기숙사로 돌아와야만 했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노란 전차 노선을 갈아타는 법을 익히는 데 반나절이 걸리기도 했고, 이틀이 지나서야 겨우 시장 가는 길을 익힐 수 있었다. 시장이나 전차, 버스 안에서 들려오는 마자르어(Magyar, 헝가리어를 그들이 부르는 이름)는 단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우랄알타이어, 한국어와 뿌리가 같으니 좀 더 친근할 것이라는 짐작은 곧 오해로 밝혀졌다. 마자르어는 화가 난 사람이 감정을 억누른 채 툭툭 내뱉는 말처럼 딱딱했다.

50시간도 채 되지 않아 벌써 김치와 쌀밥이 그리웠다. 가게에 가도 선뜻 손이 가는 것이 없었다. 조잡하거나 내용물을 짐작할 수 없는 것들 속에서 겨우 오렌지 몇 개, 우유, 달걀과 시큼한 맛이 나는 둥근 빵 같은 것만 집어 들곤 했다. 계속 같은 가게를 찾았지만 비닐봉지 한 장 건네주는 법이 없었다. 한번은 담을 것을 달라고 영어와 수신호를 함께 보내자, 마지못해 누런 종이봉투 하나를 내주었다.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 차가운 우윳병에 맺혀 있던 물방울에 젖어 종이봉투는 힘없이 찢어졌다. 오렌지와 병우유와 빵과 깨진 달걀이 함부로 바닥에 뒹굴었다. 난감함이 몇 초 만에 분노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순간, 두고 온 사람들의 이름과 얼굴들이 줄지어 떠올랐다. 얼음을 깨며 촬영했던 영화 <파업전야>의 장면들도 떠올랐다. 당장 그 사람들과 편집이 끝나 상영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그 작품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아니야, 그래 이건 아니야. 돌아가자, 시작하기 전에 돌아가자.’

하지만 내겐 돌아갈 용기조차 없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더 화를 냈고, 모든 것에 투덜대면서 부다페스트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첫 주말, 나는 부다페스트의 심장이라고 하는 도심 광장의 가장 오래된 카페에 앉았다. 관광객들이 자주 온다는 그곳에서는 그나마 짧은 영어를 쓸 수 있었다. 나는 커피를 시켰다. 삶에서 커피한잔이 가장 간절한 순간이었다. 맛있는 커피를 마실 수 있다면, 무거운 기분을 조금은 떨쳐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계속되는 밤샘 작업 동안 뜨거운 물에 훌훌 타 마시곤 했던, 설탕과 프림이 적당히 들어간 그 커피가 그리웠다. ‘세계 어디에서나 같은 맛일 거야. 커피는 서양 음료니까.’ 나는 입맛에 익숙한 한국의 그 커피를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앞에 커피 잔이 놓였다.

아니었다. 커피가 아니었다. 한국의 그 커피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 흔한 물 한 잔도 가져다주지 않았다. 내 앞에 놓인 커피 잔은 소녀들의 장난감 살림 도구만큼 작았고 그 안, 갈색 거품이 층을 이룬 커피는 엑기스를 응고시켜놓은 젤리처럼 보였다. 우유나 프림을 담은 그릇조차 보이지 않았다. 설탕 그릇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짧은 영어로는 뭔가를 더 주문하거나 불평할 수도 없었다. 답답하고 화가 났다. 제대로 된 커피 한잔마저 내주지 않는 도시라니, 당장이라도 커피 잔을 집어 던지고 싶을 만큼 싫었다.

‘이건 커피가 아니잖아. 따뜻한 향기가 피어오르는, 넓은 커피 잔에 찰랑이는 커피를 달란 말이야. 프림의 고소한 맛을 즐길 수 있는 그런 커피!’ 일주일 동안 이 낯설고 불친절한 도시를 참을 만큼은 참아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그만 참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웨이터를 찾아 불만을 쏟아내려 했다. 그러나 웨이터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런 황당함에 동의를 구하는 심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이상한 풍경을 발견했다.

이상한, 풍경이었다. 나를 뺀 카페 사람들 모두가 아무런 불만이 없어 보였다. 아니, 행복하고도 느긋해 보였다. 카페를 가득 메운 대부분의 관광객과 손님들은 주말의 그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이 세상에 단 둘만이 존재한다는 듯 앞에 앉은 상대에게만 눈길을 보내는 연인들, 열심히 지도를 들여다보며 수다를 떠는 여자들, 친구처럼 사이좋아 보이는 할머니와 손자……. 마침 그때 내게 커피를 가져다준 웨이터가 옆 자리 다른 손님들의 주문을 받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거의 반사적으로 미소를 지으며 그가 상냥하게 물었다. “뭘 도와드릴까요?” 당황스러웠다. “워터 플리즈.” 얼결에 그렇게 말했다. 웨이터는 눈인사를 하고 물한 컵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물을 들이켜며 생각했다. ‘왜 아무도 불만이 없는 걸까?’ 당연했다. 그 작은 잔에 담긴 것이 바로 그들이 바라는 커피, 동유럽과 부다페스트의 커피였으니까. 그곳은 한국이 아니었고, 당연히 나는 한국에서 즐겨 마시던 커피를 주문할 수 없었다. 나는 어쩌면 그곳에 있는 사람 누구도 한국이라는 나라를 모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맞은편 테이블에 앉아 있던 금발의 미녀 앞에, 바로 내 앞에 놓인 것과 꼭 같은 커피 잔이 놓였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커피 잔에 설탕을 타서 휘휘 젓더니 단숨에 마셔버렸다. 그러고는 입술에 묻은 커피를 혀로 날름 핥아 먹으며 음미했다. 술꾼이 소주 첫 잔을 탁 털어 마시는 것처럼 날렵하고도 능숙한 동작이었다. 나도 그녀처럼 커피 잔에 설탕을 타보았다. 휘휘 저어 단숨에 마셨다.
그건 커피였다. 그동안 내가 마셔왔던 커피와는 달랐지만 분명한 커피였다. 쓴맛과 달콤한, 전혀 다른 두 맛이 과하게 섞여 있었지만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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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정민(물나무)

 

나의 첫 번째 부다페스트 커피였다. 문득 볼에 닿는 햇볕의 따스함이 느껴져 카페 창밖을 내다봤다. 맑은 하늘이 보였다. 그제야 내가 처음으로 부다페스트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느새, 봄이었다. 아직 쌀쌀했지만 햇살 속에서 따뜻한 부다페스트의 봄이 느껴졌다. 그제야 두 주먹을 꽉 쥐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새로운 땅에 와서도 나는 여전히 지난 추억에 묶여 있었다. 두 주먹 꽉 쥐고 아무것도 놓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한국을 떠난 뒤, 나는 오히려 한국을 더욱 억세게 움켜쥐고 있었다. 그 자세로 부다페스트를 향해서 주먹질을 하고 있었다. 진한 커피 한 모금이, 그 낯설고 강한 맛이 온몸에 퍼지는 동안 나는 그런 생각들을 했다. 그러면서 천천히 주먹을 펴고 손을 들어 웨이터에게 커피 한 잔을 더 시켰다. 웨이터가 새로운 손님이라도 맞이하는 양 여전히 반갑게 웃었다. 그리고 두 번째 커피가 도착했다. 다시 한 번, 에스프레소였다. 그들에게 별다른 조건을 달지 않는 커피는 당연히 에스프레소인 모양이었다. 그 커피를 마시며 나는 처음으로 부다페스트로 들어가는 문 하나를 열었다.

이념이 달라 우리에게 오래도록 금단의 땅이었던 동유럽의 부다페스트는 그 후로도 여전히 낯설었다. 예약 없이는 아무 미용실에 불쑥 들어가 머리카락을 자를 수 없었고, 일하기로 작정한 시간에서 딱 5분이 지났다 는 이유로 노점상은, 주섬주섬 좌판을 정리하는 중에도 바나나를 팔지 않았다. 햄버거 하나를 먹기 위해 맥도날드 가게 앞에 10여분 긴 줄을 서야 할 때도 있었다.

그렇게 나는 부다페스트에서 수많은 겹겹의 문을 만났다. 하지만 에스프레소의 낯선 맛과 화해하고 난 다음부터는, 조금씩 더 큰 설렘과 기대감을 느끼며 활짝 그 문을 열곤 했다. 거기엔 다른 방식으로 살아온 사람들의 새로운 세계가 있었다. 나는 그들의 소박한 우아함에 감동했고, 여유로운 마음에 동화되었다.


나는 이제 새로운 세계를 조우할 때, 그래서 두렵고 막막할 때면 부다페스트에서 처음으로 맛보았던 에스프레소를 떠올린다. 그리고 내 두 손이 잘 비어 있는지, 새로운 발견을 선사할 그 겹겹의 문을 열 준비가 되어 있는지 확인한다. 혹시 새로운 세계가 낯설고 두려워 움츠리고 있다면 마음을 열고 발을 내딛자. 낯섦과 두려움은 설렘과 떨림의 다른 이름이곤 하니까. 그 세계는 당신에게 이제껏 볼 수 없던 것들을 보게 할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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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워서 완벽한 장윤현 저 | 쌤앤파커스

'하고 싶은 이야기'와 '보여 주고 싶은 이야기'를 세련된 감수성, 섬세한 감정선, 디테일한 연출력으로 그려내는 영화감독 장윤현의 첫번째 산문집이다. 「오! 꿈의 나라」, 「파업전야」, 「접속」, 「텔 미 썸딩」, 「썸」 등 그의 영화에는 늘 인간의 외로움과 폐쇄된 감정 그리고 상처와 슬픔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과정이 묵직하게 담겨져 있다. 하지만 「황진이」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바리스타, 고종과 커피를 둘러싼 삶과 죽음을 그린 웰메이드 사극 영화 「가비」로 돌아오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커피 #부다페스트 #에스프레소
12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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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da223

2012.05.12

"낯섦과 두려움은 설렘과 떨림의 또 다른 이름이곤 하니까".. 부다페스트 오래된 카페에서의 커피 한잔이 비로소 부다페스트를 소박하고 우아한 곳으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들었군요. 소박하고 우아하다는 표현이 정말 마음에 들었어요, 그 느낌이 저에게도 전해지는 느낌이에요. 우리는 새로운 경험을 할 때면 몸살을 앓는 것 같아요, 그래도 그 몸살을 앓아야 그 낯섦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니깐 새로운 것을 맞이하는 설렘과 떨림으로 비로소 받아들일 수 있는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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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jmcp25

2012.03.20

위의 기사를 읽으면서 슬픔과 감동이 함께 밀려왔습니다. 가끔 외국으로 떠나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적이 있는데 타국에서의 낯설음과 이질적인 감정들을 사실 그대로 표현한것 같아요. 커피를 마시면서 두 주먹을 꽉 쥐고 있는 나의 모습은 여전히 한국을 떠나서도 지난 추억에 묶여 있었고 한국을 더욱 억세게 움켜지고 있었다는 느낌은 낯설음에 대한 자신의 분노와 쓸쓸함, 앞으로 나아가야 할 삶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낸것 같아요. 새로운 세상을 대할때 마음을 열고 그들의 여유와 가치관을 받아들이고 이해한다면 낯설음과 두려움은 설렘과 떨림으로 변할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해준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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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바나나

2012.03.19

낯섬과 두려움은 설렘과 떨림의 다른 이름, 너무 멋진 해석인 것 같아요. 좀 전에 쓴 커피를 마셨는데 지금은 쓰고 달콤한 커피를 마시고 싶네요. 외로움도 완벽함의 다른 이름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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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현(영화 감독)

1997년 영화 <접속>으로 데뷔해, 지금까지 영화감독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다.
하지만 나는 영화감독이라기보다는 수수한 회사원에 가까운 모습이다. 외모나 옷 입는 취향, 일상의 습관 모두 평범하다. 한눈에 영화감독인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문화인다운 풍모도 없고, 촬영 현장에서의 카리스마가 풍문으로 나도는 사람도 아니다. 재기발랄함, 날렵하고 세련된 감각, 이런 것들하고도 거리가 멀다. 나는 그냥 단순 무식하게 꾸역꾸역 앞만 보고 가는 사람,지름길로 가지 못하고 언제나 돌아가는 사람, 다만 오래 꾸준히 파고드는 사람이다. 그건 영화를 만들 때도 그렇고, 커피를 공부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커피에서 삶을 발견했다. 그리고 다시 사람을 발견했다. 내 주요 관심사는 ‘사람’이다. 끊임없이 사람을 관찰하고, 사람에 대해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커피에서 발견한 사람들의 모습을 오래도록 생각하게 되었다. 그건 때로 고통스럽지만 행복한 일이었다.

가끔은 삶이 엇나간다는 생각에, 상처 받아 숨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날 위로한 건 한잔의 커피였다.

작품으로는 <접속>(1997), <텔 미 썸딩>(1999), <썸>(2004), <황진이>(2007)…… 그리고 <가비>(2012)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