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고통 속을 통과하는 것이다
여기, 온몸으로 고통을 통과한 두 사람이 있다. 소설이나 영화 속의 인물이 아니다. 그들은 20세기에 실제 숨 쉬고 살았던 인물들이다. 한 사람은 여자였고, 한 사람은 남자였다. 한 사람은 오스트리아 출생이고, 한 사람은 멕시코에서 태어났다. 한 명은 의사였고, 다른 한 명은 화가였다. 한 명은 1954년 세상을 떠났고, 한 명은 1997년 숨을 거두었다. 그들은 살아생전 한순간도 같은 공간에 놓인 적이 없을 만큼 서로 연관성 없는 인물들이다. 별다른 공통점도 없다. 그러나 이들을 한데 묶어 주는 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글ㆍ사진 채널예스
2010.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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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극과 반응 사이

여기, 온몸으로 고통을 통과한 두 사람이 있다. 소설이나 영화 속의 인물이 아니다. 그들은 20세기에 실제 숨 쉬고 살았던 인물들이다. 한 사람은 여자였고, 한 사람은 남자였다. 한 사람은 오스트리아 출생이고, 한 사람은 멕시코에서 태어났다. 한 명은 의사였고, 다른 한 명은 화가였다. 한 명은 1954년 세상을 떠났고, 한 명은 1997년 숨을 거두었다. 그들은 살아생전 한순간도 같은 공간에 놓인 적이 없을 만큼 서로 연관성 없는 인물들이다. 별다른 공통점도 없다. 그러나 이들을 한데 묶어 주는 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당신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당신은 울었고 세상은 기뻐했다. 이제 당신이 죽을 때는 세상은 울고 당신은 미소 지을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

그들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그들은 울고 사람들은 웃었다. 그러나 그들이 숨을 거둘 때는 오로지 그들만이 미소 짓고 모든 사람이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꼭 그와 같은 삶을 살았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빅터 프랭클과 프리다 칼로이다. 그들은 내가 아는 역사 속의 그 어떤 사람보다도 커다란 고통을 당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또 그들은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을 통틀어 가장 당당히 온몸으로 그 고통과 맞섰고 그것을 통과한 사람들이다. 한때는 삶이 자신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가는 것을 묵묵히 지켜봐야 했던 이들. 어느 날 이유 없이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온몸과 영혼으로 맞이해야 했던 이들. 모든 불가능한 조건들과 삶을 내팽개치고 짓밟을 구실들과 꿈을 그저 한낱 꿈으로 치부해 버릴 무수한 상처와 아픔을 가진 이들. 이제 그들을 소개하려 한다.

빅터 프랭클이 숨을 거두고 얼마 후, <뉴욕타임스>는 그를 다음과 같은 한 문장으로 요약해 기사를 실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야만적이었던 20세기의 수난을 가장 극한 상황에서 체험했지만, 20세기 인류에 가장 희망적인 메시지를 던진 사람.’

수감 번호 119, 104번.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어느 날 유대인이자 정신과 의사였던 빅터 프랭클은 1천5백 명의 다른 유대인들과 함께 며칠 밤과 낮을 기차를 타고 달리며 낯선 곳으로 이송되고 있었다. 그리고 잿빛 새벽의 기운이 겨우 세상을 밝히고 기차가 덜컹거리며 선로로 들어간 뒤 팻말을 본 사람들은 심장이 멈추는 듯한 공포와 함께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우슈비츠. 가스실과 화장터, 대학살, 인종 살육장이라 불리는 그곳. 그곳을 통과하며 빅터 프랭클은 사람들이 대롱대롱 매달린 교수대를 상상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현실은 그보다 더욱 끔찍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1천5백 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은 2백 명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가축우리 같은 건물에 구겨 넣어졌다. 그렇게 나흘간 빵 한 개를 받고 얼마 후, 군복이 잘 어울리는 마른 체격의 장교 한 명이 건물에 들어왔다. 그는 왼손으로 오른손 팔꿈치를 받친 채 무심하고 평온한 표정으로 한 줄로 세워진 그들을 향해 계속해서 오른쪽과 왼쪽을 가리키는 행동만을 했다. 빅터 프랭클은 오른쪽으로 가게 되었다. 그것이 그들의 삶과 죽음을 가르는 최초의 선별이었다. 그곳에서 90퍼센트의 사람들이 왼쪽, 즉 화장터로 끌려갔다. 살아남은 빅터 프랭클은 몇백 야드 떨어진 굴뚝에서 곧 구름 연기가 하늘을 뒤덮는 광경을 지켜보며 서 있었다.

수용소에 들어간 빅터 프랭클이 처음으로 빼앗긴 것은 평생 동안 심혈을 기울인 연구의 원고였다. 그것만은 돌려주기를 애원하는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냉소 섞인 비웃음이었다. 그 뒤 그는 살아남은 사람들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에 채찍을 맞으며 온몸의 털을 모두 깎였다. 한 명의 인간 존재로서의 모든 수치심이 고개를 드는 상황이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글자 그대로 우리 자신의 벌거벗은 실존뿐이었다. 그동안의 삶과 현재를 연결시켜 주는 물건 중 과연 내게 남은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나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안경과 벨트가 전부였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벨트는 나중에 빵 한 조각과 바꾸어 먹고 말았다. (…) 우리는 우스꽝스럽게 벌거벗겨진 자신의 몸뚱이 외에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상의 지옥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인간 정신의 꽃

그들은 두 장의 담요로 9명이 되는 사람들이 바닥 위에서 함께 잠을 잤다. 그는 인간이 어떤 환경에서도 적응할 수 있는 존재임을 확실히 깨달았다. 그전까지 빅터 프랭클은 이 세상에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이것이 없으면 잠을 잘 수 없고, 저것이 없으면 살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아우슈비츠에서는 모든 것이 예외였다. 양식이 없어도, 잠이 없어도 인간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공포와 절망뿐이어도 인간은 결국 살아남았다.

끊임없이 돌아오는 죽음에의 선별 과정, 하루에도 몇 명씩 시체가 되는 옆 자리의 동료들, 감시병들에게 받는 죽음보다 끔찍한 정신적 모멸감과 하루 빵 한 조각과 묽은 죽으로 생명을 이어가며 감당해야 하는 육체노동. 그곳은 지상의 지옥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나는 동료가 괴로워하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던 어느 날 밤의 일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잠을 자면서 몸부림을 치는 것이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평소에도 악몽이나 황홀경에 시달리는 사람을 특히 딱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나는 그 불쌍한 사람을 깨우려고 했다. 그러다 갑자기 내가 무슨 짓을 하려고 했지 놀라 그를 흔들어 깨우려던 손을 거두어들였다. 그 순간 나는 꿈을 꾸지 않는다는 것은, 비록 나쁜 꿈일지라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수용소의 현실만큼이나 끔찍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빅터 프랭클은 그 후 3년 동안을 아우슈비츠를 포함해 네 곳의 수용소를 전전하며 목숨을 이어 갔다. 죽음에의 선별에 선택당하지 않기 위해 매일 유리 조각으로 면도를 하던 남자. 동상에 걸려 찢어진 부은 발을 신발 속에 구겨 넣으며 아이처럼 엉엉 우는 동료의 울음소리를 듣던 남자. 그러나 끝까지 인간의 고귀함을 잃지 않으며 성자처럼 고통에 온몸으로 맞섰던 이 남자는 모든 가치가 파괴되고 인간이 더 이상 인간일 수 없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 인간은 상황의 노예도 아니고 운명의 허수아비도 아니라고 나는 믿는다. 상황에 굴복할지 상황에 맞설지를 결정하는 주체는 어디까지나 인간이다. (…) 인간에게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의지가 있고 스스로를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는 그곳에서 인간이란 얼마나 잔인하고 더러워질 수 있는지, 반면에 또 얼마나 선하고 위대할 수 있는지를 직접 목격한다. 인간이란 아무런 감정도 이유도 없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지만, 죽음에 직면해 있으면서 마지막 남은 빵 조각을 옆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도 있는 존재임을 목격한 것이다. 인간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타락할 수도 있으나 신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어느 날 밤이었다. 피로와 배고픔에 찌든 송장 같은 몸뚱이로 막사 바닥에 앉아 있는 그들에게 동료 한 사람이 달려왔다. 그는 점호장으로 가서 해 지는 풍경을 보라고 외쳤다. 그들은 밖으로 나가 빛나는 구름과 살아 숨쉬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황홀한 풍경은 초라한 막사와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모두들 그 광경에 시선을 모으며 침묵이 흐르고 있는 그때 누군가 말했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다니!”

이 구절 앞에서 나는 결국 참았던 눈물을 뚝뚝 흘리고 말았다.

그러나 수용소에서 석방된 빅터 프랭클에게는 더 큰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처참히 살아 돌아온 수용소에서 누이를 제외한 아버지, 어머니, 형제, 그리고 아내까지 그의 전 가족이 몰살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는 말한다. 덤덤하게, 모든 고통을 초월한 사람의 목소리로 말이다.

사랑이란 어떤 사람의 육체적 존재보다는 그 사람의 정신성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 지금 내 옆에 있다는 것, 숨을 쉬고 살아있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하는 건 아니란 사실이다.

위대함의 척도는 삶의 고통에 어떻게 대처하는가

빅터 프랭클. 그는 나에게 진정한 위대함이란 무엇인지를 가르쳐 준 사람이다. 한 사람의 위대함의 척도가 삶의 고통에 대처하는 자세라면 그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위대한 삶을 산 사람이다. 나는 이렇게 슬프고, 이렇게 진실되고, 이렇게 아름다운 책은 지금껏 만나 보지 못했다. 삶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의미를 지니며, 고통 역시 그 안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이 더는 고통만이 아님을 이토록 생생하게 가르쳐 주는 책을 만나 보지 못했다. 그의 말대로 시련과 고통은 신의 영역이다. 신의 세계이다. 우리는 그 의도를 인간의 방식으로 해석할 뿐이다. 모든 고통에도 의미와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고통을 그저 고통으로 받아들이느냐 그 안에서 내면을 단련하는 발판을 세우고 의미를 발견하느냐는 개인의 의지와 선택의 문제이다. 우리의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언제나 길이 놓여 있는 것이다. 사실 슬픔에 빠지고 좌절하는 데 가장 큰 몫을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누구도 우리에게 슬픔과 좌절을 선택하도록 강요하지 않았다.

엘리노어 루스벨트는 말한다.
“아무도 당신의 동의 없이 당신에게 고통을 가하지 못한다.”

우리를 아프게 하고 상처 줄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우리 자신뿐이다. 내 영혼을 걷어차고 이미 벌어진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것도 나 자신이다.

후학들은 빅터 프랭클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도 삶을 마칠 때까지 호수처럼 맑은 영혼을 가지고 있었다고 밝힌다. 그는 절망 앞에서도 끝내 희망을 선택한 사람이었다. 진정한 자기 자신의 주인이었다.

가슴속에 슬픔밖에 없는데 어떻게 웃으라 하시냐고 따지는 한 청년에게 틱낫한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자네의 슬픔에 웃어 주게나!”

자신의 슬픔에 진짜 미소를 보낸 남자, 빅터 프랭클. 삶이 던지는 질문 앞에 고민이나 말장난이 아닌 행동으로 답을 해야 한다는 빅터 프랭클은 고통에 일그러져 비틀대는 당신과 나에게, 휘청거리고 넘어져 다시는 일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단념하는 우리에게, 이제 이렇게 이야기한다.

당신의 인생을 두 번째로 살고 있는 것처럼 살아라. 당신은 첫 번째 인생을 형편없이 행동함으로써 망쳐 버렸는데, 이제 두 번째 인생을 살면서 지난번의 과오를 지금 막 다시 되풀이하려 하고 있다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행동하라.

나를 새롭게 할 수 있는 순간은 5분마다 찾아오는 법

당신은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았는가? 오늘은 그저 어제와 그저께의 반복일 뿐이었는가? 여전히 3년 전과 마찬가지로 살고 있다고? 그렇다면 지금 당장 가혹하리만치 당신 자신의 알갱이 그대로와 직면해 보길 바란다. 당신 자신과 일상을 아주, 아주 면밀히 관찰해 보라. 그리고 과거의 당신을 버리고 지금 이 순간 당신의 두 번째 인생을 새로 시작해라. 첫 번째 인생에서 저질렀던 판에 박힌 습관들과 매너리즘과 상처와 고통 따위 모두 지워 버리고, 빅터 프랭클의 말대로 형편없이 망쳐 버렸다고 순순히 인정하고, 이제 당신의 두 번째 인생을 새로 시작해 보는 것이다. 두 번째 인생마저 망쳐 버려 벌써 다섯 번째쯤의 인생을 새로 시작하고 있는 중이라고? 아무렴 어떤가?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우리는 무수히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나를 버리고 다시 태어나게 하면 어떤가?

나를 새롭게 할 수 있는 순간은 5분마다 한 번씩 찾아온다고 했다. 그 말은 곧 최고의 내가 될 수 있는 기회는 매순간 찾아온다는 말이다. 이전의 소심하고 용기 없는 나, 게으르고 변덕스러운 나, 그런 가면은 조용히 벗어던지고 모든 과오에서 벗어나 두 번째 인생을 지금 이 순간 다시 맞는 것이다. 지난번 인생에서 발을 헛디뎌 낭떠러지로 떨어졌었다 해도 괜찮다. 지금 이 순간의 당신은 다시 출발선상에서 운동화 끈을 바싹 조이고 있을 테니 말이다.

삶은 만만하지 않다, 고통은 고통으로 받아들여라

나는 실제로 프리다 칼로의 작품집을 보고 그날 저녁 밤새도록 악몽에 시달린 경험이 있다. 그녀의 작품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알겠지만 프리다 칼로의 그림들은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끔찍한 것들이 태반이다. 끊어진 동맥을 손에 쥐고 있는 자화상에서부터 남자의 칼에 온몸을 난도질당한 여성, 온몸에 못이 박힌 자신의 모습과 건물에서 추락해 자살하는 여성까지. 그녀의 작품들은 정면으로 응시하기가 무척이나 힘이 든다. 죽음의 공포를 연상시키는 붉은 화폭에서는 금방이라도 핏방울이 흘러내리고 피비린내가 번져 올 것만 같다. 그녀의 그림들에는 삶의 고통과 잔인함이 그대로 펼쳐져 있다. 그런데 이런 자신의 작품에 대해 프리다 칼로는 말한다.

사람들은 내가 초현실주의자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다. 나는 결코 꿈을 그리지 않았다. 나는 바로 나의 현실을 그렸다.

프리다 칼로는 작은 캠퍼스에 자신의 현실을 그대로 투영해 담아냈다. 외면하고 싶은 고통을 그대로 직면하고 홀로 고통 속을 고요히 통과한 것이다. 화폭은 그녀의 지난한 고통의 삶을 담아내는 도구이자 유일한 치유의 장이었다.

영화 <프리다>의 원작이기도 한 미술사학자 헤이든 헤레라의 전기 『프리다 칼로』는 어린 시절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겪었던 고통과 그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과정을 영화보다 더 생생하게 그려 낸 책이다.

삶의 기술은 댄서의 기술보다 레슬러의 기술과 비슷하다

아우렐리우스는 그의 책 『명상록』에서 삶의 기술은 댄서의 기술보다는 레슬러의 기술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갑자기 닥치는 의외의 공격에 항상 대비하고 굳건히 마음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1907년 멕시코의 코요야칸에서 태어난 프리다 칼로는 일곱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오른쪽 다리를 절게 되었다. 그리고 열여덟 살이던 1925년,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뒤바꿔 놓는 끔찍한 사고를 당한다. 그것은 인생이 그녀에게 가한 최초의 혹독한 공격이었다. 하굣길에 그녀가 타고 가던 버스가 전차를 들이받은 것이다.

그녀는 사고 현장에서 말 그대로 쇠기둥에 박혔다. 척추가 부러지고 골반이 부서지고 한쪽 발이 으깨졌다. 그날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29년 동안 그녀의 삶은 고통과 병마와의 투쟁으로 점철되었다.

그녀는 사고로 인해 평생 동안 서른두 번의 외과 수술을 받았다. 아이를 간절히 원했지만 자궁을 심하게 다쳐 평생 아이를 갖지 못했다. 수차례 아이를 가졌으나 모두 유산을 해야 했다. 그녀의 삶은 서서히 망가져 가는 육체와의 지난한 투쟁이었다. 사고 이후 단 한 순간도 아픔과 떨어져 살아 본 적이 없었다.

평생의 연인이자 정치적 동지였던 디에고 리베라와의 사랑 역시 순탄치 못했다. 디에고와는 줄곧 결혼과 별거, 이혼 그리고 재결합을 반복하며 살았다. 디에고에게 있어 프리다는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존재였으나 그것도 그의 자유로운 욕망을 막지는 못했다. 디에고는 평생 프리다 외에 다른 연인을 두었고 심지어 프리다의 친동생과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그녀를 사랑한 것만큼의 똑같은 고통을 그녀에게 안겨 준 것이다. 그럼에도 프리다는 평생 디에고의 곁을 떠나지 못했다. 프리다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일생 동안 두 번의 중대한 사고를 겪었다. 하나는 전차 사고였고, 다른 하나는 디에고였다.”

사고로 인해 부자연스럽고 불편해진 육체의 틀에 갇힌 프리다는 병실에 누워 지내는 동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프리다는 석고 깁스를 하고 있는 끔찍하게 지루한 시간을 견디기 위해 무엇이든 하자고 결심했고, 그래서 그림을 시작했다고 밝힌다. 말하자면 고통은 그녀의 숨겨진 천재성을 발굴시키는 계기로 작용한 셈이다. 끔찍한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킨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프리다는 그 전차 사고가 아니었더라면 세계적인 화가로 명성을 떨치며 미술계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녀는 그 고통으로 하여금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알프레드 뮈세의 시 「10월의 밤」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인간은 수련생, 고통이 스승이니,
고통 받지 않는 한 그 누구도 자신을 알지 못합니다.


프리다 칼로는 고통이라는 스승을 받아들였고, 그로 인해 자신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 그녀 삶의 가장 큰 스승은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게 만들어 준 아픔과 고통이었다.

삶은 때론 ‘놀라운 선물’을, 때론 ‘치명적인 지뢰’를 동시에 준다

삶은 때론 ‘서프라이즈한 선물’을 안겨 주기도 하지만, 한쪽 다리를 잃을 정도로 치명적인 지뢰를 심어 두기도 한다. 때로는 인생의 고통과 정면 승부를 해야 될 날이 반드시 찾아올 것이다. 팔십 평생이 로맨틱 영화처럼 달콤하고 동화처럼 아름다운 이야기들로만 이어질 것이라 생각하는가? 삶을 제대로 이해하기를 원한다면 그런 유아기적 발상부터 집어던져라. 중요한 것은 고통과 아픔이 찾아올 수도 있음을 받아들이고 그 고통을 지나는 유일한 길은 그곳을 거쳐 통과하는 것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인생은 힘들다는 사실을 외면해선 안 된다. 인생에는 고독도 있고, 아픔도 있고, 누군가의 죽음도 있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그리고 제 몫의 고통을 당당히 통과하라. 역경이 아무리 강해도 결국 더욱 강한 것은 당신 자신이다. 역경은 결코 당신을 이길 수 없다. 그 사실을 믿어라.

자신의 고통을 그린 화가 프리다 칼로. 응어리진 감정들과 흐느낌들, 폭발할 것 같은 생의 고통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그대로 화폭에 담은 대가는 참으로 엄청난 것이었다. 프리다 칼로는 멕시코의 국보급 화가를 뛰어넘어 피카소와 뒤샹 등이 인정하는 초현실주의 화가로 거론되며 미술계에서 자신의 입지를 정확히 다지게 되었다. 그녀는 세계적인 가수 마돈나가 여신으로 추앙하는 화가이며, 스스로 하나의 전설이자 신화가 되었다. 그녀를 둘러싼 모든 것, 전차 사고, 역시 유명한 화가였던 디에고와의 평생에 걸친 열정적이고 지독한 사랑, 작품, 옷차림이나 성격 등이 전설로 남게 되었다.

그녀가 그린 숱한 자화상들은 피 흘리고 상처받은 모습이다. 그러나 시선만큼은 곧고 맑으며 절망을 극복한 강한 여인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준다. 1954년 7월 13일 사망하기 며칠 전까지도 그녀는 손에서 붓을 놓지 않았다. 삶은 그녀에게 가혹하리만치 많은 것을 빼앗아 갔지만 그녀는 끝내 아름다웠다. 고통만을 안겨준 생을 너무도 사랑한 그녀는 매순간 타오르는 활화산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태우며 열정적으로 살다 갔다. 묵묵히 고통을 통과한 자의 뒷모습이 얼마나 찬란한가를 충분히 입증하고 떠나갔다.
#프리다칼로
5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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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nose

2012.05.20

코메디언은 진정한 슬픔을 겪은 사람만이 될 수 있다고 하던가. 저에게 있어 하루는 그저 오늘과 내일 사이의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드네요. 5분만에 한번씩 생을 바꿀 기회가 찾아온다. 그걸 잡기위해 해야할 일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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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ㅋ

2011.12.11

고통받지 않는 한 누구도 자기자신을 알지못하죠. 살아가는건 자체가 수행, 우리모두 고행자인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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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lovehea

2010.06.16

예전에 프로이트에 대해 배우다가 프리타 칼로에 관심이 생겨서 도서관에 있는 프리다 칼로 관련 서적을 모두 읽은 적이 있다. 프리다 칼로 때문에 미술에 관심이 생겨 미술 서적도 읽고.. 즐거웠었는데.. 갑자기 또 생각난다. 올해안에 그 때 읽었던 책들을 모두 소장해버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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