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인트 블랭크>로 살펴본 소시민 영웅 만들기 영화
프랑스의 영웅 이야기 <포인트 블랭크>의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평범한 간호사가 납치된 아내를 구출한다’는 이야기이다.
글ㆍ사진 최재훈
2011.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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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에 영웅이 탄생한다는 말이 있다. 여기서 ‘영웅’은 우리가 흔히 어릴 때부터 보아왔던 슈퍼 히어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나와 함께 살고, 나와 함께 수많은 불의와 험난한 세상을 견디고 살던 소시민이 어느 날 불쑥 영웅이 되어 이 혼탁한 세상을 구해줬으면 하는 믿음은 새로운 ‘영웅’의 자화상을 만들어낸다. 최근 할리우드를 통해 새롭게 태어난 영웅들을 보면 ‘영웅’에 대한 시대적 고민과 그 가치를 읽을 수 있다.

절대적 슈퍼 히어로였던 <스파이더 맨>도 소시민의 얼굴로 바뀌고, <슈퍼맨>과 <배트맨> 역시 인간적 고뇌가 그들의 막강한 힘 보다 앞선다. 절대적인 기지와 섹시한 남성적 매력으로 각광받은 ‘제임스 본드’의 <007 시리즈>를 뛰어넘어 새로운 영웅의 표본이 된 것은 평범하고 어수룩해 보여 보다 친숙한 주인공, 맷 데이먼을 앞세운 <본 시리즈>였다. 돌이켜 보면, 소시민이 영웅이 되는 이야기는 대머리에 몸매도 보잘 것 없는 브루스 윌리스를 내세워,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형사가 가족과 도시를 구출하는 영웅이 된다는 <다이 하드> 시리즈를 통해 확장되었다. <다이 하드> 시리즈 이후, 우리는 평범한 소시민이 영웅이 되어가는 과정 속에 더 깊이 공감하고 더 빨리 감동하고 있다.


가족의 영웅, 소시민을 뛰어넘는 힘 : <포인트 블랭크>


프랑스의 영웅 이야기 <포인트 블랭크>의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평범한 간호사가 납치된 아내를 구출한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다이 하드> 류의 할리우드 액션 블록버스터를 떠올린다면 이 영화는 상당히 섭섭해 할 것이다. 단순해 보이는 이야기의 틀 속에 <포인트 블랭크>는 보다 더 복잡하고 얽히고, 꼬여서 충격적이기까지 한 이야기를 층층이 숨겨두고 있다. 우리가 흔히 관광명소로 이해하고 있는 파리의 에펠탑, 루브르 박물관이 아닌 파리 사람들의 생활 터전인 지하철, 영세 아파트, 경찰서, 시내 곳곳 등 삶의 현장 속을 파고 든 카메라는 파리의 사람들과 그 속을 헤매고 다니는 주인공의 움직임을 숨 쉴 틈 없이 긴박하게 따라다닌다.

오토바이에 치인 의문의 사나이 위고(로쉬디 젬)를 우연히 살리고 영웅이 된 다음 날, 사무엘은 집에 침입한 괴한이 휘두른 둔기에 맞고 기절한다. 깨어나 보니 출산을 6주 앞둔 만삭의 아내는 사라졌고, 의문의 사내는 사무엘에게 "아내를 구하고 싶다면 위고를 병원에서 탈출시키라"는 명령을 남긴다. 단순한 교통사고 환자인 줄 알았던 위고는 덫에 걸린 킬러였고, 사무엘 아내 납치 사건은 위고를 구하려는 친동생의 작전이었음이 밝혀진다. 그리고 점점 상황은 꼬여가고, 위고 뿐 아니라 평범한 간호사였던 사무엘까지 살인자 누명을 쓰고 쫓기게 된다.

오로지 아내만 구하면 됐던 사무엘은 현재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경찰에 도움을 요청하지만 알고 보니 경찰은 영화 속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위험한 조직이었다. 이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사건들은 더욱 절박하게 인물들을 조여오고, 그 속에서 밝혀지는 진실은 더욱 더 거센 긴장감으로 휘몰아친다. 평범한 남편이자 간호사였지만 킬러의 탈출을 도우며 원치 않는 액션을 펼쳐야 하는 사무엘 역을 맡은 질 를르슈는 한국 관객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현재 프랑스를 대표하는 최고의 배우이다. 평범한 소시민의 모습에서 절박한 상황 앞에서 영웅이 될 수밖에 없는 남자의 면모를 섬세하게 드러내는 그의 연기는 산만해질 수 있는 이야기의 틈새를 꽉 채운다.

여기에 <영광의 날들>로 2006년 칸 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은 배우 로쉬디 젬은 속을 알 수 없는 킬러 위고 역을 연기하며, 탄탄한 긴장감을 형성한다. 냉철한 카리스마의 소유자지만 동생과 동료를 챙길 줄 아는 따뜻함이 있는 위고라는 캐릭터는 젬을 통해 침묵마저 강렬한 존재감을 내뿜는다. 최근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스킨 아이 리브 인>에 주연으로 출연한 스페인의 여배우 엘레나 아나야의 연기도 주목할 만하다. 이외에도 <타인의 취향>으로 국내 관객에게 친숙한 배우 제라르 랑방까지 더하면서 치밀한 이야기 구조에도 불구하고 자칫 긴장감이 떨어지는 순간까지 배우들의 매력으로 가득 채워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통쾌한 판타지, 소시민 영웅을 찾아서…….

<내 남자친구는 왕자님>

여성 관객들을 위한 판타지는 대부분 ‘신데렐라 스토리’의 새로운 변형이었다. 세상 가장 거칠고 안하무인인 재벌 2세이지만, 오직 별 볼 일 없는 여자 주인공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백마 탄 왕자’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직도 유효한 이야기만큼, 남성 관객들을 위해서 아직까지 유효한 이야기는 ‘영웅’의 이야기다. ‘백마 탄 왕자’의 이야기도 시대에 따라 조금 업그레이드되면서 수동적 여성상의 주인공에서 좀 더 능동적인 여성으로 변해가듯, 영웅의 이야기도 시대상을 반영하면서 조금씩 달라져왔다.

그 결과 절대 영웅의 시대에서 평범한 소시민도 영웅이 될 수 있는 조금 더 현실지향적인 이야기로 발전해 왔다. 이는 ‘비현실적인 주인공’ 보다는 나와 조금은 더 가까운 캐릭터를 통해 위안을 받으려는 관객들의 현실적 수요를 반영하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힘든 경제 상황과 사회적 분위기가 만연한 현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으면서도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소시민적 영웅’들은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힘을 가지고 있다.

<배트맨>

<스파이더맨3>

소시민 영웅의 이야기는 팀 버튼 감독의 <배트맨> 시리즈에서 그 전형을 찾을 수 있다. 영웅의 외모와 동떨어진 마이클 키튼을 통해 팀 버튼은 영웅의 이야기에 앞서 그의 상처와 정체성의 문제를 파고든다. 이후 이런 맥락은 토비 맥과이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스파이더 맨> 시리즈에서도 드러난다. 이 영화에서 영웅인 스파이더맨은 소시민이며, 동시에 스파이더맨은 소시민적 영웅이다.

샘 레이미 감독은 스파이더맨의 활동 반경을 뉴욕 맨해튼의 빌딩 숲으로 한정 짓고, 그와 적대 관계에 있는 인물들도 주인공 피터 파커와 개인적인 인연이 닿아있는 사람들로 한정짓는다. 결과적으로 이 소시민적 영웅은 우리 동네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청년, 친구, 애인의 모습이다. 또한 이 영웅 이야기는 ‘큰 힘에는 그 만큼의 책임이 뒤따른다’는 심오한 주제를 담고 피터 파커의 소소한 일상 속, 삶의 책임을 이야기 한다. 샘 레이미 감독은 3편까지 이어지는 시리즈를 통해 연인에게 청혼하기 위해 고심하는 평범한 뉴욕청년의 뚝심을 보여주면서, 우리 일상 속 소시민의 영웅담을 담아낸다. 스펙터클하고 박진감 넘치지만, 우리 주변 어딘가에 ‘스파이더 맨’이 살아있을 것 같다는 기시감을 준다.
<반칙왕>

<거북이 달린다>

우리나라 영화에서는 김지운 감독의 <반칙왕>에서 한국적 소시민 영웅담의 전형을 읽을 수 있다. 실적 위주의 사회에서 부적응자에 가까운 은행원의 지지부진한 일상과 이제는 한물간 프로레슬링의 세계가 충돌하면서 헛헛한 웃음을 자아낸다. 우스우면서도 가슴 찡한 부조리극처럼 <반칙왕>은 주눅 든 소시민의 일상에서 사각의 링 위로 뛰쳐나간 일탈은 소박한 자아 찾기의 과정을 감동적으로 풀어나간다.

무기력한 현대인의 일상을 덤덤하게 훑던 영화의 리듬은 ‘반칙왕’으로 거듭나는 순간 활기를 띄기 시작한다. 환호 속에 등장한 유비호가 로프 위에서 멋지게 한 바퀴 돌아 뛰어내리고, 노란 고무줄과 못 달린 슬리퍼를 동원한 반칙 장면까지만 해도 낄낄거리던 관객이 어느 순간 웃음을 완전히 거두게 되는 것은 그 치열한 사각 링의 대결이 적자생존의 현실과 맞물려 처연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칙왕>은 현실 풍자의 적나라한 칼날보다는 우화와 동화의 세계에 더욱 깊이 발을 담그고 있다. 이후 송강호는 ‘소시민’ 캐릭터의 전형이 되어 코미디와 비극을 오가면서 그 특유의 서민적 연기를 선보이며 한국 영화계의 독특한 캐릭터가 되었다.

송강호의 대를 잇는 배우로는 <추격자>와 <거북이 달린다>의 김윤석을 들 수 있다. <거북이 달린다>에서 김윤석은 충남 예산에서 한량의 삶을 살던 중, 갑자기 나타난 탈주범에 의해 모든 것을 잃은 남자로 분했다. 형사임에도 불구하고 용돈 벌이 삼아 소싸움 대회에 돈을 걸었다가 탈주범에게 돈은 물론 형사의 명예와 남자로서의 자존심을 잃게 된 그가 모든 것을 되찾기 위해 놈을 추격한다. 이때부터 별 볼일 없는 남자는 하나의 영웅의 카테고리 속으로 들어간다. 큰 인기를 얻지는 못했지만 <차우> 속 평범한 주인공 역시 멧돼지와 사투를 벌이는 평범한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준다.

흔히 볼 수 있는 우리 주위 인물처럼 특별한 능력도, 남다른 힘도 없지만 자신들의 소박한 목적을 위해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는 5인의 추격대는 관객들에게 통쾌함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우리나라의 블록버스터는 평범한 소시민이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모험 어드벤처의 모습을 하고 있다. <괴물>은 평범한 한 가족이 가족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중심이었고, <해운대> 역시 ‘사랑’이라는 카테고리 속에서 거대 자연의 흉포함에 맞서 싸우는 소시민의 이야기였다. 곧 개봉을 앞두고 있는 한국형 블록버스터 <퀵>은 평범한 퀵 서비스 기사의 영웅 이야기를 담고 있다.


우리는 환상을 꿈꾸지만, 비현실적 캐릭터에는 더 이상 매력을 느끼게 하는 동질감을 느끼기 힘들어졌다. 허황된 판타지는 고통을 잊게 할 수 있지만, 판타지가 끝난 후 더 큰 허무함을 안겨준다. 이런 현실 속에서 소시민의 영웅이이야기가 사랑받는 현실은 현실적 판타지 속에서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작은 희망과 동질감,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작은 사랑과 그 위안이다.

이런 관객의 요구에 따라 이제 우리는 슈퍼 히어로가 아니라, 가족을 위해 거대한 세력에 맞서 싸워 승리하는 소시민 영웅을 보며 환호한다. 실제로 현실 속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일이기에 소시민의 영웅담은 SF 판타지 보다 오히려 더 황당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우리는 또 꿈꾼다.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은 더 나아질 것이고, 우리가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를 위해서라면 나도 싸울 수 있을 거란 위안과 그 소박한 믿음…….진정한 가치가 승리하는 그 날이 올 거라고 말이다. 그들처럼 나도 영웅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글/ 최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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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인트블랭크 #영웅 #납치
4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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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ㅋ

2011.11.21

내남자 친구는 왕자님 현대판 공주 스토리 손발이 오글거렸지만 왕자의 미모에 눈한번 질끔감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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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바라기

2011.07.26

인상깊게 보았던 '슈퍼맨', '배트맨' 다시한번 보고 싶은 영화를 보니 정말 반갑네요. 다른 영화도 보고 싶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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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꽃방

2011.07.16

아내 납치에 대한 영화는 그전에 뭔가 있었던거 같은데 이 영화도 무척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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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훈

늘 여행이 끝난 후 길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된 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느라, 아주 멀리 돌아왔고 그 여행의 끝에선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음악, 공연, 문화예술계를 얼쩡거리는 자칭 culture bohemian.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씨네서울 기자,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