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정말 좀 제발 그냥 내버려 두게나
미안하네, 좀머 씨. 자네 뜻을 최대한 존중하고 싶지만 한국의 독자들과 자네에게 숨결을 불어넣어 준 쥐스킨트 씨가 그대를 다시 불러내게 하니 나로선 어쩔 도리가 없구먼.
2006.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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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사랑을 생각하다』의 본문은 70쪽이 채 안 된다. 하지만 ‘사랑과 죽음’을 주제로 하는 책의 내용은 ‘깊이’가 있다. 우선, 쥐스킨트는 세 가지 사례를 통해 “사랑을 배설물과 확실하게 구별해 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하고 따진다. 쥐스킨트는 이 세 가지 사례에다 사랑과 연모에 대한 플라톤의 분류 방식을 적용한다.
플라톤의 잣대에 의하면, 오펠 오메가 자동차를 타고 있던 젊은 연인들의 사랑은 동물적 사랑으로 분류된다. 그들이 사랑을 나누는 장소가 매우 부적절한 탓이다. 교차로의 진행 교통 신호를 기다리는 자동차 안은 “매춘부의 집이지 결코 아프로디테의 사원이 될 수 없”어서다. 또한 그 자동차 안에서 일어난 행위에선 사랑이라는 것이 전혀 중요하지 않아서다. “아니, 그것은 사랑과 가장 관계가 먼 행위이다. 그것은 혐오스러운 짓거리에 불과하다.” 만찬에 초대된 기이한 커플은 완전한 착각 속에서 고갈되어 가는 에로스다.
이 두 가지 사례에 견줘 19살 호텔 남자 종업원에 대한 늙은 작가의 사랑은 에로스의 본질을 충족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 사랑에는 도취가 있고, 사랑하는 사람의 아름다움 속에서 성스러움을 보고 있으며, 뭔가 창조적인 것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 사랑은 불멸성을 추구하고 있고, 또 실제로 작가의 작품을 통해 불멸에 도달한다.”
그런데 쥐스킨트는 세 번째 사례에도 뭔가 본질적인 것이 빠져 있는 느낌이 든다고 지적한다. “사랑이라는 말을 생각할 때 딱 떠오르는 뭔가가 거기에는 빠져 있는 것이다.” 그 사랑이 동성애적이어서만은 아니다. 그건 늙은 “작가의 완전한 일방성, 그리고 의식적인 포기 때문이다. 포기한다는 것은 사랑의 정반대 행위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다. 사랑을 포기하려는 시도는 포기의 성공 여부에 관계없이 그 사랑이 사소한 것,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주는 것이다.”
쥐스킨트의 논의는 사랑의 속성에 가닿는다. “사랑에 빠진 사람과는 합리적인 토론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사랑 때문에 멍청해지는 현상은 성적 유희에 국한하지 않는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맹목적 사랑, 하느님께 바치는 신앙인의 성스러운 사랑, 조국에 대한 노예들의 숭배, 지도자를 향한 맹목적 추종 등에서도 발견된다.
“사랑은 언제나 이성의 상실, 자포자기, 그로 인한 미성숙함이라는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잘해야 우스꽝스러운 코미디가 되는 것이고, 최악의 경우에는 세계 정치사의 대재앙이 되는 것이다.”
쥐스킨트는 스탕달을 빌려 사랑을 하면 죽음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또, 쥐스킨트는 사랑을 위해 자살하거나 사랑의 괴로움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의 마음속을 들여다 볼 수 있기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안나 카레니나』, 『보바리 부인』이 감동적으로 읽힌다고 덧붙인다.
“하지만 곧 공감이 안 되는 지점,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는 지점, 그리고 진짜 거부감이 스멀스멀 밀려오는 순간이 온다. 마치 타나토스와 함께 녹아 버리려는 듯이 에로스가 타나토스를 너무나 격렬하게 끌어안는 순간, 사랑의 가장 고귀한 완성을 죽음 속에서 찾으려는 순간이 바로 그런 거부감이 생기는 때이다.”
이러한 인식은 괴테와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대비를 통해 심화한다. 이에 앞서 쥐스킨트는 괴테의 분신인 젊은 베르트르의 자살과 클라이스트의 자살을 비교한다. 베르테르의 자살은 연인과 함께하는 삶이 불가능해지자 연인을 위해서 저지른 일이다. 반면, 클라이스트는 늘 자살을 꿈꿨고, 끝내 실행에 옮겼다.
“물론 클라이스트는 시종일관 분명하게 자신의 의지를 따라간 반면, 괴테는 외견상 부드럽게 보이기 때문에 해석을 할 때 종교적이고 형이상학적이고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어느 정도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다는 차이가 있다. 또한 클라이스트가 상처 입고 자극받으며 거칠게 행동하는 반면, 괴테는 우리를 언어적으로 기분 좋은 충만함으로 이끌 뿐만 아니라 나이에서 오는 성숙하고 현명한 태도로 우리의 마음을 달래준다. 그래서 클라이스트를 사로잡았던 그 두려운 유혹, 죽음에 대한 에로틱한 동경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해준다.”
오르페우스와 예수의 대비는 더욱 흥미롭다. 쥐스킨트는 예수보다 오르페우스를 긍정한다. 그에게 “오르페우스는 사랑 때문에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의 선구자”이나, ‘라자로의 기적’에서 예수는 전형적인 현대 정치인의 태도를 보인다. “그는 반사적으로 그 사건을 자신의 은총에 대한 홍보에 이용하려” 한다.
“늘 모든 것을 헤아릴 수 있고, 자신의 감정을 제어할 수 있고, 결코 에로스의 도취에도 빠지지 않기 때문에 나사렛 예수는 매우 냉정하고 근접하기 어렵고 비인간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쥐스킨트는 우리가 그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는지 모른다면서도 실제로 그는 인간이 아닌 신이었으리라 추측한다.
“오르페우스는 그 점에서 우리와 아주 가깝다. 기뻐 어쩔 줄 모르다가도 금세 변덕을 부리고, 맹목적인 용기는 없으나 어느 정도 문명화되어 있고, 빈틈없고 현명하나 완전히 치밀하지는 못하다는 점에서 그는 우리와 닮았다. 또한 오르페우스는 좌절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인간이었다. 아니, 바로 그 좌절 때문에 그는 의심할 바 없이 더 완전한 인간이었다.”
『사랑의 추구와 발견』(강명순 옮김, 열린책들, 2006)은 영화감독 헬무트 디틀과 함께 작업한 시나리오와 디틀의 짧은 글 「나를 해석해 봐, 이 멍청아!」로 이뤄져 있다. 「사랑의 추구와 발견」은 오르페우스의 신화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작품이다. 영화 속 장면을 화보로 싣고 있기도 하다. 『사랑의 추구와 발견』은 쥐스킨트와 디틀의 첫 만남이 아니다.
앞서 두 사람은 「로시니 혹은 누가 누구와 잤는가 하는 잔인한 문제」에서도 공동 작업을 했다. 『로시니 혹은 누가 누구와 잤는가 하는 잔인한 문제 영화는 전쟁이다!』(강명순 옮김, 열린책들, 2002)에는 세 편의 글이 실려 있다. 쥐스킨트의 ‘시나리오론’과 헬무트 카라제크와 디틀의 대담, 그리고 시나리오다. 「친구여, 영화는 전쟁이다!」에서 쥐스킨트는 시나리오 쓰기의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1996년의 파트리크 쥐스킨트
둘째는 『좀머 씨 이야기』가 갖고 있는 작품 자체의 매력이다. 누구나 한번쯤 겪었을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장 자크 상페의 파스텔톤 수채화와 어우러져 매력을 발산한다. 셋째 이유는 한국문학의 침체에서 찾을 수 있다. 최근 나오는 국내소설은 『좀머 씨 이야기』가 오히려 우리나라 소설가의 작품이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낯설다.
네 번째는 쥐스킨트의 작품이 우리 사회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청소년이 갈망하는 바를 표현한다는 것이다. 우리 독자들이 갖고 있는 소시민적 좌절감과 무기력함을 자극하는데, 여기에 전가의 보도처럼 인용되는 좀머의 말 한마디.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또한 『좀머 씨 이야기』는 하나의 작품이라도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얼마나 다르게 수용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정처없이 걸어다니기만 하는 좀머 씨의 방황이 나치즘과 2차 세계대전의 상흔이라는 암시에도 (거기서) 우리 독자들은 무위자연의 도교적 세계관을 읽는다.
사실 주체적인 독자가 되지 못하고 유행 따라 책을 읽는 독서행태가 쥐스킨트 열풍의 한 요인임은 부정하지 못한다. 우리 독서풍토의 저간의 사정을 알기라도 하듯 쥐스킨트는 다음과 같은 독서론을 펼친다.
“있는 힘을 다해 레테의 물살을 버티어 내야 한다. 허둥지둥 글 속에 빠져들지 말고, 분명하고 비판적인 의식으로 그 위에 군림해서 발췌하고 메모하고 기억력 훈련을 쌓아야 한다.”
쥐스킨트 현상은 현재도 진행중이다. 돌출 변수가 없는 한, 하반기까지 열풍이 지속될 전망이다. 더 정확한 원인 분석과 영향 파악의 작업은 후일을 기약할 수밖에 없다. 다만, “좋은 작품을 좋은 번역, 공들인 편집으로 좋은 책을 만들어내면 독자는 반드시 있다”는 열린책들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증거가 바로 『좀머 씨 이야기』 돌풍임이 틀림없다는 것이 중간점검의 맺음말이다.
쥐스킨트의 책들
『좀머 씨 이야기』는 두말할 나위 없는 쥐스킨트의 대표작으로 이 책의 한국어판은 1990년대 중반의 밀리언셀러였다. 세계적으로는 오히려 『향수』가 쥐스킨트의 대표 작품으로 통한다. “18세기 프랑스 파리를 배경으로 극히 예민한 후각을 타고난 냄새의 천재의 짧은 일대기”인 이 소설은 “1985년 출간되어 30여 개의 언어로 번역되고 천만 부 이상 팔려나감으로써 작가에게 작가적 명성과 부를 한꺼번에 안겨”주었다(개정번역판에 실린 옮긴이의 「『향수』를 다시 번역하며」에서).
『콘트라베이스』(유혜자 옮김, 열린책들, 1993)는 쥐스킨트의 희곡이다. 그는 이 작품이 “다른 일반적인 문제를 다루면서, 한 소시민이 그의 작은 활동 공간 내에서의 존재를 위한 투쟁을 다뤘다”라고 자평한다. “애당초부터 콘트라베이스로 시작한 사람은 절대 없습니다”라는 본문의 한 구절은 쥐스킨트의 그런 뜻을 담고 있다. 콘트라베이스라는 악기의 이모저모에 대한 묘사와 설명이 재미있다. 콘트라베이스는 “아주 볼품이 없는 악기”다.
“여러분께서도 이것을 한번 봐 주시기 바랍니다. 한번 자세히 봐 주십시오. 꼭 살이 피둥피둥하게 찐 부인네 같지 않습니까. 엉덩이는 축 쳐졌고, 허리 부분은 잘록하지도 못한 것이 위쪽으로 지나치게 길게 뽑아 올라져서 도대체가 못마땅합니다. 게다가 가늘고 축 늘어져 곱사등이 같은 어깨 부분 좀 보십시오. 정말 못 말립니다.”
콘트라베이스의 외모가 이렇게 엉망인 것은 이 악기가 음악 역사상 보기 드문 잡종이기 때문이다. 콘트라베이스는 “악기의 돌연변이”다. 『콘트라베이스』는 읽기 전용의 레제드라마가 아니라 실제로 공연되는 모노드라마다. 이 1인극은 독일어권에서 자주 무대에 올려지며 우리나라에서도 공연되고 있다. 그나저나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는 계획대로 연주회에서 돌출행동을 감행했을까?
『비둘기』(유혜자 옮김, 열린책들, 1994)의 책날개에 있는 저자 소개 글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그는 세 번째 소설 『비둘기』를 통하여 조나단 노엘이라는 한 경비원의 내면세계를 깊이 있게 묘사, 유럽 매스컴으로부터 예술적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라 평가받게 된다.” 뒤따르는 구절이 주목을 요한다.
“그러나 이러한 대대적인 성공에도 아랑곳없이 이 괴이한 작가 쥐스킨트는 모든 문학상 수상을 거부하고, 사진 찍히는 일조차 피하고 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일에 대해 발설한 사람이면 친구, 부모를 막론하고 절연을 선언해버리며 은둔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깊이에의 강요』(김인순 옮김, 열린책들, 1996)는 소품 세 편에다 ‘문학론’을 묶은 작은 단편집이다. 표제작은 자신의 작품이 깊이가 없다는 평론에 충격을 받고 깊이를 추구하려다 좌절하는 화가의 이야기다. 「승부」는 체스게임을 통한 승부의 세계를 그렸고, 「장인(匠人) 뮈사르의 증언」은 성공한 보석 세공업자의 세계인식을 유언을 통해 보여준다.
1990년대 열린책들에서 펴낸 쥐스킨트의 한국어판 초판은 신국판 페이퍼백이다. 이 책들은 나중에 모두 신판이 나왔다. 신판은 문고 판형의 하드커버다. 이 글에서 출간연도는 초판을 말한다. 다만, 『향수』는 페이퍼백 개정번역판이 1995년 나왔었고, 『로시니 혹은 누가 누구와 잤는가 하는 잔인한 문제 영화는 전쟁이다!』의 초판 제목은 『로시니 혹은 누가 누구와 잤는가 하는 잔인한 문제』(1997)다.
미안하네, 좀머 씨. 자네 뜻을 최대한 존중하고 싶지만 한국의 독자들과 자네에게 숨결을 불어넣어 준 쥐스킨트 씨가 그대를 다시 불러내게 하니 나로선 어쩔 도리가 없구먼. 올해 초 어느 도매서점의 지난해 연간 베스트셀러 목록을 훑어보다가 내 눈을 의심하게 하는 책 두 권을 발견하지 않았겠나.
한 권은 자네를 주인공으로 하는 『좀머 씨 이야기』(유혜자 옮김, 열린책들, 1992)였고, 다른 한 권은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강명순 옮김, 열린책들, 1991)였네. 베스트셀러 종합 순위가 몇 백번 대에 있을지언정 두 권이 꾸준히 팔리고 있는 걸 알고 꽤 놀랐지. 게다가 얼마 전 오랜 침묵을 깨고 파트리크의 신간이 나왔지 뭔가.
독일 뮌헨에서 태어난 파트리크 쥐스킨트(Patrick S?skind, 1949- )는 과작(寡作)의 작가다. 작품의 분량도 대체로 짧다. 『사랑을 생각하다』(강명순 옮김, 열린책들, 2006)는 그런 그가 9년 만에 선보인 신작 에세이다. 그간 우리는 쥐스킨트의 소설과 희곡, 그리고 시나리오를 접한 바 있다. 쥐스킨트의 에세이는 우리에게 다소 낯선 장르인 셈이다.『사랑을 생각하다』의 본문은 70쪽이 채 안 된다. 하지만 ‘사랑과 죽음’을 주제로 하는 책의 내용은 ‘깊이’가 있다. 우선, 쥐스킨트는 세 가지 사례를 통해 “사랑을 배설물과 확실하게 구별해 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하고 따진다. 쥐스킨트는 이 세 가지 사례에다 사랑과 연모에 대한 플라톤의 분류 방식을 적용한다.
플라톤의 잣대에 의하면, 오펠 오메가 자동차를 타고 있던 젊은 연인들의 사랑은 동물적 사랑으로 분류된다. 그들이 사랑을 나누는 장소가 매우 부적절한 탓이다. 교차로의 진행 교통 신호를 기다리는 자동차 안은 “매춘부의 집이지 결코 아프로디테의 사원이 될 수 없”어서다. 또한 그 자동차 안에서 일어난 행위에선 사랑이라는 것이 전혀 중요하지 않아서다. “아니, 그것은 사랑과 가장 관계가 먼 행위이다. 그것은 혐오스러운 짓거리에 불과하다.” 만찬에 초대된 기이한 커플은 완전한 착각 속에서 고갈되어 가는 에로스다.
이 두 가지 사례에 견줘 19살 호텔 남자 종업원에 대한 늙은 작가의 사랑은 에로스의 본질을 충족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 사랑에는 도취가 있고, 사랑하는 사람의 아름다움 속에서 성스러움을 보고 있으며, 뭔가 창조적인 것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 사랑은 불멸성을 추구하고 있고, 또 실제로 작가의 작품을 통해 불멸에 도달한다.”
그런데 쥐스킨트는 세 번째 사례에도 뭔가 본질적인 것이 빠져 있는 느낌이 든다고 지적한다. “사랑이라는 말을 생각할 때 딱 떠오르는 뭔가가 거기에는 빠져 있는 것이다.” 그 사랑이 동성애적이어서만은 아니다. 그건 늙은 “작가의 완전한 일방성, 그리고 의식적인 포기 때문이다. 포기한다는 것은 사랑의 정반대 행위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다. 사랑을 포기하려는 시도는 포기의 성공 여부에 관계없이 그 사랑이 사소한 것,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주는 것이다.”
쥐스킨트의 논의는 사랑의 속성에 가닿는다. “사랑에 빠진 사람과는 합리적인 토론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사랑 때문에 멍청해지는 현상은 성적 유희에 국한하지 않는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맹목적 사랑, 하느님께 바치는 신앙인의 성스러운 사랑, 조국에 대한 노예들의 숭배, 지도자를 향한 맹목적 추종 등에서도 발견된다.
“사랑은 언제나 이성의 상실, 자포자기, 그로 인한 미성숙함이라는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잘해야 우스꽝스러운 코미디가 되는 것이고, 최악의 경우에는 세계 정치사의 대재앙이 되는 것이다.”
쥐스킨트는 스탕달을 빌려 사랑을 하면 죽음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또, 쥐스킨트는 사랑을 위해 자살하거나 사랑의 괴로움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의 마음속을 들여다 볼 수 있기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안나 카레니나』, 『보바리 부인』이 감동적으로 읽힌다고 덧붙인다.
“하지만 곧 공감이 안 되는 지점,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는 지점, 그리고 진짜 거부감이 스멀스멀 밀려오는 순간이 온다. 마치 타나토스와 함께 녹아 버리려는 듯이 에로스가 타나토스를 너무나 격렬하게 끌어안는 순간, 사랑의 가장 고귀한 완성을 죽음 속에서 찾으려는 순간이 바로 그런 거부감이 생기는 때이다.”
이러한 인식은 괴테와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대비를 통해 심화한다. 이에 앞서 쥐스킨트는 괴테의 분신인 젊은 베르트르의 자살과 클라이스트의 자살을 비교한다. 베르테르의 자살은 연인과 함께하는 삶이 불가능해지자 연인을 위해서 저지른 일이다. 반면, 클라이스트는 늘 자살을 꿈꿨고, 끝내 실행에 옮겼다.
“물론 클라이스트는 시종일관 분명하게 자신의 의지를 따라간 반면, 괴테는 외견상 부드럽게 보이기 때문에 해석을 할 때 종교적이고 형이상학적이고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어느 정도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다는 차이가 있다. 또한 클라이스트가 상처 입고 자극받으며 거칠게 행동하는 반면, 괴테는 우리를 언어적으로 기분 좋은 충만함으로 이끌 뿐만 아니라 나이에서 오는 성숙하고 현명한 태도로 우리의 마음을 달래준다. 그래서 클라이스트를 사로잡았던 그 두려운 유혹, 죽음에 대한 에로틱한 동경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해준다.”
오르페우스와 예수의 대비는 더욱 흥미롭다. 쥐스킨트는 예수보다 오르페우스를 긍정한다. 그에게 “오르페우스는 사랑 때문에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의 선구자”이나, ‘라자로의 기적’에서 예수는 전형적인 현대 정치인의 태도를 보인다. “그는 반사적으로 그 사건을 자신의 은총에 대한 홍보에 이용하려” 한다.
“늘 모든 것을 헤아릴 수 있고, 자신의 감정을 제어할 수 있고, 결코 에로스의 도취에도 빠지지 않기 때문에 나사렛 예수는 매우 냉정하고 근접하기 어렵고 비인간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쥐스킨트는 우리가 그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는지 모른다면서도 실제로 그는 인간이 아닌 신이었으리라 추측한다.
“오르페우스는 그 점에서 우리와 아주 가깝다. 기뻐 어쩔 줄 모르다가도 금세 변덕을 부리고, 맹목적인 용기는 없으나 어느 정도 문명화되어 있고, 빈틈없고 현명하나 완전히 치밀하지는 못하다는 점에서 그는 우리와 닮았다. 또한 오르페우스는 좌절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인간이었다. 아니, 바로 그 좌절 때문에 그는 의심할 바 없이 더 완전한 인간이었다.”
『사랑의 추구와 발견』(강명순 옮김, 열린책들, 2006)은 영화감독 헬무트 디틀과 함께 작업한 시나리오와 디틀의 짧은 글 「나를 해석해 봐, 이 멍청아!」로 이뤄져 있다. 「사랑의 추구와 발견」은 오르페우스의 신화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작품이다. 영화 속 장면을 화보로 싣고 있기도 하다. 『사랑의 추구와 발견』은 쥐스킨트와 디틀의 첫 만남이 아니다.
앞서 두 사람은 「로시니 혹은 누가 누구와 잤는가 하는 잔인한 문제」에서도 공동 작업을 했다. 『로시니 혹은 누가 누구와 잤는가 하는 잔인한 문제 영화는 전쟁이다!』(강명순 옮김, 열린책들, 2002)에는 세 편의 글이 실려 있다. 쥐스킨트의 ‘시나리오론’과 헬무트 카라제크와 디틀의 대담, 그리고 시나리오다. 「친구여, 영화는 전쟁이다!」에서 쥐스킨트는 시나리오 쓰기의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1996년의 파트리크 쥐스킨트
좀머, 나는 10년 전에도 자넬 불러내 귀찮게 한 일이 있지. 내가 출판전문지의 초짜 기자 주제에 당시 거세게 불었던 쥐스킨트 열풍을 ‘집중 취재’한 거, 자네 기억하나. <출판저널> (제194호) 1996년 6월 20일자에 실렸던 그 기사 말이야. 왜 이렇게 시작하잖아. “『좀머 씨 이야기』와 쥐스킨트 돌풍이 거세게 불고 있다. 올해의 베스트셀러 목록은 『좀머 씨 이야기』를 앞세운 쥐스킨트 책의 잔치판이다.”(이어지는 글은 그 기사에서 발췌하였음)
『좀머 씨 이야기』와 쥐스킨트 현상을 보는 시각은 확산하는 독자층과 맞물려 다양하지만 몇 개의 요인으로 수렴한다. 그 첫째가 열린책들의 안목과 단단한 책 만들기다. 많은 관측자가 간과하는 부분이기도 한데, 권당 5%의 저자 인세를 지급하지만 선인세가 2천 달러인 점이 이를 말해준다.둘째는 『좀머 씨 이야기』가 갖고 있는 작품 자체의 매력이다. 누구나 한번쯤 겪었을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장 자크 상페의 파스텔톤 수채화와 어우러져 매력을 발산한다. 셋째 이유는 한국문학의 침체에서 찾을 수 있다. 최근 나오는 국내소설은 『좀머 씨 이야기』가 오히려 우리나라 소설가의 작품이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낯설다.
네 번째는 쥐스킨트의 작품이 우리 사회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청소년이 갈망하는 바를 표현한다는 것이다. 우리 독자들이 갖고 있는 소시민적 좌절감과 무기력함을 자극하는데, 여기에 전가의 보도처럼 인용되는 좀머의 말 한마디.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또한 『좀머 씨 이야기』는 하나의 작품이라도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얼마나 다르게 수용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정처없이 걸어다니기만 하는 좀머 씨의 방황이 나치즘과 2차 세계대전의 상흔이라는 암시에도 (거기서) 우리 독자들은 무위자연의 도교적 세계관을 읽는다.
사실 주체적인 독자가 되지 못하고 유행 따라 책을 읽는 독서행태가 쥐스킨트 열풍의 한 요인임은 부정하지 못한다. 우리 독서풍토의 저간의 사정을 알기라도 하듯 쥐스킨트는 다음과 같은 독서론을 펼친다.
“있는 힘을 다해 레테의 물살을 버티어 내야 한다. 허둥지둥 글 속에 빠져들지 말고, 분명하고 비판적인 의식으로 그 위에 군림해서 발췌하고 메모하고 기억력 훈련을 쌓아야 한다.”
쥐스킨트 현상은 현재도 진행중이다. 돌출 변수가 없는 한, 하반기까지 열풍이 지속될 전망이다. 더 정확한 원인 분석과 영향 파악의 작업은 후일을 기약할 수밖에 없다. 다만, “좋은 작품을 좋은 번역, 공들인 편집으로 좋은 책을 만들어내면 독자는 반드시 있다”는 열린책들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증거가 바로 『좀머 씨 이야기』 돌풍임이 틀림없다는 것이 중간점검의 맺음말이다.
쥐스킨트의 책들
『좀머 씨 이야기』는 두말할 나위 없는 쥐스킨트의 대표작으로 이 책의 한국어판은 1990년대 중반의 밀리언셀러였다. 세계적으로는 오히려 『향수』가 쥐스킨트의 대표 작품으로 통한다. “18세기 프랑스 파리를 배경으로 극히 예민한 후각을 타고난 냄새의 천재의 짧은 일대기”인 이 소설은 “1985년 출간되어 30여 개의 언어로 번역되고 천만 부 이상 팔려나감으로써 작가에게 작가적 명성과 부를 한꺼번에 안겨”주었다(개정번역판에 실린 옮긴이의 「『향수』를 다시 번역하며」에서).
『콘트라베이스』(유혜자 옮김, 열린책들, 1993)는 쥐스킨트의 희곡이다. 그는 이 작품이 “다른 일반적인 문제를 다루면서, 한 소시민이 그의 작은 활동 공간 내에서의 존재를 위한 투쟁을 다뤘다”라고 자평한다. “애당초부터 콘트라베이스로 시작한 사람은 절대 없습니다”라는 본문의 한 구절은 쥐스킨트의 그런 뜻을 담고 있다. 콘트라베이스라는 악기의 이모저모에 대한 묘사와 설명이 재미있다. 콘트라베이스는 “아주 볼품이 없는 악기”다.
“여러분께서도 이것을 한번 봐 주시기 바랍니다. 한번 자세히 봐 주십시오. 꼭 살이 피둥피둥하게 찐 부인네 같지 않습니까. 엉덩이는 축 쳐졌고, 허리 부분은 잘록하지도 못한 것이 위쪽으로 지나치게 길게 뽑아 올라져서 도대체가 못마땅합니다. 게다가 가늘고 축 늘어져 곱사등이 같은 어깨 부분 좀 보십시오. 정말 못 말립니다.”
콘트라베이스의 외모가 이렇게 엉망인 것은 이 악기가 음악 역사상 보기 드문 잡종이기 때문이다. 콘트라베이스는 “악기의 돌연변이”다. 『콘트라베이스』는 읽기 전용의 레제드라마가 아니라 실제로 공연되는 모노드라마다. 이 1인극은 독일어권에서 자주 무대에 올려지며 우리나라에서도 공연되고 있다. 그나저나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는 계획대로 연주회에서 돌출행동을 감행했을까?
『비둘기』(유혜자 옮김, 열린책들, 1994)의 책날개에 있는 저자 소개 글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그는 세 번째 소설 『비둘기』를 통하여 조나단 노엘이라는 한 경비원의 내면세계를 깊이 있게 묘사, 유럽 매스컴으로부터 예술적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라 평가받게 된다.” 뒤따르는 구절이 주목을 요한다.
“그러나 이러한 대대적인 성공에도 아랑곳없이 이 괴이한 작가 쥐스킨트는 모든 문학상 수상을 거부하고, 사진 찍히는 일조차 피하고 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일에 대해 발설한 사람이면 친구, 부모를 막론하고 절연을 선언해버리며 은둔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깊이에의 강요』(김인순 옮김, 열린책들, 1996)는 소품 세 편에다 ‘문학론’을 묶은 작은 단편집이다. 표제작은 자신의 작품이 깊이가 없다는 평론에 충격을 받고 깊이를 추구하려다 좌절하는 화가의 이야기다. 「승부」는 체스게임을 통한 승부의 세계를 그렸고, 「장인(匠人) 뮈사르의 증언」은 성공한 보석 세공업자의 세계인식을 유언을 통해 보여준다.
1990년대 열린책들에서 펴낸 쥐스킨트의 한국어판 초판은 신국판 페이퍼백이다. 이 책들은 나중에 모두 신판이 나왔다. 신판은 문고 판형의 하드커버다. 이 글에서 출간연도는 초판을 말한다. 다만, 『향수』는 페이퍼백 개정번역판이 1995년 나왔었고, 『로시니 혹은 누가 누구와 잤는가 하는 잔인한 문제 영화는 전쟁이다!』의 초판 제목은 『로시니 혹은 누가 누구와 잤는가 하는 잔인한 문제』(1997)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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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최성일