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스 시절 가장 잘 만든 곡은 「여름 안에서」”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전설’이다. 이 외에는 달리 압축 가능한 형용이 없다. 한국 흑인음악과 댄스음악의 견인차 역할을 하며 두 장르의 진보를 이뤄 낸 음악인으로 이현도를 첫손 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글ㆍ사진 이즘
2011.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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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살아 있는 전설’이다. 이 외에는 달리 압축 가능한 형용이 없다. 한국 흑인음악과 댄스음악의 견인차 역할을 하며 두 장르의 진보를 이뤄 낸 음악인으로 이현도를 첫손 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어 라임에 대한 본보기를 제시했으며 국내에서는 생소하기만 했던 뉴 잭 스윙, 펑크(funk), 일렉트로 합과 같이 다양한 스타일을 구사하며 흑인음악의 대중화를 꾀했다. 또한, 구본승의 「너 하나만을 위해」, 유승준의 「열정」, 렉시의 「Let me dance」 등을 통해 댄스음악의 세련미를 한 단계 상승시킨 업적도 있다. 힙합, 댄스음악 마니아들은 추앙해 마땅한 인물이다.

자신의 역할을 프로듀서로 한정한 지난 2004년 앨범 이후에 솔로 작품은 없지만 그는 마이티 마우스의 「사랑해」와 「연애특강」, 에픽 하이의 「Paris」, 소야앤썬의 「웃으며 안녕」 등을 작곡, 프로듀싱했다. 긴 세월을 지나오면서 말쑥하고 완성도 높은 음악을 선사한 그이지만 “언더 정신이나, 예술성으로 평가를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앞으로 계속 히트곡을 내는 것이 대중음악가로서 가장 큰 목표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오랜만이다. 한국에 온 지 얼마나 됐나.

“지금 두 달째 되어 가고 있어요. 거의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지냈죠.”

미국에서 최신 트렌드를 많이 접했을 텐데, 요즘 미국 힙합은 어떤 것 같나.

“요즘 힙합은 너무 확확 변해요. 한국에서는 드렁큰 타이거가 강렬한 인상을 줬기 때문인지 몰라도 힙합을 종교로 이해하는 인식이 있는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진화를 안 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죠. 우리나라는 1990년대 스타일을 정통으로 인정하는 분위기인데 미국에서는 그 패턴이 일부 언더그라운드에만 남아 있지 계속 흐름이 바뀌어요. 어떻게 보면 그 시대의 힙합과 지금의 힙합은 완전히 다른 음악이 된 것이죠. 성향도 다르고 음악적인 내용이 다 달라요. 한때 올드 스쿨 스타일이 다시 돌아온 적은 있었죠.”

언젠가는 그런 옛 흐름이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는 말인가.

“네, 오죠. 음악이라는 것이 늘 보면 스스로 재생산, 재창조하지 않습니까. 갑자기 시대를 뚫고 뿅 나오는 것은 거의 없다고 보거든요. 음악은 특히 감각적이기 때문에 흐름이 순환해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러면 즐겨 들은 뮤지션은 누가 있나.

“저는 힙합 자체만으로 음악을 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봐요. 좋은 음악은 가리지 않고 다 듣는 편인데, 일렉트로니카를 가장 많이 듣고 있어요. 에드 뱅어(Ed Banger)라는 레이블이 있어요. 거기 소속이었던 다프트 펑크(Daft Punk)의 앨범을 매우 좋게 들어서 그 레이블 사람들의 음악을 열심히 찾아 들었어요. 지금은 나머지 멤버들이 투어도 하면서 돌아다니는데 사운드가 좋더라고요. 질감이 거칠어서 어떻게 보면 상놈들이 모여서 만든 느낌이에요. 그런데 실제 하는 짓도 상스럽더라고요. (웃음) 프랑스 사람들인?도 미국 동경하고, 클럽에서 경비랑 싸우기도 하고. (웃음) 정말 독특한 사람들이에요.”

더티 사우스(dirty south) 계열도 흥미를 느끼나.

“별로 안 좋아해요. 재미가 없어요. 똑같은 사운드에다 코드 진행도 너무 틀에 박혀서 그 사운드를 넘어가려 해도 넘어갈 수가 없어요. 누구는 특유의 하이 햇(hi-hat) 소리가 드르륵 연달아 들어가는 게 좋다고 하는데 저는 ? 모르겠어요.”

그동안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을 했는데 모든 장르를 버무린다고 했을 때 이현도가 할 수 있는 지금 최고의 음악은 무엇인가.

“막연하게나마 전자음악인 것 같아요. 어쿠스틱도 좋은 건 알겠는데 제가 추구하는 음악은 컴퓨터나 전기 기계를 거친 악기로써 제가 표현할 수 있는 만큼 다 표현하는 것이라고 봐요. 요즘 전자음악을 듣다 보면 오케스트라 연주 같은 걸 커트한 뒤에 거기에 일부러 전자음 잡음을 넣어서 색다른 느낌을 주는 것도 있잖아요. 그런 스타일은 요즘 시대에 전자음악만의 매력인 것 같아요.”

김범수와 휘성이라는 두 명의 뛰어난 보컬과 작업했다. 김범수는 어떤 장점이 있는가.

“「바보 같은 내게」 곡을 썼죠. 작곡가로서 머릿속에 그린 사운드보다 더 잘 나온 사례는 여태까지 범수밖에 없었어요. 그때는 범수가 순수 R&B를 추구하려는 자세가 있었어요. 너무 애드리브를 치니까 그만하라고, 제발 할 때만 하라고 말릴 정도였어요. (웃음) 그래서 노래를 듣고 짜릿했던 경험이 있어요.”

휘성은 어떤가.

“‘역시 휘성이구나.’라고 생각하는데, 독창적인 그루브감이 조금은 저랑 안 맞아요. 휘성은 이론적으로 정립하지 않고 감각으로 자신이 훈련해 왔기 때문에 정작 녹음을 하면 기계나 수치상으로 어긋나는 부분이 있어요. 그 부분을 수정하려고 애를 쓰긴 하지만 휘성은 최고지요.”

그렇다면 기계적으로 딱딱 떨어지는 정확성을 우선시하는 건가.

“저는 일부러 열어 둬요. 랩을 하든, 드럼 비트를 연주하든, 기타 연주를 하든. 다 하고 나서 이후에 관여를 많이 하는 편입니다. 한 것을 나중에 평가해서 아니다 싶으면 조정을 가하고, 그렇게 열어 뒀는데도 느낌이 좋으면 그대로 살리기도 하고요.”


다른 아티스트와의 작업 중 만족스러웠던 작품을 꼽는다면.

“어휴, 잘 모르겠어요. 휘성의 앨범? 제 곡이 타이틀로 선정된 건 아니지만 휘성이 공들여서 만들었기 때문에 저 스스로도 열심히 임했다고 생각해요. 믹싱은 아쉬운데 음색이나 그루브감을 만들면서 좋은 추억들이 있어서 기억에 남네요. 마이티 마우스의 「사랑해」도 괜찮았고, 에픽 하이의 「Paris」도 에픽 하이답게 분위기가 딱딱 잘 맞아떨어져서 재미있게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요즘 아티스트 중에 감각이 출중하다고 생각하는 인물이 있나.

“저는 요즘에 장점만 봐요. 다 좋게 들리더라고요. 다는 아니지만 특히 신사동 호랭이가 포미닛이나 비스트 곡을 써 줄 때 그런 감각을 보고 용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카라 곡을 주로 쓰는 스윗튠(한재호, 김승수), 이 친구들 사운드도 좋더라고요. 사실 카라보다 음악을 먼저 더 좋아했고요. 신스팝인데 대중적인 멜로디를 집어넣는 내공이 있더라고요. 그리고 일본의 퍼퓸(Perfume) 곡을 만드는 나카타 야스타카(中田 ヤスタカ) 그 사람 행보를 많이 지켜보았죠.”

이현도가 만든 ?몇 곡들이 레퍼런스와 표절 사이에서 논쟁이 오가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 입장을 밝힌다면. 해명을 해야 할 것 같다.

“제 프로그래머도 그랬어요. 휘성 곡(「Girls」)이 너무 똑같은 것 아니냐고. ‘나도 한번 그런 스타일을 해 보자. 휘성의 목소리를 오토튠으로 꾸며 보면 재미있겠다.’라는 생각에 시도해 봤는데 그걸 표절이라고 하면 너무 편협한 거죠. 어떻게 보면 오마주라고 할 수도 있겠죠. 편협하게 보자면 티 페인(T-Pain)도 에이콘(Akon)을 표절한 거라고 할 수밖에 없잖아요. 유명 프로듀서 중에도 마음먹고 샘플을 따서 결국에는 자기 것으로 만든 사례도 많아요. 하지만 그런 것을 표절이라고 하지는 않죠. 비슷하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런 풍으로 만들고 싶었을 뿐이에요.”

토크박스, 보코더, 오토튠을 모두 다 사용했는데 본인에게 가장 잘 맞는 건 무엇인가.

“어울리는 것은 모르겠는데 확실히 가장 쓰기 쉬운 것은 오토튠이에요. 실제로는 보코더를 가장 많이 사용하고요. 토크박스는 정말 좋아함에도 하기가 정말 어려워요. 그 소리를 로저 트라웃먼(Roger Troutman)의 방식 그대로 낼 수 있는 사람이 지금은 테디 라일리(Teddy Riley)밖에 없어요. 로저 트라웃먼이 죽고 난 후에 그가 쓰던 토크박스를 테디 라일리가 샀데요. 그리고 언제 만날 기회가 생겨서 비결을 물어봤는데 아무리 물어봐도 딴 소리만 하더라고요. “열심히 해” 이런 말만 하고. (웃음) 저도 아무리 노력했지만 특유의 발음이 안 나요. 하고 싶은 건 역시 토크박스인데 이제는 못할 것 같고 요즘 들어 보코더가 가장 음악에 맞고, 저도 쓰면서 재미있고 좋아요. 오토튠은 토크박스처럼 연주의 개념으로 생각하지는 않아요.”

샘플링 작업을 많이 해 왔는데 샘플링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

“예전에 샘플 사용에 대한 국제적인 기준 정립이 안 되었을 때에는 신나게 가져다 썼어요. 한번은 미국 프로듀서에게 ‘샘플링이 좋은 것이냐, 아니면 날로 먹는 것이냐?’고 물어 본 적이 있는데 그가 하는 말이 “그림을 그리는 데 여러 방법이 있지 않느냐. 붓으로 그리거나, 나무를 태워서 나온 재로 그리거나. 아니면 콜라주 방식으로 갖다 붙여서도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과연 그림이 아닌 것이냐. 어떤 샘플을 취해서 곡에 가미했는데 결국에 사람들이 익숙함 속에서 좋은 느낌을 가졌다면 잘 만든 것이다. 자부심을 가져라.”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일부러 통으로 가져다 쓴 적도 있었어요. 보란 듯이.”

이현도가 살아 있는 전설이라면 듀스는 추억 속의 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20대 후반 이상의 음악팬들이라면, 특히 춤과 랩을 좋아한 이라면 한번쯤은 그들의 춤과 노래를 따라 했을 것이다. 프로 댄서들이나 많은 후배 래퍼가 듀스를 보며 꿈을 키웠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나를 돌아봐」, 「약한 남자」, 「우리는」, 「굴레를 벗어나」, 「상처」 등 듀스 시절 다수의 히트곡이 있지만 이현도는 최고의 노래로 「여름 안에서」를 꼽았다. 다이내믹한 리듬과 격렬한 춤이 특징이었던 듀스였기에 의외의 답변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매년 여름마다 큰 사랑을 받는 노래를 만들었다는 것에 보람을 느껴서였다. 그는 “요리사는 자기가 만든 음식을 손님이 맛있게 먹을 때가 가장 기쁘다.” 덧붙였다.

힙합 쪽에서 많은 아티스트가 듀스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고 한국 힙합의 효시 격으로 경배를 하는데, 본인은 경배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안 믿죠. 그런데 그걸 믿는다 해도 ‘네, 믿습니다. 제가 전설 속의 누구입니다.’라고 하면 건방지고 이상하잖아요. (웃음)”


힙합은 어떻게 접하게 됐나? 그 시절에 미국본토 랩 음악을 듣기란 쉽지 않은데. 조건이 좋았던 건 아닌가?

“초등학교 4학년 때쯤이었나? 허비 행콕(Herbie Hancock)의 「Rock it」 공연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무대에 로봇들이 나와서 움직이다가 갑자기 사람이 되더니 브레이크댄스를 추는데 신기했어요. 그러다 마이클 잭슨의 「Billie Jean」 보고 완전 갔어요. 그때는 매일 AFKN 보고 라디오 들으면서 좋은 노래 나오기를 기다렸어요. 막무가내로 들은 거죠. ?합만이 아니라 뉴 웨이브, 일렉트로 펑크 이런 음악을 들으면서 자양분을 얻었던 것 같아요. 힙합의 경우에는 런 디엠시(Run DMC)가 레이건 대통령 취임 행사에 나와서 랩을 하고 노는 것을 보고 정신을 잃었죠. ‘노래를 하지 않아도 이렇게 멋있을 수 있구나.’ 주변에 비디오 있는 애들 집에 가서 춤 연습하고, 또 그때 <브레이크댄스>라는 영화가 나왔어요. 그런 영상을 보면서 연습했어요. 그러면서 이태원, 뉴욕에 사는 친뢱 등 여러 사람을 통해서 마구잡이로 음악을 접했고요. 조건보다는 열정이었던 것 같아요.”

우리나라에서 당시에는 접하기 어려운 흑인음악의 세계를 듀스가 열어 줬다.

“사실 저 혼자서 시작한 건 아니에요. 어디선가 조금씩 다 하고는 있었어요. 그때 앨범 전체가 온전히 힙합으로 나오는 것은 미국에서도 불과 몇 년 전 일이었어요. 일반 노래에 양념처럼 몇 마디 랩이 들어간 정도가 많았죠. 엄밀히 말하면 듀스 음악은 뉴 잭 스윙에 가까운 가요였겠죠. 미국에서도 엠시 해머(MC Hammer)나 바닐라 아이스(Vanilla Ice) 이런 사람들이 빌보드에서 몇 주 동안 정상을 치던 그 시기부터 힙합이 인기 장르가 될 수 있었던 문을 열어준 것 같아요.”

듀스는 국산 라임의 창조자라는 평을 듣는다. 외국 힙합 아티스트에게서 영향을 받았나. 에릭 비 앤 라킴(Eric B. & Rakim) 같은….

“그럼요. 에릭 비 앤 라킴이 그때는 젊고 혈기왕성한 미국 힙합의 주류였죠. 사실 저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덩달이 말장난을 시작했어요. 친구들은 말장난을 듣고 “뭔 소리 하냐? 유치하다.” 그랬지만 저는 그게 정말 재미있었어요. 셰익스피어가 라임을 넣어서 희곡을 만들었다 이런 이야기는 나중에 안 것이고요, 그냥 말장난이 재미있어서 시작했는데 그게 나중에 큰 도움이 된 거죠. ‘배 째실라고 그려? (백제, 신라, 고구려)’를 제가 먼저 하고 있었어요. 교장 선생님 말하는 거를 바꿔서 놀리기도 하고.”

당시에 에릭 비 앤 라킴의 음악을 듣고 어땠나.

“영어를 잘 몰라서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어요. 비트도 우중충하고 음악 자체도 멋있게 느껴지지도 않았고요. 저는 런 디엠시만이 진짜라고 생각했죠. 물론 제 음악적인 출발의 일부분일 뿐 런 디엠시를 파고 추앙하지는 않아요. 오히려 마이클 잭슨이 저에게 가장 강력한 인상을 줬죠. 그렇게 거슬러가면서 퀸시 존스(Quincy Jones)를 알아 가게 됐고요.”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가 듀스보다 조금 일찍 나왔다. 첫 인상을 말해 본다면.

“사실 준비는 저희가 먼저 했는데요, 제작자가 파워가 없어서 거의 1년 동안을 허송세월로 보냈어요. 양현석씨랑은 이미 친분이 있었죠. 앨범이 막상 나오니까 안도했어요. 뭐 데뷔 전에는 펑키한 쪽으로 나온다고 했는데 들어 보니 ‘에이, 별로구나.’라고 생각했죠. 물론 얼마 후에는 제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고 판명됐지만. (웃음) 지금 들으면 그때 음악이 어설프기도 하지만 듣기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들으면 또 좋게 들리더라고요.”

그럼 「나를 돌아봐」는 데뷔 전에 히트할 것이라고 느꼈나.

“그때까지만 해도 가사에 라임을 많이 쓸 수 없었어요. 개념 자체가 없던 시기였고, 말씀드렸다시피 사람들이 말장난 같이 볼까 봐요. 가사뿐만 아니라 안무도 순화시켰어요. 본 방송 전에 비공개 녹화를 두어 번 했는데 관중들이 웅성웅성하면서 무대가 끝났는데도 박수를 안 치시더라고요. 대기실에 내려가서 “우리가 너무 과격하게 춰서 정신이 없나 보다.”라고 했죠. <꾸러기 대행진>이라는 프로에 나가서 춤추고 노래했던 것이 방송에 먼저 나가게 되었어요. 그 뒤에 길거리에 나갔더니 우리 음악만 계속 흘러나오는 거예요. 정말 놀랐죠.”


은 가요계에서 독집 개념으로서 사실상 첫 리믹스 앨범이다. 「여름 안에서」도 굉장한 히트를 기록한 의미 있는 앨범인데.

“「여름 안에서」는 흥행을 노리고 만든 게 아니라 여름철은 지났는데 마땅히 정규 앨범에 수록할 수가 없어서 그랬던 거예요. (웃음) 그때는 젊어서 오만 가지 생각이 샘솟을 때라 같은 노래라도 우려먹는 것이 아니라 재활용해서 완전히 다른 분위기로 바꾸면 좋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당시에 제작자 분이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지 않은 편이라 저에게 전권을 위임했어요. 그래서 어느 정도 제 생각대로 할 수 있던 상황이었어요.”

이후에 평단에서 ‘저주받은 걸작’이라고 일컫는 3집 를 발표한다.

“저주받을 정도는 아닌데. 나름 돈도 많이 벌어? 부도를 막아준 앨범인데요. (웃음) 선 주문이 130만 장 넘게 들어와서 120만 장 찍었는데 생각만큼은 안 나갔어요. 90만 장 정도 나갔다고 하더라고요.”

결국 3집이 마지막 작품이 되었는데, 김성재의 불의의 사고가 없었더라면 듀스를 계속 이어 올 수 있었다고 보나.

“2집 만들면서 변덕이라고 해야 하나요? 제가 춤을 먼저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런 춤에는 이런 음악이 어울리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19살에 음악을 시작한 거였어요. 소위 말해서 엔터테이너로서 각광을 받을 거라고 생각도 안 했고요. 저는 제가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못하는지 파악을 잘하는 편이에요. 외모는 안 되도 창작은 자신 있었거든요.”

행여 그런 측면이 김성재와 작별하게 하는데 일정 부분 작용한 것인가.

“아니에요. 막역한 사이였어요. 성재랑은 헤어진다고 해서 돌아서는 사이도 아니었고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같이 사고치고 다녔는 걸요. (웃음) 단지 저는 성재랑 제가 안 멋있는데도 멋있는 척해야 하고, 또 그걸 보고 사람들이 추앙해 주고, 어떤 일은 잘했는데도 욕먹고, 이런 환경이 정말 싫었어요. 말씀 드렸지만 저는 장단점을 잘 파악해서 못생긴 걸 아는데도 잘생긴 척 하는 제 자신이 너무 싫었어요. <내일은 늦으리> 같은 콘서트에 참여해서 몇만 명의 환호성을 들으며 인기에 취하다 보니 어린 나이에 자만심도 들었죠. 그러다 2집을 준비할 때 마가 끼면서 모든 것이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이쪽에서는 바람 넣고, 저쪽에서는 “음악이 예전이랑 똑같네.”라든지 얘들은 벌써 갔다느니 이러니까 저 역시도 반짝 가수가 되는 것이 아닐까 회의가 들었죠

말 그대로 「굴레를 벗어나」려고 했어요. 하나하나 이 바닥을 알게 되면서 그때부터 내가 곡을 쓰는 것이 음악에 있어서 궁극적인 목표이지 않나 생각도 들게 되었죠. 주위에서 우리 것도 써 줘라 그러니까 이 길도 승산이 있겠구나 싶었죠. 흔히 회사와 3집 때 정도 되면 많이 부딪힌다고 하는데 정말 그 말이 맞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성재가 전면으로 나서고 저는 뒤에서 곡 써 주고 하면 좋을 것 같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듀스 해체가 해방이었죠. 그런데 그런 역사가 지금도 되풀이되고 있어요. 요즘 음악 하는 후배들 이야기 들어보면.”


듀스 시절을 돌이켜볼 때, 이런 점은 듀스 업적으로 역사에 기록되고 싶다는 것이 있다면.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저를 진심으로 평가해 주시고 애정을 담아 말씀해 주시는 것이야 황송하죠. 어떤 획을 그었다고는 생각해요. 하지만 뭔가 정립되는 문화가 아직 우리나라는 부족한 것 같아요. 소방차, 박남정 같은 선배님들 예술이었잖아요! 인정을 받아야 하는데 그분들이 예능에 나와야만 어린 친구들이 알게 되는 현실이 안타까워요.”


듀스의 작품 중에 스스로 잘 만든 곡을 말해본다면.

“(난감한 기색으로) 정말로 하나 꼽으라면 「여름 안에서」를 꼽겠습니다. 그게 힙합도 아니고 뭐 아무 것도 아니에요. 노래도 못 불렀고, 비트도 어떻게 보면 처지는 느낌도 드는데, 지금까지도 여름만 되면 들리는 시즌 송이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대중음악가로서 자부심을 느끼게 합니다.

요리사가 자기가 음식을 잘 만들어서 기쁜 것이 아니라 손님이 맛있게 먹는 것을 보면 기쁜 것처럼 말이죠. 제가 나름 열심히 하는 것을 보고 하느님께서 주신 보너스라고도 생각해요.

간혹 제 음악을 얼핏 들으면 ‘이때 이 녀석이 용감했네?’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써먹었던 샘플도 잊고 있다가 ‘어? 내가 이런 걸 썼었네?’ 하며 놀라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별로죠. (웃음)

최근 들어 생각의 패러다임이 넓어졌어요. 그래서인지 「여름 안에서」가 정말 좋아요. 후배들이나 90년대에 태어난 아이들이 그 노래를 부르는 걸 보면 참 흐뭇해요. 힙합 뮤지션으로 인정받고 아니고 간에 그런 음악을 만들었다는 게 정말 기뻐요.”


듀스의 「Go! Go! Go!」, 솔로 앨범의 「제3의 눈」, 「이면」 등 몇몇 곡은 록 본능이 느껴진다.

 

“원래 힙합 워너비였을 때에는 기타 소리만으로 거부감을 느꼈어요. 저 학교 다닐 때 힙합 좋아하는 애들은 반에서 2~3명밖에 없었어요. 애들이 잉베이 맘스틴(Yngwie Malmsteen)이 맞는 발음이네, 잉위 말름스틴이 맞는 발음이네 논쟁 벌일 때 “병신들.” 그러면서 나이트 가고 그랬어요. (웃음)

음악을 하나씩 접해 가면서 가지를 확장했어요. 예를 들어 닥터 드레(Dr. Dre) 곡들의 샘플이 조지 클린턴(George Clinton)의 음악이라는 것을 알게 되듯이 말이죠. ‘이게 밴드 음악이구나.’ 하면서 샘플링을 통해 기타 소리나 밴드 음악을 좋아하게 되고 더 나아가서 하드록도 좋아하게 된 거죠.

너바나(Nirvana)의 를 듣고는 충격을 받았어요. 힙합을 듣다 보면 록과 랩이 결합하는 사례도 많잖아요. 퍼블릭 에너미(Public Enemy)의 척 디(Chuck D)가 “다른 음악은 악기를 이용해서 반주로 쓰지만, 힙합은 다른 음악을 이용해서 반주로 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이 문장이 샘플링을 설명하는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해요.”


알다시피 지금은 걸 그룹, 아이돌이 대세다. 대선배로서 현재 음악계를 어떻게 보고 있나.

“나름대로 의미도 있고요, 일리도 있다고 생각해요. 데뷔했을 때 패티김 선생님이 저희한테 “자네들은 노래는 안 하고 왜 이상한 것을 해?”라고 하신 적도 있으신데요. 요즘에는 장점만 보고 싶어요. 물론 부작용은 있겠지만 어쩌겠습니까. 현재 시장의 수요자가 그것을 선호하는 걸 나쁘다고 할 수는 없잖아요. 그 연령대에 즐길 수 있는 매력이 있다고 봐요. 더불어 한류도 일으키면서 자기 영역에서는 선전하고 있고요. 그 수많은 아이돌 중에서 몇 명은 진정한 뮤지션으로 거듭날 수도 있겠죠. 저도 어떻게 보면 아이돌이고 댄스 가수였잖아요. 그런 좋은 점만 보고 있어요.”

음악이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순간이 있었다면.

“아직 안 온 것 같습니다. 돌이켜보면 듀스 해체 콘서트 때 모든 순서가 끝나고 성재랑 저랑 대기실에서 단둘이 있었을 때가 좋았어요. 그 순간에는 미래에 대한 걱정도 없었고요, 마음이 편안하고 하나의 챕터를 마치는 느낌이 들었죠. ‘이제는 두 꼬마가 아니라 성인 이현도, 김성재가 되어서 뭔가를 하겠구나.’ 뭔가 부푼 순간이었던 것 같아요. 방금 전까지 환호를 뒤로하고.”

그러던 김성재가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떤 감정이었나.

“맨 처음에는 몰래카메라인 줄 알았어요. 그런 거 있잖아요. 한국 사람이 러시아 같은 나라에 가서 그 사람들 쏼라쏼라하는데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는 거요. 주위에서는 뭐라고 말하는데 문장 해석이 전혀 안 될 정도로 완전히 패닉 상태였어요. 그 충격을 치유하는 데 2년 넘게 걸린 것 같아요. 그때 한국을 떠난 것은 정떨어졌기 때문이에요. 정떨어졌다는 게 대한민국을 향한 건 아니에요. 미국에서도 애국가를 듣거나 국가대표 경기를 보면 가슴이 찡해지거든요. 사회 분위기, 몇몇 사람들이 너무 싫었어요. 어디를 가도 말초적인 질문만이 계속 저를 따라왔어요. 미국에서도 어느 정도 안면이 쌓이면 “정말 걔가 죽인 거 맞아요?”라고 물어봐요. 조기축구회에서 공차고 나서 뒤풀이를 가도 그 이야기를 꺼내요. 모든 사람이 그게 궁금해서 나를 만나는 게 아닐까 하는 피해의식을 느낄 정도였어요. 이제는 뭐 극복했지만요.”

진행 중인 구체적인 프로젝트가 있는가.

“현재는 없어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내 솔로 앨범 만드는 재미보다도, 내가 공부하고 깨달으면서 커져 가는 음악에 대한 열정이 있으니 그 열정으로 대중이 원하는 가수가 있다면 그 친구를 조력하고, 그 프로젝트가 호응을 얻으면 훨씬 더 가치가 있지 않나 싶어요. 마치 지금은 그라운드에서 뛰지 않지만 황선홍 씨나 홍명보 씨가 감독으로서 팀을 조련해서 우승하는 것처럼요.”

인터뷰: 임진모, 홍혁의, 김반야, 황선업
사진: 김반야
정리: 한동윤

글 / 한동윤(bionicsoul@naver.com)







#이현도
6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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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하늘

2011.12.20

여름안에서는 너무나 유명했었던 곡이었죠. 시대를 앞서간 듀스가 그립기만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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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ㅋ

2011.10.30

언제나 그리운 듀스, 이현도님 홧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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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venworld

2011.07.30

듀스는 전설...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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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