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에게 청부살인을 시킨 흔비
흔비의 아들은 또한 왜 그렇게도 잔인했으며, 살인 후에 흔적을 지우거나 하지 않았을까.
2008.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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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비欣非는 형틀에 묶여 땅을 보고 엎드려 있었다. 눈에 망나니가 술을 뿜으며 칼춤을 추는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그녀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목을 고정시킨 대나무가 마치 칼날인 듯 선득선득하게 느껴졌다. 망나니는 시간을 끌었다. 한 번에 벨 것인지 여러 차례 내려칠 것인지 정하지 못한 몸짓이었다. 흔비는 한 번에 죽게 해달라고 속으로 빌었다. 목에 힘을 빼려고 했지만 자꾸 뻣뻣해졌다. 목이 돌처럼 단단해진 것 같았다.
망나니가 든 것은 23킬로그램이나 나가는 묵직한 칼이다. 이 칼로도 사람의 목이 단번에 잘려나가지는 않았다. 그래서 여러 명의 망나니가 돌아가면서 네댓 번 내려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면 죄수들은 괴로워서 발광하다가 죽어간다. 사형수를 둔 가족들은 망나니에게 돈을 쥐어주곤 했다. 고통 없이 끝내달라는 부탁이었다. 흔비는 그러지 못했다. 경황없이 끌려와서 이곳에 누웠다. 어서 끝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마지막 순간 머릿속으로 지난 세월이 흩어지듯 스쳐갔다. 그녀의 어머니는 첩이었다. 죽은 돈녕敦寧 이교李絞의 첩이었다. 이교는 왕실의 친척으로 살림은 넉넉했으나 고급 관료가 되지는 못했다. 이교는 딸이었던 흔비를 상당히 아꼈다. 흔비는 세상에 아쉬울 것이 없었지만 첩의 딸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흔비의 죽음 앞에 예를 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신을 찾아갈 사람도 없었다. 같은 시간 그녀의 유일한 혈육인 아들도 능지처참 당했기 때문이다. 능지처참은 모반대역죄나 친부모살인죄와 같은 최악의 반도덕범에만 적용하는 것이었다. 능지처참을 당한 죄인의 매장은 허용되지 않았다. 모자지간에 이렇게 동시에 잔인한 죽음을 당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만큼 흔비와 그의 아들은 잔인하게 범죄를 저질렀던 것이다.
흔비는 집안 좋은 남자를 만나 사랑받으며 살고 싶었다. 자신의 처지로는 양반이나 중인 이하의 첩이 되는 것이 가장 좋은 혼처였다. 빼어난 미모 덕분에 그녀는 참판을 지냈던 조효문曹孝門의 첩이 됐다. 조효문은 창녕현昌寧縣 사람으로 1444년(세종 26)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인재였다. 조선초기 과거 시험에 합격하는 연령은 대체로 30세 전후였다. 과거 시험은 사회적 지위와 경제력을 확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조효문은 앞길이 보장된 유능한 젊은이였다.
그는 과거에 합격한 그해 예문관 검열藝文官檢閱에 임명됐다. 그 후 자리를 여러 번 옮겨서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이 되었다가 세조가 즉위함에 따라 좌익공신左翼功臣에 올랐다. 좌익공신은 정난공신과 함께 세조의 왕위 쟁취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자들로 이른바 훈구세력의 핵심이었다. 조효문은 1455년(세조 1) 9월 5일에 책봉된 3등 좌익공신 44명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는 세조에게 지속적인 충성을 보내 사육신 사건 이후 재조정을 거쳐 책봉된 좌익공신에도 포함됐다.
조효문은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세조는 난신에 연좌된 부녀를 대신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는데, 이의산李義山의 딸 소사召史?막금莫今을 당시 경상도 관찰사였던 조효문에게 주었다. 1457년(세조 3) 6월 세조는 조효문이 손에 종기를 앓고 있다는 말을 듣고 내의內醫 평순平順에게 명해 역마로 급히 달려가 치료하게 할 정도로 사랑을 베풀었다.
흔비가 조효문을 만난 것은 그가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을 때였다. 남편의 사랑을 받았고 상당한 재산도 축적했다. 하지만 그녀를 늘 괴롭히는 것은 첩의 딸로 또다시 첩이 됐다는 사실이었다. 신분의 굴레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고려 말 사회 혼란기에 여러 처를 거느리는 풍조가 만연했고, 이것이 조선 초까지 이어졌다. 태종은 수직적 질서를 마련하기 위해 일부일처제에 입각한 서얼차대법을 실시했다. 처는 한 명만 둘 수 있었고, 나머지는 첩으로 간주했다. 대명률에 정처를 첩으로 삼으면 장 100대, 첩으로 정처를 삼으면 장 90대에 원래대로 환원, 처가 있는데도 처를 취하면 장 90대에 후처를 강제 이혼시키는 것으로 돼 있을 정도였다. 처와 첩의 위치는 분명한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같은 첩이라도 기생첩이나 계집종첩과 같은 천첩의 자손은 차별이 더 심했다.
첩의 자손들은 문무 양반 관료에 등용될 수 있는 과거 응시 자격을 법적으로 박탈당했다. 이따금 제한된 범위 안에서 등용된 예가 있긴 하다. 부친의 관직이 높고 낮음에 따라, 그리고 모친의 신분이 양인인가 천인인가에 따라 달랐다. 문무관 2품 이상인 자의 양첩良妾 자손은 관직을 정3품까지로 제한하고, 천첩 자손은 5품까지로 제한했다. 6품 이상인 자의 양첩 자손은 정4품까지, 천첩 자손은 정6품까지로 제한했다. 7품 이하 및 관직이 없는 사람의 양첩 자손을 정5품까지, 천첩 자손 및 천인으로서 양인이 된 자는 정7품까지, 양첩 아들의 천첩 자손은 정8품까지로 제한했다. 2품 이상 관원의 첩 자손은 사역원司譯院?관상감觀象監?전의감典醫監?내수사內需司?혜민서惠民署?도화서圖畵署?산학算學?율학律學 등의 기술직에 국한시켜 천대했다.
하지만 첩은 당시 사회가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전기 양반가의 처가살이 풍속 또한 남성들이 첩을 필요로 하게 만들었다. 양반 집안의 남성들은 일찍 장가들어 처가살이를 하면서 부부관계에서 안정을 누리지 못하고 자주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본가의 부모님을 뵈러 가는 일이 잦을 뿐만 아니라 과거 준비나 유학을 위해 집을 떠나 있는 기간이 많았다. 더욱이 관직에 종사하는 기간에 내?외직 이동이 잦았다. 잦은 정쟁으로 인한 귀양살이로 집을 떠나 있는 기간이 긴 경우도 있었다.
부인들은 친정 부모를 모시고 사는 입장에서 남편을 동행하며 뒷바라지할 수 없었다. 당연히 남자들은 빈 곳을 채워줄 누군가를 구하게 되었고, 신분이 낮고 가난한 여성들이 양반의 첩으로 들어가 남자의 시중을 들고 집안일을 돌보는 대가로 안정을 누릴 수 있었다. 첩에게는 토지와 노비를 분배해주기도 했다.
첩의 지위는 사회 신분에 따라 양민의 경우 양첩이 되며 천민의 경우 천첩이 되었다. 이러한 신분 구별은 자녀들에게까지 적용돼 양첩의 자손은 서자庶子이며 천첩의 자손은 얼자孼子로 구별돼 차별의 대상조차 다시 서열화됐다. 서얼들은 집안의 조상 제사에 참여할 수 없으며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조차 없었다. 물론 족보에도 오를 수 없는 사생아였다.
흔비는 첩의 소생으로 다시 첩이 된 천첩이었다. 신분 콤플렉스에 시달리던 흔비는 조그만 일에도 자주 격분하곤 했다. 그것은 요즘 말로 조울증에 가까웠다. 어떤 때는 굉장히 여유를 부리다가 어떤 때는 아무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노비를 혼내곤 했다. 이 때문에 집안 노비들은 자연히 흔비를 피해다녔다.
흔비는 조효문과의 사이에 아들 하나를 두었다. 그 아들 조진경曹晉卿이 집안의 계집종을 동대문 밖에서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유는 간단했다. 계집종이 말을 제대로 듣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조진경도 어린 시절 늘 우울하게 지냈다. 어머니가 첩으로서 날마다 아버지만 기다리며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것을 목격하곤 했기 때문이다. 그는 나름대로 문자에 노출되어 책도 읽었다. 그렇지만 천첩의 소생으로 사회활동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나마 남편인 조효문이 살아 있을 때는 본처나 그의 가족들로부터 큰 비난을 받지 않고 살 수 있었다. 그런데 1462년(세조 8) 10월 10일 조효문이 병으로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두 모자의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영감의 죽음과 뒤이은 재산상속 문제로 두 모자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이런 처지에 놓인 이들은 주변 사람들이 놀랄 만큼 작은 일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흔비와 조진경도 마찬가지였다. 남편의 죽음으로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치밀어오르는 분을 견딜 수가 없었다.
당시 흔비의 집에는 나이 지긋한 계집종 보로미甫老未가 있었다. 어느 날 남의 집 종살이를 하던 그녀의 자식이 병들어 죽었다는 전갈이 왔다. 실의에 빠진 보로미는 당연히 주인에게 며칠 휴가를 청했다. 그러나 흔비는 매정하게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나이가 많은 보로미가 요즘 들어 자신을 마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에 이 일을 기회로 삼아 길을 들이겠다는 심산이었다. 보로미 또한 어이가 없었다. 자식 잃은 부모 마음도 모르는 작살 맞을 년이라는 욕을 하고 다녔다. 천한 것이 가죽에 분칠을 해서 양반을 홀리고 이만큼 호강했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어디 재산까지 탐하냐며 쏟아냈다.
보로미는 그 길로 짐을 싸서 길을 나섰다. 흔비의 허락 없이 죽은 아들을 보러 나선 것이다. 이 같은 반항에는 영감 잃은 첩이 뭘 어쩌겠느냐는 심정도 한몫 작용했다.
당연히 이야기가 흔비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종에게 욕지거리를 당한 자칭 마님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손이 부들부들 떨렸고 거의 반 실성 상태로 돌입했다. 이 ‘사태’를 해결하지 못하면 모든 노비가 자신을 우습게 생각할 것 같았다. 그때 흔비에게 섬광처럼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 생각은 뱀의 혓바닥처럼 차갑고 짜릿짜릿하게 그녀의 뇌 속을 핥아댔다. 당시 보로미에게는 죽은 아들 말고 데리고 사는 작은아들이 있었다. 아직 열 살도 되지 않은 어린아이였다. 보로미는 집을 나서기 전 앞으로 벌어질 사태를 어느 정도 예상했다. 만약 흔비가 문제를 삼으면 죽은 조효문의 아들들을 부추겨서 첩의 자리에서 쫓아낼 요량이었다. 주인 잃은 첩의 신분은 그만큼 불안했다. 보로미는 흔비의 약점을 잘 꼬집고 모함하면 충분히 쫓아낼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흔비의 복수가 자신의 작은아들에게까지 미치는 잔혹한 것일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흔비는 아들 조진경을 조용히 불렀다. 조진경 또한 보로미가 명을 어기고 집을 나섰다는 말을 듣고 어머니가 무슨 말을 할지 예상은 하고 있었다. 어미가 입을 열었다.
“너와 네가 살 길이 무엇이더냐. 계집종 하나 다스리지 못하니 장차 이 집안에서 다리 한쪽을 제대로 펴겠느냐. 어찌 우리 모자의 우스운 꼴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느냐.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독하게 끊어내지 않으면 앞날이 없겠구나.”
아들이 보는 앞에서 보로미를 살해하라는 말이었다. 조진경은 놀랐지만 그 또한 끓는 피를 조절할 줄 모르는 못난 한량이었다. 그동안 보로미에게 알게 모르게 차별 대우를 받았던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가슴이 북받쳐왔다. 그런 그를 향해 어미는 서두르라고 재촉했다.
조진경은 평소 가깝게 부리던 노복奴僕 두어 명과 함께 말을 타고 보로미를 쫓았다. 노복들은 이 일이 마무리되면 반드시 한 재산 마련해주겠다고 구워삶았다. 보로미는 이런 상황도 모른 채 어떻게 흔비를 몰아낼 것인지를 궁리하며 가느라 채 동대문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멀리서 그녀의 뒷모습을 본 조진경 일당은 말의 보폭을 줄이면서 따라붙었다. 보로미가 동대문을 지날 때까지, 그리고 동대문 바깥 바위 구멍 사이에 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무서운 속도로 덮쳤다.
보로미는 정신이 없었다. 누가 부르는 것 같더니 주먹과 발길질이 날아왔고 그것이 흔비의 아들 조진경인 줄을 깨달았을 땐 이미 몸은 밧줄에 꽁꽁 묶였고 입 안엔 헝겊이 미어터질 정도로 틀어박혀 있었다. 조진경은 보로미 아들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채며 소리쳤다.
“내가 네 어미 죽이는 것을 봐라.”
아이가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다. 차마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조진경은 종 부황夫黃을 시켜 다듬이 방망이로 보로미의 머리를 치게 했는데 한 번에 죽지 않았다. 그러자 조진경이 직접 활을 쏘았다. 가까운 거리에서 한 번 쏘았고 그래도 죽지 않자 한 번 더 쏘았다. 보로미의 아들은 이미 혼절해 있었다.
승정원에 첩보가 날아들었다. 조진경이 보로미를 죽이는 장면을 보고 어떤 사람이 달려가 고한 것이다. 은밀하게 처리하라는 흔비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조진경은 주변을 세심하게 살피지 못했고, 결국 완전범죄는 무산됐다. 세조는 크게 노해 군사를 내어 흔비와 조진경을 잡아들였다. 왕이 직접 비현합丕顯閤에 나아가 국문하니 그 서슬에 조진경과 흔비는 그대로 이실직고했다.
세조는 살인자들을 의금부에 투옥시키고 신하들에게 큰소리로 입을 열었다.
“살리고 죽이고 주고 빼앗고 하는 것은 홀로 한 사람에게서만 나오는데, 조진경이 마음대로 계집종을 죽였으니 잔인하고 포악하기가 이보다 더 심할 수 없다. 그 어미라는 자는 아들이 사람을 죽이도록 사주하였으니 인륜의 무너짐이 이보다 더하겠는가?”
대신들은 입을 모아 “마땅히 극형에 처해야 합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런데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노사신이었다. 그는 “주인이 마음대로 노비를 처치했다고 죽음으로 죄를 묻는다는 조문이 없습니다. 만일 죽이면 노비로서 주인을 배반하는 자가 모두 구실로 삼을 것입니다”라며 극형을 면제해줄 것을 청했다. 한 여자가 아들이 보는 앞에서 아무 죄 없이 몽둥이와 화살에 맞아 끔찍하게 죽었는데도 그는 조선의 수직적인 질서가 붕괴되는 것을 염려하고 있었다. 세조는 그의 말을 무시했다. 의금부의 판결은 이러했다.
“조진경 모자가 사람을 도성 밑에서 죽이고는 조금도 숨기거나 덮는 것이 없이 흉기를 버젓이 버려두었으며 심지어는 자식을 증인 세우고 어미를 죽였으니, 고금에 이보다 극악스러운 일이 없다. 조진경은 능지처참하고 그 어미 흔비는 참형한다. 아울러 가산을 적몰하라. 또한 종 부황은 장 100대에 유 3000리로 하고 속을 받은 뒤에 제주 관노에 영속하고, 따라 다니며 금하지 않고 하수한 종 금음진今音進?길생吉生은 장 100대에 유 3000리로 하고 속을 받은 뒤에 각각 사는 읍의 종으로 속하게 하라.”
흔비는 왜 그랬을까? 꽉 짜인 신분질서 속에서 위태롭게 서 있던 첩이라는 위치가 그렇게 고통스러웠을까. 흔비의 아들은 또한 왜 그렇게도 잔인했으며, 살인 후에 흔적을 지우거나 하지 않았을까. 보로미와 흔비 모자지간에 기록되어 남지 않은 보다 깊은 원한은 어느 정도로 깊었던 것일까. 흔비의 시신은 아무도 찾아가지 않았다.
망나니가 든 것은 23킬로그램이나 나가는 묵직한 칼이다. 이 칼로도 사람의 목이 단번에 잘려나가지는 않았다. 그래서 여러 명의 망나니가 돌아가면서 네댓 번 내려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면 죄수들은 괴로워서 발광하다가 죽어간다. 사형수를 둔 가족들은 망나니에게 돈을 쥐어주곤 했다. 고통 없이 끝내달라는 부탁이었다. 흔비는 그러지 못했다. 경황없이 끌려와서 이곳에 누웠다. 어서 끝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마지막 순간 머릿속으로 지난 세월이 흩어지듯 스쳐갔다. 그녀의 어머니는 첩이었다. 죽은 돈녕敦寧 이교李絞의 첩이었다. 이교는 왕실의 친척으로 살림은 넉넉했으나 고급 관료가 되지는 못했다. 이교는 딸이었던 흔비를 상당히 아꼈다. 흔비는 세상에 아쉬울 것이 없었지만 첩의 딸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흔비의 죽음 앞에 예를 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신을 찾아갈 사람도 없었다. 같은 시간 그녀의 유일한 혈육인 아들도 능지처참 당했기 때문이다. 능지처참은 모반대역죄나 친부모살인죄와 같은 최악의 반도덕범에만 적용하는 것이었다. 능지처참을 당한 죄인의 매장은 허용되지 않았다. 모자지간에 이렇게 동시에 잔인한 죽음을 당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만큼 흔비와 그의 아들은 잔인하게 범죄를 저질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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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비는 집안 좋은 남자를 만나 사랑받으며 살고 싶었다. 자신의 처지로는 양반이나 중인 이하의 첩이 되는 것이 가장 좋은 혼처였다. 빼어난 미모 덕분에 그녀는 참판을 지냈던 조효문曹孝門의 첩이 됐다. 조효문은 창녕현昌寧縣 사람으로 1444년(세종 26)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인재였다. 조선초기 과거 시험에 합격하는 연령은 대체로 30세 전후였다. 과거 시험은 사회적 지위와 경제력을 확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조효문은 앞길이 보장된 유능한 젊은이였다.
그는 과거에 합격한 그해 예문관 검열藝文官檢閱에 임명됐다. 그 후 자리를 여러 번 옮겨서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이 되었다가 세조가 즉위함에 따라 좌익공신左翼功臣에 올랐다. 좌익공신은 정난공신과 함께 세조의 왕위 쟁취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자들로 이른바 훈구세력의 핵심이었다. 조효문은 1455년(세조 1) 9월 5일에 책봉된 3등 좌익공신 44명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는 세조에게 지속적인 충성을 보내 사육신 사건 이후 재조정을 거쳐 책봉된 좌익공신에도 포함됐다.
조효문은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세조는 난신에 연좌된 부녀를 대신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는데, 이의산李義山의 딸 소사召史?막금莫今을 당시 경상도 관찰사였던 조효문에게 주었다. 1457년(세조 3) 6월 세조는 조효문이 손에 종기를 앓고 있다는 말을 듣고 내의內醫 평순平順에게 명해 역마로 급히 달려가 치료하게 할 정도로 사랑을 베풀었다.
흔비가 조효문을 만난 것은 그가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을 때였다. 남편의 사랑을 받았고 상당한 재산도 축적했다. 하지만 그녀를 늘 괴롭히는 것은 첩의 딸로 또다시 첩이 됐다는 사실이었다. 신분의 굴레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고려 말 사회 혼란기에 여러 처를 거느리는 풍조가 만연했고, 이것이 조선 초까지 이어졌다. 태종은 수직적 질서를 마련하기 위해 일부일처제에 입각한 서얼차대법을 실시했다. 처는 한 명만 둘 수 있었고, 나머지는 첩으로 간주했다. 대명률에 정처를 첩으로 삼으면 장 100대, 첩으로 정처를 삼으면 장 90대에 원래대로 환원, 처가 있는데도 처를 취하면 장 90대에 후처를 강제 이혼시키는 것으로 돼 있을 정도였다. 처와 첩의 위치는 분명한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같은 첩이라도 기생첩이나 계집종첩과 같은 천첩의 자손은 차별이 더 심했다.
첩의 자손들은 문무 양반 관료에 등용될 수 있는 과거 응시 자격을 법적으로 박탈당했다. 이따금 제한된 범위 안에서 등용된 예가 있긴 하다. 부친의 관직이 높고 낮음에 따라, 그리고 모친의 신분이 양인인가 천인인가에 따라 달랐다. 문무관 2품 이상인 자의 양첩良妾 자손은 관직을 정3품까지로 제한하고, 천첩 자손은 5품까지로 제한했다. 6품 이상인 자의 양첩 자손은 정4품까지, 천첩 자손은 정6품까지로 제한했다. 7품 이하 및 관직이 없는 사람의 양첩 자손을 정5품까지, 천첩 자손 및 천인으로서 양인이 된 자는 정7품까지, 양첩 아들의 천첩 자손은 정8품까지로 제한했다. 2품 이상 관원의 첩 자손은 사역원司譯院?관상감觀象監?전의감典醫監?내수사內需司?혜민서惠民署?도화서圖畵署?산학算學?율학律學 등의 기술직에 국한시켜 천대했다.
하지만 첩은 당시 사회가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전기 양반가의 처가살이 풍속 또한 남성들이 첩을 필요로 하게 만들었다. 양반 집안의 남성들은 일찍 장가들어 처가살이를 하면서 부부관계에서 안정을 누리지 못하고 자주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본가의 부모님을 뵈러 가는 일이 잦을 뿐만 아니라 과거 준비나 유학을 위해 집을 떠나 있는 기간이 많았다. 더욱이 관직에 종사하는 기간에 내?외직 이동이 잦았다. 잦은 정쟁으로 인한 귀양살이로 집을 떠나 있는 기간이 긴 경우도 있었다.
부인들은 친정 부모를 모시고 사는 입장에서 남편을 동행하며 뒷바라지할 수 없었다. 당연히 남자들은 빈 곳을 채워줄 누군가를 구하게 되었고, 신분이 낮고 가난한 여성들이 양반의 첩으로 들어가 남자의 시중을 들고 집안일을 돌보는 대가로 안정을 누릴 수 있었다. 첩에게는 토지와 노비를 분배해주기도 했다.
첩의 지위는 사회 신분에 따라 양민의 경우 양첩이 되며 천민의 경우 천첩이 되었다. 이러한 신분 구별은 자녀들에게까지 적용돼 양첩의 자손은 서자庶子이며 천첩의 자손은 얼자孼子로 구별돼 차별의 대상조차 다시 서열화됐다. 서얼들은 집안의 조상 제사에 참여할 수 없으며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조차 없었다. 물론 족보에도 오를 수 없는 사생아였다.
흔비는 첩의 소생으로 다시 첩이 된 천첩이었다. 신분 콤플렉스에 시달리던 흔비는 조그만 일에도 자주 격분하곤 했다. 그것은 요즘 말로 조울증에 가까웠다. 어떤 때는 굉장히 여유를 부리다가 어떤 때는 아무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노비를 혼내곤 했다. 이 때문에 집안 노비들은 자연히 흔비를 피해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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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비는 조효문과의 사이에 아들 하나를 두었다. 그 아들 조진경曹晉卿이 집안의 계집종을 동대문 밖에서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유는 간단했다. 계집종이 말을 제대로 듣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조진경도 어린 시절 늘 우울하게 지냈다. 어머니가 첩으로서 날마다 아버지만 기다리며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것을 목격하곤 했기 때문이다. 그는 나름대로 문자에 노출되어 책도 읽었다. 그렇지만 천첩의 소생으로 사회활동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나마 남편인 조효문이 살아 있을 때는 본처나 그의 가족들로부터 큰 비난을 받지 않고 살 수 있었다. 그런데 1462년(세조 8) 10월 10일 조효문이 병으로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두 모자의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영감의 죽음과 뒤이은 재산상속 문제로 두 모자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이런 처지에 놓인 이들은 주변 사람들이 놀랄 만큼 작은 일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흔비와 조진경도 마찬가지였다. 남편의 죽음으로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치밀어오르는 분을 견딜 수가 없었다.
당시 흔비의 집에는 나이 지긋한 계집종 보로미甫老未가 있었다. 어느 날 남의 집 종살이를 하던 그녀의 자식이 병들어 죽었다는 전갈이 왔다. 실의에 빠진 보로미는 당연히 주인에게 며칠 휴가를 청했다. 그러나 흔비는 매정하게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나이가 많은 보로미가 요즘 들어 자신을 마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에 이 일을 기회로 삼아 길을 들이겠다는 심산이었다. 보로미 또한 어이가 없었다. 자식 잃은 부모 마음도 모르는 작살 맞을 년이라는 욕을 하고 다녔다. 천한 것이 가죽에 분칠을 해서 양반을 홀리고 이만큼 호강했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어디 재산까지 탐하냐며 쏟아냈다.
보로미는 그 길로 짐을 싸서 길을 나섰다. 흔비의 허락 없이 죽은 아들을 보러 나선 것이다. 이 같은 반항에는 영감 잃은 첩이 뭘 어쩌겠느냐는 심정도 한몫 작용했다.
당연히 이야기가 흔비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종에게 욕지거리를 당한 자칭 마님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손이 부들부들 떨렸고 거의 반 실성 상태로 돌입했다. 이 ‘사태’를 해결하지 못하면 모든 노비가 자신을 우습게 생각할 것 같았다. 그때 흔비에게 섬광처럼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 생각은 뱀의 혓바닥처럼 차갑고 짜릿짜릿하게 그녀의 뇌 속을 핥아댔다. 당시 보로미에게는 죽은 아들 말고 데리고 사는 작은아들이 있었다. 아직 열 살도 되지 않은 어린아이였다. 보로미는 집을 나서기 전 앞으로 벌어질 사태를 어느 정도 예상했다. 만약 흔비가 문제를 삼으면 죽은 조효문의 아들들을 부추겨서 첩의 자리에서 쫓아낼 요량이었다. 주인 잃은 첩의 신분은 그만큼 불안했다. 보로미는 흔비의 약점을 잘 꼬집고 모함하면 충분히 쫓아낼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흔비의 복수가 자신의 작은아들에게까지 미치는 잔혹한 것일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흔비는 아들 조진경을 조용히 불렀다. 조진경 또한 보로미가 명을 어기고 집을 나섰다는 말을 듣고 어머니가 무슨 말을 할지 예상은 하고 있었다. 어미가 입을 열었다.
“너와 네가 살 길이 무엇이더냐. 계집종 하나 다스리지 못하니 장차 이 집안에서 다리 한쪽을 제대로 펴겠느냐. 어찌 우리 모자의 우스운 꼴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느냐.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독하게 끊어내지 않으면 앞날이 없겠구나.”
아들이 보는 앞에서 보로미를 살해하라는 말이었다. 조진경은 놀랐지만 그 또한 끓는 피를 조절할 줄 모르는 못난 한량이었다. 그동안 보로미에게 알게 모르게 차별 대우를 받았던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가슴이 북받쳐왔다. 그런 그를 향해 어미는 서두르라고 재촉했다.
조진경은 평소 가깝게 부리던 노복奴僕 두어 명과 함께 말을 타고 보로미를 쫓았다. 노복들은 이 일이 마무리되면 반드시 한 재산 마련해주겠다고 구워삶았다. 보로미는 이런 상황도 모른 채 어떻게 흔비를 몰아낼 것인지를 궁리하며 가느라 채 동대문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멀리서 그녀의 뒷모습을 본 조진경 일당은 말의 보폭을 줄이면서 따라붙었다. 보로미가 동대문을 지날 때까지, 그리고 동대문 바깥 바위 구멍 사이에 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무서운 속도로 덮쳤다.
보로미는 정신이 없었다. 누가 부르는 것 같더니 주먹과 발길질이 날아왔고 그것이 흔비의 아들 조진경인 줄을 깨달았을 땐 이미 몸은 밧줄에 꽁꽁 묶였고 입 안엔 헝겊이 미어터질 정도로 틀어박혀 있었다. 조진경은 보로미 아들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채며 소리쳤다.
“내가 네 어미 죽이는 것을 봐라.”
아이가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다. 차마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조진경은 종 부황夫黃을 시켜 다듬이 방망이로 보로미의 머리를 치게 했는데 한 번에 죽지 않았다. 그러자 조진경이 직접 활을 쏘았다. 가까운 거리에서 한 번 쏘았고 그래도 죽지 않자 한 번 더 쏘았다. 보로미의 아들은 이미 혼절해 있었다.
승정원에 첩보가 날아들었다. 조진경이 보로미를 죽이는 장면을 보고 어떤 사람이 달려가 고한 것이다. 은밀하게 처리하라는 흔비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조진경은 주변을 세심하게 살피지 못했고, 결국 완전범죄는 무산됐다. 세조는 크게 노해 군사를 내어 흔비와 조진경을 잡아들였다. 왕이 직접 비현합丕顯閤에 나아가 국문하니 그 서슬에 조진경과 흔비는 그대로 이실직고했다.
세조는 살인자들을 의금부에 투옥시키고 신하들에게 큰소리로 입을 열었다.
“살리고 죽이고 주고 빼앗고 하는 것은 홀로 한 사람에게서만 나오는데, 조진경이 마음대로 계집종을 죽였으니 잔인하고 포악하기가 이보다 더 심할 수 없다. 그 어미라는 자는 아들이 사람을 죽이도록 사주하였으니 인륜의 무너짐이 이보다 더하겠는가?”
대신들은 입을 모아 “마땅히 극형에 처해야 합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런데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노사신이었다. 그는 “주인이 마음대로 노비를 처치했다고 죽음으로 죄를 묻는다는 조문이 없습니다. 만일 죽이면 노비로서 주인을 배반하는 자가 모두 구실로 삼을 것입니다”라며 극형을 면제해줄 것을 청했다. 한 여자가 아들이 보는 앞에서 아무 죄 없이 몽둥이와 화살에 맞아 끔찍하게 죽었는데도 그는 조선의 수직적인 질서가 붕괴되는 것을 염려하고 있었다. 세조는 그의 말을 무시했다. 의금부의 판결은 이러했다.
“조진경 모자가 사람을 도성 밑에서 죽이고는 조금도 숨기거나 덮는 것이 없이 흉기를 버젓이 버려두었으며 심지어는 자식을 증인 세우고 어미를 죽였으니, 고금에 이보다 극악스러운 일이 없다. 조진경은 능지처참하고 그 어미 흔비는 참형한다. 아울러 가산을 적몰하라. 또한 종 부황은 장 100대에 유 3000리로 하고 속을 받은 뒤에 제주 관노에 영속하고, 따라 다니며 금하지 않고 하수한 종 금음진今音進?길생吉生은 장 100대에 유 3000리로 하고 속을 받은 뒤에 각각 사는 읍의 종으로 속하게 하라.”
흔비는 왜 그랬을까? 꽉 짜인 신분질서 속에서 위태롭게 서 있던 첩이라는 위치가 그렇게 고통스러웠을까. 흔비의 아들은 또한 왜 그렇게도 잔인했으며, 살인 후에 흔적을 지우거나 하지 않았을까. 보로미와 흔비 모자지간에 기록되어 남지 않은 보다 깊은 원한은 어느 정도로 깊었던 것일까. 흔비의 시신은 아무도 찾아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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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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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Mr. Lee)
2008.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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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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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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