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책』은 작가로서의 목소리를 찾은 책 - 2006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르한 파묵 터키 현지 인터뷰
현재 오르한 파묵은 ‘터키군의 아르메니아인 학살’ 사건에 대하여 비판적인 발언을 했다가 이슬람 민족주의자들의 끊임없는 살해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신변의 위협을 받는 상황과는 다르게 시종일관 여유 있고 재치 있는 모습으로 인터뷰에 응해주었다.
2007.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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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수상 이후 국내 최초로 성사한 오르한 파묵의 인터뷰는 실로 급작스럽게 이루어졌다. 현재 오르한 파묵은 ‘터키군의 아르메니아인 학살 사건’에 대해 비판적인 발언을 하여 이슬람 민족주의자들의 끊임없는 살해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오르한 파묵은 터키 국내 일정을 숨기고, 집 주변에는 정부 요원들이 24시간 경비를 서며 사전에 약속한 사람이 아니면 잘 만나지 않으려 하는 등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르한 파묵은 신변의 위협을 받는 상황과는 다르게 시종일관 여유 있고 재치 있는 모습으로 인터뷰에 응해주었다. 오르한 파묵의 생생한 인터뷰를 만나보자.
노벨상 이후 터키 이스탄불에서 외국 언론과 인터뷰했는가?
많이 만났다. 그러나 나를 만나고 싶어 한 사람이 너무 많아서 1% 정도밖에 만나지 못했다. 영국이나 미국 등 전 세계에서 여러 사람들이 책을 출판한 회사를 통해서 나를 만나려고 했지만 답을 해줄 시간조차 없었다. 내 책은 51개 국어로 번역됐다. 영국과 미국에선 수천 명의 기자가 나를 만나고 싶어 했다. 여기까지 와 주어서 고맙다. 한국의 학교에서 내 책을 교재로 쓴다는 소식을 듣고 자부심을 느끼고 아주 기쁘다. 이난아 씨에게도 감사를 표한다. 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내 책이 번역돼 읽힌다. 한국에서는 이난아 씨를 통해서 읽히게 되었는데, 그는 터키 문학을 가장 잘 아는 한국 학자다.
집필실로 오면서 보니 보안이 철저했다.
흐란트 기독교신문 기자가 살해당하고 나서 경찰이 지키고 있다. 나뿐만 아니다. 터키 헌법 301조에 따라, 사상의 자유를 위협받는 사람들은 터키 정부가 지키고 있다. 이렇게 지키는 것은 내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이야기를 하라는 것이다. 내 생각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경찰이 나를 지키는 것이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이후 어디서 어떻게 뭐하면서 생활했는가?
작년 10월 노벨상이 결정됐고 그때 콜롬비아대학 문학 교환교수로 있었다. 노벨 문학상을 받고 12월에 터키로 귀국했다. 그러다 신문기자가 죽고 나서 위협하는 사람이 많아서 2월 초에 미국으로 갔고 유럽에도 자주 다녔다. 정치적인 억압을 상당히 많이 받는 상황이다. 죽음의 위협도 받고 있다. 터키에만 있는 게 아니고 자주 왔다 갔다 한다. 여행 중에는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
노벨 문학상이 그간 화제에서 멀어져 왔었는데 당신의 『내 이름은 빨강』은 오랜만에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한국에서도 노벨 문학상 소식 이후 10만 부가 팔려서 오랜만에 노벨상 특수가 재현됐다. 노벨상의 대중성, 화제성을 다시 복원한 계기가 된 것이다. 노벨 문학상이 그간 일반인의 문학적 취향에서 멀어졌다고 생각하는가?
스위스, 이탈리아, 라틴아메리카에서도 같은 질문을 했다. 노벨 문학상을 받고 나서 책이 가장 많이 팔린 작가라고 들었다. 터키에서도 다른 사람 책은 안 팔리는데 내 책은 잘 팔린다고 한다. 그것은 ‘남자가 왜 미인을 좋아하는가?’와 비슷한 질문과 같다. 언론에서 작품에 대해 많이 질문하면 할수록 책이 많이 팔린다.(웃음) 왜일까? 책이 읽혀서 그럴 것이다. 한국은 정치적인 질문을 많이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유럽공동체에서는 터키 상황을 알아보려고 정치적인 질문을 많이 했다. 다른 나라에서 제일 많이 읽히는 책은 『눈』이지만 한국에서는 『내 이름은 빨강』이 더 많이 읽힌다. 『내 이름은 빨강』이 화가, 그림과 관련한 소설이라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한다.
한국에도 유력한 노벨 문학상 후보가 있다. 누군지 아는가? 한국이 노벨 문학상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한국 문학을 거의 몰라서 언급하기 어렵다. 다만 고은 시인에 대해서는 들었다. 내가 그림도 그려 주었다. 내가 노벨 문학상을 받으려고 한 일은 없다. 지금까지 수상자들도 노벨 문학상을 받으려고 무슨 일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작가가 내면의 세계를 표현하려고 한 것이 노벨상을 받게 된 게 아닐까 생각한다.
『검은 책』『하얀 성』『내 이름은 빨강』은 색깔 3부작으로 불린다. 왜 작품의 제목이나 소설의 중요한 이미지로 색깔을 사용하는가?
이슬람 예술에는 컬러 상징주의가 있다. 그러나 나는 색을 많이 사용하는 편은 아니고, 색깔을 상징적으로 사용한 것도 아니다. 『이스탄불』이라는 책에서 설명했듯 스무 살 때까지 화가가 되고 싶어 했다. 상상력 속에는 저장된 것이 있다. 세상을 하나의 색깔로 보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세상을 극장으로 보았다. 이야기를 쓸 때 작가마다 경향이 다르다. 나보코프, 톨스토이는 주로 장면이나 모습을 설명하려고 애썼다. 반면 나는 그림을 그리듯 설명하는 것이다. 내가 젊었을 때부터 화가가 되고자 했던 이유다.
어째서 소설의 제목이 ‘검은 책’인가?
『검은 책』은 내가 작가로서 목소리를 찾은 책이고, 내가 가장 가깝게 느끼는 책이다. 내가 살았던 이스탄불을 설명하는 책이다. 나는 1985년에 미국 뉴욕에 있었는데 터키인으로서, 동양인으로서 내 정체성에 혼란을 느꼈다. 내가 누구인가. 유럽의 문학을 모방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뉴욕에 있을 때 내 정체성에 대해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던 것이다. 내 문화가 무엇이고 터키 문화가 세계 문화 속에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고민했다. 미국에 있을 때 이슬람의 신비스러운 작품을 신중하게 읽기 시작했다. 『검은 책』은 고전적인 이슬람, 『천일야화』 같은 스타일로 포스트모더니즘 방식을 도입해 쓴 것이다. 나는 이슬람의 고전문학에서 멀리 있었고, 이슬람 문학에 심취한 사람은 아니었는데, 보르헤스나 칼비노의 영향으로 세속적인 차원에서 이슬람 문학을 다시 보게 됐다. 『검은 책』은 변호사가 잃어버린 자기 아내를 찾는 이야기다. 그 변호사가 이스탄불 전체를 돌아다니면서, 골목골목 다니면서 느끼는, 신비하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다. 『검은 책』의 주인공처럼 이스탄불을 골목골목 다니면서 사랑하고 경험하고 느끼려고 했다. 『검은 책』은 어쩌면 내가 이스탄불을 얼마나 사랑하고 내가 이스탄불에 얼마나 묶여 있는지를 설명하는 소설일 것이다. 이스탄불에서 일생을 살았기 때문이다. 이스탄불은 유럽 도시가 아니다. 1980년 초반에는 가난하고 희망이 없고 더러운 도시였다. 『검은 책』은 이스탄불이라는, 어둡고 이해할 수 없는 도시를 설명하는 작품이다. 고대 이스탄불을 수색하는 형사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내 이름은 빨강』과 『검은 책』 모두 추리소설 기법을 따른다. 소설 속 화자는 “쓰는 사람도 범인을 알 수 없는 추리소설을 쓰고 싶다”라고 한다.
나는 단순한 추리소설가가 아니고 철학적인 추리소설가다. 모든 사람의 이야기를 찾는 것 자체가 추리다. 서구의 추리소설과는 다르다. 그냥 무엇인가를 찾는다는 것은 설정이다. 이스탄불의 거리나 창문 등 하나하나를 전부 찾아가는 것 자체가 추리다. 실마리를 그림으로 그리는 것처럼 찾아가는 것이다.
터키의 정치적 상황이 부분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소설은 정치적 현실을 보는 작가의 시각을 투영해야 한다고 보는가?
‘트렁크 살인’ 부분은 그저 대학생이 살인한 사건을 묘사한 것으로 보았으면 한다. 중요한 건 이 사건 자체가 아니다. 이 범죄를 저질렀던 대학생이 내 고등학교 시절 친구였다. 그것을 소설에 일부 가미한 것이다. 물론 사건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정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긴 하지만 중요한 건 아니다. 이스탄불의 초상화 일부로 보여 준 것이다.
이 책은 일반 독자가 읽기에는 지나치게 난해한 측면이 있다. 소설적 서사를 배제한 채 철학적 사유를 펼친 부분도 눈에 띈다. 독자를 고려하지 않고 자신만을 위한 소설을 썼다는 느낌도 드는데.
내 책은 대부분 일반 독자들에게 어려운 책이라고 하지만, 다들 잘 읽고 있다. 내 책 중에 『새로운 인생』이 제일 어렵다고 한다. 어쩌면 내가 내 책 자체를 잘 평가하지 못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주인공은 여자를 일방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으로 설정됐다. 반면 그의 아내는 이복오빠와 함께 가출해 버린다. 왜 이런 설정을 했는가.
『검은 책』은 이야기를 내용으로 한 책이면서 질투심을 느끼게 하는 책이다. 질투심은 내가 잘 아는 부분이다. 인간이 느끼는 질투심은 아니고, 문화에서 느끼는 질투심 말이다. 다른 문명,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황홀하게 느끼는 감정이다. 서구 문명과 동양 문명이 충돌한다고 믿지 않지만, 모든 사람이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문화도 자기의 문화를 설명하고 싶어 한다. 『검은 책』은 이 문제를 다룬다. 결론적으로 한국 사람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주제라고 본다. 과거의 자기 정체성이 현대에 어떻게 반영되는가를 보여 주는 것, 이 책에서 다루는 철학적인 부분은 그런 것이다.
잃어버린 아내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상징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이야기다. 상징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라 사건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검은 책』은 사람의 정체성에 한계가 없다는 것을 설명해 준다. 인간의 정체성이라는 게 모호하고, 언제든 해체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려고 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의 본을 받고 다른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형성된다. 순수한 문화도 순수한 인격체도 없다. 모든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를 내포하거나 영향을 준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한다. 이스탄불은 바로 그런 일이 벌어지는 도시다. 모든 사람은 바다다. 그 안에 들어가면 무한한 이야기가 있다. 누구든지 그 사람 안에 있는 고통과 기쁨을 나누고 싶어 한다. 현대적인 문화 이전에는 이야기로 충만했다. 현대화하면서 이야기가 문학적인 측면으로 제한되어 버렸다. 『검은 책』은 현대적 상황 속에서 옛날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옛날 문화를 찾아보는 것이다. 케말 파샤가 우리의 전통을 잊게 했다. 과거의 전통문화를 포스트모더니즘 관점에서 터키 독자와 세계 독자에게 상기해 주고자 했다. 『검은 책』에 대해 농담처럼 말하길, 프로이트식으로, 잊어버린 것은 억압된 것이라고 했다. 억압되는 것은 다른 옷을 입고 다시 나타난다. 『검은 책』은 그 억압이 가면을 쓰고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이스탄불은 새것과 옛것, 전통과 현대, 유럽과 이슬람이 공존하는 도시다.
이 소설을 보면 이스탄불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매우 슬픈 존재로 묘사된다. 보스포루스 해협 밑에 도시의 쓰레기가 쌓여 있다는 설정은 상징적으로 보인다. 사라져 가는 전통을 아쉬워하는지?
책에서 이스탄불의 문화가 다양하고 무질서하다는 걸 설명하려고 했다. 과거의 사건을 현대에 생동감 있게 표현해 보려 했던 것이기도 하다. 책에서 보스포루스 물이 빠져나간 것은 상상일 뿐 실제로 일어난 사건은 아니다. 이스탄불에서 얼마나 다양한 문화가 이 땅에 일어났는지 설명하고 싶었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와 비슷하게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율리시스』 속 더블린을 떠올리면 된다. 더블린이 바로 그 작품의 주요 캐릭터 아닌가.
터키인의 모양을 본떠 만든 장인의 마네킹이 외면당하고 유럽 여성의 모습을 본뜬 마네킹이 이스탄불 거리를 메우고 있다. 당신의 소설은 동서 문명의 충돌지인 이스탄불을 무대로 한다. 그런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이는데.
『검은 책』은 그런 면도 있다. 모방하는 것과 진실이라는 부분. 현대 터키는 서구모방 위에 세워진 나라다. 진정성을 추구하려는(authentic) 예술가에게는 모방의 문제가 있다. 서구 이외의 모든 나라는 진정성과 모방의 문제를 겪는다. 터키인으로서 모든 사람이 이와 관련돼 있다고 본다. 서구에 살지 않는 다른 사람들은 현대화라고 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모방이다. 고통스럽지만 우리가 마음으로 느끼는 부분. 서구 이외의 모든 민족은 다 느낄 것이다. 한편으로는 현대화되길 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정체성을 보호하고 싶어 한다. 이것이 모순이다. 그리고 이것이 『검은 책』의 주제다. 내 인생 전체가 관련한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내 작품의 주인공이 느끼는 진실이기도 하다. 동양에서 내 책을 좋아하는 이유가 이런 것 때문이 아닐까. 『검은 책』은 이런 문제를 용기 있게 다루어 본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하얀 성』에 대해서도 좀 다루었지만 『검은 책』은 훨씬 더 풍부하다.
이 작품이 영화의 모티프가 된 걸로 알고 있다. 당신이 직접 시나리오를 썼다고 하던데. 당신은 칸 영화제 심사위원을 맡았다. 당신은 소설과 영화의 관계를 뭐라고 보는가.
영화는 소설의 형제 장르라고 생각한다. 칸에서 영화를 볼 때 나는 소설을 생각했다. 영화는 소설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영화는 여러 사람이 만들기에 경제적인 측면에서 많은 사람에게 다양하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약점이 있다. 영화는 문학에서 표현하는 것보다 복잡하지 않고 단순화한다. 내 책을 영화화하자고 많은 사람이 제안했지만, 나는 못하게 했다. 영화가 잘못된다면 내 책은 죽어 버리기에 두렵다.
칸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작품 <밀양>의 원작은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다. 한국의 유명한 소설가 작품이고, 감독 역시 소설가 출신이다. <밀양>을 어떻게 봤는지?
스토리가 정말 좋았다. 작은 도시에 사는 여자의 이야기를 인상 깊게 봤다.
서구의 영화가 터키인의 정체성을 흔들거나 좀먹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당신은 서구 영화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인가? <마틴 기어의 귀향> 등 할리우드 영화 제목이 등장한다.
서구 문화가 터키든 한국이든 주로 영화를 통해서 전달된 것이라고 본다. 나는 우리의 문화를 영화에서 잃어버렸다고 썼다. 영화를 보면서 제스처하는 것도 본래의 것을 잃어버리고 그들을 모방하게 됐다고 썼다. 진실과 모방을 연구하는 작가가 특별하고 다르게 표현했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터키 사람 대부분이 유럽을 모방하고 있어서다. 유럽 문명을 모방하는 것을 비판하지만,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고 반대하는 건 아니다. 이와 같은 갈등을 겪기에 소설가다. 서구 영화에 분노하면서도 재미있게 가서 본다. 두 가지가 내 안에서 갈등을 겪지만 이것은 서구 이외의 어느 나라든지 고민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현대화하고 싶으면서도 자기의 본질을 찾고자 하는 것 말이다. 터키 사람들이 유럽처럼 되고 싶으면서 전통문화인 이슬람에 남고 싶어 한다. 이것을 분석하면서 이런 상황을 보여 주는 것이 작가다. 나는 정치적인 것보다도 전체적인 그림을 보기 원한다. 사람들에게 자주 이야기하지만, 나는 정치가가 아니다. 터키는 이슬람의 문화 속에 있고 유럽으로 가고 싶은 의지가 있는 나라다. 그 두 가지를 보는 게 중요하다. 내 책은 이 두 가지를 인정하고 병행하게 하려고 한다.
왜 소설을 쓰는가. 또 소설이 어떻게 읽히기를 바라는가.
나한테 소설은 진지한 부분이다. 좋은 소설은 설명하는 기법이라든가 이야기하는 내용이라든가 세상을 이해하는 측면에 기본적인 견해가 있어야 한다. 소설에는 인생의 의미가 있어야 한다. 단순한 이야기책이 아니다. 물론 소설은 재미있는 부분이 있지만, 삶의 진지한 부분이 들어 있다.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 좋은 것이란 무엇인가. 도덕적이란 무엇인가. 삶의 임무가 무엇인가. 세상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은 무엇을 근거로 하는가. 내가 사는 복잡하고 혼탁한 세상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참 소설은 이런 문제를 파고드는 것이다. 매순간 세상을 살면서 느끼는 것, 느끼는 즐거움을 단어로 표현하는 것이다. 나는 화가가 되기를 원했다. 좋은 문학이라는 것은 인생과 세계를 (그림을 보듯) 단어로 ‘보는’ 것이다.
노벨상 이후 터키 이스탄불에서 외국 언론과 인터뷰했는가?
많이 만났다. 그러나 나를 만나고 싶어 한 사람이 너무 많아서 1% 정도밖에 만나지 못했다. 영국이나 미국 등 전 세계에서 여러 사람들이 책을 출판한 회사를 통해서 나를 만나려고 했지만 답을 해줄 시간조차 없었다. 내 책은 51개 국어로 번역됐다. 영국과 미국에선 수천 명의 기자가 나를 만나고 싶어 했다. 여기까지 와 주어서 고맙다. 한국의 학교에서 내 책을 교재로 쓴다는 소식을 듣고 자부심을 느끼고 아주 기쁘다. 이난아 씨에게도 감사를 표한다. 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내 책이 번역돼 읽힌다. 한국에서는 이난아 씨를 통해서 읽히게 되었는데, 그는 터키 문학을 가장 잘 아는 한국 학자다.
흐란트 기독교신문 기자가 살해당하고 나서 경찰이 지키고 있다. 나뿐만 아니다. 터키 헌법 301조에 따라, 사상의 자유를 위협받는 사람들은 터키 정부가 지키고 있다. 이렇게 지키는 것은 내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이야기를 하라는 것이다. 내 생각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경찰이 나를 지키는 것이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이후 어디서 어떻게 뭐하면서 생활했는가?
작년 10월 노벨상이 결정됐고 그때 콜롬비아대학 문학 교환교수로 있었다. 노벨 문학상을 받고 12월에 터키로 귀국했다. 그러다 신문기자가 죽고 나서 위협하는 사람이 많아서 2월 초에 미국으로 갔고 유럽에도 자주 다녔다. 정치적인 억압을 상당히 많이 받는 상황이다. 죽음의 위협도 받고 있다. 터키에만 있는 게 아니고 자주 왔다 갔다 한다. 여행 중에는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
노벨 문학상이 그간 화제에서 멀어져 왔었는데 당신의 『내 이름은 빨강』은 오랜만에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한국에서도 노벨 문학상 소식 이후 10만 부가 팔려서 오랜만에 노벨상 특수가 재현됐다. 노벨상의 대중성, 화제성을 다시 복원한 계기가 된 것이다. 노벨 문학상이 그간 일반인의 문학적 취향에서 멀어졌다고 생각하는가?
스위스, 이탈리아, 라틴아메리카에서도 같은 질문을 했다. 노벨 문학상을 받고 나서 책이 가장 많이 팔린 작가라고 들었다. 터키에서도 다른 사람 책은 안 팔리는데 내 책은 잘 팔린다고 한다. 그것은 ‘남자가 왜 미인을 좋아하는가?’와 비슷한 질문과 같다. 언론에서 작품에 대해 많이 질문하면 할수록 책이 많이 팔린다.(웃음) 왜일까? 책이 읽혀서 그럴 것이다. 한국은 정치적인 질문을 많이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유럽공동체에서는 터키 상황을 알아보려고 정치적인 질문을 많이 했다. 다른 나라에서 제일 많이 읽히는 책은 『눈』이지만 한국에서는 『내 이름은 빨강』이 더 많이 읽힌다. 『내 이름은 빨강』이 화가, 그림과 관련한 소설이라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한다.
한국에도 유력한 노벨 문학상 후보가 있다. 누군지 아는가? 한국이 노벨 문학상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한국 문학을 거의 몰라서 언급하기 어렵다. 다만 고은 시인에 대해서는 들었다. 내가 그림도 그려 주었다. 내가 노벨 문학상을 받으려고 한 일은 없다. 지금까지 수상자들도 노벨 문학상을 받으려고 무슨 일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작가가 내면의 세계를 표현하려고 한 것이 노벨상을 받게 된 게 아닐까 생각한다.
『검은 책』『하얀 성』『내 이름은 빨강』은 색깔 3부작으로 불린다. 왜 작품의 제목이나 소설의 중요한 이미지로 색깔을 사용하는가?
이슬람 예술에는 컬러 상징주의가 있다. 그러나 나는 색을 많이 사용하는 편은 아니고, 색깔을 상징적으로 사용한 것도 아니다. 『이스탄불』이라는 책에서 설명했듯 스무 살 때까지 화가가 되고 싶어 했다. 상상력 속에는 저장된 것이 있다. 세상을 하나의 색깔로 보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세상을 극장으로 보았다. 이야기를 쓸 때 작가마다 경향이 다르다. 나보코프, 톨스토이는 주로 장면이나 모습을 설명하려고 애썼다. 반면 나는 그림을 그리듯 설명하는 것이다. 내가 젊었을 때부터 화가가 되고자 했던 이유다.
어째서 소설의 제목이 ‘검은 책’인가?
『검은 책』은 내가 작가로서 목소리를 찾은 책이고, 내가 가장 가깝게 느끼는 책이다. 내가 살았던 이스탄불을 설명하는 책이다. 나는 1985년에 미국 뉴욕에 있었는데 터키인으로서, 동양인으로서 내 정체성에 혼란을 느꼈다. 내가 누구인가. 유럽의 문학을 모방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뉴욕에 있을 때 내 정체성에 대해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던 것이다. 내 문화가 무엇이고 터키 문화가 세계 문화 속에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고민했다. 미국에 있을 때 이슬람의 신비스러운 작품을 신중하게 읽기 시작했다. 『검은 책』은 고전적인 이슬람, 『천일야화』 같은 스타일로 포스트모더니즘 방식을 도입해 쓴 것이다. 나는 이슬람의 고전문학에서 멀리 있었고, 이슬람 문학에 심취한 사람은 아니었는데, 보르헤스나 칼비노의 영향으로 세속적인 차원에서 이슬람 문학을 다시 보게 됐다. 『검은 책』은 변호사가 잃어버린 자기 아내를 찾는 이야기다. 그 변호사가 이스탄불 전체를 돌아다니면서, 골목골목 다니면서 느끼는, 신비하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다. 『검은 책』의 주인공처럼 이스탄불을 골목골목 다니면서 사랑하고 경험하고 느끼려고 했다. 『검은 책』은 어쩌면 내가 이스탄불을 얼마나 사랑하고 내가 이스탄불에 얼마나 묶여 있는지를 설명하는 소설일 것이다. 이스탄불에서 일생을 살았기 때문이다. 이스탄불은 유럽 도시가 아니다. 1980년 초반에는 가난하고 희망이 없고 더러운 도시였다. 『검은 책』은 이스탄불이라는, 어둡고 이해할 수 없는 도시를 설명하는 작품이다. 고대 이스탄불을 수색하는 형사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단순한 추리소설가가 아니고 철학적인 추리소설가다. 모든 사람의 이야기를 찾는 것 자체가 추리다. 서구의 추리소설과는 다르다. 그냥 무엇인가를 찾는다는 것은 설정이다. 이스탄불의 거리나 창문 등 하나하나를 전부 찾아가는 것 자체가 추리다. 실마리를 그림으로 그리는 것처럼 찾아가는 것이다.
터키의 정치적 상황이 부분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소설은 정치적 현실을 보는 작가의 시각을 투영해야 한다고 보는가?
‘트렁크 살인’ 부분은 그저 대학생이 살인한 사건을 묘사한 것으로 보았으면 한다. 중요한 건 이 사건 자체가 아니다. 이 범죄를 저질렀던 대학생이 내 고등학교 시절 친구였다. 그것을 소설에 일부 가미한 것이다. 물론 사건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정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긴 하지만 중요한 건 아니다. 이스탄불의 초상화 일부로 보여 준 것이다.
내 책은 대부분 일반 독자들에게 어려운 책이라고 하지만, 다들 잘 읽고 있다. 내 책 중에 『새로운 인생』이 제일 어렵다고 한다. 어쩌면 내가 내 책 자체를 잘 평가하지 못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주인공은 여자를 일방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으로 설정됐다. 반면 그의 아내는 이복오빠와 함께 가출해 버린다. 왜 이런 설정을 했는가.
『검은 책』은 이야기를 내용으로 한 책이면서 질투심을 느끼게 하는 책이다. 질투심은 내가 잘 아는 부분이다. 인간이 느끼는 질투심은 아니고, 문화에서 느끼는 질투심 말이다. 다른 문명,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황홀하게 느끼는 감정이다. 서구 문명과 동양 문명이 충돌한다고 믿지 않지만, 모든 사람이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문화도 자기의 문화를 설명하고 싶어 한다. 『검은 책』은 이 문제를 다룬다. 결론적으로 한국 사람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주제라고 본다. 과거의 자기 정체성이 현대에 어떻게 반영되는가를 보여 주는 것, 이 책에서 다루는 철학적인 부분은 그런 것이다.
잃어버린 아내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상징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이야기다. 상징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라 사건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검은 책』은 사람의 정체성에 한계가 없다는 것을 설명해 준다. 인간의 정체성이라는 게 모호하고, 언제든 해체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려고 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의 본을 받고 다른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형성된다. 순수한 문화도 순수한 인격체도 없다. 모든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를 내포하거나 영향을 준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한다. 이스탄불은 바로 그런 일이 벌어지는 도시다. 모든 사람은 바다다. 그 안에 들어가면 무한한 이야기가 있다. 누구든지 그 사람 안에 있는 고통과 기쁨을 나누고 싶어 한다. 현대적인 문화 이전에는 이야기로 충만했다. 현대화하면서 이야기가 문학적인 측면으로 제한되어 버렸다. 『검은 책』은 현대적 상황 속에서 옛날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옛날 문화를 찾아보는 것이다. 케말 파샤가 우리의 전통을 잊게 했다. 과거의 전통문화를 포스트모더니즘 관점에서 터키 독자와 세계 독자에게 상기해 주고자 했다. 『검은 책』에 대해 농담처럼 말하길, 프로이트식으로, 잊어버린 것은 억압된 것이라고 했다. 억압되는 것은 다른 옷을 입고 다시 나타난다. 『검은 책』은 그 억압이 가면을 쓰고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이스탄불은 새것과 옛것, 전통과 현대, 유럽과 이슬람이 공존하는 도시다.
이 소설을 보면 이스탄불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매우 슬픈 존재로 묘사된다. 보스포루스 해협 밑에 도시의 쓰레기가 쌓여 있다는 설정은 상징적으로 보인다. 사라져 가는 전통을 아쉬워하는지?
책에서 이스탄불의 문화가 다양하고 무질서하다는 걸 설명하려고 했다. 과거의 사건을 현대에 생동감 있게 표현해 보려 했던 것이기도 하다. 책에서 보스포루스 물이 빠져나간 것은 상상일 뿐 실제로 일어난 사건은 아니다. 이스탄불에서 얼마나 다양한 문화가 이 땅에 일어났는지 설명하고 싶었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와 비슷하게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율리시스』 속 더블린을 떠올리면 된다. 더블린이 바로 그 작품의 주요 캐릭터 아닌가.
『검은 책』은 그런 면도 있다. 모방하는 것과 진실이라는 부분. 현대 터키는 서구모방 위에 세워진 나라다. 진정성을 추구하려는(authentic) 예술가에게는 모방의 문제가 있다. 서구 이외의 모든 나라는 진정성과 모방의 문제를 겪는다. 터키인으로서 모든 사람이 이와 관련돼 있다고 본다. 서구에 살지 않는 다른 사람들은 현대화라고 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모방이다. 고통스럽지만 우리가 마음으로 느끼는 부분. 서구 이외의 모든 민족은 다 느낄 것이다. 한편으로는 현대화되길 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정체성을 보호하고 싶어 한다. 이것이 모순이다. 그리고 이것이 『검은 책』의 주제다. 내 인생 전체가 관련한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내 작품의 주인공이 느끼는 진실이기도 하다. 동양에서 내 책을 좋아하는 이유가 이런 것 때문이 아닐까. 『검은 책』은 이런 문제를 용기 있게 다루어 본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하얀 성』에 대해서도 좀 다루었지만 『검은 책』은 훨씬 더 풍부하다.
이 작품이 영화의 모티프가 된 걸로 알고 있다. 당신이 직접 시나리오를 썼다고 하던데. 당신은 칸 영화제 심사위원을 맡았다. 당신은 소설과 영화의 관계를 뭐라고 보는가.
영화는 소설의 형제 장르라고 생각한다. 칸에서 영화를 볼 때 나는 소설을 생각했다. 영화는 소설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영화는 여러 사람이 만들기에 경제적인 측면에서 많은 사람에게 다양하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약점이 있다. 영화는 문학에서 표현하는 것보다 복잡하지 않고 단순화한다. 내 책을 영화화하자고 많은 사람이 제안했지만, 나는 못하게 했다. 영화가 잘못된다면 내 책은 죽어 버리기에 두렵다.
칸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작품 <밀양>의 원작은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다. 한국의 유명한 소설가 작품이고, 감독 역시 소설가 출신이다. <밀양>을 어떻게 봤는지?
스토리가 정말 좋았다. 작은 도시에 사는 여자의 이야기를 인상 깊게 봤다.
서구의 영화가 터키인의 정체성을 흔들거나 좀먹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당신은 서구 영화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인가? <마틴 기어의 귀향> 등 할리우드 영화 제목이 등장한다.
서구 문화가 터키든 한국이든 주로 영화를 통해서 전달된 것이라고 본다. 나는 우리의 문화를 영화에서 잃어버렸다고 썼다. 영화를 보면서 제스처하는 것도 본래의 것을 잃어버리고 그들을 모방하게 됐다고 썼다. 진실과 모방을 연구하는 작가가 특별하고 다르게 표현했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터키 사람 대부분이 유럽을 모방하고 있어서다. 유럽 문명을 모방하는 것을 비판하지만,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고 반대하는 건 아니다. 이와 같은 갈등을 겪기에 소설가다. 서구 영화에 분노하면서도 재미있게 가서 본다. 두 가지가 내 안에서 갈등을 겪지만 이것은 서구 이외의 어느 나라든지 고민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현대화하고 싶으면서도 자기의 본질을 찾고자 하는 것 말이다. 터키 사람들이 유럽처럼 되고 싶으면서 전통문화인 이슬람에 남고 싶어 한다. 이것을 분석하면서 이런 상황을 보여 주는 것이 작가다. 나는 정치적인 것보다도 전체적인 그림을 보기 원한다. 사람들에게 자주 이야기하지만, 나는 정치가가 아니다. 터키는 이슬람의 문화 속에 있고 유럽으로 가고 싶은 의지가 있는 나라다. 그 두 가지를 보는 게 중요하다. 내 책은 이 두 가지를 인정하고 병행하게 하려고 한다.
왜 소설을 쓰는가. 또 소설이 어떻게 읽히기를 바라는가.
나한테 소설은 진지한 부분이다. 좋은 소설은 설명하는 기법이라든가 이야기하는 내용이라든가 세상을 이해하는 측면에 기본적인 견해가 있어야 한다. 소설에는 인생의 의미가 있어야 한다. 단순한 이야기책이 아니다. 물론 소설은 재미있는 부분이 있지만, 삶의 진지한 부분이 들어 있다.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 좋은 것이란 무엇인가. 도덕적이란 무엇인가. 삶의 임무가 무엇인가. 세상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은 무엇을 근거로 하는가. 내가 사는 복잡하고 혼탁한 세상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참 소설은 이런 문제를 파고드는 것이다. 매순간 세상을 살면서 느끼는 것, 느끼는 즐거움을 단어로 표현하는 것이다. 나는 화가가 되기를 원했다. 좋은 문학이라는 것은 인생과 세계를 (그림을 보듯) 단어로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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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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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ㅋ
2012.0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