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아지랑이, 달빛, 처마 끝에 걸린 초승달, 푸른 안개, 내 머리를 흔드는 바람, 그리고 당신. 하느님은 가장 아름다운 것들은 손으로 잡을 수 없게 만드셨다. - 박광수, 『광수 광수씨 광수놈』
몽골인 바짜라칵은 썩 부지런한 초원의 유목민에다가 책임감 강한 가장, 그리고 여행자의 자상한 친구다. 그는 울란바타르에서 의사 일을 하는 어머니와 트럭을 운전하는 아버지, 그리고 바로 이웃하여 함께 유목 일을 하는 남동생 내외와 살고 있다. 아내 오통토구스와 7년 전 결혼해 여섯 살짜리 큰아들 투무르바투르와 다섯 살짜리 계집아이, 세 살짜리 사내아이 등 세 아이를 키우고 있는 서른 살 사내다. 그가 보여준 빛바랜 사진에서는 칭기즈칸의 후예다운 늠름한 소년과 인민군 부대에서 근무하던 매서운 눈매의 청년 바짜라칵을 만날 수 있었다. 말이 통하지 않던 유목민 사내에게 갖은 방법으로 알아낸 정보가 맞다면 말이다.
바짜라칵을 처음 만난 곳은 울란바타르에서 차로 두 시간쯤 걸리는 테를지 인근 ‘거북바위’에서였다. 몽골행 비행기에서 만난 교민 박 선생님을 통해 한 몽골인을 알게 되었고 그를 통해 관광지의 숙박시설이 아닌 보통 몽골 토착민들이 사는 몽골식 텐트 ‘게르’에서 며칠 묵고 싶다는 소원이 받아들여져 우여곡절 끝에 만나게 된 것이 바짜라칵과 그의 가족이었던 셈이다.
바짜라칵은 처음부터 무척 친절했지만 한눈에 보기에는 마음을 놓을 만한 인상이 아니었다. 평상시에도 웃통을 벗고 지내는 이 사내는 골리앗처럼 우람하고 커다란 덩치의 사내였다. 거친 초원과 노동이 단련시키고 만들어낸 다부지고 위협적인 체격이라고나 할까. 망망한 초원 위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한 채의 움막집 게르, 거기에 덩치가 산山만 한 이 몽골인 사내를 순순히 믿을 수 있을까? 혼자인 여행자에게 두려움이 찾아드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의심 많던 여행자는 바짜라칵의 거듭되는 순수함과 친절함을 만날 때마다 자꾸만 부끄러워져야 했다. 차를 대접받고 빵을 대접받고 몽골의 음료인 수태차를 대접받았다. 저녁 무렵에는 곤하게 낮잠을 자는 나그네를 깨워 함께 말을 타자 했고 그 말을 몰고 초원에 흩어져 있던 바짜라칵 소유의 야크와 소들을 몰고 들어오는 진귀한 경험을 선사해줬다. 양쪽에서 그와 내가 말을 타고 한 무리의 야크떼를 몰고 들어오던 초원의 저녁, 그 귓가로 <아웃 오브 아프리카>나 엔니오 모리코네의 영화음악 같은 배경음악이 환청처럼 들려왔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 저녁은 내가 맞은 생애 최고의 저녁 중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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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을 따라오지 말고 동생들과 함께 게르에 남아 있으라는 아빠의 말에도 아랑곳없이 바짜라칵의 큰아들 투무르바투르는 나그네의 뒤를 언제나 졸졸 따라다녔다. 수줍은 소년에게 사진을 몇 컷 찍어주자 투무르바투르는 이내 낯선 여행자에게 친근하게 다가왔다. 가이드를 한다기보다는 그 자신이 즐기는 산책이라 할 만한 걸음걸이로 초원과 자작나무 숲, 눈과 얼음이 녹지 않은 숲의 응달, 천둥으로 인해 생겼다는 10여 미터 깊이의 물웅덩이, 그리고 화산에서 튀어나와 생긴 투명한 돌을 주워 나그네에게 주었다.
그렇게 큰아이 투무르바투르와 두어 시간 산과 들을 산책하고 그의 오두막에 당도했다. 오두막 한쪽 가축우리엔 야크와 양, 염소 따위를 키웠다. 오두막에선 투무르바투르의 동생인 다섯 살 여자애와 세 살 사내아이가 뛰어놀고 있었다. 낯선 나그네를 짐짓 경계하던 아이들도 이젠 제법 친해져 차츰 만만하게 보기 시작했다. 나그네를 보자마자 덥석 안기거나 손을 잡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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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짜라칵이 막내 사내아이에게 뭐라 주문하자 꼬마 녀석이 갑자기 험상궂은 얼굴을 하더니 ‘으아~!’ 하는 괴성과 함께 두 팔을 번쩍 들고 배를 홀쭉하게 하더니 허리를 굽혔다. 그러고는 나그네를 향해 무섭게 돌진해왔다. 나그네는 당황했지만 일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바짜라칵이 하는 말에서 나는 ‘몽골 스모’라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한낮에 게르 안에서 TV를 통해 스모 비슷한 몽골의 씨름을 본 적이 있었다. 세계 어느 나라나 아이들이 TV를 흉내 내는 건 비슷비슷한 모양이다.
밤은 더디게 찾아왔다. 몽골의 오뉴월은 바야흐로 백야의 계절로 접어들어 밤 10시에도 주변이 환했다. 초원의 밤은 아름다웠다. 군대를 제대한 이래 본 적이 없는 별똥별들의 아스라한 추락과 캄캄한 밤하늘에 넘쳐흐르던 은하수의 은빛 물결, 그리고 교교한 손톱 모양의 초승달이 초원 뒤편 산등성이에 그림처럼 걸려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워우우~’ 하는 늑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흔히 들었던, 꼭 그런 종류의 늑대 울음이었다.
나그네에게 씨름 선수처럼 돌진해오던 막내가 나그네의 무릎을 베고 맥없이 잠들어버렸다. 마침내 가축을 손질하던 작업을 마친 바짜라칵 부부가 아이를 안고 자신들의 게르로 향할 때 눈에 졸음이 가득한 투무르바투르와 계집아이가 나그네의 손을 양쪽에서 꼭 잡았다.
오뉴월 시베리아의 대지 위에 지천으로 핀 꽃처럼, 밤하늘을 새까맣게 채운 별처럼 그들은 아름답게 반짝이는 초원의 아이들이다.
녀석들이 부러웠다. 바깥세상의 눈으로 보기에 가진 것 없고 궁핍해 보이는 아이들이지만 녀석들은 세상 누구보다 아름답고 황홀한 많은 것을 가까이에 소유하고 있었다. 과연 누가 소중한 것을 많이 갖고 있는 이들인가? 과연 누가 진정 부유하고 넉넉한 이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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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