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노마 필드는 공연히 목소리를 높이는 지식인이 아니다. 그녀는 진짜 ‘과격’하고, ‘불온’한 인물이다. 노마 필드의 비판적 인식은 매우 예리하다. 본질을 짚는다.
2008.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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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리뷰 대상으로 국내저자는 어찌 그리 인색하냐는 질문을 몇 번 받았다. 국내저자를 기피하는 까닭은 기획리뷰가 ‘외국사상가의 번역서 리뷰’에서 출발한 점이 가장 크다. 여기에다 국내저자는 이름이 높을수록 신뢰하지 않아서다.
‘수전 손택 이후 미국 최고의 지성’이라는 노마 필드(Norma Field, 1947- )의 표현을 빌리면, “제아무리 깊은 학식과 풍요로운 교양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사상과 행동의 도덕성까지 보증해 주지는 않는다.” 또한 “어제 오늘의 ‘사건’을 추적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매스컴의 책임 역시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우리 언론의 인물 관련 보도와 인물평은 믿을 게 못 된다. 자사(自社)의 이해관계에 따라 뻥튀기하기 일쑤여서다. 언론사의 이익과 맞서는 인물은 아예 무시하는 전략을 취한다. 어느 언론사든 예외가 없다. 언론의 전반적인 보도 내용 또한 마찬가지다. 자사의 생존과 이익을 최우선으로 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두 번째 ‘도발’을 앞두고 불붙은 전 지구적인 반전 열기를 국내 언론을 통해 접하기란 참으로 막막한 일이다. 하물며 시장경제학파의 총본산 격인 경제학부가 있는 미 시카고대학의 반전을 주제로 한 ‘학내토론회’ 열기가 외신으로라도 전해지길 바라는 건 무리다.
『교양, 모든 것의 시작』(서경식?가토 슈이치 공저, 이목 옮김, 노마드북스, 2007)에 실려 있는 노마 필드의 강연 글 「전쟁과 교양」은 분량이 짧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노마 필드가 서경식 선생의 강연 제의를 수락하는 계기부터 그러한데, 애초에 그녀는 서경식 선생이 기획한 <‘교양’의 재생을 위하여>라는 일본 도쿄케이자이대학 특별강연회에 응할 뜻이 없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무력감 속에서 인문교양의 중요성을 호소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도 부질없고 위선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경식 선생이 불쑥 던진 ‘도발적인 발언’에 낚이고 만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미국 ‘교양교육(liberal arts education)’의 실패를 의미하는 게 아닐까요?” 노마 필드는 지금, 뭘 위해 인문교양을 활성화해야 하는지 묻고 답한다.
“당연히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의미 있는 삶을 보낼 수 있는 그런 사회건설이 목표이며, 그것이 바로 교양 본연의 의미가 될 것이다. 또 그런 이상적인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전쟁을 막아야 하고 그 다음으로 기아와 빈곤을 퇴치해야만 한다. 물론 그런 지상과제를 완수할 수 있다고는 어느 누구도 장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이상에 대한 집념을 창출하는 것이 교양 본래의 역할이다.”
노마 필드는 정의의 도래를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된 오늘의 현실에 회의를 품기도 한다. “정의의 편린조차도 경험한 적이 없는 우리로서는 그것을 바랄 최소한의 힘마저도 상실해가고 있는 건 아닐까.” 회의는 짧을수록 좋다. 노마 필드는 ‘정의의 도래를 향한 상상력’에 기대를 건다.
“정의라는 추상적인, 또 공허하게 변해가는 개념을 상상력은 몸과 마음으로 감지하게끔 만들어준다. 그런 감성적이며 열정적인 희원에서 세상에 작용과 반작용을 가하는 상상력과 행동이 비로소 탄생하는 것이다.”
정의를 바라는 자에게 무력감은 경계대상 1호다. 무력감, 다시 말해 일본 작가 사타 이네코가 말한 ‘잿빛 현실’은 우리 몸과 마음을 갉아먹는다. 퇴폐의 온상이다. “이상의 추구를 일시적으로라도 단념하는 행위 자체가 퇴폐를 불러 온다”는 사타 이네코의 지적은 정말이지 핵심을 찌른다.
교양의 일환으로서 비판적 인식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상을 정확히 포착하는 능력이다.” “불평등의 수많은 폐해들 가운데 하나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상상력의 결핍이다. 내 자신과 동떨어져 있으면 타인의 고통을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 타자의 새로운 쓰임새를 안다. “(‘타자’란 양심적인 사람이 비판을 전제로 사용하는 말이다)”
노마 필드는 일본의 경제적 풍요가 만들어낸 매력적인 현상 가운데 하나로 행락이 아닌, 젊은이들의 제3세계 여행을 든다. “예컨대 대학생이 캄보디아로 가서 난민의 실태를 체험한다.” 노마 필드는 그런 젊은이들에게 성원을 보내면서도 자신과 좀 더 가까이 있는 타자와의 만남은 과연 가능할는지 따져 본다.
“가령 일본 도시의 노숙자들과 젊은이들의 ‘교류’가 가능한 일일까? 자신과 똑같은 사회의 성원으로서, 일단 똑같은 언어로 말하고, 용모나 자태도 별반 다르지 않은 인간의 비참함, 그 노숙자들의 초라한 모습을 볼 때마다 우리는 어떤 저항감 같은 걸 품지 않을까? 그 저항감의 배후에는 언젠가 나도 저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일종의 공포심이 도사리고 있지 않을까? 해외의 ‘타자’는 이 같은 공포심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다.”
노마 필드는 공연히 목소리를 높이는 지식인이 아니다. 그녀는 진짜 ‘과격’하고, ‘불온’한 인물이다. 노마 필드의 비판적 인식은 매우 예리하다. 본질을 짚는다. 안온한 중산층의 안이한 의식을 질타한다. 또 비판대상에서 그녀 자신도 예외일 수 없다.
“하지만 ‘걱정이 없다’는 것 역시 일종의 허상이며 거짓말일 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걱정이 무용하다 할지라도 늘 불안에 쫓기고 시달리면서 늘 좀 더 빨리, 더 근사하게, 조금 더 많이 무언가를 소유하지 못하면 이 사회에서 낙오되는 건 아닐까 불안해하며 초조한 날들을 보내는 것이 중산계급의 잿빛 현실은 아닐까? 그러한 옹색한 생활에 매달리는 것 자체가 얼마나 우리의 사고를 정지시켜 왔던가.
이제 곧 지천명(知天命)이 될 나로서도, 지금의 생활을 잃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내 생활이 위협받지 않으면서 어떻게든 근본적인 변혁에 참가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공허한 바람을 간직해 왔다. 하지만 이런 마음가짐으로는 ‘정의의 기적적 도래’에 아무런 상상력도 작동하지 않는다 해도 무리는 아니다.”
노마 필드의 강연 글 「전쟁과 교양」은 내게 반성과 새 다짐의 계기가 되었다. 먼저 반성이다. 나는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을 불가항력이라 생각하고, 한반도 긴장완화를 약간이라도 덜 수 있다는 점을 파병이 가져다주는 긍정적 효과로 여긴 것에 대해 깊이 반성한다. 나의 안전을 도모하고자 먼 나라 분쟁에 개입하는 행위가 몹시 나쁘다는 단순한 이치를 이제야 깨닫는다.
“지금의 현실에서 정말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나쁜지 근본적인 성찰을 게을리해왔음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마 필드는 일본을 예로 들고 있으나, 우리 역시 “국민 모두가 복지를 국가의 혜택이 아니라 개인의 권리로 인식하고 끝까지 철저하게 지켜내려는 용의, 교양이 필요할 것이다.” 아니, 우리는 아직은 지켜낼 게 별로 없다.
따라서 “경제적 혼란과 불평등을 핑계로 삼아서는 결코 회복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표현은 이렇게 바꿔야 한다. 성장논리와 무한경쟁구조에 짓눌려선 결코 쟁취할 수 없을 것이다. “누가 뭐라 하건 어떻게 해서든 정치 쪽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지난 대선을 마지막으로 선거에 참여하지 않으려던 생각을 바꾼다.
“민주주의란 한번 확보하고 나면 영원히 지속되는 존재가 아니라 영구혁명을 필요로 하는 제도요 사상이며,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서라도 상상력을 해방시켜 인문교양의 재생을 도모해야만 한다.”
현재로선 『죽어가는 천황의 나라에서』(박이엽 옮김, 창작과비평사, 1995)가 노마 필드의 우리말로 번역된 하나뿐인 저서다. 나는 《동아대학보》 1998년 3월 16일자에 실린 일본 관련서의 새로운 흐름을 짚은 「‘인상기’ 차원 넘는 냉정한 시각들」이라는 글에서 이 책을 거론하며 ‘숨은 보석’이라는 표현을 썼다. 이 책은 지금도 숨은 보석이다.
누가 일본사회를 이해하는 데 어떤 책이 좋겠느냐 물어온다면 서슴없이 이 책을 추천하겠다. 저자의 관점부터 책의 내용, 그리고 번역에 이르기까지 나무랄 데가 없다. 노마 필드는 일본인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일본계 미국인이다. 그녀의 중간적인 입장은 편견을 배제한다.
이 책에는 세 사람의 일본인이 등장한다. 오키나와의 슈퍼마켓 주인과 야마구치에 사는 평범한 가정주부, 그리고 나가사키의 시장이 그들이다. 그들은 일본 사회의 주류적인 시각에 반기를 들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슈퍼 주인은 일장기를 불태웠고, 주부는 자위대원으로 순직한 남편의 신사봉헌을 거부했으며, 시장은 시의회에서 천황의 전쟁책임론을 주장했다. 그 결과 이들에게는 엄청난 ‘이지메’가 가해진다. 특히 모토시마 히토시 나가사키 시장은 우익단원의 총격을 받아 폐 관통상을 입는다.
물론 악랄한 비난만 있진 않았다. ‘창조적 소수’에게 응원군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시장에게 보낸 편지를 엮은 책이 그 증거다. 비논리적인 비판보다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위로와 지지가 압도적이다. 노마 필드는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세 사람의 삶과 힘겨운 싸움을 실감나게 묘사했고, 유려한 번역은 읽는 맛과 재미를 배가한다.
앞으로는 어떤 주제를 다룬 책들을 모아 테마 리뷰를 이따금 시도할 생각이다.
‘수전 손택 이후 미국 최고의 지성’이라는 노마 필드(Norma Field, 1947- )의 표현을 빌리면, “제아무리 깊은 학식과 풍요로운 교양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사상과 행동의 도덕성까지 보증해 주지는 않는다.” 또한 “어제 오늘의 ‘사건’을 추적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매스컴의 책임 역시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우리 언론의 인물 관련 보도와 인물평은 믿을 게 못 된다. 자사(自社)의 이해관계에 따라 뻥튀기하기 일쑤여서다. 언론사의 이익과 맞서는 인물은 아예 무시하는 전략을 취한다. 어느 언론사든 예외가 없다. 언론의 전반적인 보도 내용 또한 마찬가지다. 자사의 생존과 이익을 최우선으로 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두 번째 ‘도발’을 앞두고 불붙은 전 지구적인 반전 열기를 국내 언론을 통해 접하기란 참으로 막막한 일이다. 하물며 시장경제학파의 총본산 격인 경제학부가 있는 미 시카고대학의 반전을 주제로 한 ‘학내토론회’ 열기가 외신으로라도 전해지길 바라는 건 무리다.
『교양, 모든 것의 시작』(서경식?가토 슈이치 공저, 이목 옮김, 노마드북스, 2007)에 실려 있는 노마 필드의 강연 글 「전쟁과 교양」은 분량이 짧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노마 필드가 서경식 선생의 강연 제의를 수락하는 계기부터 그러한데, 애초에 그녀는 서경식 선생이 기획한 <‘교양’의 재생을 위하여>라는 일본 도쿄케이자이대학 특별강연회에 응할 뜻이 없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무력감 속에서 인문교양의 중요성을 호소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도 부질없고 위선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경식 선생이 불쑥 던진 ‘도발적인 발언’에 낚이고 만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미국 ‘교양교육(liberal arts education)’의 실패를 의미하는 게 아닐까요?” 노마 필드는 지금, 뭘 위해 인문교양을 활성화해야 하는지 묻고 답한다.
“당연히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의미 있는 삶을 보낼 수 있는 그런 사회건설이 목표이며, 그것이 바로 교양 본연의 의미가 될 것이다. 또 그런 이상적인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전쟁을 막아야 하고 그 다음으로 기아와 빈곤을 퇴치해야만 한다. 물론 그런 지상과제를 완수할 수 있다고는 어느 누구도 장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이상에 대한 집념을 창출하는 것이 교양 본래의 역할이다.”
노마 필드는 정의의 도래를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된 오늘의 현실에 회의를 품기도 한다. “정의의 편린조차도 경험한 적이 없는 우리로서는 그것을 바랄 최소한의 힘마저도 상실해가고 있는 건 아닐까.” 회의는 짧을수록 좋다. 노마 필드는 ‘정의의 도래를 향한 상상력’에 기대를 건다.
“정의라는 추상적인, 또 공허하게 변해가는 개념을 상상력은 몸과 마음으로 감지하게끔 만들어준다. 그런 감성적이며 열정적인 희원에서 세상에 작용과 반작용을 가하는 상상력과 행동이 비로소 탄생하는 것이다.”
정의를 바라는 자에게 무력감은 경계대상 1호다. 무력감, 다시 말해 일본 작가 사타 이네코가 말한 ‘잿빛 현실’은 우리 몸과 마음을 갉아먹는다. 퇴폐의 온상이다. “이상의 추구를 일시적으로라도 단념하는 행위 자체가 퇴폐를 불러 온다”는 사타 이네코의 지적은 정말이지 핵심을 찌른다.
교양의 일환으로서 비판적 인식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상을 정확히 포착하는 능력이다.” “불평등의 수많은 폐해들 가운데 하나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상상력의 결핍이다. 내 자신과 동떨어져 있으면 타인의 고통을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 타자의 새로운 쓰임새를 안다. “(‘타자’란 양심적인 사람이 비판을 전제로 사용하는 말이다)”
“가령 일본 도시의 노숙자들과 젊은이들의 ‘교류’가 가능한 일일까? 자신과 똑같은 사회의 성원으로서, 일단 똑같은 언어로 말하고, 용모나 자태도 별반 다르지 않은 인간의 비참함, 그 노숙자들의 초라한 모습을 볼 때마다 우리는 어떤 저항감 같은 걸 품지 않을까? 그 저항감의 배후에는 언젠가 나도 저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일종의 공포심이 도사리고 있지 않을까? 해외의 ‘타자’는 이 같은 공포심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다.”
노마 필드는 공연히 목소리를 높이는 지식인이 아니다. 그녀는 진짜 ‘과격’하고, ‘불온’한 인물이다. 노마 필드의 비판적 인식은 매우 예리하다. 본질을 짚는다. 안온한 중산층의 안이한 의식을 질타한다. 또 비판대상에서 그녀 자신도 예외일 수 없다.
“하지만 ‘걱정이 없다’는 것 역시 일종의 허상이며 거짓말일 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걱정이 무용하다 할지라도 늘 불안에 쫓기고 시달리면서 늘 좀 더 빨리, 더 근사하게, 조금 더 많이 무언가를 소유하지 못하면 이 사회에서 낙오되는 건 아닐까 불안해하며 초조한 날들을 보내는 것이 중산계급의 잿빛 현실은 아닐까? 그러한 옹색한 생활에 매달리는 것 자체가 얼마나 우리의 사고를 정지시켜 왔던가.
이제 곧 지천명(知天命)이 될 나로서도, 지금의 생활을 잃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내 생활이 위협받지 않으면서 어떻게든 근본적인 변혁에 참가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공허한 바람을 간직해 왔다. 하지만 이런 마음가짐으로는 ‘정의의 기적적 도래’에 아무런 상상력도 작동하지 않는다 해도 무리는 아니다.”
노마 필드의 강연 글 「전쟁과 교양」은 내게 반성과 새 다짐의 계기가 되었다. 먼저 반성이다. 나는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을 불가항력이라 생각하고, 한반도 긴장완화를 약간이라도 덜 수 있다는 점을 파병이 가져다주는 긍정적 효과로 여긴 것에 대해 깊이 반성한다. 나의 안전을 도모하고자 먼 나라 분쟁에 개입하는 행위가 몹시 나쁘다는 단순한 이치를 이제야 깨닫는다.
“지금의 현실에서 정말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나쁜지 근본적인 성찰을 게을리해왔음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마 필드는 일본을 예로 들고 있으나, 우리 역시 “국민 모두가 복지를 국가의 혜택이 아니라 개인의 권리로 인식하고 끝까지 철저하게 지켜내려는 용의, 교양이 필요할 것이다.” 아니, 우리는 아직은 지켜낼 게 별로 없다.
따라서 “경제적 혼란과 불평등을 핑계로 삼아서는 결코 회복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표현은 이렇게 바꿔야 한다. 성장논리와 무한경쟁구조에 짓눌려선 결코 쟁취할 수 없을 것이다. “누가 뭐라 하건 어떻게 해서든 정치 쪽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지난 대선을 마지막으로 선거에 참여하지 않으려던 생각을 바꾼다.
“민주주의란 한번 확보하고 나면 영원히 지속되는 존재가 아니라 영구혁명을 필요로 하는 제도요 사상이며,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서라도 상상력을 해방시켜 인문교양의 재생을 도모해야만 한다.”
현재로선 『죽어가는 천황의 나라에서』(박이엽 옮김, 창작과비평사, 1995)가 노마 필드의 우리말로 번역된 하나뿐인 저서다. 나는 《동아대학보》 1998년 3월 16일자에 실린 일본 관련서의 새로운 흐름을 짚은 「‘인상기’ 차원 넘는 냉정한 시각들」이라는 글에서 이 책을 거론하며 ‘숨은 보석’이라는 표현을 썼다. 이 책은 지금도 숨은 보석이다.
누가 일본사회를 이해하는 데 어떤 책이 좋겠느냐 물어온다면 서슴없이 이 책을 추천하겠다. 저자의 관점부터 책의 내용, 그리고 번역에 이르기까지 나무랄 데가 없다. 노마 필드는 일본인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일본계 미국인이다. 그녀의 중간적인 입장은 편견을 배제한다.
이 책에는 세 사람의 일본인이 등장한다. 오키나와의 슈퍼마켓 주인과 야마구치에 사는 평범한 가정주부, 그리고 나가사키의 시장이 그들이다. 그들은 일본 사회의 주류적인 시각에 반기를 들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슈퍼 주인은 일장기를 불태웠고, 주부는 자위대원으로 순직한 남편의 신사봉헌을 거부했으며, 시장은 시의회에서 천황의 전쟁책임론을 주장했다. 그 결과 이들에게는 엄청난 ‘이지메’가 가해진다. 특히 모토시마 히토시 나가사키 시장은 우익단원의 총격을 받아 폐 관통상을 입는다.
물론 악랄한 비난만 있진 않았다. ‘창조적 소수’에게 응원군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시장에게 보낸 편지를 엮은 책이 그 증거다. 비논리적인 비판보다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위로와 지지가 압도적이다. 노마 필드는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세 사람의 삶과 힘겨운 싸움을 실감나게 묘사했고, 유려한 번역은 읽는 맛과 재미를 배가한다.
앞으로는 어떤 주제를 다룬 책들을 모아 테마 리뷰를 이따금 시도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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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일
2008.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