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는 담지 못했던 호주 워킹 홀리데이 이야기
결국 정든 카불쳐의 삶을 정리해야 될 때가 왔습니다. 호주에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왔던 베리와 줄리앙과 이별을 해야 할 순간이 온 것입니다.
2009.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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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는 좋은 곳입니다.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환경으로, 평생의 추억을 가지고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설렘을 가지고 호주로 떠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듭니다. 저 역시 그곳에서 추억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왜 저의 책에는 추억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아픈 이야기들만 있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물어봅니다. 호주에서 어떻게 이렇게 안 좋은 일만 겪을 수 있는지 말이죠. 물론 저에게도 좋은 추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책의 흐름상 생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의 지인 역시 떠나기 전의 저에게 안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들리지 않았고, ‘호주에 가면 너무 좋아요.’라는 90퍼센트의 말과 글에 현혹되어 워킹 홀리데이를 떠났습니다.
좋은 추억을 책 내용에 수록하고 싶었지만 싣지 않았습니다. 나쁜 이야기가 90퍼센트이고 좋은 이야기가 10퍼센트면 좋은 내용이 바로 저의 이야기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책에는 담지 못했던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외국인 쉐어 베리와의 마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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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불쳐. 브리즈번에서 북쪽으로 트레인으로만 한 시간을 가야 하는 곳. 7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제가 있게 된 곳입니다. 3대 도시 브리즈번에만 있어도 지루할 정도로 시간이 남았는데, 이곳은 정말 아무것도 할 것이 없었습니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그 시간을 잘 활용한다면 영어 공부를 하는 데 큰 기회가 될 수 있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새벽 청소는 밤 12시부터 아침 7시까지 하기에 오후 7시쯤에는 반드시 잠을 자야만 했습니다. 하루 일과는 12시에 일어나 카불쳐 매장으로 가서 7시까지 일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8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씻으면 아침 9시, 3시간 정도 자면 12시가 되었습니다. 점심을 먹은 다음 휴대용 DVD 플레이어로 영화를 한 편 보고, 『grammar in use』 책을 보는 것이 하루 일정이었습니다.
카불쳐에서 쉐어(집주인이 방을 빌려주고 주방 시설이나 취사도구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우리나라의 자취방 하숙과 비슷함)를 했지만 집주인인 베리와는 마주칠 일이 없었습니다. 그는 63세의 페인트공으로,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 6시가 조금 넘는 시간에 돌아오기 때문에 저와 마주칠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집에 항상 혼자 있거나 ‘스카이’라는 고양이와 노는 것이 저의 일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베리와 마주치는 것을 꺼렸습니다. 일반적으로 ‘외국인 쉐어’는 중국인이나 일본인, 즉 모국어가 영어가 아닌 나라의 사람들과 같이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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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근처 휴양지도 없고, 학교도 없는 관계로 오지인이 아닌 이상 이곳에 살 이유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브리즈번에서 트레인으로만 1시간 떨어진 지역이다 보니 더더욱 외국인이 있을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오지인과 같이 사니 자연스레 영어를 쓸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환상은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깨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홈스테이의 오지인이 아니었습니다. 즉 그들은 배려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홈스테이 주인들은 영어를 잘 못하는 학생을 많이 접하다 보니 느리게 말하는 법을 배웠지만, 이곳에 있는 오지인들이 영어를 못하는 동양인에게 느리게 말할 이유는 없었던 것입니다. 베리는 항상 말하지만 저는 못 알아듣고 “That's okay.” 정도의 대화에서 끝나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베리가 거실에 있거나 주말이라 쉴 경우는 그 자리를 피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베리가 굉장히 화가 나 있었습니다. 그는 잡아먹을 듯한 기세로 다가오더니 리모콘을 조작했냐고 물어봤습니다. 베리가 들어오기 전까지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기에 “YES.”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마치 범인을 잡았다는 듯이 저를 거실로 끌고 가 텔레비전이 안 나온다며 역정을 냈습니다.
그는 텔레비전 광이었습니다. 그에게 텔레비전은 인생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었기에 텔레비전이 안 나오자 흥분한 것입니다. 그는 제가 알아들을 정도의 욕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변명할 영어를 몰라 “I'm sorry.”라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텔레비전을 두들겨 보고 고치려고 노력했지만 먹통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화가 나서 리모컨을 던졌습니다. 저를 향해 던지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기분이 나빴습니다. 순간 ‘내가 이런 대접 받으면서 살아야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혹시 백호주의의 모습이 아닌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베리는 급기야 자신의 딸에게 전화하였고, 사위인 듯한 사람이 와서 리모컨 버튼을 조작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텔레비전이 멀쩡해졌습니다. 참으로 머쓱한 순간이었습니다. 베리 역시 자신이 너무 역정을 낸 것 같은지 미안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너무 화가 났습니다. 순간 욕이라도 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아버지 생각이 났습니다. 우리 아버지도 뭐가 잘 안 될 때 짜증내고 역정을 내셨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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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색한 기운이 흐르고 방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어떤 언어로든 지금의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했습니다.
“I'm sorry about that. So I'd like to treat you Korean foods.”
전자사전을 손에 든 채 천천히 베리에게 말했습니다. 사실 잘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하면 베리가 “아니다, 내 잘못이다.”라고 이야기할 것이라 생각했고, 그 계기로 한 걸음 다가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역시나 그는 자신이 미안했고, 음식을 대접해 주는 것에 대해 고맙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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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무언가를 정복한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영어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날 이후로 베리와 저는 나이와 국경을 초월한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한국 음식을 대접하고, 그가 집안일을 하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것이 우리나라의 예절이자 예의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길게 이야기하지는 못했지만 양손으로 전자사전을 두드리면서 한 단어 한 단어 그에게 말을 했습니다. 결국 그렇게 바라던 외국인 친구가 생긴 것입니다. 더군다나 베리의 집에는 또 다른 외국인 쉐어로 고등학교 역사 선생님인 줄리앙이 들어왔습니다. 그는 동양사에 관심이 많았고, 특히 한국 음식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저는 부족한 음식 솜씨였지만 우리나라 대표 음식 불고기를 그에게 선사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동안 즉석 짜장과 카레로 저녁을 차려 주었습니다. 결국 몇 번의 식사 대접이 있고 나서 그들은 자신의 호주 음식을 대접하겠다며 T-BONE 스테이크와 스파게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정말 감격이었습니다. 아웃백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먹는 스테이크와는 차원이 다른 맛이었습니다. 다른 것보다 그들에게 가족이라는 느낌으로 다가간 것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날 이후로 저는 3일에 한 번 꼴로 ?녁 식사를 차렸습니다. 하루는 베리 아저씨가, 다음날에는 제가, 그 다음날에는 줄리앙이 호주 음식을 번갈아가며 만들게 된 것입니다.
‘5년 후 내 자신에게 당당한 사람이 되자. 지금 이 순간이 힘들고 지치지만 추억이 될 수 있도록…….’ 잃어버린 초심도 서서히 되찾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렇게 카불쳐의 삶은 성공하는 듯 보였습니다.
베리와 줄리앙과의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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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심이 너무 상했습니다. 내가 왜 불법 이주노동자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해 화가 났습니다. 결국 모든 일을 관두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얼마 안 있어 저를 대신할 사람이 왔고, 인수인계를 한 뒤 집에만 있었습니다. 과외를 해 볼까 했지만 다시 연락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농장을 간다는 이유로 무기한 연기한 것이 벌써 3개월이 지났기 때문입니다.
결국 집에만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전 같지 않았습니다. 예전에는 일이 있었으므로 낮에 자고 오후에 DVD를 보며 지냈지만, 하루 종일 할 일이 없게 된 것입니다. 베리와 줄리앙과 이야기를 나눌 시간을 벌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들 역시 낮에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카불쳐에서 같이 동고동락한 동생 찬혁이와 같이 지낼 수도 없었습니다. 찬혁이는 이미 먼저 시티로 가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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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정든 카불쳐의 삶을 정리해야 될 때가 왔습니다. 나에게 항상 상처만 주었던 호주에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왔던 베리와 줄리앙. 카불쳐를 떠난다는 이야기는 그들과의 이별을 말했습니다. 그들에게 무언가를 남겨 주고 싶었습니다. 한국인 크리스 강태호라는 이름을 그들에게 각인시켜주고 싶었습니다. 그날 저는 그들에게 시중에서 판매하는 불고기 양념장이 아닌, 저의 정성이 담긴 한국 음식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들에게 해 주는 마지막 한국 음식이었습니다. 줄리앙은 매우 아쉬웠는지 자신이 즐겨 입는 청바지를 저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베리는 “Really?”를 연발하며 정말 가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베리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저는 마지막 저녁을 차려 주고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함께 찍은 사진을 넣은 액자와 편지를 베리와 줄리앙의 책상 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찬혁이가 자동차를 끌고 저를 데리러 왔습니다. 결국 에버튼 파크 숙소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찬혁이는 빨리 가자며 발길을 재촉했습니다. 그때 갑자기 베리가 다가왔습니다. 그는 상기된 채로 잘 가라며 안아 주었습니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정말 가기 싫었습니다. 호주에서 나를 그렇게 대접해 준 외국인은 베리가 유일무이했습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베리와 사진을 찍고 자동차 시동을 걸었습니다.
“형은 진짜 복 받은 사람이야.”
찬혁이 저를 부러워하며 말했습니다. 왈칵 눈물이 났습니다. ‘베리에게 무언가 더 해주고 싶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카불쳐가 추억 속에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그런데 저 멀리 베리가 보였습니다. 그는 계속 손을 흔들면서 우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었던 것입니다. 너무 감격했습니다. 아마 호주로 워킹 홀리데이를 갔던 어떤 이도 이런 경험은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 당시의 기억은 저에게 가장 큰 자랑거리입니다. 영어는 배우지 못하고 왔지만 당시의 일들은 저에게 가장 큰 추억인 것입니다.
베리에게 말했습니다. 꼭 성공해서 다시 오겠다고. 그리고 내가 책을 써서 당신에게 보여 줄 것이고, 당신은 나의 아버지라고 말이죠. 하지만 저는 한국으로 돌아와 그에게 연락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한국에서의 삶이 힘겨워서일까요? 아닙니다. 어쩌면 그 아름다웠던 추억도 저에게 있어 마이너스의 시간으로 자리 잡힌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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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를 배우기 위해 떠났던 워킹 홀리데이. 하지만 정작 영어는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시간만 낭비했다는 자괴감 때문에 그 당시를 기억하기 싫은지도 모르겠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항상 약을 드셨던 베리. 제가 주는 음식을 먹고 나면 어린아이같이 “원더풀~”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던 베리. 제가 타 준 커피를 좋아했던 베리. 그가 너무나 보고 싶습니다.
혹시 카불쳐로 가시는 분이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54281390으로 전화해서 안부를 물어봐 주세요. 한국의 크리스를 아느냐고 물으시면 그가 반갑게 맞이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하지 못한 말을 그에게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미안합니다.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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