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고통과 눈물의 시기를 거치면서 사랑한다
괴기하고도 끔찍한 일을 다루는 이 소설의 목소리가 이 곡처럼 경쾌하고도 즐겁기만 한 까닭은 역시 ‘우리’가 고통과 눈물의 시기를 거치지만, 한편으로는 사랑도 하고 즐겁기도 한 평범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리라.
2007.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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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번 자매들은 열세 살(서실리아), 열네 살(럭스), 열다섯 살(보니), 열여섯 살(메리), 그리고 열일곱 살(터리즈)이었다. 그 애들은 키가 작았고, 청바지를 입으면 엉덩이가 불록 튀어나왔으며, 동그스름한 뺨은 마치 등[背]처럼 보드라웠다. 지나가다 그 애들을 한 번씩 훔쳐볼 때면, 마치 우리가 그동안 베일 쓴 여자들만 봐 온 것처럼 그 애들이 정숙하지 못하게 맨얼굴을 드러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1970년대 미국 디트로이트 시 외곽의 어느 소도시에 살던 리즈번 가 다섯 딸의 연령대와 생김새는 위와 같았다. 연년생 딸들을 뒀을 뿐, 여느 미국의 중산층 가정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리즈번 가가 ‘우리’라고 말하는 동네 10대 남자 아이들의 관심의 대상이 된 건 그 소녀들이 엄마와 달리 너무나 예뻤기 때문만은 아니다. 1년여에 걸쳐서 도저히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그 집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시작은 열세 살 밖에 안 된 막내 서실리아가 했다. 그리고 마지막은 메리였다. 서실리아는 스토아 철학자처럼 목욕을 하다가 손목을 그었고(이 첫 시도는 실패했고, 좀 더 극적인 두 번째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메리는 터리즈처럼 수면제를 삼켰다. 제목에서 이미 짐작할 수 있다시피 제프리 유제니디스의 데뷔작 『처녀들, 자살하다』의 내용은 리즈번 가의 다섯 자매들이 어떻게, 또 왜 자살해야만 했는가를 회상한다.
자매들은 왜 자살했는가?
소설 속의 화자인 ‘우리’는 자매들이 왜 자살해야만 했는가를 알아내기 위해서 관련자들의 증언과 증거자료를 수집한다. ‘우리’는 서실리아가 죽은 뒤, 리즈번 씨를 위로하기 위해서 찾아가 얘기를 나눈 바 있는 무디 신부님이나 인터뷰를 거부하는 리즈번 부부를 찾아간다. 심지어 ‘우리’ 중 한 명인 빈스 푸질리는 리즈번 가에 식료품을 배달하던 트럭에 올라타 주문 목록을 슬쩍 해오기도 한다. 거기에는 크로거 밀가루 2킬로짜리 1봉지, 카네이션 가루우유 4리터짜리 5통, 화이트 클라우드 휴지 18롤 등의 주문목록이 적혀 있었다.
‘우리’는 갖은 노력을 다해서 자매들의 자살의 원인을 해명할 수 있는 증거물을 모았는데, 그 숫자는 제1호부터 제97호에 이른다. ‘우리’가 잘리지 않고 살아남은 나무들 중 한 그루에 마련한 오두막집에 모아둔 그 증거물들은 이 책을 쓸 당시 다음과 같은 상태였다.
(제18호) 메리의 오래된 화장품은 수분이 다 날아가서 베이지색 가루가 되었다.
(제32호) 발목까지 올라오는 서실리아의 캔버스 운동화는 칫솔과 주방용 세제로는 어찌할 수 없는 누런색으로 변했다.
(제57호) 보니의 봉헌 초들은 밤마다 쥐들이 갉아 먹는다.
(제81호) 럭스의 브래지어(피터 심슨이 십자가에 걸려 있던 것을 훔쳐 왔음을 이제야 인정하는 바다.)
내가 보기에 이 목록은 시구에 가깝다. 결국 ‘우리’가 알아낸 그 자살의 비밀에 대해서는 스포일러에 해당하니까 여기서는 말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 비밀이라는 건 1970년대 디트로이트 인근의 소도시에서 10대를 보낸 사내들, 하지만 이제는 어른이 되어버린 ‘우리’가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문장으로 이 책을 끝내는 것과 그 비밀은 관련이 있다.
중요한 것은 오직 우리가 그들을 사랑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부르는 소리를 과거에도 듣지 못했고 지금도 듣지 못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 나무 위 집에서, 가늘어져 가는 머리카락과 출렁거리는 뱃살을 하고, 그들이 영원히 혼자 있기 위해 간 방, 홀로 죽음보다 더 깊은 자살을 한 곳, 퍼즐을 완성할 수 있는 조각들을 영원히 찾아낼 수 없을 그 곳에서 나오라고 그들을 부르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그런데, 왜 ‘우리’인가?
리즈번 가에 들어갈 수 있었던 녀석인 피터 심슨(결국 그때 럭스의 브래지어를 훔쳤다는 사실이 밝혀진다)의 말에 따르면, 저녁을 먹는 동안 여자애들이 사방에서 발길질을 해대는 통에 누구 짓인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런 발랄한 아이들에 비해서 리즈번 부인은 젊었을 때 혹시 예뻤던 흔적이 남았는가 싶어서 유심히 살펴보지만, 뒤룩뒤룩 살진 팔뚝과 인정사정없이 잘라낸 철심 같은 머리카락, 도서관 사서 같은 안경 때문에 늘 ‘우리’를 좌절시킨다.
리즈번 부인은 일요일마다 세 장의 앨범을 지겹도록 틀어대는데, 그건 “우리가 모타운 방송국에서 로큰롤 방송국으로 라디오 주파수를 바꿀 때마다 항상 중간에 스쳐 지나가는 음악이고, 어두운 세상의 한 줄기 빛이자 완전히 개똥 같은 음악”, 즉 가스펠이다. 사건은 괴기하고도 음울한데도 ‘우리’가 말하는 방식은 늘 이런 식으로 경쾌하다. 이 때문에 이 소설은 죽음을 다룰 때도 유쾌하게 읽힌다. 다 읽고 나면 ‘우리’가 지금은 중년 남성들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그런 사실은 자주 잊혀진다. 이 소설에서 ‘우리’는 십대 소년들일 확률이 높다. 예컨대 이 소설의 클라이막스 부분이 있다. ‘우리’는 집안에 갇혀 지내는 자매들을 구출하기 위해 자동차를 하나 마련해서 서로의 의사를 타진해본다. 전화를 걸어서 서로 들려주는 노래로.
리즈번 자매들 ‘또다시, 당연히, 혼자Alone Again, Naturally’, 길버트 오설리번
우리 ‘너에겐 친구가 있어You've Got a Friend’, 제임스 테일러
리즈번 자매들 ‘아이들은 어디서 놀지요?Where Do the Children Play?’, 캣 스티븐스
우리 ‘친애하는 소심한 씨Dear Prudence’, 더 비틀스
리즈번 자매들 ‘바람 속의 촛불Candle in the Wind’, 앨튼 존
우리 ‘야생마들Wild Horses’, 더 롤링 스톤스
리즈번 자매들 ‘열일곱 살에At Seventeen’, 재니스 이언
그 시절의 사운드트랙들. 소설에도 나오듯이 “지금도 쇼핑센터 같은 곳에서 우연히 들을 때면 발길을 멈추고 잃어버린 시간을 되돌아보게 하는 노래”들이다. 쇼핑센터의 고객들은 결코 ‘우리’가 될 수 없다. 어쩌면 리즈번 가의 자매들이 차례로 자살하면서 ‘우리’라는 것도 사라진 것일지 모른다. 중년의 사내들이 오래 전 기이한 자살 사건에 대한 기억을 서로 대조하고 증거물들을 다시 뒤져본 뒤, 글을 쓰면서 ‘우리’라고 한 까닭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시간은 흐르고 흐른다. 아이들은 어른이 된다. 우리는 내가 된다. 이제는 더 이상 옆집 소녀의 생리 주기에 대해서 관심을 둘 만한 나이가 아니다. 그런 시절은 이제 사라졌다. 중국의 피아니스트인 린하이가 발견한 비파의 소리처럼. 몇 년 전 린하이는 중국 남부의 수상도시 주장을 방문했다가 비파라는 악기를 발견하고, 그 소리에 푹 빠져 <비파 이미지>라는 앨범을 발표했다. 그 앨범의 세 번째 곡은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노래’다. 이 곡에다가 린하이는 다음과 같은 글을 덧붙였다.
우리는 평범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고통과 눈물의 시기를 거쳐 왔다. 하지만 우리는 평범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사랑도 했고, 즐겁기도 했다.
괴기하고도 끔찍한 일을 다루는 이 소설의 목소리가 이 곡처럼 경쾌하고도 즐겁기만 한 까닭은 역시 ‘우리’가 고통과 눈물의 시기를 거치지만, 한편으로는 사랑도 하고 즐겁기도 한 평범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리라.
※ 운영자가 알립니다
<김연수의 文音親交 프로젝트> 연재를 시작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1970년대 미국 디트로이트 시 외곽의 어느 소도시에 살던 리즈번 가 다섯 딸의 연령대와 생김새는 위와 같았다. 연년생 딸들을 뒀을 뿐, 여느 미국의 중산층 가정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리즈번 가가 ‘우리’라고 말하는 동네 10대 남자 아이들의 관심의 대상이 된 건 그 소녀들이 엄마와 달리 너무나 예뻤기 때문만은 아니다. 1년여에 걸쳐서 도저히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그 집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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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열세 살 밖에 안 된 막내 서실리아가 했다. 그리고 마지막은 메리였다. 서실리아는 스토아 철학자처럼 목욕을 하다가 손목을 그었고(이 첫 시도는 실패했고, 좀 더 극적인 두 번째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메리는 터리즈처럼 수면제를 삼켰다. 제목에서 이미 짐작할 수 있다시피 제프리 유제니디스의 데뷔작 『처녀들, 자살하다』의 내용은 리즈번 가의 다섯 자매들이 어떻게, 또 왜 자살해야만 했는가를 회상한다.
자매들은 왜 자살했는가?
소설 속의 화자인 ‘우리’는 자매들이 왜 자살해야만 했는가를 알아내기 위해서 관련자들의 증언과 증거자료를 수집한다. ‘우리’는 서실리아가 죽은 뒤, 리즈번 씨를 위로하기 위해서 찾아가 얘기를 나눈 바 있는 무디 신부님이나 인터뷰를 거부하는 리즈번 부부를 찾아간다. 심지어 ‘우리’ 중 한 명인 빈스 푸질리는 리즈번 가에 식료품을 배달하던 트럭에 올라타 주문 목록을 슬쩍 해오기도 한다. 거기에는 크로거 밀가루 2킬로짜리 1봉지, 카네이션 가루우유 4리터짜리 5통, 화이트 클라우드 휴지 18롤 등의 주문목록이 적혀 있었다.
‘우리’는 갖은 노력을 다해서 자매들의 자살의 원인을 해명할 수 있는 증거물을 모았는데, 그 숫자는 제1호부터 제97호에 이른다. ‘우리’가 잘리지 않고 살아남은 나무들 중 한 그루에 마련한 오두막집에 모아둔 그 증거물들은 이 책을 쓸 당시 다음과 같은 상태였다.
(제18호) 메리의 오래된 화장품은 수분이 다 날아가서 베이지색 가루가 되었다.
(제32호) 발목까지 올라오는 서실리아의 캔버스 운동화는 칫솔과 주방용 세제로는 어찌할 수 없는 누런색으로 변했다.
(제57호) 보니의 봉헌 초들은 밤마다 쥐들이 갉아 먹는다.
(제81호) 럭스의 브래지어(피터 심슨이 십자가에 걸려 있던 것을 훔쳐 왔음을 이제야 인정하는 바다.)
내가 보기에 이 목록은 시구에 가깝다. 결국 ‘우리’가 알아낸 그 자살의 비밀에 대해서는 스포일러에 해당하니까 여기서는 말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 비밀이라는 건 1970년대 디트로이트 인근의 소도시에서 10대를 보낸 사내들, 하지만 이제는 어른이 되어버린 ‘우리’가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문장으로 이 책을 끝내는 것과 그 비밀은 관련이 있다.
중요한 것은 오직 우리가 그들을 사랑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부르는 소리를 과거에도 듣지 못했고 지금도 듣지 못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 나무 위 집에서, 가늘어져 가는 머리카락과 출렁거리는 뱃살을 하고, 그들이 영원히 혼자 있기 위해 간 방, 홀로 죽음보다 더 깊은 자살을 한 곳, 퍼즐을 완성할 수 있는 조각들을 영원히 찾아낼 수 없을 그 곳에서 나오라고 그들을 부르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그런데, 왜 ‘우리’인가?
리즈번 가에 들어갈 수 있었던 녀석인 피터 심슨(결국 그때 럭스의 브래지어를 훔쳤다는 사실이 밝혀진다)의 말에 따르면, 저녁을 먹는 동안 여자애들이 사방에서 발길질을 해대는 통에 누구 짓인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런 발랄한 아이들에 비해서 리즈번 부인은 젊었을 때 혹시 예뻤던 흔적이 남았는가 싶어서 유심히 살펴보지만, 뒤룩뒤룩 살진 팔뚝과 인정사정없이 잘라낸 철심 같은 머리카락, 도서관 사서 같은 안경 때문에 늘 ‘우리’를 좌절시킨다.
리즈번 부인은 일요일마다 세 장의 앨범을 지겹도록 틀어대는데, 그건 “우리가 모타운 방송국에서 로큰롤 방송국으로 라디오 주파수를 바꿀 때마다 항상 중간에 스쳐 지나가는 음악이고, 어두운 세상의 한 줄기 빛이자 완전히 개똥 같은 음악”, 즉 가스펠이다. 사건은 괴기하고도 음울한데도 ‘우리’가 말하는 방식은 늘 이런 식으로 경쾌하다. 이 때문에 이 소설은 죽음을 다룰 때도 유쾌하게 읽힌다. 다 읽고 나면 ‘우리’가 지금은 중년 남성들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그런 사실은 자주 잊혀진다. 이 소설에서 ‘우리’는 십대 소년들일 확률이 높다. 예컨대 이 소설의 클라이막스 부분이 있다. ‘우리’는 집안에 갇혀 지내는 자매들을 구출하기 위해 자동차를 하나 마련해서 서로의 의사를 타진해본다. 전화를 걸어서 서로 들려주는 노래로.
리즈번 자매들 ‘또다시, 당연히, 혼자Alone Again, Naturally’, 길버트 오설리번
우리 ‘너에겐 친구가 있어You've Got a Friend’, 제임스 테일러
리즈번 자매들 ‘아이들은 어디서 놀지요?Where Do the Children Play?’, 캣 스티븐스
우리 ‘친애하는 소심한 씨Dear Prudence’, 더 비틀스
리즈번 자매들 ‘바람 속의 촛불Candle in the Wind’, 앨튼 존
우리 ‘야생마들Wild Horses’, 더 롤링 스톤스
리즈번 자매들 ‘열일곱 살에At Seventeen’, 재니스 이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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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의 사운드트랙들. 소설에도 나오듯이 “지금도 쇼핑센터 같은 곳에서 우연히 들을 때면 발길을 멈추고 잃어버린 시간을 되돌아보게 하는 노래”들이다. 쇼핑센터의 고객들은 결코 ‘우리’가 될 수 없다. 어쩌면 리즈번 가의 자매들이 차례로 자살하면서 ‘우리’라는 것도 사라진 것일지 모른다. 중년의 사내들이 오래 전 기이한 자살 사건에 대한 기억을 서로 대조하고 증거물들을 다시 뒤져본 뒤, 글을 쓰면서 ‘우리’라고 한 까닭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시간은 흐르고 흐른다. 아이들은 어른이 된다. 우리는 내가 된다. 이제는 더 이상 옆집 소녀의 생리 주기에 대해서 관심을 둘 만한 나이가 아니다. 그런 시절은 이제 사라졌다. 중국의 피아니스트인 린하이가 발견한 비파의 소리처럼. 몇 년 전 린하이는 중국 남부의 수상도시 주장을 방문했다가 비파라는 악기를 발견하고, 그 소리에 푹 빠져 <비파 이미지>라는 앨범을 발표했다. 그 앨범의 세 번째 곡은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노래’다. 이 곡에다가 린하이는 다음과 같은 글을 덧붙였다.
우리는 평범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고통과 눈물의 시기를 거쳐 왔다. 하지만 우리는 평범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사랑도 했고, 즐겁기도 했다.
괴기하고도 끔찍한 일을 다루는 이 소설의 목소리가 이 곡처럼 경쾌하고도 즐겁기만 한 까닭은 역시 ‘우리’가 고통과 눈물의 시기를 거치지만, 한편으로는 사랑도 하고 즐겁기도 한 평범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리라.
※ 운영자가 알립니다
<김연수의 文音親交 프로젝트> 연재를 시작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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