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이 메흐멧 누스렛(Mehmet Nusret)인 아지즈 네신(Aziz Nesin, 1915~1995)은 터키 작가다. 2006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오르한 파묵보다 1.5세대 앞선 인물이다. 그는 “서슬 퍼런 계엄령 하에서도 권력의 압제에 굴하지 않고 글로써 자신의 신념을 지”켰다(『이렇게 왔다가 이렇게 갈 수는 없다』 앞표지 날개 저자 소개 글).
지금까지 아지즈 네신의 책은 여덟 권이 우리말로 번역되었다. 전부 이난아 옮김이다. 나는 그의 회고록 『이렇게 왔다가 이렇게 갈 수는 없다』(푸른숲, 2009)를 읽는 내내 마음이 몹시 무거웠다. “그의 작품들은 항상 분노하는 동시에 미소를 짓는다”(오르한 파묵)는 평가에서 이 서글픈 회고록은 예외다.
“고통스러웠던 기억은 따로 모아두고, 이 책에서는 여러분이 읽고 웃을 수 있는 기억들만 담았다”(202쪽)지만, ‘포복절도한 웃음’이나 유쾌함 같은 건 없다. 나는 결국 아지즈 네신 회고록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눈물을 떨군다. “도서관에 있는 도서 대출 목록에서 선생님 이름을 보았거든요. 죄송합니다.”
내가 눈물을 떨군 “이미 알 것 모를 것 다 아는 고등학생”이 아지즈 네신에게 던진 사과의 말 한마디다. 그때 아지즈 네신은 터키 북서부의 도시 부르사에 유배된 몸이었다. 유배 회고록은 1947년 겨울 넉 달간의 기록이다. 무일푼이나 다름없던 유배자는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린다.
그래서일까? 유배 기간이 적어도 4년은 되는 것 같다. 그래도 솔제니친이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서 묘사한 소련 시베리아 강제수용소에 비하면, 아지즈 네신의 유배 생활은 한결 자유롭다. 날마다 조석으로 거주지 관할 파출소에 출두해 ‘부르사 시 경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서명을 해야 했지만 말이다.
“관료주의 사회에서 ‘책임’이란 한마디로 불덩이 같은 거다. 내게 불똥이 튀지 않으려면 한시라도 빨리 다른 사람에게 넘겨버려야 한다. 그렇다고 불덩이를 땅에 떨어뜨려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의무는 신성한 것이니까.” 나는 불덩이를 떠넘기기에 급급한 부르사 시 치안책임자들의 태도가 우습기는커녕 무척 씁쓸했다.
아지즈 네신이 “유배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혹시라도 무슨 피해를 볼까 봐 전전긍긍하며” 그를 대놓고 피했던 것이다. 나는 이 땅에서 어떤 낙인 때문에 고초를 겪은 분들의 고통을 이제야 겨우 비로소 이해할 만큼 그런 현실에 둔감했다.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사람들’이 이웃과 친지들에게까지 당한 극단적인 따돌림을 납득할 수 없었다.
아지즈 네신은 참으로 인간적이다. 나는 부끄러워하며 주저하는 그의 사람됨에 반했다. “지금 이 글이 나의 회고록이 아니라 소설이었다면, 주인공은 청년이 두고 간 돈을 갈기갈기 찢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바로 일어나서 청년이 두고 간 돈이 얼마인지 세어보았다.” 나로선 이 책이 소설이 아니라 회고록인 게 천만다행이다.
『왜들 그렇게 눈치가 없으세요?』(노석미 그림, 살림, 2009)는 아지즈 네신의 유년 시절 이야기다. 아지즈 네신은 풍자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네신이 이야기하는 그의 삶은 슬프기만 하다. 나한테 그는 ‘슬픈’ 풍자작가다. “사람들은 제게 왜 풍자작가가 되었냐고 항상 묻습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마도 절 풍자작가로 만든 것은 저의 삶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눈물 속에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의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우리들 대부분은 가난이 무슨 죄라도 되는 양 부끄러워합니다. 저도 오랜 세월을 가난 때문에 부끄러워했습니다, 작가가 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하지만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모두가 가난한 나라에서는 가난이 부끄러운 게 아니라 재산이 많은 게 더 부끄러운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51쪽부터 ‘짠함’의 연속이다. 어린 아지즈 네신은 헌 옷을 뜯어 만든 명절 옷 바지 주머니에 구멍이 나서 잉크 살 돈을 잃어버린다. “아버지가 그날 저녁 왜 늦게 들어오셨는지 나중에 커서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아내와 아들에게 명절 선물을 사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55쪽)
57쪽과 58쪽에서 내 눈가는 다시금 흐릿해진다. “우리는 대부분의 명절 아침을 항상 이렇게 보냈습니다. 아침까지 헌 옷으로 내 명절 옷을 짓는 어머니…. 다혈질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마음씨가 좋은 아버지…. 울어서 눈두덩이 부어올랐지만 한 번도 누구에게 하소연한 적이 없는 어머니….”
아지즈 네신은 싸움꾼이 아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나를 싸움꾼으로 알고 있습니다. 작가 생활을 하면서도 싸움을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치열한 글 싸움이나 격렬한 논쟁은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싸움은 내가 건 것이 아니었습니다. 첫 번째 공격은 제가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은혜를 저버리지 않는 개만도 못한 인간은 얼마나 많은가(112쪽). 아지즈 네신의 어머니는 결핵을 앓았다. “어디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우리 집에 무상으로 고기를 주었습니다. 아마 결핵퇴치단체였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보건부 혹은 시 당국일지도 모르지요.” 1920년대에 말이다. “우리에게 일주일에 500그램의 고기는 엄마를 회복시킬 약이었습니다.”
어린 아지즈 네신은 아주 멋진 소년이었다(130쪽). 예나 지금이나 백만장자의 실상은 이렇다.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이 같은 거짓말과 속임수를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 백만장자들의 근본을 보면 위의 네 가지 철칙과 맞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오히려 정반대인 사람들이 있을 뿐입니다.” 백만장자가 되기 위한 네 가지 철칙은 133쪽에 나온다.
아지즈 네신의 우화집은 그의 유배 회고록과 유년 시절 이야기 못잖게 감동적이다. ‘아지즈 네신의 유쾌한 세상 비틀기’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양은아 일러스트, 살림, 2009)에 실린 우화들은 좀 무겁다.
다소 무거운 내용에 걸맞게 우화들을 사자성어로 풀어 보면, 「아, 우리 당나귀들」과 「행복한 고양이」는 순응주의(順應主義)다. 집주인과 세입자의 처지가 뒤바뀌는 「우리 집」은 주객전도(主客顚倒)이고, 「학부모 회의」는 중구난방(衆口難防)이며, 「쥐들은 자기들끼리 잡아먹는다」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이다(‘순응주의’는 사자성어가 아님).
“버르장머리 없는 것 같으니라고! 아니, 어떻게 엄마 아빠에게 지금까지 자기가 어느 학교에 다니고, 몇 학년인지 말도 안 해 줄 수 있냐! 요즘 애들은 부모를 존경하는 법이 없다니까!” 집에서 일어난 어이없는 중구난방의 말도 안 되는 아빠의 마무리다.
“그 수완 좋은 관리인은 자신도 자신의 종족을 죽이고 죽여 살아남은 가장 힘센 쥐처럼, 자신의 친구들을 먹고 먹어, 죽이고 죽여, 그 커다란 창고의 관리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 삶에서의 성공 방법을 쥐들에게 적용했던 것입니다.” 인간사(人間事)의 약육강식은 다른 동물들에게 절대 뒤지지 않는다. 더 능하면 능했지!
『당나귀는 당나귀답게』(이종균 그림, 푸른숲, 2005)는 ‘아지즈 네신의 삐뚜름한 세상 이야기’다. 첫 작품 「위대한 똥파리」는 도전 정신과 그것의 실행을 부추긴다. “어떤 길을 택할 것인지는 파리들 자신이 알아서 할 일이다. 하지만 진실은 있다. 어둠 속에 죽치고 앉아 있는 파리의 기념비가 세워졌다는 얘기는 파리들의 역사 그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으니까.”
「거세된 황소가 우두머리로 뽑힌 사연」은 비토(veto)가 가져온 엉뚱한 결과다. 「기후제와 관절염」에 나타난 터키와 그리스의 선린우호관계는 한국과 일본은 꿈도 못 꾼다. 남북한은 더 말해 뭣 하랴! 「양들의 제국」은 늑대의 꾐에 빠진 어리석은 양들을 풍자한다. 아니, 아지즈 네신이 풍자한 대상은 그런 인간들이겠지.
한국어판 표제작 「당나귀는 당나귀답게」는 군사독재자의 위선에 불과했던 예전의 본분 지키기를 떠올린다. 다음은 「멋진 것과 옳은 것」에 나오는 시의 정의다. “내가 생각하기에, 시는 옳은 것을 멋진 감정으로 설명하는 거란다.” 「미친 사람들, 탈출하다」에선 과연 누가 미쳤고, 누가 안 미쳤는지 영 헷갈린다.
무라트의 할아버지가 노익장을 과시하는 「연싸움」의 뒷맛은 씁쓸하다. “우리가 할아버지가 되었을 땐 어쩌면 연을 날리지 못하게 될지도 몰라. 그 때가 오면 이 곳도 건물들로 가득 차 버려서 연을 날릴 만한 공터가 남아 있지 않을 테니까.”(무라트) 맨 끝에 놓인 「세 가지 물건」은 무슨 얘긴지 잘 모르겠다.
『개가 남긴 한마디』(이종균 그림, 푸른숲, 2008)는 또 하나의 ‘삐뚜름한 세상 이야기’다. 「까마귀가 뽑은 파디샤」는 권력자가 자신의 고정지지층만 섬기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보여준다. ‘파디샤’는 “(이슬람권 국가의 군주)”를 말한다. 「도둑고양이의 부활」의 맺음을 보면 세무 당국은 어디서나 비호감이다.
“잘못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나도 잘 모르겠네. 모든 사람이 아는 사실이라 해도 대놓고 얘기하면 죄가 되는 수가 있잖은가? 메르시메키우스가 어쩌다 살해되었는지 기억하게나. 로마가 공화 정치를 한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는데도, ‘로마는 공화국이다.’라고 외쳤기 때문에 목숨을 잃었네. 나도 정확한 체포 이유는 모르겠네. 하지만 분명한 건 지금 자네 아들에 대한 체포 영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네.”(「당신을 선출한 죄」)
「왕과 빈대」에서 사람의 피에 걸신들린 빈대는 쇠를 먹는 상상의 동물인 불가사리를 떠올린다. 「아주 무서운 농담」의 반전이 약간 의외라면, 「개가 남긴 한 마디」의 그것은 좀 싱겁다. 「총리를 뽑는 아주 특별한 기준」에 등장하는 파디샤는 무척 단순하다. 「당나귀에게 훈장을!」의 당나귀는 관제언론이 아닌가 싶다.
진화는 진보가 아니다. “진화란 변화하는 환경에 대한 적응이지 진보가 아니다.”(스티븐 제이 굴드, 『생명,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 김동광 옮김, 경문사, 2004, 45쪽) 다소 엽기적인 「늑대가 된 아기 양」에서 아기 양의 늑대로의 초고속 진화는 더욱 포악해진 양치기라는 변화된 환경에 적응한 것이다.
「꼬리 밑 선구자」의 안타고니스트로 설정된 ‘비범한 물고기’는 개척자 정신이 강하다(실제론 프로타고니스트다). “이 바위 틈새는 우리가 살기에는 너무 좁아요. 제가 다른 곳으로 가서 무엇이 있는지 보고 올게요.” 행동파 파리가 연상된다. 「꼬리 밑 선구자」의 타이틀 롤을 맡은 ‘꼬리 밑 물고기’는 2인자이기는커녕 기껏해야 기생하는 부류에 불과하다.
“옳은 말을 하시는군요. 하지만 내 잘못은 아닙니다.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잖아요. 사람들에게 양심이라는 것이, 도덕이라는 것이 털끝만큼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내 잘못이 아니야」)
『튤슈를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의 여섯 가지 이름』(김민지 일러스트, 푸른숲, 2007)은 “아지즈 네신의 우화 중에서 사랑을 소재로 한 단편만을 선별해 엮”었다(「옮긴이의 말」). 사랑을 주제로 한 단편선집이지만, 적어도 첫 번째 작품과 두 번째 작품은 연관이 있어 보인다.
「빛나는 것, 그것은」 사랑이리라. 독수리와 물고기 익투스의 사랑은, 사랑은 역경마저 극복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화자와 청자인 남자와 여자 사이엔 국경이 가로놓여 있다. 「품을 수 없는, 안길 수 없는」에서 참나무와 인형의 사랑은, 사랑의 아픔을 대변한다. 아무튼 남자를 떠났던 여자가 돌아왔다.
“「감아 안아야 할 그 아름다움의 이름」에서는 연인 사이의 연대, 즉 삶의 이상(理想)을 공유하는 것의 어려움을, 「찰나에 만나다」에서는 하나가 되려는 열망, 그러나 함께할 수 없는 고통에 대해 이야기한다.”(「옮긴이의 말」)
“시인은 단순히 시를 쓰고 읽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삶의 형태”다. 시인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는 “사랑이란 매 순간 끊임없이 갈구하지만 완전하게 내 것으로 소유할 수 없는, 찾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더 멀리 달아나버리는, 설명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이다(「나비, 시인, 그리고 여자」).
쓸모 있음에 대한 나비의 항변을 경청한다. “사람들은 누에나비 이외의 다른 나비들은 쓸모가 없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도대체 쓸모가 있다는 게 뭐죠? 아름다운 자태로 하늘을 나는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쓸모 있는 게 아닐까요? 세상을 아름답게 꾸며주는 것 이외에 도대체 저희에게 다른 무엇을 기대하는 거죠?”
「튤슈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가 존재하는 이유다. 일흔 살 먹은 남자를 낯선 도시에서 헤매게 하는 튤슈는 누구인가? “제가 모르는 곳의 모르는 집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는, 제가 모르는 여자가 튤슈입니다.” ‘그’는 세계에서 복잡하기로 이름난 어느 도시의 문화 광장 한 구석에서 목소리가 잠길 때까지 ‘너를 사랑해 튤슈’를 외친다.
“그 순간 나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무슨 이유로 이 원시적인 고함에 관심을 갖는지 생각해보았다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다 ‘너를 사랑해 튤슈’라고 소리치고 싶지만, 남자처럼 마음 깊은 곳에서 용기가 나지 않아 저렇게 소리치는 남자에게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어쩌면 그는 우리 대신 튤슈를 사랑한다고 외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500쪽 가까운 장편소설 『생사불명 야샤르』(푸른숲, 2006)를 하루에 후딱 읽었다. 아지즈 네신은 실로 대단한 작가다. 그의 진가를 만끽했다. 솔직히 옮긴이의 번역 소감을 반신반의한 게 사실이다. “이 책을 번역하는 내내 방바닥을 뒹굴며 웃었던 경험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독자들도 읽는 내내 터져 나오는 웃음을 멈출 수 없을 것이다.”
정말 그렇다. 풍자와 익살이 난무하는 『생사불명 야샤르』를 읽으며 나는 뒤집어졌다. 내 책 읽기 사상 최대의 요절복통이었다. 예의 네신의 다른 작품들처럼 웃음 뒤끝으로 서글픔이 밀려오지만, 여기선 즐얰움이 주눅 들지 않는다. 더구나 이 작품은 해피 엔딩이다. 야샤르 야샤마즈는 ‘천일야화’의 샤흐라자드다.
다만 야샤르는 감옥에서 동료 죄수들에게 자신의 기구한 인생살이를 들려준다. 그런데 우리는 야샤르의 험난한 삶을 동정하기 전에 너무나 우스운 ‘시츄에이션’ 앞에서 데굴데굴 구르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 제가 죽었대요. 제가 죽었대요.”(48쪽) 야샤르는 울음보를 터트리지만 우리는 웃음보가 터진다. (이후 전개되는 상황에 대해선 책임 못짐.)
또한 다만 야샤르의 ‘살아 있는 죽음’은 “국가가 임명한 대단한 공무원”들의 실수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과오를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야샤르는 그에게 닥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재앙을 이렇게 노래한다. “악운이 날 따라다녔지/희망을 안겨주는 척 시간만 끌었다오/내게 치유할 수 없는 상처만 남겨준 채/내 상처를 감싸주오, 안쉐를 불러주오” 안쉐는 그의 약혼녀다.
야샤르는 “살아 있으면서도 살아 있지 못한 자신의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야샤르 야샤마즈의 모험담은 동료 죄수들을 사로잡는다. “야샤르는 마치 모두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체화한 후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 같았다.” 죄수들이 야샤르의 이야기를 듣다 말고 자기도 모르게 내지른 고함은 우리 현실과도 들어맞는다. “맞아, 정말 똑같아!”
그런데 우리나라 독자들은 우리와 밀접하거나 우리 현실 그대로인 외국 얘기는 오히려 외면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단지 반면교사(反面敎師)일 수 있다는 이유로 『생사불명 야샤르』를 따돌리는 건 참으로 아쉽다. 꽤 개선되긴 했어도 이 나라 관공서의 실상은 아직 미흡한 점이 있으니 말이다.
“정부기관? 공공기관이라고? 그래, 그럼 공공기관이 하는 일이 뭐요? 학교에 입학하려고 했더니 ‘넌 죽었어’라고 하고, 군대에 끌고 갈 때는 ‘넌 살아 있어’라고 하더니, 또 유산을 상속받으려고 할 때는 ‘넌 죽었어’라고 하고, 세금을 거두어 갈 때는 다시 또 ‘넌 살아 있어’라고 하는, 도대체 씨도 안 먹히는 이야기들을 해대는 공공기관이라는 곳은 뭘 하는 곳이냐고!”(484쪽)
2004년 번역서 초판이 출간된 『제이넵의 비밀편지(2판)』(홍정아 그림, 푸른숲, 2007)는 우리말로 옮겨진 아지즈 네신의 첫 작품이다. 새 직장을 얻은 아버지를 따라 온 가족이 앙카라로 이주한 초등학교 5학년 제이넵 얄크르와 제이넵이 전에 살던 이스탄불의 같은 반 친구 아흐멧 타르바이가 편지를 주고받는 형식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권말엔 작가의 편지 2통이 실려 있다. 먼저 「어린이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원서 초판의 ‘저자 후기’로 짐작된다. 이어지는 「독자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원서의 재판 혹은 개정판의 ‘저자 후기’가 아닌가 싶다. 1960년대 중반, 아지즈 네신은 『제이넵의 비밀편지』를 ‘어린이 문학상 공모전’에 출품하지만 미역국을 먹는다.
작가의 두 번째 편지는 ‘어린이 문학상 공모전’의 예심을 맡은 터키 작가 오나트 쿠트라르의 입을 빌려 『제이넵의 비밀편지』가 미역국을 먹게 된 사연을 전한다. 나는 쿠르라르가 네신의 회갑 잔치에서 뒤늦게 ‘폭로’한 (어디서나 있을 법한) 본심 심사위원들의 몰이해보다 아래 내용이 더 인상적이었다.
“저는 불가리아의 유명한 영화인이자 풍자가인 토도르 디노브의 말을 자주 떠올리곤 합니다. 그가 손님으로 처음 터키에 초대되어 왔을 때 터키 풍자가들에게 아래와 같은 메시지를 전해 주었습니다. ‘풍자는 우리 세계를 웃음거리가 되는 것으로부터 구제해 줍니다.’”
책마다 빼놓지 않은 이난아 번역가의 ‘옮긴이의 말 혹은 편지’가 각별하다. “제가 처음 아지즈 네신의 작품을 번역하게 된 동기는 무엇보다도 그분의 시대를 뛰어넘는 풍자와 위트를 담은 작품 자체가 대단해서였지만 한편으로는 그분의 일관된 ‘어린이 사랑’, 그 정신에 깊은 감동을 받았던 것도 크게 작용했습니다.”(『왜들 그렇게 눈치가 없으세요?』)
“아지즈 네신이 국민작가로 추앙받는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작가 이전에 실천적인 지식인으로서 평생을 기득권 세력과 투쟁하는 데 바쳤기 때문이다. 그는 터키의 폭력적인 정권, 특히 언론인에 대한 탄압을 정면으로 비판한 작품들 때문에 내란 선동이나 좌익 활동이란 죄목으로 이백오십 번 이상의 재판을 받았으며 유배와 수감 생활을 반복하였다.”(『튤슈를 사랑한다는 것은』)
“저는 네신의 이야기 속에 담긴 이 의미를 느끼고 공감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네신의 이야기를 독자 여러분들께 전달하고 있고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네신의 이야기를 독자 여러분들에게 전하는 일은 제게 봄을 믿게 하는 햇볕을 쬐는 소중한 사명입니다.”(『더 이상 견딜 수 없어!』)
확언하건대 우리에게 아지즈 네신 같은 작가는 없다. 혹시라도 국내 작가 중 누군가 노벨문학상을 받는다면 그건 사상누각(砂上樓閣/沙上樓閣)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최성일
joke2222
2010.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