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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또한 잉여로서 살아가고 싶은 것이다. 소설가 손창섭이 묘사한 잉여인간, 즉 ‘쓸모없는’ 인간이 아니라, 도무지 ‘쓸 수 없는’ 인간으로 살고 싶은 것이다. 체제가 이용할 수 없는 잔여로서의 인간, 체제 속으로 추슬러지지 않는 인간, 그러나 체제 속에 부유하는 인간, 체제 안에서 체제 밖outside in을 볼 수 있는 디아스포라적인 인간.
<브로크백 마운틴>이다.
브로크백 마운틴은 이들에게 사랑의 환유이다. 산 속, 사람들의 시선이 없는 곳, 그러나 세상 밖으로 터져 있는 곳, 적어도 이 산 속에 있는 한 이들은 숨어들 필요가 없다. 문제는 산 속에서만 살 수 없다는 것인데, 산을 벗어난 ‘에니스(히스 레저)’와 ‘잭(제이크 질렌홀)’은 서로를 바라보는 것조차 힘겹다.
이 영화의 배경인 ‘브로크백 마운틴’은 ‘없는 산’이다. 영화의 원작자인 소설가 E. 애니 프루는 로키산맥 어디 즈음에 ‘브로크백 마운틴’을 가상으로 설정하였다. 영화 속 시간도 1963년. 그 시기가 아무리 ‘앵그리영맨angry young man’의 시기였고, 히피문화가 번성했다 하더라도 여전히 그들은 소수자였고, 그 문화는 하위문화였다. 작가가‘없는 산’을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런 소수자의 하위문화 이야기를 품을 곳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브로크백 마운틴에 젊은 남자, 에니스와 잭이 들어온다. 여기서 이들은 양들을 방목하며 여름을 보낸다. 동성애 영화, 맞다. 그러나 좋은 동성애 영화가 그렇듯이, 이 영화에서 ‘동성’이라는 점은 어떤 흥밋거리도 되지 않는다. 다만, 거대한 산 속에서 미약하기만 한 두 인간이 나누는 비루한 몸의 위로가, 영화의 스크린이 너무 넓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서로가 나눈 것이‘사랑’이라는 확신이 들수록 그들은 헤어질 준비를 서두른다. 동성애자라는 것이 마을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살해당할 수도 있었던 시기였기에, 둘은 각자 여성과 결혼을 한다. 그러나 에니스는 아내와 섹스를 하면서 잭을 떠올리고, 잭은 마침내 에니스에게 엽서를 보낸다. 4년이 지나 에니스의 집에서 둘은 다시 만난다.
서로를 그동안 만나지 않았음에 대한 자책이라도 하듯, 몸을 부딪치며 둘은 키스한다. 그리고 그 광경을 에니스의 아내가 보게 된다. 에니스는 이혼하고, 에니스와 잭은 1년에 한 번씩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만나기로 하지만, 364일을 만나지 않고 있다가 하루를 만나게 되면, 그 364일의 기다림이 고스란히 사랑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원망과 자조와 두려움과 연민으로 자신과 상대를 괴롭히게 되는 법.
그 하루 동안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지 못했던 시간을되짚어 보느라 지쳐갔던 두 사람. 20년이 흐르고 어느새 둘은 중년이 되고 젊음과 늙음의 사이에서 더 이상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잃어버린 시간들에 대한 회한은 사랑의 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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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잭이 의문사를 당하고(아마도 동성애가 발각되어서), 에니스는 잭의 집에 다다른다.
그리고, 그 에니스는 우리가 아는 ‘히스 레저’이다. 영화 속에서 잭의 죽음에 대해 함구할 수밖에 없듯이, 히스 레저의 죽음에 대해서도 침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떤 죽음에 대한 언어는 언제나 실언失言이 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등딱지를 잃어버린 거북처럼, 혹은 외피를 떼어낸 동물처럼 상처입는다. 이 영화의 핍진성은 브로크백 마운틴을 유토피아 혹은 파라다이스paradise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선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세속에서 약간 비껴간 곳para-site으로 만들었다는 것에 있다. 그들은 상처를 벌려서 확인하지 않는다. 상처의 속을 헤집는 것은 더 깊은 균열로 이어지리라는 두려움 때문일터인데, 바로 그것이 범인凡人들이 안전지대를 찾아가는 방식이다. 그들은 그렇게 스스로 타자들의 시선 속으로 기어들어가 안전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것이 안전일까. 도피나 투항은 아닐까.
사랑이 무엇일까 하고 이즈음에서 자문하는 것은 분명 사랑에 대한 감상어린 치기에서 나온 것일 뿐이다. 오히려 이 영화에서‘사랑’에 관한 적절한 질문을 찾는다면, 그것은 오히려 왜 이들은 자기 자신의 사랑을 믿지 못하는가 하는 점이다. 사랑에 대한 불신과 욕망 사이의 딜레마 때문에 끊임없이 분열되면서 자기 환멸을 견뎌야 하기에, 이들은 1년에 한 번을 만나도 찰나의 행복조차 느끼지 못한다.
그것은 물론 이성애에 대한 강박 때문이다.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의 말대로라면, 이성애는 동성애적인 애착을 금지의 대상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양성된 것이다. ‘남자가된다’는 것은 애초의 양가적인 성적 욕망을 이성애화시키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그 이성애화를 위해 에니스는 어린 시절 동성애자를 죽인 적이 있다(혹은 동성애자를 죽인 아버지 목도한 적이 있다). 그 실수는 그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이 사라지지 않는 한 반복될 잠재적 증상이다. 마침내 에니스는 잭을 사랑하게 되고 그 증상은 반복될 기미를 보이며 금방이라도 범람할 것처럼 위태롭다.
그 위태로움을 봉합하기 위해 이들이 선택한 것은 역시 결혼이다. 잭과 에니스 모두 결혼으로 제도권 속으로 편입되는 듯한 포즈를 취한다. 잭은 부잣집 여자와 결혼하여 그 부에 편승하는 듯하고, 에니스는 자수성가하여 아내와 자식들 속에서 마침내 점점 권태를 맞이하게 되는 중년의 시점에 도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증상은 반복된다. 에니스가 결혼 서약 후 구토증을 느낀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4년 후 잭을 다시 만나고, 20년간 그 만남을 잘라내지 못하는 내내 에니스의 사랑과 죄의식은 서로를 구속하고 증상을 강화한다.
사실 여기에 대해서는 함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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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니스의 옷과 잭의 옷이 겹쳐져 걸려 있는 장면, 언젠가 에니스가 잭을 뒤에서 안은 것처럼 걸려 있는 그 옷의 메타포에 대해서도 나는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다. 잭이 브로크백 마운틴에 묻히고 싶어했다는 것도, 에니스가 “I swear……”라고 말한 것에 대해서도 재의미화하고 싶지가 않다. 아마 에니스가 잭의 죽음과 실연을 애도했다고 규정하고 싶지 않아서일 것이다. 애도로써 떠나보내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함께 살아가는 것, 그것이 어리석은 짓이라 하더라도 잭을 자신에게 동일화하며 견뎌가는 것, 그것이 오히려 에니스의 몫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청명한 브로크백 마운틴 풍경을 떠올릴 때마다 나를 휘감는 현기증을, 그리고 그 현기증 뒤에 숨어 있는 어떤 기억을 아직은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나의 치기 때문일 것이다.
당신은 어떤 사랑의 증상을 반복하고 있습니까
사랑은 늘 실수의 반복입니다. 하지 말았어야 했던, 그러나 할 수밖에 없었던 일을, 다시 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또 다시 ‘그 상황’ 속에 자신을 밀어넣지만 결국 다시 같은 실수를 하게 됩니다.
오래 전 강박증적으로 실연에 스스로 가 닿는 한 사람을 알았습니다. 그의 실연반복강박증을 역설적으로 이용하여 그를 제게서 떠날 수 없게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지만, 저는 그런 연기 혹은 자기기뢸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를 서둘러 떠났지요. 그는 ‘드디어’ 저와 헤어졌다고 마음껏 아팠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러 저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 그는 누구와 이별하며 만나고 있을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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