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톱니바퀴가 아니다. 나는 살아있는 존재다
교사가, 학생이, 학부모가 사고를 칠 때마다 이른바 ‘교권’을 둘러싼 소란이 일지만, 그것은 논란거리가 되기에도 힘이 부쳐 보인다.
글ㆍ사진 최성일
2006.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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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가, 학생이, 학부모가 사고를 칠 때마다 이른바 ‘교권’을 둘러싼 소란이 일지만, 그것은 논란거리가 되기에도 힘이 부쳐 보인다. 왜냐하면, 교권 논쟁은, 데릭 젠슨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 문화의 전체적인 흐름을 읽지 못하도록 사람들의 주의를 분산시키”려는 “소소한 논쟁거리”에 지나지 않아서다. 다시 말해, “부차적이고 사소하며 우리의 화를 자극하는 문제”인 까닭이다.

 얼마 전, 듀나의 <한겨레> 칼럼에 발끈한 교원단체 간부이자 현직 고등학교 교사의 반론은 그런 증거가 되기에 충분하다. 그 교사의 「스승 폄훼 기고 유감」(<한겨레> 2006년 4월 28일자)은, 듀나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는 ‘스승 공포담’과 같은 무협적인 내용에 대해 전혀 동의할 수가 없다”라는 주장부터 교사와 학생의 심연에 가까운 시각차를 느끼게 하지만 이 글의 압권은 다음과 같은 전근대적인 조언이다. “필자는 듀나라는 분에게 올 스승의 날에는 회초리라도 준비해서 생각나는 선생님을 찾아가라고 권하고 싶다.”

그러면 도대체 듀나의 어떤 얘기가 적잖은 교사들의 분노를 샀을까? 「‘스승의 노래’는 환상/존경심 없는 게 학생 탓이랴」(<한겨레> 2006년 4월 20일자)에서 스승의 날을 없애고 “공식행사에서 스승이라는 말을 쓰는 것과 ‘스승의 은혜’라는 노래를 부르는 걸” 금지하자는 듀나의 제안은 두말할 나위 없겠지만, ‘스승 공포담’ 또한 교사들의 심기를 거슬렀으리라. “대한민국에서 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스승이라는 딱지를 달고 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공포담을 서넛 이상 알고 있다. 물론 그 대부분은 자기 자신이 직접 체험한 것이다.”

부끄러운 기억

이런 점은 나도 예외가 아니어서 나 역시 선생님들이 무서웠다. 그리고 그것이 겉으로 드러난 피상적인 두려움이 아니라 마음 깊숙이 각인된 근원적 공포였다는 것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0년이 지난 최근에야 깨달았다. 그런데 이러한 뒤늦은 자각의 이면에는 꽤 오랜 세월 나를 짓누른 부끄러운 기억이 있다.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일이다. 동네친구들과 놀던 나는 먼발치에서 다가오는 초등학교 6학년 담임선생님과 눈길이 마주치자 냅다 줄행랑을 놓았다. 이 일이 얼마나 부끄럽고 충격적이었는지 그 이후로 나는 다신 동네친구들과 놀지도 않았다.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충격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자 그때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의문이 들었다. 내 해답은 6학년 담임선생님이 두려워서였다. 그런데 또 하나의 물음이 꼬리를 물었다. 6학년 담임은 특별히 무서웠던 기억이 없는데 어찌된 영문인가? 이에 대한 해답은 교사 일반에 대한 공포감이었다.

5학년이 된 첫날의 일이 떠올랐다. 자세가 흐트러진(나는 떠들진 않았다. 새 학년 첫날 떠들 만큼 나는 숫기가 있지 않았다) 나는 교단 앞으로 불려나가 아주 세게 뺨을 한 대 맞았다. 내 자리로 돌아와 나는 책상에 엎드려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속으로 울었다. 내가 시범 케이스였다는 것을 아주 한참 후에 깨달았지만 선생에 대한 공포감은 내면에 깊이 새겨졌던 모양이다. 6학년이 되어 운동회를 앞두고 꾸미기 체조 연습을 하는 중에 꾸미기 체조의 지도를 맡은 5학년 담임이 친근감을 표시할 때에도 나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스승의 은혜를 저버리는 배은망덕한 학생이기 전에 무분별한 교사 폭력의 희생양이었던 셈이다. 검은색 겨울 교복만큼이나 어둡고 칙칙했던 중?고등학교 시절의 쓰라린 기억은 접어두자. 다만, 아침이면 꼬박꼬박 무덤 같은 학교로 향한, 가출이나 무단결석은 꿈도 못 꿔본 소심한 학생이었던 게 못내 아쉽다. 사실, 그 당시 나는 학교가 무덤 같다는 걸 알지도 못했거니와 학교가 싫다고 말할 수조차 없었다.

나도 학교가 싫다

하지만 학교가 싫었던 건 분명하다. “우리가 모두 학교를 싫어하는 건 놀랄 일도 아니다”라는 말을 대놓고 ‘씨부렁거리는’ 데릭 젠슨이 무척 반가운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또, 학교 다닐 적에 누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해줬더라면 나는 참 기뻤을 것이다. “학교를 싫어하는 건 좋은 일이라고, 지겨워서 해골이 터지게 만들어놓고는 옴짝달싹 않고 앉아서 재미있는 척하고 있기를 기대하는 건 정말 미친 짓이라고, 게다가 그걸 좋아하길 기대하는 건 훨씬 더 미친 거라는 겁니다.”

데릭 젠슨쟀 『네 멋대로 써라』(김정훈 옮김, 삼인, 2005)는 글쓰기 책이다. 나는 젠슨의 글쓰기 규칙과 그가 말하는 글쓰기의 본질에 공감한다. 젠슨의 글쓰기 규칙 여섯째는 이렇다. “보여줘라, 말하지 말고.” 젠슨에게 “글쓰기는 과정을 겪는 일”이다. 또한, “글쓰기는 정말로 옮겨가는 순간들에 관련되어 있어. 삶에서 죽음으로 옮겨가는 것. 태어남으로 옮겨오는 것. 관계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 이해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 위대한 변모들은 위대한 글쓰기 감이”라고 말한다.

내가 더 공감하는 것은 젠슨의 세계관과 현실인식이다. “산업 문명은 결코 지속 가능할 수 없”고, “전통?철학?경제학?학교 제도 등등을 통해서 권리 부여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한, 권력을 쥔 자들은 그들이 착취하는 사람들에 대해 그저 멸시만을 느낄 뿐이다. 그러나 그런 자리가 위협받으면, 때려잡기가 시작되는 걸 보게 될” 거라는. 젠슨은 “우리의 체계는, 우리 가슴과 몸과 이웃들한테서, 인간됨과 동물성과 우리가 들어 사는 세상 속에 깃들어있음에서” 우리를 갈라놓는다고 덧붙인다.

젠슨은 산업 문명, 임금 경제, 산업 학교교육 따위를 싫어하는데, 앞서 봤듯이 학교에 대한 그의 비판은 정곡을 찌른다. 그와 그가 아는 사람들은 대체로 배우는 건 좋아해도 학교는 싫었단다. 젠슨은 이제 그 까닭을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내가 좋아하지 않은 건, 내가 배우고 있던 것, 바로 그거였다.” 학교가 제 소임을 못하고 있다는 주장은 어림없는 소리라는 그의 반론에도 동의한다. “학교는 너무나 잘 성공해나가고, 제 목적을 정확히 이뤄내고 있다.”

기계에 의존하는 삶에서 벗어나라

데릭 젠슨이 목수이자 산림운동가이며 프리랜서 작가인 조지 드래펀과 함께 지은 『웰컴 투 머신』(신현승 옮김, 한겨레출판, 2006)의 제목은 반어적이다. “머신토피아, 또는 권력의 비밀에 관한 보고서”라는 표지 문구가 기계를 별로 반기지 않으리라는 언질을 준다면, 옮긴이 서문의 한 구절은 이를 기정사실화한다. “이 책은 현대의 기계문화에 대한 통렬한 비판서로, 기계를 사용하던 인간이 역으로 기계의 지배를 받으며 기계화되어가는 현실을 예리한 시각으로 관찰하고 있다.”

본문에서 젠슨과 드래펀은 이 책을 통해 “불확실한 기술, 정치가와 경영자들의 비밀스런 음모, 정체불명의 관료주의자들이 정해놓은 기본적인 계층 분류에 관련한 사례들을 논의했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런 시스템에 의존할수록 우리는 더욱 불안해지며 보안에 대한 최신기술과 흑색선전, 부모의 예측에 더더욱 빠져든다”라고 덧붙였다.

『웰컴 투 머신』은 팬옵티콘panopticon과 관료주의를 강하게 비판한다. 팬옵티콘은 공리주의 철학자 제레미 벤담이 고안한 원형감옥이다. 현대 모든 사회 조직의 원형으로 여겨지는 팬옵티콘은 “확인하고 분류한 후 재화와 용역의 제공 또는 거부에 대한 결정권을 가진 기계”다. 그런데 “팬옵티콘이 처벌을 위한 염탐 목적으로 설계된 것처럼” 미국이 개발한 첨단 관측 장치들은 “보나마나 단순한 관찰 이상의 용도로 쓰일” 거라고 이 책은 전망한다. 그것들이 “추상적이고, 비인간적이고, 감지할 수 없고, 비타협적이고, 신속하고, 조용하고, 치명적인 팬옵티콘식 개념”과 공격자의 욕구와 맞물려 있어서다.

또한, 이 책은 “살충제가 식물을 만들 수 없는 것처럼 관료주의는 번화한 지역을 중심으로 약동하는 커뮤니티에 힘을 불어넣을 수 없다”라고 강조한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며, 그보다 더 나은 존재로 내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내 망각한다”라는 대목은, 36년 전 자신의 몸을 불사른 청년 노동자의 절박한 외침을 떠올린다.

이 책은 산업과 과학, 그리고 종교와 다른 여러 제도에서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되는 ‘다양성’을 옹호한다. ‘자원resource’과 ‘생태계ecosystem’라는 단어를 혐오하는 데릭 젠슨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나는 톱니바퀴가 아니다. 나는 절대로 톱니바퀴가 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톱니바퀴가 되길 거부한다. 나는 살아있는 존재다.”

#톱니바퀴 #존재 #교사 #학생 #학부모 #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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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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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릭 젠슨

데릭 젠슨은 『뉴욕 타임스』 등 여러 매체에 글을 쓰고 강연을 함으로써 문명 세계의 모순을 폭로하고 그 대안을 찾고 있는 사회운동가이다. 또한 『말보다 오래된 언어』(A Language Older Than Words), 『가상의 문화』(The Culture of Make Believe) 등으로 절찬받는 미국의 신세대 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1960년 미국에서 태어났으며 노암 촘스키, 반다나 시바, 아룬다티 로이, 하워드 진과 함께 가장 진보적인 사회 변혁 운동가 중 한 명으로 주목받고 있다. 데릭 젠슨은 이스턴 워싱턴 대학에서 창작학 학위, 콜로라도광업학교에서 광물공학 학위를 받았다. 그는 작가, 철학자, 글쓰기 선생이자 농부이며 벌치기, 또한 아나키스트이자 환경운동가라는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으며 대학 때 높이뛰기 선수였고, 졸업 후에는 높이뛰기 코치로 일한 경력도 있다. 대학원에서 글쓰기를 공부한 후에는 이스턴 워싱턴 대학과 펠리컨 베이 주립교도소에서 글쓰기를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 책읽기 모임과 토론 모임을 이끌고 있다. 그는 현재 북부캘리포니아에 살면서 삼림황폐화 저지, 댐 철거, 연어 등 물고기와 양서류의 서식지 복원, 유기농 진흥과 가족영농 보존 등과 같은 이슈들을 조직화하고 있다. 그는 현대 사회와 그 가치에 의문을 제기하는 여러 권의 저서가 있으며 국내에 출간된 책으로는『네 멋대로 써라(Walking on Water)』『웰컴 투 머신(Welcome to the Machine)』『약탈자들(Strangely Like War)』이 있으며, 그 외의 저서로는『말보다 오래된 언어(A Language Older than Words)』『땅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Listening to the Land)』『철도와 벌목(Railroad and Clearcuts)』『엔드게임(Endgame)』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